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트럼프의 압승은 제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스스로 "독재자 되겠다"고 공언한, 중범죄 혐의만 해도 34건이나 기록한, 거의 조폭을 방불케 하는 사기꾼 기업가가 패권 국가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충격을 주기에 물론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은 트럼프의 압승을 누가, 어떤 유권자 집단이 가져다주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일 것입니다.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은 바로 백인 노동자입니다. 이 그룹에서는 트럼프의 득표율은 66% 정도나 됐습니다. 한데 비백인 노동자나 영세민들도 과거의 대선에 비해 트럼프를 훨씬 더 많이 찍었습니다. 인종 집단 별로 보자면 비백인 노동자들의 가장 큰 그룹은 중남미계 이만자와 그 후손들일 겁니다.
그런데 중남미계 남성들 중에서는 트럼프의 득표율은 55%에 이르렀습니다. 중남미계 여성의 경우 38%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2020년보다 8%나 높은 수치였습니다. 즉, 쉽게 이야기하면 백인 노동자들의 트럼프 지지는 지난 8년간 "그대로"지만, 노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비백인 인종 집단들도 가면 갈수록 트럼프에 더 기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후보를 상당히 많이 지지해준 것은, 19세기말이나 20세기초에 노조 운동 등을 통해서 미국의 민주화에 가장 많이 기여했던 바로 그 노동자라는 것입니다. 한 때의 민주화 주역들이 이제 신권위주의 도래의 "들러리"가 된다는 것인데, 그 함의는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히 (백인 남성) 시민들에게 형식적인 투표권이 주어진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정착민 국가 미국에서는, "제거"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물건"으로 취급됐던 흑인이 아닌 (최소한의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 정착민들에게는 애당초부터 기본적 참정권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일단 원주민 "제거" 과정에서는 모든 (백인 남성) 정착민들이 같이 민병대에 합류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했기에 참전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투표권도 주어지는 논리였습니다. 참, 참고로, "무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물신화는 이 역사적 과정과는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훨씬 포괄적이고 인권적, 자유주의적 내용이 훨씬 많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할 때에 미등록 이민자들의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기본권 보장, 노동자들의 결사권 보장,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모든 권리에 대한 보장, 그리고 기본적인 복지, 즉 사회적인 기본권의 보장 등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만약 "민주주의"를 이와 같은 광의로 해석하자면, 미국의 민주화는 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것이고 결정적인 시기는 1920-70년대였습니다. 예컨대 빈민 이외의 백인 남성 시민으로 본래 국한됐던 투표권은, 1920년부터 여성을, 1924년부터 원주민을, 1943년부터 중국계 이민자들을, 1960년대에 남부의 흑인들을, 1971년부터 18-20세의 청년들까지 포함하게 됐습니다.
납세를 기준으로 투표권을 제한할 수 없다는 사법부의 판단은 1966년에 이르러서야 나왔습니다. 즉, 미국이 본래부터 "민주 국가"였다기보다는 1920-70년대에 아주 고통스러운 민주화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또 예컨대 일리노이스주가 선구적으로 동성애를 탈범죄화시킨 것은 1962년이었고, 전국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공동 서명 없이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74년이었습니다. 즉, 트럼프 정도의 노인이라면, 남부의 혹인과 전국의 동성애자, 여성 등이 평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던 "민주화 이전"의 시대를 아직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최근의 일입니다.
미국이 1920-70년대에 왜 민주화됐을까요? 1980년대의 한국의 민주화는 일부의 중간 계층 (학생, 재야 운동가 등)과 노동자 계급의 "합작품"이었다면, 미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960년만 해도 그 조직율이 30% 정도 됐던 노조들이 사회적 권리 확보에 아주 큰 역할을 했는가 하면, 여성, 인종적 소수자, 동성애자 등의 권리를 위해서는 주로 하층까지 참여하고 중산 계층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시민 사회 조직들이 싸웠습니다.
또 그러 시민 사회 조직에 돈과 시간을 바칠 만큼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안정된 직장과 소득을 가졌고, "괜찮은" 직장 하나에서 나오는 소득으로는 대부분의 경우에 중간 계층에 해당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정도 "잘 돌아가는" 경제를 뒷받침했던 것은 1960년대말 이전까지 세계의 제조업을 주도했던 미국의 어마어마한 "생산력"이었던 거죠.
즉 - 1980년대의 한국도 그랬듯이 - 국가의 세계경제적 지위와 성장, 그리고 노동계급/중간계급 일부의 조직력과 민주화 압력 등은 다 서로 연결돼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지금 "좋았던 그 때의 그 미국"은 이제 없습니다. 2002년만 해도 세계 제조업에서의 미국의 비중은 28%나 됐지만, 지금 16%에 불과합니다.
1945년에 미국 근로자의 거의 40%나 제조업에 종사했지만, 그 비율은 지금 8,5%에 불과합니다. 서비스 부문 중심의 경제에서는 노조 조직률이 과거 만큼 올라가기기 힘들죠. 지금 미국 노동자들의 10%만이 노조에 가입돼 있는데, 솔직히 그 대부분은 공공부문 종사자들입니다. 공공 부문에서는 32%지만, 민영 부문에서는 6%에 불과해 한국보다 2배 이상 낮은 수준입니다.
즉, 미국의 평균적 노동자란 지금 슈퍼마케트에서 일하면서 노조에 미가입한 20-30대입니다. 이 평균적 노동자는 1950-60년대의 평균적 노동자에 비해 훨씬 더 불안한 경제적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의 은행 빚은 약 10만 불 이상, 즉 그의 평균 연봉의 130% 정도에 이를 것입니다. 1960년데 가구 부채는 전체적으로 미국의 GDP의 40%에 불과했지만, 지금 63% 정도 될 것입니다.
노조 등 사회 단체의 활동과 무관한 대부분 미국 노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개인(과 그 가족)의 각자도생 사회에서의 "경제적 생존"입니다. 약 65%나 거의 저축을 못하고 간신히 다음 월급 날까지 버티는 (living from paycheck to paycheck)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조직 생활이나 조직 투쟁을 평생 해보지 못하고, 경제적 생존에 올인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원자화된 개인은 과연 어떤 국가를 선거 때에 선택할 것인가요?
맞습니다. 특히 그 개인이 교양 수준이 높지 못할 경우 그가 트럼프가 선포하는 "저렴한 경찰 국가", 즉 공공부문 비용 지출을 줄여가면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보안, 경찰" 업무에 - 소수자들의 권리를 침범하면서 - 주력하는, 그런 국가를 선탤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 트럼프라는 현상 출현의 사회적 배경이라면 배경입니다.
서비스 부문 중심의 경제에서 노조 등 사회 운동의 힘이 빠지고, 개인들이 경제적 생존을 중심으로 해서 각자도생 방식으로 빠듯한 삶을 살아가고, 무능한 자유주의 세력 (바이든 행정부)이 노동계급에 제대로 된 재분배 정책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 그 힘을 잃은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에만 치중하는, 쇠락을 거듭하는 사회에서는, 1920-70년대에 어렵게 이루어진 민주화는 충분히 역행될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역행이 시작된 셈이고, 사회 운동이 이를 지금 막지 못하면 앞으로 신권위주의 국가 미국의 명실상부한 완성은 시간의 문제일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변혁 진영이 정말 제대로 학습하고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최악의 상황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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