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홀로코스트란 과연 무엇인가요? 홀로코스트가 시작됐던 시절인 1930년대 중후반에는, 식민지 조선의 사회는 대개 유대인들을 동정했습니다. "파쇼"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좌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보수 중의 보수인 윤치호 같은 사람들도 유대인 작가들의 책을 불태우게 하고 아인슈타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한 히틀러를 "광인", "진시황제" 같은 인물로 보고 경악했습니다.
일제 지배하의 조선 민족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수천년 사이의 고난은, 특히 조선 기독교인들에게는 쉽게 비교됐습니다. 한데 동시에는 특히 보수쪽에서의 히틀러의 영웅화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한 때에 좌파이었던 전향자들의 히틀러를 향한 열정 (?)은 다소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스탈린주의 좌파로서 전지전능한 "혁명 국가"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온 이들에게는, 전향 이후에 전지전능한 파시스트 국가의 "무한한 행정력"을 찬양하기가 심적으로 쉬웠던 모양입니다. 대표적으로 한 때에 서울파 공산주의자들의 이론가쯤 됐다가 1930년대말에 <만선일보>편집국장으로서 일제를 열심이 돕고 있었던 홍양명은 <삼천리>의 설문 (1940년)에 응하여 "21년 전에 일개 오장에 불과했던" 히틀러의 "통쾌한 성공"을 극찬했습니다.
"광신적 열정", "스피디한 돌진력", "천재 중의 천재"...전향한 과거의 공산주의자의 눈에는 히틀러가 이렇게 보였습니다. 1933년에 독일 철학 전공자이었던 전원배가 부분적으로 국역한 <나의 투쟁>은 젊은 일군 장교 박정희의 애독서이었습니다. 단, 그가 <나의 투쟁>을 국역본으로 읽었는지, 1930년대말부터 흔해진 일역본으로 읽었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한국의 군부 독재를 "파쇼"로 규정하는 것은 1970년대부터 종종 볼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한데 이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을 꼭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파쇼 전두환"을 규탄했던 1980년대의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파쇼"란 일단 민중을 억압하는 극단적 독재 정권의 대명사이었지, 이를 꼭 홀로코스트와 연결시키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1930년대에 박해를 받는 유대인들을 동정했던 <동아일보> 등에게 유대인과 조선인의 처지가 묘하게 겹쳐질 수 있었다면, 1970-80년대의 한국인들에게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은 그저 머나먼, 그다지 관계가 있어보이지 않는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급진적인 운동권 학생들이 반대했던 군사 독재이었는데, 박정희 등 군부 독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도의 군사화 등은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한데 군부 독재 세력들은 당연하게도 홀로코스트 등 인권과 관계되는 문제에 하등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홀로코스트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라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1990년대에 해외여행의 자율화와 함께 일정한 국제화가 이루어지고, 거기에다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으로 일제의 "위안부" 성노예 등이 알려져 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제 전쟁 범죄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전개됐습니다.
이 전쟁 범죄라는 '과거사'를 다루는 일본의 방식이 독일과 하도 대조되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 국가의 사죄와 배상"과 "태평양 전쟁 시절의 전쟁 범죄에 끝내 국가적인 사법적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본" 사이의 비교는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관련 해외 저서가 국역 출판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이 알려진 것은 본격적으로 2000-2010년대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고 서경식 선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가 2006년에 국역돼 나온 것은 국내 "홀로코스트 서적"의 효시 중의 하나이었던 것이죠.
한국과 홀로코스트의 만남은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데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늦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보" 차원에서는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해 강하게 종속돼 있는데, 미국에서의 홀로코스트 인식도 사실 굉장히 늦게 발달됐습니다. 1980-90년대 이전에는 미국의 홀로코스트 인식은 초보적 단계이었는데, 그렇게 보면 한국이 미국보다 약 20년 정도 늦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일단 홀로코스트에 대한 미국의 책임부터 만만치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생명"과도 같았던 "미국 입국 비자"이었는데, 오늘날 트럼프주의와 비슷한 고립주의의 열풍에 휩쓸렸던 1930년대말 미국에서는 "유대인의 입국"은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 다수가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1938년 한 여론 조사의 결과를 보면 "유럽 유대인들의 미국 이민 인원 증가"를 찬성했던 미국인 응답자는 21%에 불과했습니다.
비자 발급을 주관했던 미 국무부 안에서의 반유대주의도, 그때만 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홀로코스트를 앞두고 미국에 이민가서 생명을 보지할 수 있었던 유럽 유대인들은 22만명 정도 됐지만, 미 정부는 마음만 먹었으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의 종전 거의 몇년 후에 바로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냉전의 새로운 구도에서는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도 "친미 반공"의 대열에 합류한 옛 엘리트 중에서는 파시즘의 관련자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히틀러 시절의 유대인들의 국적을 박탈시켜 그들을 차별했던 <뉴렘베르그 법률>을 기초한 법률가 한스 글롭케 (Hans Globke)가 서독 수상 콘라드 아데나우에르를 1953-63년에 차관급 요직으로 보좌한 일이 하도 유명하지만, 이건 사실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소련과 친소 국가 동독에 냉전의 최일선에서 맞서고 있었던 서독의 국방부나 외무부에서는 나치 시절에 이미 장교, 관료 일 했던 사람들은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이들의 과거 범죄인 홀로코스트를 "건드리는" 것은 미국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이었습니다. 일단 1960년대에 미-소 평화 공존의 이념이 확산돼 냉전의 기운은 다소 가라앉았고, 1970년대에 데탕트의 무드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서독에서 히틀러 시절부터 현역이었던 관료 등이 고령으로 퇴직하기 시작하고, 미국에서는 과거의 반유대주의는 거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과거"를 좀 더 솔직하게 논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1978년에 미국 텔레비전에서 산영된 <홀로코스트>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공공간, 대중문화에서의 "기념화"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됐습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1993년에 개관된 것은 이와 같은 기념화의 "정점"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해에 <쉰들러의 리스트>가 개봉돼 한국에서도 히트를 쳤는데, 아마도 이 영화의 성공도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의 조성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즉,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서 비교적 늦게 형성됐지만, 이는 미국에서의 홀로코스트 기념화의 궤도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또 하나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해, 관심, 조명은 언제보다 더 필요합니다. 사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이야말로 양심적인 재미, 재유럽 유대인으로 하여금 네타냐후의 파시스트적 정책을 반대하는 데모의 대열에 나서게끔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데모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후손들이 나와 "지금 제노사이드가 다시 저질러지기 위해서 내 부모가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것을 봤을 때에 마음 속 울컥했습니다. 사실 과거의 야만과 그 야만에 맞선 인간성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야만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궁극적으로 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기사 등록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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