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적색 개발주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전지윤


[박노자 교수와 노동자연대 사이에 진행된 논쟁에 대해 논평한 두가지 글을 차례로 싣는다.] 


1. '적색개발주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성격에 대해서 최근 박노자 교수와 노동자연대 동지들간의 논쟁(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73350)은 인상적이다. 박노자 교수는 자신이 노동자연대와 ‘99%의 의견을 같이하면서 1%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논쟁이 서로간의 공통점과 동지적 연대의 지점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바탕으로 우호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한다.


논쟁 초기에 나는 박노자 교수의 이런 주장에 좀 더 공감이 갔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백년 전의 반전적 사회주의 운동가의 격언대로 중국이나 북조선 등 한국의 공식적 적보다는 한국 자국의 문제부터 짚어서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게 제 임무라고 사료합니다.”


실제 종북몰이 탄압 사건에서, 이에 대한 반대보다 북한 사회 성격에 대한 분석 차이를 더 강조하는 듯한 태도는 부적절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대립에서도 둘 모두에 대한 공평한 반대보다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어느 정도 우선될 필요도 있다.


박노자 교수가 강조했듯, 우리가 미국-남한 진영에 속한 좌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은 세계 500대 기업중 절반을 소유하고 있고, 중국보다 10배가 넘는 군비를 쓰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다. 더불어 중국·러시아의 체제와 지배계급을 자신이 지지할 일은 없다고 박노자 교수도 거듭 확인하지 않았던가.


극단적 신자유주의와는 다르게 주요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여전한 국유 등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 북한의 적색 개발주의에 대한 박노자 교수의 설명도 이해되는 면이 있다. 그런 형태적이고 양적인 차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를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구체적으로 토론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적색개발주의로 명명하든, “국가자본주의로 명명하든 둘 모두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면서 변혁의 대안을 추구한다면 나머지 문제는 얼마든지 토론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동지적 토론을 위해서도 박노자 교수가 논쟁의 전개 과정에서 제시한 일부 주장에 대한 이견은 밝히고 싶다.


박노자 교수는 구동구권 사회는 서방 자본주의와 질적으로 달랐다고 주장한다. ‘(자본, 토지, 노동) 3대 시장의 존재여부, ‘투자의 주체가 사적 자본가가 아니었고 투자의 목적도 이윤추구가 아니었다는 게 그의 주장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이 두 체제 사이의 형태적, 양적인 차이를 너무 중시하는 분석으로 들린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들은 현상 형태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850년대에 미국 남부의 노예주()들을 자본주의로 봤다. 노예주 자체에는 자유 시장도 임금 노동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남부의 노예주들이 북부 자유주와 경쟁 체제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형태와 구조는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 엥겔스도 주식회사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미 더는 사적 생산이 아니다. 트러스트는 사적 생산의 종식 뿐 아니라 무계획성의 종식도 뜻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구동구권에서 사적 소유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부의 생산과 분배가 국제적 경쟁 압력에 의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국가 관료가 집합적 자본가 노릇을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는 구동구권서방 자본주의사이에 수많은 유사성을 봐 왔다. 둘 모두에서 권력은 노동자·민중에게 있지 않았고 소수 지배자들인 국가관료나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둘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은 스스로 사회와 생산을 통제하지 못했고 소수 관료나 자본가들이 통제권을 가졌다


둘 모두에서 지배계급과 노동자·민중 사이에 커다란 불평등이 존재했다. 둘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차이는 질적 차이라고는 보기 힘들어 보인다.


박노자 교수도 익히 알고있겠지만, 두 체제를 모두 경험한 사람들도 둘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남과 북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개방되어 있는 남한이나 폐쇄적인 북한이나 할 것 없이 한반도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가부장적 권위가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지만 동시에 가사와 노동을 모두 해내는 슈퍼맘이 되기를 강요하고,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지만 조신하고 정숙한 여성에 대한 환상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과 북이 무척 비슷했다.”(<남북 청춘, 인권을 말하다>, 53


북한의 억압과 불평등이 싫어서 남한에 왔다가, 국정원의 간첩조작과 밑바닥 비정규직 삶을 경험하는 탈북자들도 비슷한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토니 클리프가 1948년에 국가자본주의론을 제시할 때, 이런저런 면에서 빈틈이 있었다는 제기는 있을 수 있다. 소련을 하나의 거대한 단일 공장으로 가정한 것이나, 임노동의 존재를 부정했던 것이나 등에서. 또 러시아 혁명이 변질돼 간 과정에 대해서도 혁명의 국제적 확산의 실패와 고립뿐 아니라 주관적 대응과 선택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빈틈은 얼마든지 토론과 경험 속에서 보완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주의는 노동자들 스스로의 아래로부터 투쟁과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 의의는 여전하다고 본다.


