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주의자인 폴 르블랑(Paul Le Blanc)은 레닌과 볼셰비키의 경험과 사상에 대한 글들을 발표해 왔다. 지난해 그가 발간한 책 <미완의 레닌주의: Unfinished Leninism>는 레닌과 오늘날의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한 주요 글들을 엮은 것이다.
이것은 영국 RS21(21세기 혁명적 사회주의: 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의 활동가 조나스 리스톤(Jonas Liston)이 이 책을 서평한 것이다. 비록 르블랑의 책이 아직 한국에 발간된 것은 아니지만 레닌주의 논쟁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돕는 의미에서 번역 소개한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rs21.org.uk/2014/08/13/unfinished/
최근 혁명적 좌파가 겪은 힘든 일들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부분, 특히 러시아 혁명가로서 레닌의 유산과 그가 주요한 역할을 했던 조직인 볼셰비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다.
폴 르블랑의 신간 <미완의 레닌주의>는 이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레닌의 개성, 로자 룩셈부르크와의 관계, 볼셰비키 당에서 민주주의 등의 주제들을 다루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전략적 지침을 제공한다. 르블랑은 또한 라스 리(Lars Lih), Luke Cooper, Charles Post와 같은 급진적 사상가들,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쟁점에 대해서도 다룬다.
강연 중인 폴 르블랑
나는 ‘A등급’ 역사를 공부하는 대학생이었을 때 처음으로 레닌에 관심을 가졌다. 그 교육을 받고 나서, 나는 아마존에 그 이름을 검색했고 첫 번째로 나온 책을 샀다: 로버스 서비스의 레닌 평전.[편집자 - 이 책은 한국에도 출판돼 있다.]
그 책은 레닌의 삶에 대한 엉망이고, 편향적이고, 우파적인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꽤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서비스가 그려낸, 그 어떤 가책도 없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냉철하고 누구도 봐주지 않는 직업 혁명가로서의 레닌의 모습을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4년 후에 나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 가입했고, 여기서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해 내가 오해했던 것들 중에, 분명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독서와 토론을 통해 조목조목 반박되었다. 최근까지도 내가 계속하고 있었던 오해는, 레닌이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너그러워질까봐 스스로에게 인간적인 유대나 즐거움을 전혀 허락하지 않은 외골수 천재였다는 것이었다.
레닌이 “사람들을 쓰다듬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헛소리를 속삭이”고 싶어지게 할까봐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들을 수 없다고 말한 이야기는 그가 무정하고 교양 없는 혁명가라는 이 그림에 대한 증거로 종종 인용된다. 하지만 르블랑이 쾌활하게 기록하는 바에 따르면, 이 하나의 일화는 맞는 것일지 몰라도 이 일화가 레닌에 대해 그리는 그림은 실제와 거리가 멀다.
레닌과 룩셈부르크에 대한 르블랑의 논평은 그들 사이의 동지적이면서도 논쟁적인 부딪힘에 대한 가장 좋은 요약들 중 하나를 제공해 준다. 그는 그들의 개인적 관계와, 민족 문제부터 제국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혁명적 조직까지 그들이 논쟁했던 쟁점들을 기록한다.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 19세기 초 독일 공산당 활동가)는 “룩셈부르크냐 레닌이냐가 아니라 룩셈부르크와 레닌”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르블랑은 이 책에서 그렇게 접근하고 있다.
그들의 논쟁들 중 많은 수는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묘사할 때는 정확하지만, 상대방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는 부정확했던 것에서 나왔다. 탈하이머를 다시 인용하자면 “그들을 묶어 주는 것은 그들이 세계혁명의 커다란 총체성의 서로 다른 수준, 상황과 영역에서 꼭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혁명정당의 세 가지 조건들
르블랑은 그의 책의 많은 부분을 혁명적 노동자당 발전의 세 가지 조건을 논의하는 데 할애한다:
첫 번째는 오늘날 노동계급의 선진 층의 혁명적 계급의식이다. 두 번째는 조직된 혁명가들의 올바른 정치적 전략과 전술이다. 세 번째는 “가장 넓고 많은 노동자들과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접촉이다.
