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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중국은 사회주의나 반제국주의 국가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3. 27.

전지윤

  

사드나 아시아투자인프라은행 논란은 중국의 부상을 반영한다. 관련해서 중국의 역사와 사회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진보진영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갈수록 파열음을 내는 미중 갈등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성장하는 중국 민중 저항을 어떻게 볼 것인지 뿐 아니라 도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관련 논의와 고민의 발전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열강의 침입과 군벌의 시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탈은 1840년 아편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앞 다퉈 중국에 들어와서 추악한 이권다툼을 벌였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은 중국 민중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열강의 전쟁물자 생산기지가 된 중국에서는 노동계급과 저항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일본의 강점이 그대로 인정되자 54일 천안문 광장에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시위를 벌였고, 2백 개 도시에서 동맹휴업이 벌어졌다. 북경정부가 학생들을 탄압하자 9만 명의 노동자가 방어하는 파업에 나섰다. 5.4운동이었다.


러시아는 중국에 침을 흘리는 열강중 하나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는 중국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중국의 자결권을 지지했다. 이것은 중국에서 좌파의 성장과 1921년 공산당 탄생으로 이어졌다. 초기 중국 공산당은 트로츠키와 레닌의 영향을 받아 중국혁명을 세계혁명의 일부로 생각하는 국제주의적 입장이었다.


반면 중국 지주와 자본가 들의 정당인 국민당은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에 맞서기보다는 노동자·농민의 요구와 투쟁을 탄압하는 데 주력했다. 부패한 군벌뿐 아니라 국민당도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강력 탄압했다.

 

1925~271차 중국 혁명의 교훈

 

1920년대 중국에는 연안 공업단지 대공장에 집중돼 있는 노동계급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노동자들 속에 탄탄한 기반이 있었다. 이 상황에서 1925530일 상하이에서 영국군이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5·30사건)하며 혁명이 촉발됐다.


상하이에서 16만 명이 거리 시위에 나섰고 광조우와 홍콩에서도 총파업이 벌어졌다. 무장한 정당방위대가 등장했고 파업위원회가 공장을 관리하며 노동자 정부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농민들도 지주를 내쫓고 토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민당의 자본가와 지주들은 곧 거부감을 보이며 혁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중국 공산당에 하달하는 정책이 재앙적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국민당을 ‘4계급 혁명 블록이라고 했다.


심지어 국민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키고 장제스를 코민테른 간부로 추대했다. 중국 공산당 당원들에게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충성하라고 했다. ‘먼저 1단계 민족해방혁명을 위해서 국민당과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트로츠키를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된 멘셰비즘이라고 비판했다.


이제 스탈린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이 부담스러워하니 민족자본가 공장에서는 파업을 하지 말라고 했다. 농민 반란을 자제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국민당 장제스의 명령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노동자들이 장악한 상하이에 큰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다. 공산당의 협조 속에 노동자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일주일 후 장제스는 파업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공산당 활동가들을 처형했다. 스탈린은 뒤늦게 추수봉기를 지시하고 광둥꼬뮌을 선언하라며 초좌익적 모험주의를 부추겼지만 그것은 공산당의 고립만 심화시켰다. 상하이·광둥에서 노동자들은 대량학살을 당했고 독립적 노동자 조직은 철저히 파괴돼 갔다.


이제 중국 공산당은 도시 노동계급 기반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농민에 기반한 게릴라부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이 노선을 대변한 것은 마우쩌둥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당원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군사적 투쟁에 의존하는 좌파 민족주의 정당으로 성격이 바뀌어갔다.

 

19492차 중국 혁명의 의의와 한계

 

1937년부터 중국을 독식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더욱 노골적이고 야만적으로 나타났다. 일본군은 무기력한 국민당 군을 물리치고 난징을 함락해 6주 동안 30만 명을 학살했다.(난징 대학살)


그런데 부패한 반공주의자 장제스는 일본과 싸우기보다 공산당을 공격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지주와 자본가들이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마저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측근 4대 가문이 연루된 엄청난 부패와 물가폭등 속에 갈수록 지지를 잃어갔다. 국민당은 부르주아적 토지개혁조차 할 능력이 없었다.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을 수행할 대안적 주체로서 공산당이 부상했다. 27년의 패배 이후에 공산당의 홍군은 처음에 강서성에 적색근거지를 마련했다. 30년대 초에 국민당이 추격해오자 공산당은 대장정에 나섰다. 1934년에 9만 명이 시작한 대장정은 그것이 마무리될 때 8천여 명이 남았을 정도로 처참하고 초인적 과정이었다.


