전지윤
[이 글은 그동안 ‘변혁재장전’에서 진행한 여러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자극과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며 결코 개인적 성과물이 아니다. 이 세미나에 기여해 왔고,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와 많은 지원을 해준 준비위원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동지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초고에 대한 조언과 토론을 해 준 이상수, 이승현 동지에게 특히 감사드린다. 신자유주의가 가져 온 변화, 노동운동의 위기와 후퇴,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방향 등을 다룬 꽤 분량이 긴 이 글을 세 차례에 나눠서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그 두번째이고 원래 있던 각주는 일단 다 생략했다.]
[1편에서 이어짐]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 새로운 투쟁의 도약을 위해 1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공세
이제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단계로 전환한 과정을 살펴보자.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에 깊숙이 연결된 상태로 커 온 한국 자본주의 특성상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는 이미 1970년대 중반에 한국에도 유입됐다.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교육받고 귀국한 젊은 관료와 학자들은 시장주의적 신념이 더욱 강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본거지”에서 유학하고 온 이들은 “철저한 시장경제의 신봉자”였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미 박정희 정권의 1979년 4월 ‘경제안정화 계획’에는 금융 자율화, 가격통제 해제, 수입 자유화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도 철저한 신자유주의자였고 은행 민영화, 외자도입 자율화, 금융 자율화, 외국인 투자 자유화 등을 위해 법 개정과 제도 마련을 추진하기도 했다.
더구나 압력은 밖에서도 들어오고 있었다. ‘자유경쟁의 논리’는 언제나 그런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강자들의 목소리인 법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경제의 개방과 시장주의 개혁을 촉구했다. 이미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세 인하, 수입규제 철폐, 서비스산업의 자유화, 외국인 재산권 보호에 대한 요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을 계속해 온 한국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를 향한 이런 내외부적 압력들은 여전히 큰 물줄기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국가 주도의 자본 축적이 성공하면서 그 내부에서 변화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독재 정권의 품 안에서 잉태되고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자라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들 속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압축 성장 속에서 국가와 유착하며 힘을 키워 온 사적 자본가들의 일부에게서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독립하려는 동기가 생겨났다. 이들은 군부독재에 의해서 모든 것을 일일이 규제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억압 통치 일변도가 한국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봤다. 군부의 억압에 반발하며 자신들도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자본가 야당 정치인들이 이런 사적 자본가들을 대변하며 군부독재에 반대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변화의 주요한 계기가 된 것은 역설적이다. 1987년은 아래로부터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투쟁을 통해서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강제해 낸 역사적 계기였다. 그런데 “민주화에 따른 정치체제의 변형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다시 추진되고 경제구조의 변환이 시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투쟁에 직면해 뒤로 물러서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권위주의 세력, 투쟁에 올라탄 자유주의 세력과 재벌 대기업들이 이런 변환을 추구했다. 87년 이후 투쟁을 통해서 임금과 근로조건을 대폭 개선해나가던 노동계급이 주요한 표적이 됐다.
사용자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노동규율을 회복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것이 199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신경영 전략’이다. … 그 기본 방향은 현장 근로자들에 대한 노무관리를 체계화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려는 것이었으며, 일본식 노무관리를 이식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청기업에 생산 설비와 부품 생산을 이전하며 비용을 절감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규제 완화와 자본시장과 투자의 자유화 등을 통해서 이를 뒷받침했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를 외치며 OECD 가입을 추진한 것도 신자유주의적 방향 전환의 일부였다. “OECD의 일반적 가입 조건에는 정부 규제 완화, 자본거래 자유화(자본이동 규제 완화 및 외국인 투자제한업종 폐지), 서비스 시장 자유화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재벌들은 더 손쉽게 해외에서 저금리로 투자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이런 단기차입금으로 제철(현대), 특수강(한보 기아), 자동차(삼성) 등 이미 포화된 산업부문에 ‘과잉중복투자’를 감행했다.” 그 와중에 외채의 규모와 구조 모두 급속히 악화돼 갔다. 재고가 쌓이고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서 경상수지 적자는 확대됐고, 기업의 수익성도 떨어져 갔다.
‘떠오르는 호랑이 경제’라고 찬양하며 앞 다투어 한국, 타이 등에 투자했던 국제투자자와 투기꾼들은 뭔가 낌새를 채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투자를 회수하기 시작하다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가 시작됐다.
한국 자본주의도 이때 바닥난 외환 보유고 속에서 국가 부도 위기를 겪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면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가는 결정적 전환의 문턱을 넘게 된다.”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제시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위한 로드맵’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먼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다국적 기업과 국제투자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1997년 2월 주한 미 부대사가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런 생각이 반영돼 있다. 그 서신에서 주한 미 부대사는 “여전히 강력한 경제 민족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 정책 등을 포함한 낡은 경제모델의 요소들은 미국산 수입품이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지적했다.
다국적 기업은 더 제한없이 한국 시장에 진입하고, 공기업을 인수하고, 높은 이윤을 거둬가고 싶어했다. 국제 투자자들은 좀 더 자유롭게 한국 시장에 투자하고, 언제든지 들락날락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다. 이것을 가로막는 ‘낡은 장벽’들은 모두 제거돼야 했다.
동시에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지배계급과 기업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위의 같은 서신에서 주한 미 부대사는 “한국 사회에는 기존 모델이 생산적 수명을 다했기에 한국이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계속하려면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일반적 합의가 있음”이라고 쓰고 있다.
즉 한국 지배계급 내에서도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큰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에서 시장 지향적이고 경쟁적인 모델로” 가고자하는 분위기가 강력했다는 것이다. 실제, IMF 때 재경원 차관이었던 강만수는 나중에 발간한 책에서 IMF를 이런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해 준 “축복”이었다고 돌아보고 있다.