첫 번째 측면은 ‘전투적 노동자-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발전을 포함한다. 구체적으로, 르블랑은 작업장 투쟁이든, 지역사회 캠페인이든, 억압에 맞선 투쟁이나 보다 넓은 사회운동에서든 투쟁에 뿌리를 둔 전투적 프롤레타리아들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투사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투쟁을 진전시키고 승리로 이끌기 위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두 번째 측면은 이 투사들이 조직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르블랑은 모든 색깔의 견해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하면서도 핵심적인 정치 과업을 다룰 수 있는, 철저하게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혁명적 조직은 노동계급의 저항을 막다른 길로 유도하는 개혁주의적 혹은 명백하게 반동적 세력에 대항하면서 또한 스스로의 잘못된 방향도 교정할 수 있는 비판적 지향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혁명적 좌파가 직면한 가장 큰 약점은 르블랑이 묘사하는 세 번째 측면과 관련이 있다. 그는 과거의 ‘급진적 노동계급 하위문화’에 대해 논한다. 이 전통들은 노동계급의 경험과 투쟁을 반영하는 수많은 조직, 인프라, 예술, 음악, 문학과 다른 문화적 형식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하위문화는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조직형태의 부상으로 인해 점점 침식당해 왔다. 르블랑이 열거한 처음 두 대들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화와 관련된 인프라와 조직들이 재건되어야 한다.
르블랑은 <미완의 레닌주의>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 세 가지 주제들을 다룬다. 이 주제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자 보다 넓은 노동계급 운동으로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를 형성한다.
단절과 매듭으로 가득 찬
그렇지만 르블랑의 책의 제목은 내가 좀 더 엇갈리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그런 쟁점들을 제기한다. 나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유산과 교훈이 “미완”이며 이 유산과 교훈이 오늘날의 활동가와 투사들에게 지침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완전히 동의한다. 그런데 그러한 이론적 발전, 전략적 분석 그리고 전반적인 정치적 자질들이 단순히 “레닌주의”라고만 특징지어질 수 있을까?
이런 긴장은 르블랑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한 지점에서는 레닌의 “삶과 사상, 정치적 실천과 일치하는 이론적·분석적·전략적·전술적 그리고 조직적 접근이 합쳐진 것”이라고 레닌주의를 정의한다. 그런데 다른 지점에서 그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그냥 “간결하게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약어에 불과한 것임을 시사한다.
나는 이 용어의 유용성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고, 이 문제가 이러한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레닌주의”에 대해 내가 회의적인 두 가지 이유를 여기서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이 용어의 역사이다. “레닌주의”는 조엘 가이어(Joel Geier: 미국의 사회주의자)가 최근에 논했듯이 “그 어떤 외국의 당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그리고 스탈린이라는) 트로이카의 정책을 거스르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레닌 사후에 지노비예프가 ‘볼셰비키화’ 캠페인을 벌이며 만들어낸 용어다.