중간계급에 기반한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신한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홍군은 살던 곳을 떠난 농민 출신들이 다수인 게릴라 부대였다. 게릴라전이 주된 활동이 되면서 홍군 안에서는 상명하복과 지도자 숭배 캠페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여전히 국공합작과 단계혁명을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노동계급 정당이 아닌 공산당이 지킨 것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중간계급 게릴라들의 군사적 독립성이었다. 결국 공산당은 일제 패망 후 부패하고 취약한 국민당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49년 혁명은 중국 민중을 제국주의 열강과 지주 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 위대한 혁명이었다. 중국 민중이 공산당을 지지해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 열강을 몰아낸 환영할 사건이었다. 이는 2차 대전 후 세계 곳곳에서 반제 민족해방 투쟁들을 촉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혁명은 민족해방 혁명이었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혁명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자의식적인 행동과 조직화, 자주관리, 노동계급 권력기관의 등장 등은 저지당했고 나타나지 않았다. 노동자와 농민은 혁명의 수동적인 지지자로 머물렀다. 홍군은 국민당이 버리고 도망간 도시로 진격하면서 노동자 파업을 금지시켰다. 상하이로 입성한 공산당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일을 계속하고, 영업은 평상시처럼 돌아가게 하라. 국민당 관리들과 경찰관들은 자기 직무에 그대로 남아 인민해방군과 인민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중국 민중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 혁명을 국제적 혁명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적 착취·경쟁 체제에 도전하는 길이었다. 이것은 국제주의이며 연속혁명노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구세력을 척결한 후 독립적 민족국가를 건설해서 국제적 경쟁에 뛰어드는 길이었다. 이것은 소위 일국사회주의라 불렸다. 중국 공산당이 선택한 길은 분명히 후자였다.

 

마오쩌둥의 시대 - ‘대약진 운동문화 혁명의 진실

 

마우쩌둥은 자신들의 목적이 독립적 민족국가를 건설해서 서방과 경제적·군사적으로 경쟁하는 것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50년 또는 60년 내에 우리는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 우리는 실로 방대한 인구와 방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가능할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도 그것[최신 무기]을 가져야 한다. 미사일이든, 핵폭탄이든, 수소폭탄이든 저들이 가지면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초기에 공산당 정부는 임금·노동조건·교육 등의 개선을 일부 진행했다. 그러나 서방과의 경쟁이 격해지면서 공산당은 갈수록 부국강병으로 나아갔다. 우선순위는 중공업 축적에 있었다. 토지의 강제 집산화와 무지막지한 생산량 초과 달성 강요가 시작됐다. ‘대약진 운동이었다.


공장은 철저하게 권위적으로 편제됐고, 관료들은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저곡가로 저임금을 유지하며 중공업에 자원과 투자를 집중했고, 농업과 생필품은 부차화됐다. 그 결과는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이었지만, 동시에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갔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관료 지배계급 내에서 배척되기 시작했다. 마오의 후계자리를 놓고 관료들의 암투도 격화됐다. 얼굴마담으로 전락하던 마오는 경쟁 지배관료들을 겨냥해 대중선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자본주의 반동을 획책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마오의 정적들은 제거돼 갔고, 이제 마오와 관료지배에 도전하는 모든 언행은 부르주아적’, ‘봉건적이라는 이름 아래 공격당했다. 이것이 문화 혁명이다.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는 극에 달했다. 수백만 명이 정치적 박해를 당했고 수십만 명이 처형당했다. 그런데 서로 진정으로 마오의 뜻을 대변한다는 홍위병들 사이의 거리전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홍위병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내걸고 파업과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부 홍위병 조직들은 적색 자본가 계급이 문제라며 관료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오와 관료들은 군대를 동원한 학살, 수십만 명 강제 하방을 통해서 가까스로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과 시장개혁으로의 전환