2000년의 재정경제부 보고서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정책들을 IMF 프로그램에 포함시켜 국내외적 지지를 끌어낸 효과”를 지적하고 있다. “위기라는 곤경이 사회 전반 구석구석에서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내어 … 몇 달 전만해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성취하게 했다”는 것이다. IMF도 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정책당국은 순전히 외부에서 부과된 조치를 실행할 때보다 더 기꺼이 이러한 조치들을 실행할 의지가 있었다”고 했다.
이런 이해관계의 일치 속에 긴축적 통화·재정 정책, 자본과 외국인 투자 자유화, 금융 개방, 기업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등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들이 관철돼 갔다. 그래서 “1997년 말에서 1998년 말에 이르는 기간은 한국 자본주의에 새로운 발전 경로와 구조가 형성되는 결정적 순간”이 됐다. 다국적 기업과 재벌 대기업들의 한국 경제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져 갔다.
특히 “외국자본이 한국 정치경제의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했을 뿐 아니라 금융도 자립성을 띠게 되었다.”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급속히 증가했다. 1996년 시작된 한국의 파생금융상품 거래는 2011년까지 무려 4,285배나 증가했고, 같은 기간에 하루 평균 주식 거래대금도 407배나 성장했다. 재테크 붐이 일어났고 금융자산과 함께 가계부채도 증가해 갔다.
하지만 1997년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노동자들과 생산현장에서 불어닥친 변화였다. 특히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들이 중요했다. 이것들은 한국 경제 관료들이 강력히 요구해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87년의 진출 이후 힘을 키워 온 민주노조 운동의 기를 꺾고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은 한국 노동운동의 심장부인 울산에서 민주노조의 상징적 존재인 현대차노동조합을 향해 5천 명 정리해고 공격을 시도했다.
현대차노동조합은 점거 파업을 통해 이에 맞섰고 일부 이 공격을 막아냈지만, 정리해고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98년 8월에 현대차노동조합은 277명 정리해고와 1,300명의 무급휴직을 받아들이며 파업을 끝냈다. 이 기간을 거치며 희망퇴직 등으로 공장을 떠나야 했던 노동자들은 1만여 명에 달했다. 당시 집권당 국회의원으로서 중재자 구실을 한 노무현은 “이것은 모델 케이스였다 … 단 하나의 현실적 해결책은 정리해고와 위로금을 받는 것이었다”고 했다.
지배계급은 이런 모델 케이스를 곳곳에서 만들려 했고,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탄압과 경찰력 투입이 수시로 자행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진행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구속·수감 노동자 수도 꾸준히 증가해 갔다.
물론 그럼에도 노동조합이라는 방패가 있는 곳에서는 신자유주의 공격이 아주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민주노조는 아직 젊었고 활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화는 기업내부노동시장의 해체보다는 외부노동시장의 확대라는 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용자들은 기업내부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욕심대로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외부노동시장 확대라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 결과 한편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중심이 축소되고 다른 한편 분절이 심화되었다.
외주화, 사내하청, 임시직, 파트타임, 이주 노동력의 도입 등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주요 대기업들은 2000년대 이후 정규직 신규채용을 최소화하고 필요한 인력은 사내하청과 비정규직으로 충원해갔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규모가 정규직을 훌쩍 뛰어넘은 현대중공업, AS업무 자체를 협력업체 비정규직으로 거의 100퍼센트 해결하는 삼성전자 등이 그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사내하청 비율은 1996년 31.7퍼센트, 2000년 50.5퍼센트, 2005년 80.3퍼센트, 2010년 127.4퍼센트로 계속 증가해 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규모를 연도별로 살펴보면 2001년 8월 737만 명에서 2007년 3월 879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증가하던 “비정규직 비율은 2007년 3월 55.8%를 정점으로 2015년 3월에는 44.6%로 8년 사이 11.2%포인트 감소”했다.
하지만 정부 통계가 사내하청과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자영업자로 잘못 분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비정규직 규모는 50%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결국 한국의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50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에서 굳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주화와 사내하청의 급속한 확산이다. 기업주들은 안정된 숙련 노동자가 필요한 부분을 최소화하면서 가능한 많은 업무를 외주업체와 하청업체로 넘겼다. 심지어 같은 생산라인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서 일하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완성차기업은 노동보다는 선진 기계, 선진 기술의 도입을 통해 품질 향상을 시도하게 된다. … 이와 같은 설계를 통한, 그리고 기계를 통한 품질향상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생산과정에서 숙련의 필요성은 더욱 감소했고, 노동은 최대한 절감되어야 할 비용으로 간주되었다.
기업주들이 노린 것은 단지 인건비 절감만이 아니었다. “대기업들이 외주화 전략을 통해 간접 고용을 확대한 중요한 이유는 보통 ① 인건비 절감, ② 경기변동에 따른 유연한 고용조정, ③ 노조 회피를 통한 노사관계 관리” 세 가지 모두였다.
특히 원청기업이 업무를 부품기업들로 넘기고, 그 부품기업들을 경쟁시키는 것은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먼저 수주경쟁 속에서 “부품기업 간 치열한 납품경쟁은 완성차기업이 물량 배정을 지렛대로 부품기업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제”였다.
그리고 이것은 부품기업들이 이 압력에 내부 구조조정과 재하청을 통해 대응하도록 유도했다. 즉 또다시 “비용절감을 위해 부품기업이 주로 활용하는 전략은 외주화와 비정규직화”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노동시장이 끝없이 분절되고 격차가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업 내 노동시장 분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사내하청)의 이중구조로 분절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 1차 한시하청 및 아르바이트, 2차․3차 사내하청까지 이어진다. 기업 내 노동시장의 중층적 분절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공세 속에서 노동자들 내부의 격차가 어떻게 확대돼 왔는지는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남성 정규직의 임금을 100이라 할 때 여성 정규직 임금은 그것의 68.2, 남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52.7,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은 35.9였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이 100일 때, 대기업 비정규직의 임금은 64, 중소기업 정규직의 임금은 52,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임금은 35라는 통계도 있다. 이런 격차에는 남성이냐 여성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대졸자이냐 아니냐도 영향을 끼치지만 무엇보다 사업장의 규모와 노조 유무가 큰 영향을 끼쳐 왔다.
