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며칠 전 이재빈 동지가 “마지막 글”이라며 우리에게 글을 보내 왔다. 이 글은 이재빈 동지의 페이스북에도 공개돼 있다. 아마도 이재빈 동지는 우리 모임에서 탈퇴하며 이 글로 의사를 표현한 것 같다.
이재빈 동지는 1년전 내가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내에서 분파를 건설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일 때 큰 도움을 줬던 동지중 하나다.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많은 힘든 일을 겪어야 했던 당시 우리는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분파 투쟁 때 이재빈 동지가 했던 기여들은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다함께에서 나온 이후에는 학업과 개인적인 사정들 때문에 함께 토론·협력할 기회가 부족했지만, 이재빈 동지는 번역 등에 일부 기여하며 논쟁적 제기로 토론을 고무하기도 했다.
내가 앞으로 이재빈 동지에 대해 어떤 비판을 하더라도 이 모든 기억과 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걸음마 수준인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의 길에서 이재빈 동지와 계속 함께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소식이다. 많은 동지들이 아쉬움 속에서 이 소식을 듣고 그의 글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재빈 동지가 제기한 주장과 비판에 답하는 게 동지적 의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자 한다.
먼저 이재빈 동지는 안타깝게도 매우 날선 언어로 나를 비판하고 있다. “스스로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우둔한 결정”, “종교적 설교”, “재앙적 경로를 걷는 과정”, “변증법에 대한 무지함”, “약자가 곧 진리의 담지자라는 식의 도덕주의”, “기독교 신앙을 연상시키는 운동주의”, “공허한 종교적 프레임” …
우리는 이미 지난 분파 투쟁 때 상대편의 감정을 할퀴고, 상하게 하려는 어법이 진지한 토론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느낀 바 있다. 또 상대방을 함부로 무슨 ‘주의’라고 딱지붙이는 것이 낳는 부정적 효과도 말이다. 그런데 이재빈 동지는 이런 경험에서 나와 같은 교훈을 배우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자신의 주장을 “‘선전주의’, ‘조직이 아닌 연구소’를 만들자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했다는 이재빈 동지의 주장도 이해가 안 간다. 나는 혹시나 해서 내가 이재빈 동지의 주장에 이견을 표했던 글들을 다시 찾아 봤지만 그런 표현은 없었다. 왜냐면 나는 누구보다 그런 어법에 거리를 두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재빈 동지는 내 주장과 실천이 너무나 잘못됐다고 보기에 감정이 격해져 이런 언사를 택했으리라. 그리고 가장 큰 계기는 무엇보다 근래 ‘성폭력 사건 논란’에서 내가 취한 주장과 태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대한 이재빈 동지의 비판이 모순돼 있을 뿐 아니라 별 근거와 설득력이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먼저 “왜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시절에는 피해호소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인가?”라는 이재빈 동지의 물음에는 진작에 내놓은 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저는 다함께 지도부의 완전히 잘못된 대처를 뻔히 보면서도 침묵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에 함께 했습니다. 저는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극도로 한심한 태도를 취하며 고통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진실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비겁했고 정치적으로 한심했다’는 자기비판을 몇 번을 더 해야 나를 비판하는 동지들이 만족할지 모르겠다. 거듭 말하지만 오류를 고수하는 ‘일관성’보다는, 오류를 교정하고 “선회”하는 게 백번 옳다. 진보당 경선부정에 대해서 내가 입장을 “선회”한 것도 마찬가지였고, 이에 대해서는 이재빈 동지도 ‘왜 전에는 안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둘째, 이재빈 동지는 우리가 “모(母) 조직에 대한 과도하기 그지없는 종파적 마녀사냥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보통 마녀사냥은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뒤집어씌우는 것을 뜻한다. 그럼 이재빈 동지는 노동자연대가 잘못이 없다고 보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이재빈 동지 스스로도 노동자연대의 잘못을 길게 나열하고 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대부분 나와 조형석 동지가 지적한 내용과 겹친다. 이재빈 동지는 “사태 악화의 출발은 … ‘노동자연대’가 성마르게 진보 운동의 전통에서 이탈한 대응을 보여준 데 있었다”고 잘 지적한다. 그동안 내부 토론에서 이재빈 동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을 거의 못들은 나로서는 반가운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비슷한 주장이 이재빈 동지가 하면 노동자연대에 대한 “토론과 비판”인 반면, 내가 하면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것이 되는가? 이중잣대 아닌가?
사실 [성폭력 사건]대책위가 피해호소인의 편에서 사태 악화에 책임이 있는 쪽에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마녀사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몇몇 부정확하고 과도한 측면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노동자연대 스스로도 ‘마녀사냥’ 용어까지는 쓰지 않고 있다.
