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최근 미국의 대외 정책은 거의 지속적인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프간 및 이라크의 침공은 미국 패권의 쇠락을 크게 촉진시킨, 미국으로서는 역사적 이정표 격의 대재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외에도 미국의 대외 정책에 있어서의 성공 사례를, 최근에 거의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예컨대 리비아 사태 (2010-11년과 그 이후)에의 개입의 목적은 카다피 제거와 안정적인 친미 정권의 부식이었는데, 전자는 성공했지만 후자는 완벽하게 실패해 리비아에서는 통일적 국민 국가 자체가 붕괴됐습니다. 대우크라이나 정책의 목표부터 불분명했습니다. 2008년에 부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언급했지만, 사실 이를 나토의 다른 열강 (독일 등)이나 미국의 관료들조차 원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일단 친미 정권은 수립됐지만, 곧 러시아 개입과 내전으로 동부의 공장, 광산 지대인 돈바스를 절반 잃었고, 지금 러시아의 전면적 침략 속에서 대부분의 공업 시설이 위치한 영토의 5분의 1일을 잃었습니다. 즉, 전쟁이 예컨대 내일 정지돼도 '친미 우크라이나'는 살아 남겠지만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지원을 필요로 할, 스스로의 공업 기반이 극도로 약한 '불구 국가'일 것입니다. 이것 역시 러시아의 승리도 아니지만, 미국 대외 정책의 '승리'로도 보기가 좀 힘듭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사우디 수교 추진은 하마스의 공격으로 좌절돼 무기한 연기, 즉 사실상 당분간 무산된 가운데 미국의 가자 학살/제노사이드 지원 등은 반대로 사우디와 미국의 적대국 이란 사이의 일정한 관계 개선을 가능케 했습니다. 중동에서의 미국의 정책 중심에 있는 사우디는, 가면 갈수록 미국이 아닌 중국 쪽으로 기울여져 갑니다.
어딜 봐도 미국으로서의 '확실한 승리'는 없습니다. 윤석열의 대일 군사 협력 등은 미국의 요구가 완벽하게 관철된, 최근에 세계적으로 흔치도 않은 사례지만, 윤이 하야하고 나서 이 부분 역시 다음 정권에 의해 뒤집혀질 가능성도 큽니다. 하도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역마다 미국 대외 정책이 실패하고,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밀리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본적인 원인은 물론 미국 패권의 전체적인 쇠락이며, 그 기반에 있는 것은 미국에서의 자본 이윤율의 저하, 중국 등 신생 경쟁국에 비해 미국 제조업의 쇠퇴, 첨단 기술에 있어서 미국이 중국에 추월을 당하고 있는 상황 등입니다.
즉, 전체적인 패권의 위기 속에서는 미국의 대외 정책은 잘 나갈 리는 없습니다. 한데 이외에는 또 다른 정책적 혼선과 오류, 실패의 근인들이 있습니다. 이 근인들이 미국이라는 자유주의 제국이 운영되는 근본적 방식과 연결돼 있습니다.
첫째, 서로 주장과 정책이 극단적으로 갈려 있는 양당제 틀 속에서는 권력 교체는 곧 대외 정책의 발본색원적 수정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정책에 있어서는 지속성, 연속성이 부족합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외부 행위자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립니다. 예컨대 평양에 올브라이트를 보낸 클린턴 행정부는 대북 수교를 추진했지만, 바로 그 다음에 조지 부시는 이를 무산시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게 북한의 입장에서는 "변덕", "신의 없는 나라" 아니면 뭘로 보일까요? 오바마는 대이란 정상화를 추진해 '딜'을 해놓았지만, 바로 다음의 대통령인 트럼프는 이를 무산시켜 이란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를 잃고 말았습니다. 다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를 트럼프의 "빅 플랜"은 푸틴과 손을 잡아 중국을 포위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 대외 정책의 이와 같은 특징, 즉 정책 지속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러시아 지도부는 과연 그걸 수용할는지 불분명합니다.
둘째, 미국의 '심층 국가', 즉 외교, 안보, 군사 관료들의 상당수는 분석 능력이 좋아도 미국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 자기완결적인 미국 시스템 안에서는 - '외국'에 대해 잘 모릅니다. 외국 (특히 미국) 유학이 지배층 성원이 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국 등과 달리, 미국에서는 고급 정치인 (국회 의원 등)은 미국의 영토를 벗어나지도 않고, 그 어떤 외국어도 배우지도 않고 충분히 정책 결정을 수행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외국 국가들을 평가할 때에 계량화된 수치, 예컨대 총국민생산 등을 보고 판단을 하는데, 이 수치들은 다소 기만적입니다. 예컨대, 세계 최대의 명목 총국민생산은 당연 미국인데, 그 중의 77%는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미국에서 백만 명 이상 되는 변호사의 서비스나, 월마트, 맥도널드 소매 판매 성적 등은, 군사력 등을 그다지 증강시키지 않습니다.
한데 많은 미국 정치인들이 러시아의 총국민생산이 전세계 GDP의 3%밖에 안돼 "어차피 적수가 될 나라가 아니다"라고 만만하게 여겼습니다. 명목 GDP의 경우 러시아 경제는 미국 경제의 10분의 1도 안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군사력'과 직결되는 철강 생산의 경우, 러시아의 철강 생산은 미국의 90% 정도 됩니다.
또, 군수 기업에 필수적인 전기 생산의 경우, 러시아는 미국의 4분의 1 정도 돼도 세계 4위 수준입니다. 그러니 '전쟁 수행 능력' 차원에서는 만만하게 볼 사회는 전혀 아닌데, 미국 전문가들이 그걸 알아도 미국 정치인들이 그걸 잘 모르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에 "러시아에 완패를 안긴다는" 등의 비현실적인 목표들을 제시한 바 있었습니다.
셋째, 정책 결정의 과정에는 각종의 집단적 이해 관계들이 너무나 쉽게 개입합니다. 다원적인, 그러나 일차적으로 "부유층" 위주로 짜여진 정치 체제에서는, 쉽게 이야기하면 돈이 좀 있는 집단이라면 누구나 정책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로비들은 아예 관련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는 거의 비토를 행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컨대 AIPAC 등 이스라엘 로비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대이스라엘 정책을 입안, 결정, 집행하기란 미국에서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 유지라는 미 제국의 '국익'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서 손을 떼고, 이스라엘 아닌 사우디 등 아랍/이슬람 국가를 미국의 주된 현지 주니어 파트너로 키우는 것이 더 합목적적이었겠지만, 미국 내부 정치의 지형으로 봐서는 현재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좀 슬픈 생각이지만, 만의 하나에 미국에서 다소 친북적 성향의 코리안 자본가 그룹이 존재했다면 어쩌면 그들의 로비는 북-미 수교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효율적으로 작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데 그런 그룹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북 정상화는 미국 정치 의제에서 지금 사실상 배제돼 있는 상황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는, 저는 앞으로도 미국의 대외 정책의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의 극우들은, 결국 그러다가는 미국의 실패한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좇아 나라를 그르치기가 대단히 쉬울 것입니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제발 한국에서 대외 정책의 결정이 한반도 평화 등 국내의 제일 절실한 이해 관계 본위로, 자주적으로 결정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사 등록 202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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