“대규모 사업체의 비정규직 임금은 중소규모 사업체 정규직의 임금보다 높은 상황이다. 특히 대규모 유노조 사업체의 정규직 대비 중소규모 무노조 사업체의 비정규직의 상대임금 수준은 38.6%에 불과해 10년 전 수준보다 격차가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노조 조직률이 대규모 사업장에서 특히 높다는 점을 볼 때 노조 유무가 더 주된 변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민주노조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고, 신자유주의 공세에서도 좀 덜 뺏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역설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분절과 격차는 더 확대돼 왔다. 노동운동 내에서조차 ‘노동자는 과연 하나인가’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울산의 노동자는 40~50평 아파트에 살며 쏘나타와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직영 계급'과 20평 임대주택에서 엑센트와 아반떼를 타는 '하청 계급',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는 '알바 계급'으로 갈라졌다. … 2013년 9월 기준으로 [현대차]울산공장에는 정규직 2만4498명(조합원), 사내하청 4258명, 식당·청소·경비 1730명, 촉탁계약직 2200여명(전 공장 2781명)이 일하고 있다. … 2012년 울산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 평균 임금은 136만원으로 정규직 340만원의 40.1%였다.
이런 상황이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어렵게 만들고, 결국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고 누구에게 이익이 됐는지는 명백하다. 계속 악화해 온 노동소득 분배율, 여전히 세계 최장 수준인 노동시간 등이 그것을 보여 준다. 노조 조직률이 낮고, 대기업의 일자리가 많지 않고, 비정규직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볼 때, 전체 노동자의 거의 70~80퍼센트가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에 놓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정규직까지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고용불안도 심각해져 왔다. 이 나라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5.1년에 불과하고 단기근속자 비율은 35.5퍼센트, 장기근속자 비율은 18.1퍼센트인데 세 지표 모두 OECD 최하위 수준이다.
반면 신자유주의 공세가 한참 진행중이던 2000년대 중반에 “한국의 대표 기업들(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의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과 영업이익률은 각각 8.6퍼센트와 9.1퍼센트로 세계 주요 기업보다 2배 정도 높았다.”
물론 세계적으로 진행된 과정과 마찬가지로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통해 자본 축적을 진행해 온 과정은 또한 노동계급을 대규모로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서비스, 미디어 산업 등에서 영세자영업자, PD, 작가, 작곡가 등까지 불안정해지고 노동계급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규모는 1987년 9백19만 명에서, 1997년 1천 3백4만 명, 2015년 1천 8백79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해 왔다.
한국 노동운동이 지나온 길과 위기
한국의 노동운동은 87년의 폭발적 투쟁 속에서 얻어낸 힘과 자신감을 유지하는 것에서도, 신자유주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에서도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진출과 성장이 눈부셨던만큼 이런 실패는 더욱 쓰라린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87년 이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해서 임금과 노동조건의 커다란 개선에 성공했다는 것이 이후에 나타난 실패의 배경이 됐다. 조건 개선을 위해서라도 단결과 공세적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그 조건에 머무르며 수세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독일 노동운동에서 나타난 이런 역설을 지적한 바 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 운동이 빠르게 성장하여 노동조합이 완전히 독립하였고 노동조합들의 투쟁 방법이 특화되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상임 노동조합 관료제가 도입되었다. … 그러나 발전의 변증법에서는 노동조합을 성장시키는 이러한 필연적인 수단이 오히려 노동조합 발전이 특정 단계에 이르고 조건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걸림돌로 변화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이 과정과 요인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자유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계급투쟁의 제도화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1945년 이래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쪽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아래로부터 도전에 직면한 지배세력은 민주노조 등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조직과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배전략과 방식의 변화였다. 더 이상 기층 노동자․민중 조직과 대표자들에게 지배구조 밖에서 투쟁하는 길만을 남겨두고 이것을 ‘강제와 폭력’으로 다스릴 수는 없게 됐다. 그들이 지배구조 안으로 들어와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된 것이다.
노태우 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했던 남재희는 당시 집권 민자당의 대표였던 김종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썽꾸러기를 텐트 밖에 놓아두면 계속 텐트 안을 향해 오줌을 갈길게 아닌가, 텐트 안에 넣어야 오줌을 갈겨도 밖으로 향할 것이고….’ 나는 민주노총 합법화 필요성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
이것은 갈수록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켰다. 자유민주주의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이 제도화된 협상 속에서 근로조건 개선을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국가형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적 쟁점들은 보통 제도정치권 내에서 자유주의․개혁주의 정당들이 담당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개별 작업장의 경제투쟁마저도 독재정권에 맞선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던 경향은 줄어들게 된다. 투쟁보다는 협상을 통한 해결 경향이 강화됐고, 노사관계가 제도화되면서 초기의 전투성과 활력은 점차 사그라져 갔다.
민주노조 운동 초기의 전투성은 “국가와 사용자의 비타협적 태도와 물리적 억압 속에서 강력한 투쟁 전술을 사용해야 교섭이 가능하고 달리 선택할 투쟁 수단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조건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정치적 문제들보다는 임금과 근로조건 등의 문제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런 조건은 부문과 기업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기업과 부문별로 칸막이가 생겼고 시야는 갈수록 협소해졌다. “단체교섭이 제도화되자마자 산별 교섭은 구체적이고 협상 가능한 의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교육․의료․사회 개혁같은 보편적이면서도 정치사회적인 요구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또, 노동조합 “조직은 수단에서 차츰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질적인 목표로 바뀌어 가고 … 이 때문에 노동조합의 안정을 해칠 걸림돌들과 위험들을 피하게 해주는 [노사]평화를 드러내놓고 받아들일 필요가 생겨난다.”