심지어 그 전에도 이 용어는, 레온 트로츠키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레닌의 부인] 둘 다 그들의 회고록에서 명확히 말하듯이, 러시아 및 국제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몇몇 투쟁에서 레닌에 대한 분파적 비방으로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민주적이고 해방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을 틀 지우는 데 좋은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최근 이안 버철이 rs21 잡지에 쓴 글(http://rreload.tistory.com/111)에서 제기한 질문과 관련이 있다: “레닌주의적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만한 일관된 사상의 총체가 존재하는가?”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레닌은 그를 만들었던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는 기나긴 과정을 거쳤다. 1976년에 마이클 뢰비(Michael Löwy)는 다음과 같이 썼다:
헤겔에 대한 비판적이고 유물론적인 독해는 레닌을 제2 인터내셔널의 사이비-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구속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사상에 부과한 이론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변증법이 빠진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대변되는 장애물로부터 자유로워진 레닌은 여러 사건들의 압박 속에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할 수 있었다: 다수의 인민, 즉 노동자 대중과 농민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실제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구성하는 정책들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철학적 기반을 다시 탐구하는 과정은 1917년 레닌의 ‘4월 테제’로 이어졌다. 4월 테제는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즉시 노동자 소비에트 대표단의 통제 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는 레닌이 경제 결정론으로부터 단절하여 정치를 “고전역학의 동질적이고 텅 빈 시간”이 아니라 “단절, 수많은 매듭, 그리고 사건들을 잉태하고 있는 요람”으로 인식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향해 나아간 것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레닌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는 볼셰비키 당과 국제적인 혁명적 좌파 전체에 걸친 변화의 본질적 부분이었다. 국가나 제국주의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니콜라이 부하린과 안톤 판네쿡 등의 혁명가들의 사상에 대해 레닌이 더 크게 관심을 가진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1977년에 Marian Sawer가 썼듯이, 레닌은 국가에 대한 부하린의 설명에 설득되었고 그 문제에 대한 그의 “기존의 모든 생각”을 폐기했으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들어 낼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서 소비에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부하린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나는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는 것을 “레닌주의”라는 틀 속에 끼워 맞추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한편, “<국가와 혁명>과 <좌익 공산주의: 유치한 혼란>을 제외하고 레닌의 이론에서 독창적이거나 변치 않는 가치를 갖는 것은 거의 없다”는 찰리 포스트(Charlie Post)의 주장에 르블랑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완전히 동의한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경험을 오늘날 우리의 투쟁과 토론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새로운 분석과 이론적 발전에 장애물을 만드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여러 정치적 질문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하고 넓히는 길로서.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의 방법론이 이것의 중심이다.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의 이익을 진전시키기 위해 현 상황으로부터 필수적인 실천적, 전략적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문화를 향하여
벤사이드(Bensaïd)가 사망하기 직전에 완성된 회고록(‘An Impatient Life’)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세계화된 불의에 항거하는 반란이 배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후퇴와 패배의 악순환은 깨지지 못했다. 의지와 의식성이 없다면 수가 많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승리 없는 저항과 받아치기에 급급한 전망은 결국 소모되고 말 것이다. 전략 없이는 승리도 없고, 힘의 균형 없이는 전략도 없다. … 오늘날의 정치 지형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는 전투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
영국 노동계급은 심각한 패배를 겪어 왔고 지난 40년간 거기서 회복하지 못했다. 개혁주의적인 사회주의는 급격하게 우경화된 한편 혁명적 좌파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에 직면하여 파편화되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재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르블랑이 자신의 책에서 논의하는 요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하고 있는 투쟁들을 세워내는 한편, 그 안에서 사회주의 정치도 세워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투쟁이 부각시키고 있는 과제들에 대한 혁명가들 사이의 논쟁이 우리의 운동을 규정하는 노선을 형성할 것이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미래 혁명적 좌파의 재탄생도 형성할 것이다.
핵심적으로, 이 나라의 혁명적 좌파는 조엘 가이어가 “아래로부터의, 활동가들의 反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정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혁명적 공산주의 문화”라고 칭한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던컨 핼러스는 거의 반 세기 전에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오직 집단만이 체계적인 대안적 세계관을 발전시킬 수 있고, 노동자들과 지식인들 모두에게 현실에 대한 부분적이고 파편화된 인식을 부과하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들과 과학의 융합”이라고 칭한 것은 혁명정당 밖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정당은 철저히 민주적인 기반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내부 일상에서 활기찬 논쟁이 언제나 있고 다양한 경향들과 다양한 색깔의 의견들이 대표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정당은 종파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내부 민주주의는 옵션이 아니다. 이는 당원들 사이의, 그리고 당원들이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근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가들이 저항(지금 여기의 파업과 캠페인에서부터, 다수에 의한 사회의 혁명적 변혁이라는 궁극적 목표까지)을 진전시킬 수 있는 주요한 소수파 투사로서 운동에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에 대한 폴 르블랑의 기여는 직접적이고, 신선하며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하다. 그는 레닌, 볼셰비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이론, 창의성, 전투성, 성공과 실패 같은 모든 다양한 측면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지금 상황을 암울하다고 본다면, 우리는 알레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언젠가 썼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보는 레닌의 자세이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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