특히 나는 최근 구소련 국가와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친 수리경제학파의 존재와 주장들을 매우 인상깊게 접한 바 있다.

자본투자의 경제적 효율성을 측정하고 평가”, “개별 및 전체 기업의 수익성을 증대하기 위한 유인을 어떻게 제공할 것이냐” “자본투자와 신기술 도입의 경제적 효율성 추구”, “기업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 개별 기업들의 수익성 제고 노력 필요”, “가장 중요 지표로서 이윤 지표 선택 강조등 수리경제학파의 주장은 시장주의 경제학과 매우 유사하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99042


이런 주장과 정책들이 일찌감치 제기되고 영향력을 넓혔다는 것은 그 체제가 어떤 논리와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였는지 더욱 분명히 보여주는 것 아닐까.    




2. 역사적 교훈과 투쟁의 미래  


노동자연대 동지들의 주장에 재반박한 글(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73401)에서 박노자 교수는 역시 고민해 볼만한 몇 가지 타당한 주장을 한다.


앞으로의 주요 대규모 생산시설의 사회화/공유화 때에 [현실 사회주의의] 그 경험을 살릴 수 있을 것이란 것이다. 맞다. 봉건제에 맞선 투쟁도 한 번에 승리하진 않았고, 앞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은 결국 자본주의가 지배적 체제로 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현실사회주의체제에서의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소유나 경제에 대한 계획 자체는 살릴점이 있다. 물론 그 껍데기는 살리면서, 알맹이를 바꾸고 내용을 채워야 한다. 관료지배계급의 소유를 노동대중의 집단적 소유로, 관료적 지령과 계획을 민주적인 참여와 계획으로 말이다. 박노자 교수도 더이상 관료적인 계획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자율적 참여가 뒷받침되는 계획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미 제국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혁명 이후 국가들의 필연적인 자위적 몸부림들에 대한 지적도 일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자주, 일부 좌파까지도 미 제국의 공격 위협이라는 근본문제를 빼놓고 북한의 대응을 평가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북한을 석기시대로 만들었고, 60년간 압박했고, 지금도 핵 선제공격과 정권교체를 말하고 있는 미국을 빼놓은 어떠한 분석도 공정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허속에서 많은 동구권 민중들이 차라리 옛 시절을 그리워할 정도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91년 이후 이 지역에서 시장개혁은 그야말로 끔찍한 야만을 낳았다.


그런데 그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서구 민중이 복지국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차우세스쿠 시절에 대한 향수는 박정희 시절의 경제성장, 고용안정에 대한 향수와 유사점이 없는가?


적색개발주의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을 볼 수 없다는 박노자 교수의 주장도 여전히 잘 납득이 안 된다. 자본주의를 주로 <자본론>에서 모델삼은 19세기 자유경쟁 자본주의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매우 역동적인 체제고, 독점과 국가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상품은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가치법칙은 변형된다.


박노자 교수가 예로 든 구소련에서 우유가격 설정의 예도, 박정희 시대 추곡수매제와 이중곡가제를 연상하지 않는가.(두 사례 모두 목적은 인민의 건강보다는 공업 생산비 절감과 저임금 유지였을 것이다.) 서로 담합하고 국가와 유착해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이 나라 통신회사들은 또 어떤가.


무엇보다 가치법칙의 핵심은 경쟁 속에서 축적이 목적이 되고 노동자를 더욱 쥐어짜고 소외시키는 메커니즘에 있다. 중국 국영기업 상하이차가 쌍용차 살인해고 공범중 하나고, 개성공단에서 북한 국가와 남한 자본의 저임금 노동자 공동착취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적색개발주의시장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이 어떻게 다르다고 봐야 할까.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압력에 노동자 착취와 군비증강으로 대응한 적색 개발주의유효성을 조금이나마 인정하기보단, 그것을 세계적 착취와 경쟁 체제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그래야 노동자 민주주의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통해 그런 압력에 맞서야 한다는 교훈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박노자 교수가 말하듯이 이런 평가와 토론은 그 력사적 경험에 의거하여 미래 투쟁의 방향을 정해야 하기에,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 점에서 박노자 교수의 통찰과 고민은 몇 가지 이견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 관련 기사: 중국은 사회주의나 반제국주의 국가인가? http://rreload.tistory.com/159]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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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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