정부와 기업주들이 노동조합과 그 지도자들을 지배구조 내로 포섭하려는 시도도 적극적이 돼 갔다. 민주노총 내에서 상대적 좌파이자 강경파였던 이갑용 집행부 시절에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1998년 정부 관계자 만남 자리에 나가니 안기부장 이종찬이 기다렸다가 “위원장이 대통령을 좀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고 부탁한 사례, 1999년에 노동부 사무관이 허영구 부위원장에게 “전별금”이라며 돈봉투를 건네려한 사례 등이 그것이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 노동조합 활동가를 포섭하려는 시도는 좀 더 치밀하고 벗어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아래 묘사한 것은 그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날 관리자 하나가 노조 활동가인 아무개를 찾아와 고향 이야기를 한다. …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고향 이야기로 시작해 노동조합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 술자리는 잦아지고 이들은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된다. 포장마차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회를 거듭하다 룸살롱으로 이어진다. …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일이 진행되는 사이 노동자는 어느덧 대의원에서 운영위원, 교섭위원, 임원 등 노조의 주요 간부가 된다. …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는 상대도 하지 않던 회사의 노무 관리 담당자가 그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 나와 있다. … 고향 선배는 이 단계에서 빠지고 이제부터는 노무 관리 부서에서 챙기게 된다. … 노무 관리 담당자는 수시로 연락을 한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일 등을 하루 먼저 알려주며 선심을 쓴다. … 서로의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충고도 하는 사이가 된다. … 어느날 돌아보니 예전에 함께했던 동지들은 멀어져있고 회사 관리자와 따로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은 노동조합 관료층의 형성과 관련있다. 노동조합이 발전하고 노사갈등이 제도화될수록 그 안에서는 분업과 역할분담이 생기게 된다. 노동조합 지도자에게는 “중요한 결정에 대한 주도권과 권한”, 평조합원 대중에게는 “규율에 대한 복종이라는 소극적인 덕목”이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조합 투사였던 활동가가 조합원 대중을 대신해서 협상을 전문으로 하게 될수록, 투쟁보다 타협을 선호하게 되고 기층의 요구와 정서에 둔감하게 된다. 또 노동조합의 한계 안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다양한 약점을 고스란히 반영하게 된다. 지배자들도 이런 계층의 형성이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940년대 중반에 미국 포드자동차의 경영주인 헨리 포드 2세는 “노사관계의 수행에도 기술자가 기계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와 꼭 같은 기술적인 숙련도와 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2005년에 당시 한국 경총 부회장이던 김영배도 비슷한 말을 했다.
“조합원들의 요구가 너무 무절제하니까 … 노조 지도부가 운신의 폭을 넓혀 확실한 리더십을 갖는 것이 노사관계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노총 간부들을 “협상을 잘해서 노사관계를 잘 풀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이 노동조합 전임 상근자 계층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과 제도화 속에서 마찬가지로 급속히 성장하며 자리를 잡았다. 이미 2000년대 후반에 이 나라의 “노조 전임자(단체협약에 의한 완전전임) 1인당 조합원 수는 73.6명으로 나타나 일본의 570.9명(2006년), 미국의 800~1000명, 유럽 국가의 1500명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었다.
노사정위, 지역노동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 등 노사갈등을 협상으로 풀어나가고 제도화하기 위한 다양한 통로와 기구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필요한 협상 전문가들도 더욱 많아졌다. 그러면서 1987~92년 사이에 매우 격렬한 형태로 분출됐던 노동운동은 점차 안정화됐다.
2) 1997년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공세 속의 후퇴
신자유주의적 공격은 보통 임금 삭감, 비정규직 확대, 노동유연화로 나타나는데 한국에서는 특히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를 차별적으로 공격하고, 격차를 벌리며 이를 이용해 이간질하는 방식을 통해서 나타났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양보나 제한된 고용안정을 제공하면서 노사관계를 안정화시키는 반면, 미조직된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저임금·비정규직·고용불안을 갈수록 확대해 간 것이다.
비버리 실버는 이처럼 “협조의 대가로 핵심노동력에게는 고용안정성을 제공하지만 이들과 동일한 권리와 혜택이 부여되지 않는 특권없는 노동자들은 거대한 완충장치로 활용하는 원래의 ‘도요타식’ 모델”을 “이중적 린 생산”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1987년 이후 급격히 성장한 한국의 조직 노동운동이 아직 전투성과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정면충돌을 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배자들은 정규직/비정규직, 조직/미조직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것을 주된 분열지배전략으로 채택했다.
서구에서는 인종·성별 등이 노동운동을 분열·약화시키는 주된 기제였지만 말이다. 둘 사이의 격차를 확대시키고 그 격차를 이용해서 이간질하면 결국 전체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업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을 유지해 주는 대신, 비용 절감과 유연한 노동 활용을 위해 외주화와 비정규직 활용을 확대해 나간다.” 이런 차별적 대응과 분열지배전략은 87년 노동자 투쟁에 대한 대응으로 이미 등장했었지만,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더욱 본격화됐다.
사용자들은 1998년 이후 많은 사업장에서 명예퇴직과 희망퇴직이라는 형태로 고용조정을 진행했고,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대규모 사업장에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조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하면서 노조의 보호 밖에 있는 비정규직 고용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 사용자들은 노조와의 직접적 충돌을 회피하는 대신 신규채용을 중단한 채 비정규직 고용의 확대와 외주화, 사내하청을 통한 노동유연화를 추구했다.
이런 이중적 공격은 먼저 외주·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하청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결국은 다시 원청업체 노동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기 쉬웠다. 이런 공격에는 두 가지 다른 대응이 가능했다.
하나는 당장은 자신들에게 직접적 공격이 가해지지 않더라도 이런 시도를 막아서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 기업 노사교섭으로만 접근할 수 없었고 그것을 넘어선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어야 했다.
