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페북에 올리고 뉴스레터에 기고해준 이서영 동지의 긴 글을 잘 봤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서영 동지(더불어 이서영 동지가 대리하고 있는 A 동지)가 그동안 어떤 힘든 과정을 거쳐 왔고 고민해 왔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고민과 어려움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저는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사람으로서 사태가 이 지경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 큰 책임이 있고, 이 사건으로 고통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거듭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서영 동지가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문제점을 비판한 것에 공감하며, 그것은 바로 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압니다. 사실 이서영 동지는 1년 전에도 이런 비판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제가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데 큰 도움과 영감을 줬습니다. 당시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이서영 동지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마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A동지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사실관계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한 이번 이서영 동지의 비판과 지적도 정당한 것입니다.
저는 특히 이서영 동지가 이 사태의 출발점이 된 원사건에 대해서 ‘성폭력’이라고 인정한 것에 대해 분명한 지지를 보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호소인의 호소에 귀를 막은 후 온갖 불순한 의도를 의심했던 것이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연대 지도부 동지들의 태도에서 보듯이 토론과 비판적 돌아보기를 통해서 자신의 기존 입장을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점에서 이서영 동지의 이런 용기는 가치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함께 이런 토론과 돌아보기를 통한 전진을 계속하고 확대했으면 합니다. 그런 기대를 보내면서 이서영 동지가 저에게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간단히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A 동지를 무조건 ‘불신’하고 그 동지의 고통을 ‘외면·회피’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현재까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것만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주장들은 그것이 피해호소인의 것이든, A동지의 것이든 아직 어떤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A 동지를 무조건 불신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사실로 확인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원사건이 성폭력이고 피해호소인의 고통 호소는 이해할만한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에 대한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초기 대응은 매우 부적절했다는 것입니다.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재판으로 문제를 떠넘기면서 사태는 심각하게 곪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피해호소인의 고통과 상처가, 더불어 A동지의 억울함도 더욱 더 가중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련자들의 교차된 증언, 각종 문서와 캡쳐 사진, 법적 자료, 양성평등센터의 조사와 판정 등으로 뒷받침이 되는 사실들이고 저와 조형석 동지의 글에서 인용하거나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섣부른 단정도 부정도
저는 이것 말고는 아직 어떤 주장들도 사실로 간주하지도 거짓으로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A 동지에 대해서도, 피해호소인의 주장과 A 동지 자신이 인정한 내용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말고는 어느 것도 단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 동지가 비록 작은 잘못을 하긴 했지만, 노동자연대의 부적절한 조언과 대응 때문에 그 잘못 이상의 비난을 당해왔고, 그 점에서 ‘노동자연대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 온 것입니다. A동지의 억울함도 법정이 아닌 대화와 운동적 해결 과정에서 풀릴 수 있다고 말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서영 동지가 ‘재판으로 간 것은 우리의 주체적 의지이기도 했다’고 강조하는 것과 재판의 내용이었던 피해호소인에 대한 부적절한 폭로를 반복하시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원사건보다 더 큰 문제는 재판으로 가면서 문제를 악화시킨 것인데, 여기에 큰 책임이 있다고 스스로 자처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결코 정의로운 내용과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보기 힘든 이 재판에 대해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A 동지가 피해자라고 하는 사건을 무조건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건과 이 사건을 섞는 것이 왜 부적절한지, 왜 이 재판이 문제였는지는 지난 호 뉴스레터에 실린 글에 잘 나와 있습니다.
“A의 말대로 B가 성추행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본 사건과 별개의 문제다. … 성추행 얘기는 B가 동영상 사건을 폭로한 직후 A의 억울함을 입증하기 위해, 즉 그녀의 거짓말을 밝히기 위해 나온 것이다. … 그리고 그것을 밝히는 것이 소송의 주된 내용이었다! … [이처럼 어떤 사건이] 피해자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 제기되면서 그녀의 평소 품행과 사생활을 공격하는 것에 이용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왜냐면 그런 모든 것들이 가해자의 권리라는 미명 하에 성폭력을 공론화 시키려는 여성들의 입을 막아 왔기 때문이다. 나는 불행히도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형사고소와 민사소송이 (A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가해지목인의 명예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과연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피해호소인 측이 6차례나 보낸 대화 요청 공문에 거듭 거절을 하지 않았더라도, 진상규명과 문제해결 노력은커녕 개인에게 문제를 떠넘기지 않았더라도, 동지들은 ‘주체적인 의지로’ 재판의 길을 택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당시 운영위원회에서 이 과정을 지켜 본 공동 책임자로서 말입니다.