 

공산당 지배자들은 갈수록 기존 방식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기만 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라는 게 분명했다. 미국하고 경쟁이 안될 뿐 아니라 중소분쟁으로 다투던 소련에도 뒤쳐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더 효율적이고 경쟁력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국가 통제를 느슨하게 하고 국제시장에 개방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던 마오는 1971년 베트남 민중 3백만 명의 학살자인 미제국주의의 수장 닉슨, 키신저와 기꺼이 손을 잡았다. 미국의 소련 견제를 돕는 대신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공산당 지배자들은 소련을 견제하고, 군사비를 낮추고 세계시장에 편입할 기회를 얻었다. 특히 마오의 사망 후에 그의 처 등 ‘4인방이 숙청(‘제국주의 첩자였다)당하고,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으면서 개혁개방을 향한 급진전이 시작됐다.


덩샤오핑 개혁의 목표는 시장의 힘을 이용해 중국 국가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검은 고양이(국가통제 방식)든 흰 고양이(시장경제 방식)든 쥐(자본 축적과 이윤 증대)만 잘 잡으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윤을 늘리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이 추진됐고, 계급적 불평등은 더욱 깊어졌다. 복지 삭감과 국영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도 이어졌다. 착취율을 높이기 위한 시도도 계속됐다. ‘개혁은 지방관료와 사적 자본가들이 사업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뜻했다


이들은 탐욕스러운 돈벌이 경쟁에 나섰고, 중국은 세계시장에 밀접히 연결된 수출주도형 경제로 변화해갔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권리들은 더욱 분명히 금지당했다하지만 임금 하락과 물가 인상, 시장개혁 과정에서 더 극심해진 부정부패 속에 정치적 불만도 높아져갔고 그것은 1989년 텐안먼 항쟁으로 폭발했다.

 

중국을 뒤흔든 톈안먼 항쟁


홀로 탱크를 막아 선 항쟁 참가자 - 이 용기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항쟁은 1989415일 후야오방의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불이 붙었다. 지배계급 특정인물의 죽음이 누적된 불만을 폭발시키는 방아쇠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후야오방은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자로서 정치개혁추진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를 추모하려고 톈안먼에 모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산당 지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추모자의 숫자는 며칠 만에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민주적 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관료 부패 척결 등을 제기해 갔다. 민주화 요구와 시위는 확대돼 갔다.


베이징이 아닌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와 파업이 확산돼 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공산당은 422일 후야오방 장례식 날에 모든 시위를 금지했다. 경찰과 군인들이 톈안먼 광장을 봉쇄했다. 그러나 학생 대열이 밤새도록 밀려들면서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15만 명이 광장에 자리를 잡고 농성을 시작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그 노래는 공산당 공식 행사에서 부르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했다. 42715만 명이 베이징 거리를 행진했다.


513일부터는 소수의 학생 지도자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 참가자는 처음에 2백 명에서 곧 1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덩샤오핑의 사퇴와 총리 리펑의 해임을 요구했다. 다음 날 시위대 1백만 명이 베이징 거리를 행진했다. 그 다음 날에는 2백만 명이 행진했다. 이런 식으로 행진 규모는 엄청나게 늘어갔다.


지배계급 내의 온건파인 자오쯔양이 면담을 통해서 시위대를 달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공산당은 519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30만 진압병력이 이동을 시작했다. 지하철, 철강 노동자들이 진압에 반대해서 파업을 시작했고, 바리케이드 앞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은 군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인민의 아들인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부리를 댈 수 있냐란 말에 많은 병사들은 흔들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생 지도부는 파업은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며 반대했고, 병사들의 무기를 빼앗지는 말자는 입장이었다. 63일 공산당은 진압부대를 재편성해서 장갑차, 탱크를 앞세워 광장에 진입하며 발포를 시작했다.