다른 하나는 “개별기업 수준의 노사교섭을 통해 비용이 조합원들에게 이전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전략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노동조합원들과 지도자들이 이 근시안적인 길을 택했다. 경제 위기를 겪으며 커진 고용불안에 대한 걱정이 이렇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고용을 위해서는 다른 어떠한 조건도 양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관점’을 내면화하게 된다. … 즉 “벌 수 있을 때(생산물량이 있을 때) 많이 벌어야 하고, 지금 당장(짤리기 전에) 벌어야 하고, (장래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회사가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들이 많이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의 비정규직 고용을 묵인하는 게 정규직 노동조합원의 고용안정을 위한 안전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원들은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이지만 나머지 노동자들은 매우 불안정한 ‘분절 노동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 구조 속에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나머지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갔다. 노조라는 방패가 있는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경제 위기 때 공격을 막아내기 쉬웠다. 또 경제가 회복될 때는 노조를 무기로 이용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부문을 뛰어넘는 연대가 강력하지 않다면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컨대 노조 유무별 임금 격차는 1990년대에는 20퍼센트 미만이었지만 2000년대에는 40퍼센트까지 확대됐다. 특히 격차의 “상승은 외환 위기 이후 구조조정과 경기 침체 시기에 나타났다.”
이중적 공격으로 이런 격차를 만들어낸 지배자들은 이제 그 격차를 이용해서 더욱 더 노동자들을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청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대기업 원청의 노조원들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 당신들에게 더 줄 것이 없다’며 불만을 억눌렀다.
“상위기업 노동조합의 선도적 투쟁 성과가 하위기업 노동자에게도 확산”되는 것을 막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하위기업으로의 비용전가를 강화하는 근거로 활용”한 것이다. 이 속에서 대기업 노조의 투쟁에 대한 나머지 노동자들의 지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반대로 열악한 조건을 견디지 못한 하청기업 노동자들이 가까스로 노조를 만들고 투쟁에 나서면, 대기업 원청 노조원들에게 ‘저들의 무리한 요구와 투쟁이 당신들의 안정된 조건을 위협한다’고 불안감을 자극했다.
하청노조 투쟁은 비정규직의 임금 상승을 통한 노동비용 증대와 투쟁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을 원청업체에 안겨주는 한편 업체 이미지를 악화시켜 사측의 투자 결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공장이전과 물량감축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정규직들의 고용불안감을 이용해 사측은 … 하청노조 투쟁과 원․하청 연대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을 극대화했다.
그래서 2000년대 초중반에 일부 볼 수 있었던 하청·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정규직 노조의 적극적 연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찾기 어려워졌다.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미조직된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갈등과 분열, 이것은 마르크스가 영국·아일랜드 노동계급의 분열을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영국의 모든 공업적, 상업적 중심지에는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는 하나의 노동자계급이 있다. … 이러한 적대관계는 영국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의 비밀이다. 그것은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밀이다.
이런 무기력과 분열은 양쪽 모두의 노동자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타협과 양보에도 불구하고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양보의 논리는 회사의 경쟁력과 노동자의 조건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회사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일거리가 많아지면서 노동자의 소득 증가와 고용안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고용안정을 위해서는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활동가들은 … 잔업·특근과 성과급의 확보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최대한 많은 돈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 결과 자연스럽게 부서 차원에서는 대의원과 사측과의 협력관계가 생겨나고 … 활동가들이 투쟁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투쟁의 와중에서도 잔업 특근을 계속하는 모습, 투쟁 이후 결국에는 사측의 생산계획을 모두 달성해내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의 연대를 기대하기 힘든 조건에서 비정규직이 조직화를 하고 투쟁에 나서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갈수록 단결과 투쟁보다는 ‘정규직 자리로 올라가는 좁은 길 위에서 경쟁’이 현실적 선택이 됐다.
그리고 “정규직화 대상자 선발은 사측의 인사고과와 생산현장의 평가에 기초해 이뤄지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측과 현장감독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았다. 불만을 토로한다거나 파업 투쟁에 적극 결합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됐다.”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체제 내에서 노동조건의 개선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는 더욱 두드러졌고, 노동자들의 분열과 개인주의는 커졌다. 노동계급 내에서 분절은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직접고용 비정규직, 간접고용 비정규직, 파견 비정규직, 부품 외주업체 정규직, 이주 노동자 등 더 세분화돼 갔다. 그럴수록 단결은 더 어려워졌고, 단체행동의 효과는 줄어들었다.
3) 이데올로기적 후퇴와 국가 탄압의 효과
한국에서 1987년 이후 아래로부터 노동자 투쟁 속에서 희망을 키우던 사람들이 곧이어 직면한 것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소련·동유럽의 몰락이었다. 물론 소련·동유럽은 ‘사회주의’를 내세우긴 했지만 소수 관료 지배자들이 통제하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였다. 많은 노동대중이 소련·동유럽을 자신들의 대안으로 여겼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먼저 소련·동유럽 몰락의 충격은 노동운동 속의 좌파 활동가들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소련·동유럽 체제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겼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많은 투사들이 노동운동을 떠나거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조건 개선만을 추구하는 노동조합주의로 더 급속히 나아가게 됐다. 소련·동유럽이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에 그쳤다.
소련·동유럽의 몰락은 나아가 지배계급과 우파의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복원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벗어난 대안은 가능하지 않게 됐다’며 자유시장을 앞세웠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이같은 이데올로기적 열세와 혼란은 당연히 노동운동의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경쟁력’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 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결해서 투쟁하기 보다는 회사나 개인의 경쟁력을 높여야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주장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가 자신이 속해있는 특정 부분의 경쟁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삶의 질과 노동 조건을 지키려 싸우게 되면 공장, 회사, 혹은 국가를 겪고 있는 위기만 심화될 것이며, 이로 인해 이들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덩달아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관점 보다는 사장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도록 부추겨진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보다 고용주의 수익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사장의 지불 능력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따낼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또한 경쟁력 이데올로기로 인해 노동자들은 경영 참여나 노사 파트너십, 양보 교섭 등을 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노동자들 사이에 무기력을 조장하게 된다.
