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시리자 왼쪽의 새로운 대안 건설을 지지하며
치프라스가 트로이카에 굴복한 이후 이제 긴축은 다시 현실이 되고 있다. 8월 18일 그리스 공항 14개가 독일 자본에 팔리며 민영화됐다. 앞으로 부가세 인상, 연금 삭감, 노동자 해고 등 3차 구제금융 합의의 결과가 속속 현실 속의 구체적 고통으로 드러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 그리스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까지처럼 그리스 경제는 계속 축소될 것이고 2020년대까지도 경기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갚을수록 더 늘어나는 국가 부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8월 14일 3차 구제금융 관련법안의 의회 투표에서 여전히 64명의 의원이 반대표를 던지고, 11명이 기권한 것은 이런 우려와 반감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시리자 의원 중에서도 33명이 반대표를 던지고 11명이 기권했다.
의회 밖에서도 반긴축 투쟁은 계속 되고 있다. 7월말 아테네에서 650여 명의 좌파·노조 활동가들이 연서명한 ‘끝까지 반대(NO)’ 위원회가 설립된 것도 그것을 보여 준다. 이 중에는 시리자 좌파 활동가들도 많았다.
트로이카가 강요한 긴축에 굴복한 세력과 그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시리자 안에서 동거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치프라스가 시리자 집권 직전에 당내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조치들을 도입했던 것은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였을 것이다. 치프라스는 이번에 트로이카에 굴복하는 과정에서 당내 의견과 목소리를 간단히 무시하곤 했다.
나아가, 그는 ‘좌파 정부를 무너뜨려 우파를 도우려 하느냐’는 논리로 시리자 좌파를 흔들고 분열시키려 애써 왔다. 8월 20일에 전격적으로 총리 사임과 조기 총선을 발표한 것도 여러 꼼수를 담고 있는 듯하다.
먼저 치프라스는 이미 시리자 내에서 3~40명이 자신에 반대해서 투표하고 있고 일부 장관들도 거기에 동조하는 상황을 나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책과 법안을 충실히 지지하는 사람들로 의원단과 내각의 구성을 다시 짜려고 한다.
아직 자신과 시리자에 대한 지지와 인기가 남아있을 때 조기총선을 하면 선거 승리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여길 것이다. 긴축이 현실화되면서 인기가 추락하기 전에 승부수를 던지려는 것이다. 시리자의 왼쪽으로 이탈하는 세력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유럽과 그리스의 지배자들도 이제는 치프라스가 아래로부터 불만을 무마하며 긴축의 집행자가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치프라스의 시리자와 몇몇 중도우파 정당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국민적 단합’의 꼴로 3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집행하길 기대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0일 시리자 좌파 의원 25명이 우선 탈당을 하고 ‘민중연합’ 창당을 선언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의석수로는 이미 제 3당인 민중연합은 반긴축, 유로존 이탈, NATO 탈퇴, 전쟁과 제국주의 반대 등의 입장을 세워가며 ‘21세기 사회주의’ 전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미 4~8% 정도의 만만치 않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나치 정당인 황금새벽당을 뛰어넘은 일부 여론조사 결과는 고무적이다. 치프라스의 굴복이 낳은 빈공간을 극우익이 아니라 좌파적 대안으로 메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니 말이다.
‘민중연합’은 지난 국민투표 때 용기있게 ‘NO'를 선택한 기층 민중들과 청년세대를 결집시켜야 한다. 그래서 3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현실화에 맞선 투쟁을 건설하는 데 최우선적 강조점을 둬야 한다. 이 투쟁은 시리자 안팎에서 투쟁하던 좌파와 광범한 노동운동 세력을 단결시키고 포괄하는 투쟁이 돼야 한다.
투쟁을 중심으로 하면서 이제 한 달도 안남은 조기총선과 의회 재구성에서도 반긴축 목소리와 정책을 반영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반갑게도 시리자 밖에서 투쟁하던 일부 좌파도 여기에 힘을 모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좌파들은 아쉽게도 여전히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시리자 좌파는 결국 치프라스에 타협해서 왼쪽 장식품 구실을 하며, 노동자들을 시리자에 묶어두기만 할 것이고 시리자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다가 막상 그들이 나오니까 ‘이들은 혁명적 원칙이 분명하지 않다’고 선을 긋는 것이다. 또는 ‘정말 진지하다면 우리 쪽으로 들어오거나 혁명적 강령을 수용하라’는 식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도 보인다.