3천여 명이 학살당하며 톈안먼 항쟁은 패배했지만 중국 사회와 공산당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공산당 관료들은 중국 노동계급과 민중의 저항과 폭발 가능성을 항상 겁내고 대비해 왔다.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가 낳은 결과

 

텐안먼 광장을 피로 물들인 후 1992년부터 덩샤오핑은 중국을 세계시장에 더 본격적으로 개방했다. 미국 등의 서방 다국적 기업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적극 호응했다. 이것은 연평균 10% 가까운 고도 성장을 낳았다.


중국 지배자들은 이것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했지만,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데이비드 하비는 이것을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라고 비꼬았다. 실제로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성장의 특징을 보였다.


먼저 엄청난 소수의 억만장자가 등장했다. 2007<포브스>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나라였다. 공산당은 중국이동통신, 중국전신, 중국석유 등 알짜 국영기업들을 통제했다. “당보다는 상공회의소에 가깝다”, “세계 최대의 지주회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게 중국 공산당이다.


공산당 고위 관료와 민간 자본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부와 사치를 누리게 됐다. 회전문 현상이 존재했는데, 공산당 고위 관료 출신은 손쉽게 사적 자본가가 됐고, 자본가들은 대부분 공산당원으로 가입했다.


반면 노동자와 농민들은 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대량해고를 당했고,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2000년대 중반에도 25천만 명이 하루 1달러를 못 벌고, 7억 명이 하루에 겨우 12달러를 벌고 있었다.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19800.3에서 20070.5로 늘어나며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다. 도농격차도 심각했는데, 2004년 농촌의 평균소득은 도시의 1/3밖에 안됐다. 특히 심각한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2억 농민공의 처지였다. 이들은 닭보다 일찍 일어나서 소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돼지보다도 못 한삶을 살았다.


신자유주의적 성장은 당연히 모순을 수반했다. 탐욕스러운 이윤추구는 베이징을 일년내내 유독가스로 가득찬 스모그로 뒤덮어버렸다. 국영 에너지기업들이 주범이었다. 국가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동산 투기가 뒤따랐고, 과잉·중복 투자와 과잉생산도 계속됐다. 중국 경제는 갈수록 세계경제의 변동과 위기에 취약해졌다.

 

중국과 제국주의

 

여기서는 먼저 중국의 패권을 비난하는 서방 주류 언론과 정부의 위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중국뿐 아니라 제3세계와 약소국을 가장 많이 억압하고 수탈한 것은 바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야말로 가장 많은 침략과 학살, 점령을 저질러 온 제국주의 최강대국이다.


하지만 레닌은 제국주의를 단지 특정 나라나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 “자본주의 최신 단계라고 보았다. 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중국은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중 하나이고 갈수록 힘을 키워왔다.


원래 초기 중국 공산당은 볼셰비키의 전통에 따라서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했다. 1921년에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국부쑨원과 맞서서 몽고족의 독립을 지지했다. “만주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은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중간계급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신하면서 공산당은 중화민족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1939년 중국공산당 당원용 교과서 첫 문장은 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화민족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건국 초기에 중국은 티베트와 신장위구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 혁명으로 독립국가를 세운 중국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물론 중소분쟁 시기에 중국이 전략적 고려에 따라 아프리카의 일부 민족해방 운동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초 미중 국교 수립 이후 중국의 패권적 태도는 노골적이 돼 갔다. 미국의 키신저는 중국이 나토 동맹보다 낫다고 만족해 했다. 1962년 인도와 국경 분쟁, 1969년 소련과 국경 분쟁, 1974년 남베트남 시샤섬 점령, 1979년 베트남 침공 등 중국의 군사적 모험은 계속됐다.


중국은 이란의 친미독재자 팔레비 국왕을 이란의 마오쩌둥 같은 존재라고 찬양하며 도움을 주고 받았다. 중국은 짐바브웨의 독재자 무가베와도 긴밀한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나이지리아와 수단에서 중국 국영석유기업은 토착민들의 저항을 짓밟으며 유전을 개발했다.