경쟁력 이데올로기는 언제든지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조장했다. 경쟁에서 뒤처지고 패배해서 조기퇴직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것은 다시 “있을 때 벌자”는 생각을 강화하고, 현재의 자리에서 잔업·특근같은 초과노동을 해서라도 최대의 소득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조장했다. 경쟁사회에서 학벌, 직위, 사회적 지위 등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기저하와 열등감에도 시달리게 된다.
[미국에서도] 육체노동자의 … 대부분이 놀라울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이죠. 그들은 대개 험한 일을 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낙인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예컨대 너희는 머리가 나쁘고 패배자들이며 뭔가 뒤떨어진 이들이라는 낙인의 느낌말이에요. …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낙인, 열등감, 바로 이런 것들이 노동계급에게 심대한 상처를 줍니다. 이런 열등감이란 상처는 분노로 이어지지요. 한편으로 타자에게 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도 향해요. 자신에 대한 분노는 대개 우울증으로 이어지고요. 또 외부로는 우선 배우자나 자녀에게 전염되죠. … 이렇게 되면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힘차게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게 돼요.
87년 이후 노동운동이 한참 성장해 나갈 때, 노동운동은 사회정의와 약자를 위한 투쟁이며,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지지를 얻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는 생산의 주역,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주장을 들으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것을 뒤집어버렸다.
이제 “일자리와 사회서비스를 지키려 싸우는 노동자들은 (심지어 더 나빠진, 몇 푼 안 되는 급료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위험에 빠트리는 이기적인 자들로 위치가 바뀌어버렸다. 죄의식이 희망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노동귀족론, 대공장 정규직 책임론, 집단 이기주의론 등이 이런 효과를 냈다.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노조 활동에 대한 친척과 친구들의 싸늘한 반응을 접하곤 했다.
공격은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물리적 탄압과 법, 제도적 억압이 뒤따랐다. 다수 노동대중을 더욱 쥐어짜서 소수 지배자들의 이윤을 높이려는 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하며 노동3권을 제약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지적했듯 신자유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국가 폭력과 경찰력이 강화되는 데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주체, 목적, 방법과 시기 및 절차 등에서 법이 정한 까다로운 요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추어야 합법적 쟁의권이 인정됐다.
이런 법과 제도를 벗어난 집단 행동은 가차없이 해고, 중징계 등의 공격을 당했고 수시로 경찰력이 투입됐다. 노동조합을 옥죄고 노동3권을 제약하는 손배가압류제, 필수유지업무제,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타임오프제 등이 만들어져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었다. 노동조합의 재정으로 해고자 생계비 지원과 손배 금액 등을 갚아야 하는 부담이 커지면서 투쟁은 더 가로막혔다. 특히 손배 가압류는 죽음까지 낳는 잔인한 탄압 무기였다.
자본가에게 손배 가압류는 해고나 구속보다도 좋은 무기다. 노동자는 해고를 해도 어떻게든 버티며 싸우고, 불법으로 몰아 구속을 시켜도 감옥에서 다시 나와 투쟁한다. 그런데 손배 가압류를 걸면 좀 다르다. 가족들의 생계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해고됐다고 이혼하는 가정은 거의 없다. 그런데 손배 가압류가 걸려 이혼하고 아이들 가출하는 가정이 숱하게 많다. … 결국 마지막 저항 수단이 목숨이 되고, 비극이 되풀이된다.
이것은 단지 용기와 투지로 돌파하면 된다고 말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본가와 정부도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파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액은 지난 10년 사이에 무려 9배나 증가했다. 민주노총 산하 노조에 청구된 손해배상 규모는 2004년 51개 사업장 575억 원에서 2014년 17개 사업장 1천691억6천만 원으로 증가했다.
4) 크고 작은 패배의 누적된 효과
한국 노동운동은 영국에서 1984년 광부노조의 패배와 같은 궤멸적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어진 크고 작은 패배의 누적은 비슷한 효과를 냈다. 물론 간간히 의미있는 승리들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방향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2000년대 말부터 봐도 먼저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점거파업이 고립 속에 쓰라린 패배로 끝났다. 2010년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 25일간의 초인적인 점거파업도 정규직 노조의 연대 부족 속에 패배했다. 이 두 가지 투쟁과 아쉬운 결과는 지금까지도 한국 노동운동과 비정규직 투쟁에 커다란 상흔을 남기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의 배신도 심각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져 온 노골적 공격도 노동운동을 비틀거리게 해 왔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복수노조제를 이용해서 ‘기존 단협 파기 ->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어용노조 설립 -> 민주노조 말살’ 시나리오를 작동하며 주요 민주노조들을 파괴해 왔다.
이 과정에서 ‘창조컨설팅’으로 대표되는 노조 파괴 전문 노무법인과 ‘컨텍터스’로 대표되는 기업형 용역깡패 회사가 활약했다. 2012년 9월 기준으로, 창조컨설팅의 관여 속에 7년 동안 14개의 민주노조가 무너졌다고 한다.
그렇게 무너진 발레오공조, 상신브레이크, 대림자동차, 우창전기, KEC, 유성기업, 만도기계 등은 대부분 각 지역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주축 구실을 해 왔기에 더 타격이 컸다. 오랜 투쟁 전통을 자랑하던 민주노조들이 허무하게 꺽여져 버린 것도 좌절감을 더했다. 알게모르게 투쟁의 근육이 약화돼 있었던 것이다. 발레오만도 회사의 한 관리자는 “혹시나 해서 칼 꺼내들고 살짝 찔렀더니 푹 들어가더라”고 했다.