이서영 동지가 말했듯이 영화 <라쇼몽>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진실’은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저는 그로부터 우리가 내리는 결론이 ‘진실은 알 수 없거나 다양하다’일 수는 없다고 생각입니다.
현실은 다양한 요소와 변수들로 이뤄져 있고, 각자는 자신들이 처한 위치와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재구성합니다. 그것은 어느 계급이나 집단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루카치는 왜 특정계급의 이해관계와 관점이 현실을 더 총체적으로, 진실에 가깝게 볼 수 있게 하는지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저는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을 채택하고 편을 드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는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서도 다양한 관점 중에서, 무엇이 가장 이 사건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진실에 가까운 관점인지 찾으려고 합니다.
이서영 동지의 오해와 달리 저는 결코 저나 우리 조직의 결속과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인 필요한가라는, 그런 종류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이 문제를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이 문제에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준비위원 동지들에게 ‘무엇이 우리 조직에 도움이 될까하는 관점을 버리자’고 처음부터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직 건설이 필요한 것이지, 조직 건설에 방해될까봐 이런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토론하고 해결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A동지에게 소송을 취하하고 피해호소인 측과 대화와 운동적 방식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재판 결과는 새로운 사태 악화의 계기가 될 것이고, 언론에까지 이 사건이 보도되면서 피해호소인뿐 아니라 A 동지의 고통도 확대되기만 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입니다. A 동지가 이 사건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에 계속 함께하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A 동지가 소송을 취하하지 않으면서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도 저희의 이런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서영 동지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만나서 상의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서영 동지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저희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해결
마지막으로 제가 이번 사건에 대해 고민하면서 특히 큰 영감을 얻었던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에서 나온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이라는 책입니다. 여러 활동가들이 참여한 토론회의 발제문과 토론 내용 등을 묶은 이 책에는 저에게 인상적인 내용이 참 많았습니다.
이 책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나 가해자는 무슨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고 주변 동지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극도로 여성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진보적 공동체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고, 누구든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해자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이런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봉쇄하며, 낙인찍히지 않으려는 강력한 반발만 낳고 진정한 평가와 성찰을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또 피해자에게 도덕적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며, 피해자는 유별나게 예민해서 우리를 힘들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둔감함을 돌아보게 만든 사람으로 기억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피해자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둔감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책은 ‘성폭력 사건은 그 공동체의 문화에 대한 성찰과 변화 요청으로 연결돼야 한다’며 ‘성폭력 사건을 개인화하지 말고 공동체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지 못하고 사건이 뒤틀릴 경우에, ‘피해호소인뿐 아니라 가해지목인도 상처를 받고 지켜보는 사람도 모두 상처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수한 신뢰의 위기를 초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상황으로 나아간다’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외면과 침묵이야말로 또 다른 가해’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 안고 토론·평가하며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관련된 개인들이 받을 고통보다 조직이 받을 피해를 더 크게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성폭력 사건의 진정한 해결은 가해자를 도려내는 것도, 피해자의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신뢰의 붕괴에서 오는 고통은 신뢰의 복원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 이후에 그 공동체는 여성 억압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평등적 감수성이 높아지고, 다시 이런 사건이 난다면 더 잘 대응할 수 있게 되었는가? 피해자는 상처를 이겨내고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게 되었는가? 가해자는 진정으로 성찰하고 진정성을 보여주며 동지들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게 되었는가?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과 정의의 회복이다.
저는 이 사건이 이토록 뒤틀리게 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된 과정에 책임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동지들이 사태 악화를 낳는 언행을 중단하길 호소합니다.(특히 노동자연대 동지들에게 피해호소인 등의 고통과 상처를 더욱 헤집지 말아달라고 정말 간절히 호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취지대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하고 협력했으면 합니다. 누구보다 저부터, 그리고 우리 조직부터 이런 잣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거듭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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