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시도를 보면서 올해 상반기에 개봉했던 영화 <차일드 44>가 다시 생각났다. 스탈린 시대를 다룬 이 영화의 주인공은 국가의 노선과 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하지 않거나 의심을 품는 모든 사람을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고 숙청하는 보안경찰이다. 숙청의 논리는 마침내 그 보안경찰의 부인과 보안경찰 자신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이 영화의 또 한 축은 ‘사회주의에서 범죄나 살인은 사라졌다’는 믿음과 통제를 위해, 연쇄살인사건을 은폐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살인사건의 뿌리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체제가 저지른 ‘홀로도모르’ 대학살이 있었지만, 결국 ‘서방자본주의가 타락시킨 괴물’의 탓이라며 덮어지게 된다.
‘자랑스러운 성공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강요하며 부끄러운 과거를 덮고, 이것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종북좌파’라고 낙인찍는 이 나라의 오늘과 겹쳐지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졌다는 이들의 집념과 광기는 우려스러운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적화통일을 대비해 혁명전사를 양성하던 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이고 집필참가자에 대한 적색테러도 우려된다’는 논리까지 나온 상황이다. 놀랍지만, 박근혜 정권의 핵심세력은 실제로 이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들 속에서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지옥같은 현실 때문이 아니라 ‘종북좌파가 주도한 그릇된 역사교육의 결과’라고 믿는 것이다. “불평과 남탓, 해도 안 될 것이라는 패배감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세대로 길러진다”, “자살과 정신질환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들이 쏟아졌다.
거의 신앙 수준으로 보이는 이런 신념을 가진 정부가 저작권을 독점한 상태에서 어떤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질지는 거의 예정돼 있다. ‘아직 쓰지도 않은 교과서 내용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냐’는 논리가 설득력이 없는 이유다. 이미 이 정부는 ‘대한민국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자부심을 높여라’는 기준을 십계명처럼 박아버렸다.
더구나 내일이라도 ‘북한 지령을 받아 국정화 반대에 나선 자들’이 누구였는지 색출·발표돼도 놀랍지 않을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총리 황교안은 이미 ‘확인해서 조치하겠다’고 했는 데, 이런 압력이 가해지면 밑에서는 뭔가를 조작해서라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고 종북좌파를 잡는 데 필요하다면 큰 문제겠냐’는 생각이 퍼질 것이다. 유우성 간첩조작이 그랬고,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그랬다. 간첩조작의 피해자로 무죄가 밝혀진 유우성 씨를 곧 해외추방하겠다는 이 나라에서 ‘설마’는 항상 배신당해 왔다.
박근혜 정부는 ‘올바른’ 정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보당을 해산시켰고, ‘올바른’ 노사관계를 위한 노동구조개악에 이어서 이제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려 한다. 그 다음은 국어, 사회 등 다른 교과서들도 ‘올바른’ 것으로 바꾸려할지 모른다. 이미 ‘왜 국어 교과서에 좌파 작가와 작품들이 실려있냐’는 압박이 커져왔다.
사실 기존의 검정제 속에서도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계속 후퇴돼 왔다. ‘검정도 문제가 많고 자유발행제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이유다. 사회주의 진영의 독립운동은 별로 다뤄지지 않았고, 독립운동사와 ‘친일 문제’ 자체가 축소돼 왔다. 우파에게 ‘가장 좌편향’이라고 비난받아 온 금성교과서마저 노동운동의 역사를 언급한 부분은 전체의 2%도 안됐다. ‘집필기준’이라는 검열과 ‘수정지시’라는 강제로 이런 우클릭이 이뤄져 왔다.
그런데 이런 우클릭이 너무 더디고 부족하니 그냥 국정으로 가서 왕창 우클릭시키자는 게 정부와 우파의 태도다. 교학사 교과서의 실패 이후 이판사판이 된 것 같다. ‘교과서에 전태일은 있는데 이병철과 정주영은 없는 상황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국정이냐 검정이냐는 수단일 뿐’이라고도 한다. ‘자유시장이든 국가개입이든 이윤만 많이 뽑아내면 된다’는 사고방식과 비슷하다.
한홍구 교수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제대로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최고권력자”가 된 것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부모가 따로따로 총에 맞아 희생된 집은 그 댁밖에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 지배자들은 왜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권하진 않고 최고권력자로 추대한 것일까.
미중 갈등 속에 커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불안정, 97년 IMF를 뛰어넘는 위기로 갈 수 있다는 경제적 불안감이 그 추동력일 것이다. 병세가 깊어지는 체제가 병든 지도자를 필요로 한 셈이다.
이 나라에서 ‘자유시장’과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지배자들은 노동자를 공격할 ‘자유’말고는 갈수록 ‘자유와 민주’를 버리고 있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은 “이석기의 단죄, 통진당 해산, 그리고 역사 교과서 개정은 박 대통령의 이념적 트레이드마크”라며 추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목표가 같더라도 방법을 달리하며 분열하곤 한다. 특히 그 방법이 오히려 목표를 방해한다고 볼 때는 분열이 커진다. 실제로 ‘국정화는 중도파를 왼쪽으로 밀어내며 좌파를 더 결집시킨 전략적 자충수’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교수, 교사, 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서고 여론이 뒤집히기 시작하면서 우파들 속에서 ‘종북: 애국’의 전선 붕괴와 ‘상식: 몰상식’의 전선 형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왔다. 하지만, 전면 장외투쟁과 예산안 보이콧 등을 계속 주저해 온 민주당을 보면서, 우파는 결국 칼을 집어넣기보다는 국정화 쐐기 박기로 나서고 있다.
민주당은 ‘우리도 할 만큼 했지만, 못 막았다. 이제 선거 때 여소야대를 만들어주면 국정화를 뒤집겠다’고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정화 반대 열기가 반년 후 총선으로 연결될 거라고 본다면 정말 나이브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민주당이 왜 선거전문형 대기업인 새누리당에 매번 패하는 선거 자영업자들인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당장 최근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은 참패했고, 벌써 ‘너무 국정화에 다 걸기하다가 중도층을 잃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뭘 다 걸었지?) 반면 울산 기초의원에서 진보당 출신이 엄청난 ‘종북몰이’를 뚫고 야권 단일 후보로 당선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야권연대의 필요성과 효과를 보여 줬다’는 평가는 일면적이다. 그보다는 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가 단결해서 종북몰이를 무력화시켰다는 게 중요하다. 진보를 넘어선 민주당과의 연대는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아마 선거 득표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투쟁의 발목을 잡는 효과를 낼 것이고, 민주당 문제를 둘러싼 진보의 분열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일부가 벌써 내년 총선을 모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으며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위한 야권연대를 제기하고, 진보통합을 이에 연동시키는 것은 우려스럽다. 필요한 것은 공동의 가치와 요구를 위한 투쟁을 더 크게 건설하는 것이고, 그 투쟁 속에서 신뢰를 쌓고 자신감을 높이며 진보의 단결을 강화하고 외연을 넓히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서든, ‘민족적 자존’을 위해서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든 국정화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힘을 모으고, 그것을 세월호의 진실을 바라는 투쟁, 노동구조개악에 반대하는 투쟁과 연결시킬 때이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쐐기 박기를 새로운 폭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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