한국 노동운동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의 양날개 전략’이 이런 패배를 막아내며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산별노조는 부문을 뛰어넘는 더 큰 단결의 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 기대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마저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파업이나 쌍용차 점거파업 때 별다른 연대 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산별노조가 주로 조직형식으로서, 산별노조 지도부에게 권한을 집중하는 것으로 추진된 것과 관련있다. 이는 노동조합적 운동의 한계 속에 위기를 겪어 온 노동운동의 돌파구가 되기 힘들었다. 기업별 완성차지부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에서 보이듯이 기업과 부문별 칸막이 현상은 여전했고 ‘무늬만 산별노조’라는 냉소가 번져 왔다.
진보정당은 2004년 총선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긴 했지만,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이 보여주듯 심각한 분열과 위기를 겪고 있다. 진보정당이 의회 안에서 정치와 입법 활동을 하고, 경제는 노동조합이 맡는다는 이분법부터 문제였다. 이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정치활동의 주체가 아니라 돈과 표를 제공하는 수동적 지지자로 머물게 했다.
하지만 의회 내 소수의원들의 활동만으로는 타협과 후퇴가 강요되기 쉬웠고, 이것은 다시 노동자들의 실망을 낳았다. 제도정치의 장에서 더 많은 몫과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주파와 평등파 간의 분파적 갈등이 심각해져갔고, 그것은 2013년에 절정에 달했던 종북몰이와 ‘내란음모 조작’ 등이 더 쉽게 먹힐 수 있는 배경이 됐다.
주요 작업장에 존재하는 현장조직들은 이런 패배, 실패를 막아내는 대안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기존 노조 지도부의 부족함과 문제점을 비판하며 등장했던 현장조직들도 금새 건강성을 잃고 노조 지도권을 두고 다투는 데 몰두해 갔다. “현장조직들에게는 집행부를 견제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려 다음 선거에서 자기 조직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일상 활동의 주요 활동 목표”가 됐다.
1990년대 후반을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완성차 3사 현장조직들의 본격적인 체세포 분열이 시작되었다. … 현장조직 분화의 주요 문제의식은 “다음 임원선거에서 누구를 위원장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 조직간 선거연합은 이념적 근접성이나 정세인식, 전술 운영의 공통성이 등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누구와 손을 잡으면 선거에 이길 수 있나”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건강한 경쟁과 협력이 아니라, 권한과 자리를 둘러싼 갈등은 수많은 분파적 다툼을 낳았다.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 사측과 유착하며 자신의 지위·권한으로 사리사욕을 추구한 노조간부 비리,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 등도 벌어졌다. 그때마다 지배자들은 탄압과 공격의 기회로 삼았다. 이 모든 것은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정당성을 갈아먹으며,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지를 떨어뜨렸다.
한국 노동운동은 현재 어디에 와 있는가
위와 같은 여러 요인과 변화들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등장하던 초기와는 매우 다른 상태에 이르러 있다. 먼저 민주노조 운동은 그 구성원들의 조건과 지위를 어느 정도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컨대 금속노조가 2011년에 66개 지회의 조합원 10만4천802명에 대해 조사한 결과, 조합원들의 월 평균임금은 359만662원이었다. 비록 잔업 특근과 장시간 노동을 통해서 얻은 소득이지만, 전체 임금근로자의 절반 가량이 월 166만7천 원도 못 받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2013년 기준)
한편 같은 조사에서 조합원들의 평균연령은 42.8세, 평균 근속연수는 17.2년, 평균 부양가족수는 4.0명이었다. 1987년의 폭발적 분출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이제 나이가 들고, 가족 부양과 노후를 걱정해야 할 세대가 된 것이다. 여기에 앞에서 설명한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은 초기의 역동성을 많은 부분 잃게 됐다.
연평균 파업발생건수, 불법파업건수와 비율, 연평균 파업참가자수, 연평균 노동손실일수 등 여러 지표로 판단하건데, 1988~92년 사이에 매우 격렬한 형태의 노동운동이 1993~1997년 사이에 노사관계가 안정화되면서 수그러들었다가, 1998~2001년 사이에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다시 노사갈등이 늘어났으나 2002~2006년 사이에 안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안정화’ 경향은 2008년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지금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돼 왔다. 작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교류하고 능동적으로 여러 활동을 공유하던 양상도 일찍부터 시들해졌다.
노동조합 내에서의 일상적인 활동, 일례를 들어 노래패라던지 풍물패라던지 영상패, 몸짓패 이런 일상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부분들이 많이 퇴조가 돼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로 나타나고 있구요. 전에 학습써클이라는 것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단지 파업 건수나 파업 참가자 수 등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변화를 봐야 한다. 그것은 투쟁과 파업이 노동자들의 투지와 자신감,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키던 효과가 점점 줄어들어왔다는 점이다.
노사관계가 제도화되면서 “파업은 임단협을 마무리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인식되어 왔으며 파업으로 인한 생산 손실은 곧바로 특근으로 만회되었다. … 노조는 전투성을 극단으로 몰아가기 보다 ‘예측 가능한 파업’, 부분 파업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었다.”
투쟁과 파업은 갈수록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의례적인 행사로 변해 갔다. 파업 기간에 노동자들이 모여서 집회와 농성을 같이 하며 결속을 다지는 일은 사라져 갔다. 출근을 안 하거나 일찍 퇴근해서 개인적 시간을 갖는 식이었다. 파업은 약속된 듯이 적당한 기간과 수준으로 마무리되고, 생산 손실은 잔업과 특근으로 보충됐다.
예컨대 현대차에서 민주노조 등장 초기나 1997년 점거파업 때 “노동자들은 ‘진정 살아있음과 공감대’, ‘까닭모를 자신감과 흥분’, ‘정신병자같은 즐거움’ 등 정서적 경험을 공유하였다”고 한다.
반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의례화 관례화되고 … 예측 가능한 범위 내로 틀 지워지는 파업은 … 의식의 고양도, 노동자 정체성의 형성도, 동지애도 느낄 수 없는 진부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 파업중 주목되는 정서(감정) 상태는 ‘짜증나는’과 ‘지루한’ 감정의 급속한 증가”였다. 이것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조합원들을 대상화하며 민주주의가 부족해지는 과정과 연결돼 있었다.