물론 민중연합은 13개 좌파그룹의 연합체로서 그 내부에는 혁명적 좌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나 선거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가진 세력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시리자의 밖에서 연합체를 꾸리고 있던 좌파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선거는 중심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선거에서 따로 대응하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영국이나 남한에서도 일부 극좌파들은 정치연합체나 심지어 개혁주의 정당 안에서도 유연하게 활동하려 한 바 있다.)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시리자같은 급진좌파연합체 안에서 급진화하는 대중과 접촉하고, 투쟁과 서로 배우기를 함께하며, 고비가 왔을 때 더 많은 대중을 왼쪽으로 이끌어내는 게 더 효과적인 전술이었던 것 같다.
극좌파들이 사태전개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는 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고 경험 속에서 입증시키는 데도, 투쟁 속에서 배우며 조직을 성장시키는 데도 이것이 더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전술은 구체적 상황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따라서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오류, 경험, 상호토론에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고 상황에 맞게 전술을 변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마치 이집트의 극좌파들이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다소 양비론적 태도에서, 분명하게 무슬림형제단을 방어하는 것으로 입장을 교정하고 있듯이 말이다.
치프라스의 굴복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시리자의 집권에서 드러났던 신자유주의와 긴축에 반대한 반감과 투쟁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제레미 코빈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그것을 보여 준다.
최근 레바논에서는 "쓰레기도 제대로 못 치우는 쓰레기 정부"를 규탄하는 5만 명의 시민이 모여서 "민중은 정권의 퇴진을 원한다"는 아랍 혁명의 구호를 재등장시켰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집권 나집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20만 명의 시위가 벌어지면서 지배층이 분열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가 중국발 위기설 속에 곳곳에서 고통전가에 더 강력한 재시동을 거는 지금, 그리스의 ‘NO'는 더 크고 강력하게 계속돼야 하고 전 세계로 번져나가야 한다.
● 김승교 동지의 가슴 아픈 소식에 애도를 표하며
8월 30일, 내란음모 조작으로 한동근 동지가 2년간 생고생 끝에 감옥을 나온 날,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이었던 김승교 변호사는 암투병 끝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지난 몇 년간의 종북몰이 광풍과 진보의 잘못된 대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 돌아보게 된다.
고인이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희대의 악법인지 조목조목 강연하시던 기억, 끝나고 뒤풀이에서 같이 토론하던 기억도 난다. 고인은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단식 농성을 하다가 쓰러져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었다.
내란음모 조작과 진보당 해산이 암세포를 활성화시킨 결정타였겠지만, 고인이 2012년 당시 진보당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겪은 서운함은 또 얼마였을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조직적·체계적 부정선거의 책임자 중 하나라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이 씌어서,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당시에 ‘이건 뭔가 이상한데’ 싶으면서도 진실을 파고들기보다는 방조했던 사람, 오랫동안 입을 닫고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로써 죄송한 마음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 점에서 최근 임기의 반환점을 돈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 일부 진보진영마저 ‘2년반 동안 한 게 없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어색하다. 왜 한 게 없겠는가? 진보당을 해산시켰고, 공무원연금을 말 그대로 반토막을 냈다.
철도·의료 민영화도 한발 더 나갔고 무엇보다 세월호의 진실을 덮어버렸다. 이 정부가 이런 게 아닌 뭔가 좋을 일을 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 아닌가. 무엇보다 진보당 해산은 우파가 ‘박근혜 최대 치적’으로 평가하는 정말 쓰라린 것이다. 그것은 단지 특정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정치적 성과를 빼앗기고 양당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천안함, 연평도, 진보당 사태와 내란음모 조작, 강제해산으로 이어진 종북몰이의 효과는 이번에 ‘2030 신안보 세대의 출현’이라고 종편들이 반기는 것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헬조선’에 살면서 고통받는 이 세대의 엄청난 불만과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려온 자들이 이제는 노동구조개악에도 세대 구도를 이용하고 있다.
이 정부의 남은 임기 절반 동안 더 빼앗기지 않고, 되찾아오려면 저들의 전략과 구도를 무너뜨리려는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정말,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볼 줄도 모르고 키우는 진돗개만 생각하는 누구처럼 돼서는 안 되겠다. 내란음모 조작으로 아직 갇혀있는 아홉 동지, 지난 몇 년간 너무나 상처받고 건강까지 잃은 많은 동지들이 다시 희망과 웃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
가장 열악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밥그릇부터 지키며 우리 모두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는 노동조합 대 고통받는 열악한 다수’라는 이간질로 우리 모두의 밥그릇을 뺏으려는 정부에 맞서야 한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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