중국은 유엔(UN)같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기구 안에서도 중요한 한축이었다. 1990년대부터 중국은 라이베리아·콩고·수단·말리 등 아프리카 10여 개국에 유엔평화유지군을 파병했고, 199192년 미군의 소말리아 침공을 도왔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은 미제국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중국 관료들은 수출 공업단지에서 미국 다국적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초착취하는 것을 열심히 돕는다. 폭스콘 노동자 연쇄 자살과 혼다 부품공장 파업에서 드러났듯이 중국과 서방 다국적 기업은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다.


그러나 이 속에서 모순도 커져 왔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미국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에 중국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면서 미국을 바짝 추격했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미국의 약화와 중국의 부상은 더 두드러졌다. 중국은 이제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됐다. 중국은 상하이협력기구와 브릭스 회의를 주도하고, 대양해군 건설을 추진하면서 패권과 군사력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아직 중국의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며 군사력은 더욱 열세이다. 하지만 미중간의 협력보다 갈등이 더 두드러지면서 세계는 더 불안정해지고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최근 사드(THAAD)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은 이것을 보여 줬다.


물론 우리는 결코 미국의 세계패권을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으로의 패권 교체를 대안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기본 방향은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와 또다른 열강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를 통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혁이어야 한다.


1) 티베트

 

티베트는 우라늄과 수자원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도·네팔·버마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티베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중국 공산당은 1951년 티베트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인 5만 명이 인도로 망명했고, 승려 16명이 점령에 항의해 분신했다. 티베트 민중의 저항은 19593월 항쟁 때까지 계속됐다.


문화혁명기간 동안 많은 수의 티베트 문화·종교 유적이 봉건적 잔재라는 이유로 파괴됐다. 특히 불교 사원의 90퍼센트 이상이 파괴됐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인들에 대한 민족적 억압과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 2007년에만 티베트인 25만 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고, 티베트에서 청년 실업률은 70퍼센트에 달한다.


이에 맞서 1969, 1987~1989년에 대규모 항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죽어갔다. 2012년에도 40여명이 독립을 요구하며 분신하는 등 거대한 저항이 벌어졌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와 타협해 왔지만, 티베트 민중의 분노는 쉽게 꺼지지 않을 것이다.

 

2) 신장위구르

 

중국 석유의 약 25%가 신장에서 나오고, 신장은 러시아와 중국의 완충지대로서 전략적 요충지이다. 중동산 석유·가스의 수송로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이슬람 신자가 다수인데 1958년부터 본격적인 한족 대량 이주와 이슬람 억압이 시작됐다. 6%이던 한족 비율은 1976년에 42%가 됐다. 이슬람 상징물들과 모스크는 문화혁명때 다 파괴됐다.


1996~2003년까지 민족억압에 저항한 170여 명의 위구르족이 처형당했다. 1998년에는 위구르족의 대규모 시위에 점령군이 무차별로 발포해 1천여 명이 죽었다.


톈안먼 항쟁 때도 신장에서 민주화 지지 시위가 신장위구르족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한 적이 있다. 당시 톈안먼 광장에서는 위구르족 청년이 운동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중국은 어디로

 

지금까지 봤듯이 중국은 평범한 노동자·민중이 민주적 방식으로 생산과 권력을 통제하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또 제국주의적 억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국가도 아니다.


중국 사회는 다른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인간의 권리와 필요가 아니라 경쟁과 축적의 논리에 종속된 사회다. 중국의 공산당 지배관료들은 사회의 필요를 축적에 종속시키는 구실을 해 왔다.


그들은 선진 열강과 경쟁하고 따라잡아야 한다며 보통 사람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고 희생을 강요했다. 관료 지배자들에게 사회주의란 생산수단과 권력을 독점한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착취할 권리를 뜻했다.(나는 이런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 부른다.)


마오 시대에는 전면적으로, 오늘날에는 부분적으로 국영기업들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중국이 사회주의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엥겔스는 국유화가 사회주의라면 비스마르크의 담배전매도 사회주의냐고 물었다. 쌍용차에서 죽음의 먹튀를 한 상하이자동차도 중국 국영기업이었다.