조합원들은 파업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파업 지도부가 설정한 적절한 수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원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파업 지침은 파업지도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되고, 파업 전, 중, 후를 통해서 조합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통로는 부재하며, 조합원들의 자율적인 토론과 대화의 장 또한 마련되지 않는다.
조합원들을 동원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집회와 투쟁 참가를 정치적 설득과 토론으로 조직하기보다 공문과 지침으로 해결하는 경향에서도 나타난다. “000 집회 참가 방침 : 대의원 이상”, “△△△ 결의대회 참가 방침 : 상집 이상”. 이런 상급단체의 공문과 지침, 인원 할당에 따라 투쟁과 연대의 수위가 판가름나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투지와 사기가 저하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보다는 비판이 더 커지며 사회적으로 고립돼 온 것과도 관련 있다. 정영태 교수는 “2005년 이후 매년 실시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양대 노총에 대한 신뢰도는 현대차·삼성·SK·LG 등의 재벌기업이나 시민단체보다 낮[다]”고 지적한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불렸던 울산에서조차 노동조합의 빨간조끼를 ‘빨조’라고 냉소적 의미를 담아 부르거나, 일부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조끼를 공장 밖에서는 입기를 꺼린다는 말까지 들린다.
물론 새롭게 성장하는 산업이나 미조직 비정규직 부문에서 새 물결이 등장하면서 기존 노동운동의 타성을 일깨우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들이 거듭돼 왔다. 2000년대 초중반의 금속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화 물결, 화물연대와 덤프연대의 등장, 공무원노조의 탄생이 그런 경우였다.
2007년 이랜드 파업이 보여 준 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성장도 마찬가지였다. 근래에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케이블방송, A/S 서비스 기사들이 대거 조직화되면서 인상적인 투쟁을 보여 줬다.
하지만 부문별로 칸막이가 높아지며 시야가 협소해진 기존 노동운동은 이런 새로운 물결에 제대로 된 연대를 제공하지 못해 왔다. 강력한 연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직력이 취약한 비정규직 등은 투쟁에서 승리하거나 조직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보통 제도화된 노사관계 밖에서 폭발하는 투쟁은 더욱 잔인한 탄압과 외면으로 대응했다. 결국,
투쟁 주체들은 약화되는 조직력을 상쇄하고 투쟁의 돌파구를 열기위해 투쟁 강도를 높이게 된다. 극단적 투쟁방식을 시도할수록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탈하게 되고, 소수화될수록 투쟁 주체들은 극단적인 투쟁 방식을 도입한다. 투쟁 장기화․소수화와 투쟁 강도 강화는 서로 보강하며 가속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지난한 투쟁을 버텨내며 노조 인정 등을 통해 노사관계의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노동자들도 곧 빠르게 민주노조 운동 속에 만연한 여러 가지 관행과 타성에 젖어들곤 했다.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흡수하며 기존의 타성이 벗겨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타성 속에 묻혀서 새롭게 나타난 생기가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금,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며 투쟁으로 성취한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에 급급해 있다. 간간히 새롭게 등장하는 투쟁과 활력들은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라는 우산과 제도화된 노사관계의 틀 밖에서 무방비로 고통받고 있다. 이렇다보니 이 틈과 격차를 이용한 지배자들의 이간질과 공격은 갈수록 더 잘 먹히고 있다. 그래서 전체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조건은 더 악화하고 있다.
2008~2012년 5년 동안 한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2.3% 하락했다. 1998~2002년 19.4%, 2003~2007년 17.6% 상승했던 것과 충격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고용의 불안정성도 극심하다. 2008~2013년 6년 동안 정리해고·명예퇴직 등 구조조정 희생자는 총 503만 명으로 연평균 84만 명이었다. 여기에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 해고자가 총 534만 명으로 연평균 89만 명이었다. … 쫓겨나올 일자리조차 사실상 가져보지 못하는 임시·일용·알바 노동자도 부지기수다. 그 수만 최소 6~7백만 명이다.
장시간 노동 등을 통해 얻어 온 조직된 노동자들의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조차 별로 안정적이지 않다. 쉽게 건들지 못하는 ‘강성 노조’ 속에서 노동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역설이 존재한다. 현대차에서도 “정규직 대체인력으로서의 비정규직, 해외생산의 확대 등은 하나같이 현대차 정규직의 고용을 위협하는 요인들이다. ‘완전고용협약서’를 가진, 국내 최강의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지만 고용불안은 불편한 진실”이다.
2015년 현재,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다. 이런 개악을 막아낼 힘을 가진 것은 조직된 노동운동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직된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는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는 공격이 먹히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것을 이용해 ‘청년 일자리를 위해서’라며 개악을 정당화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더구나 조직된 노동운동의 현장 동력은 많이 약화돼 있는 상태다. 각 부문의 임단협 투쟁을 넘어서 전체 노동시장 구조개편을 놓고 단결해 싸울 힘과 넓은 시야는 부족하다. 산별노조와 주요 대형노조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구도 총대를 매고 나서지 않으려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약점을 노리며 임금 피크제, 성과급으로 임금체계 개편, 해고·승진·징계 등에 대한 기업주 권한 강화, 고용과 노동시간의 유연화, 기간제 파견제 등 비정규직 고용의 확대 등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1987년 민주노조 운동의 탄생을 이끌었고 투쟁의 경험과 기억을 간직한 세대가 정년퇴직을 하기 시작한 지금을 노동시장의 구조를 더욱 친기업적으로 재편할 기회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고, 중국발 위기설과 미국 금리인상 등으로 불안정이 커지는 한국 경제 상황이 이런 시도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게 된다면, 노조와 단협같은 방패가 없는 대다수 노동자들은 더욱 더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노조가 있고 단협으로 방어받을 수 있는 노동자들도 점점 서로 경쟁하고 무기력해지며 부메랑을 맞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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