마르크스는 소유의 법적 형태는 생산관계의 반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외형과 내용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국유화라는 외적형태가 아니라 실제 생산관계와 사회적 내용을 분석해야 한다.


그랬을 때 중국에서는 과연 노동자들의 자주적 행동을 통한 혁명과 자치기관의 등장이 있었는가? 생산수단을 실제로 소유·통제하고 있는 게 노동계급인가 소수의 지배관료인가? 사회와 생산에 대한 모든 결정들이 노동자들의 민주적 논의를 통해서 이뤄지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어느 것도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도대체 왜 중국이 사회주의란 말인가?


이것이 미국이나 남한의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결론으로 나아갈 이유는 하나도 없다. 중국 국영기업들의 민영화를 지지하는 것으로도 나아갈 이유도 없다. 나는 서방의 시장자본주의에도,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도 모두 혁명적 반대의 입장을 취하기 위해 이런 분석과 주장을 하고자 했다.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고 권력을 잡게된다면, 그들은 국가소유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진정한 노동자 통제와 민주주의라는 실질적 내용을 채워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공산당 관료지배를 타도하며, 민주적 자치기관에 기반한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여전히 강력하다. 중국 공산당은 49년 민족해방 혁명의 정당성과 권위를 이용하고 있고,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뤘다는 성과를 앞세우고 있다. 하지만 착취와 축적에 성공하는 과정은 모순이 누적돼 온 과정이기도 하다.


중국 경제는 이제 성장률의 추세적 하락에 직면해 있다. 시진핑의 경기부양책으로 7% 정도의 성장률을 당분간 유지하더라도 충분한 일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 거품 붕괴와 경기 침체의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이 속에서 극단적 불평등, 부정부패를 낳아 온 경제성장 과정의 모순이 분출하고 있다. 중국에서 집단행동은 1994년에서 2000년대 초까지 연평균 9%씩 늘었고 그후 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매년 십만 건 이상의 집단행동이 벌어지고 있다.


민영화 과정에서 해고된 국영기업 노동자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쫓겨난 도시 거주민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맞서는 농민공들, 토지 강탈과 환경 파괴에 항의하는 농민들, 티베트와 신장 등에서의 민족적 저항 등등.


공산당 지배자들은 국방비에 맞먹는 치안유지비를 쓰고 인민해방군의 주력 부대를 인구 밀집 지역에 배치해서 이런 저항에 대비하고 있다. 2011년 아랍혁명 때 중국 공산당은 재스민이란 단어를 금지어로 지정해 인터넷 검색을 차단할 정도였다.


엄청난 경제성장 과정은 노동계급의 폭발적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이중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의 농민공들은 연안 수출 공업 단지에 밀집해 있다. ‘신세대 농민공들은 2010년 혼다 파업을 통해서 조직적이고 전투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줬다. 2014년에 광둥성에서는 최다인원(5만여 명)이 참가한 연쇄 파업도 벌어졌다.


시진핑으로의 권력 이양 과정, 보시라이 숙청, ‘부패와의 전쟁등이 보여주듯이 중국 지배자들의 분열상도 커지고 있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더 고무할 것이다. 시진핑이 조화 사회를 강조할수록 이면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중국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아직 산발적이고 고립돼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공산당에 도전하는 더 커다란 투쟁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투쟁이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다. ‘문화혁명막바지에 등장해 지배관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성무련(省無聯)’의 선언문은 그 방향을 보여 줬다.

 

“[중국] 사회의 기본 모순들은 신흥 관료 부르주아지와 인민 대중 사이의 모순들이다. 이러한 모순들의 발전과 격화 때문에 사회는 더욱 철저히 바뀔 필요가 있다. 그것은 관료 부르주아지의 타도, 옛 국가장치의 철저한 파괴, 사회 혁명의 실현, 자산과 권력의 재분배 실현, 그리고 새로운 사회, 즉 중국 인민 코뮌의 수립이다.”

 

또 텐안먼 항쟁 때 등장했던 노동자 자치조직인 베이징공인자치연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중국에서 독재와 전체주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은 우리 노동자들의 부인할 수 없는 책임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쟁취할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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