이재빈 동지의 이중잣대는 내가 “운동판 안의 ‘상도덕’조차 져버렸다”는 비판에서도 나타난다. 노동자연대 내부 문건이 공개된 상황의 책임을 나에게 묻는 것이다.(일단 좌파 운동에서 지켜야 할 동지적 예의를 “상도덕”이라고 칭하는 것부터 부적절하다.)
그런데 노동자연대 내부 문건이 공개된 책임이 나에게 있는가? 내부문건을 먼저 스스로 공개한 것은 노동자연대였다. 이 동지들은 나를 “복수심”에 불타는 “야비한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기 위해서 스스로 연달아 별별 문건들을 다 공개했다. 그 문건들은 나에 대해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과 인격적 비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재빈 동지는 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비판하지 않고, 나에겐 ‘도덕도 버렸다’고 한다.
물론 상대 동지들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우리도 그렇게 맞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 점에서 만약 대책위가 사실무근의 비방과 내부 보안, 사생활에 대한 문건을 공개했다면 나도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책위는 그런 문건이 아니라 노동자연대 활동가 스스로가 쓴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문건을 공개했을 뿐이다.
같은 문건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며 책임을 숨기려 한 노동자연대의 태도가 이 상황을 자초했다. 게다가 노동자연대 스스로도 “[안 그래도] 전문을 공개해 글의 성격과 맥락을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도 했던 터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도덕도 버린 사람이란 말을 들어야 되는가? 여기서 이재빈 동지는 그가 말하는 “상도덕”이,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더 큰 가치인지 답해야 한다.
셋째, 이재빈 동지는 우리가 이 사건에서 “그저 대책위를 추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우리가 이 사건에서 기본적으로 피해호소인과 대책위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을 넘어서 아무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설득력 있으려면 근거가 제시돼야 하지만, 이재빈 동지는 별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나는 전에도 이재빈 동지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비판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다만 몇 가지 문장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이재빈 동지는 “피해호소인의 주장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물론 아니다. 특히 조형석 동지는 이것을 몇 번 강조한 바 있다.
“여전히 ‘방관’ 이외의 B의 혐의는 분명히 판단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다함께의 방임 수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만 판단한 상태로는 B의 행위는 성폭력이 아니라 성폭력 방조라 할 수 있고, 당시 그가 대학 신입생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매우 중대한 잘못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가해지목인 또한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으므로, 함부로 그의 혐의를 기정사실로 전제해서도 안 되며, 그에게 충분한 방어권 및 공정한 판단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재빈 동지는 또 “‘노동자연대’가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 주장은 그 자체로 지나치고 부당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표현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조형석 동지는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정확하고 과도하다”고 분명히 했다. 근거없는 비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식의 비판은 없어야 한다.
넷째, 이재빈 동지는 우리가 “이 문제에 관련된 실질적 논쟁점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주장과 분석을 제시”하지 않았고 “어떤 대안이 필요한가”도 말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다보니 “독립적 입장을 갖기를 포기한 채 그저 대책위를 추수”한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느끼지만, 이재빈 동지는 항상 문제를 부당하게 단순화시킨다. ‘나는 분석을 하고 대안을 제시했지만, 당신은 분석이 없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11월 25일에 발표한 글은 뭐란 말인가? 지난 2년간의 이 사건 관련자들의 글, 페북, 재판기록, 공문, 각종 관련 증거와 문서들을 샅샅이 수집하고 직접 인용하며 쓴 이 글에서 나는 나름 이 사건을 재구성했다. 그 후에 나온 조형석 동지의 글은 치밀하고 정확하게 이 사건을 분석하려는 시도였다. 조형석 동지가 썼듯이 이것은 오래고 지난한 공동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지난 2년간의 소송 자료뿐 아니라 관련 단체들의 주장, 관련자들의 페이스북, 유사 사례에 대한 여성단체들의 경험 등을 샅샅이 모으며 토론과 회의를 반복해 나갔다. 특히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다함께와 B 측의 입장뿐 아니라 피해호소인 측의 주장과 자료들도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는 나름의 대안과 해법도 제시했다.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먼저 최초 C의 잘못이 이 사건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 사태 초기에 무턱대고 A를 의심하고 비난한 것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합니다. … 대화 제의를 외면하고 문제를 재판으로 끌고가도록 만들어서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 그러면 다른 단체들과 머리를 맞대고, 나머지 뒤엉킨 문제들을 푸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B가 자신의 잘못보다 더 큰 짐에 눌려 괴로워해 온 것도 풀릴 수 있습니다.”
조형석 동지는 나보다 훨씬 긴 글에서 세부적인 측면까지 살피면서 자세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재빈 동지가 했어야 하는 것은 이런 우리의 분석과 대안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통한 반박이지, 그것을 없는 셈치는 게 아니다.
다섯째, 막상 이재빈 동지 자신의 분석과 대안은 많은 부분에서 아쉽다. 일단 이재빈 동지의 노동자연대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비판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한편 이재빈 동지의 대책위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연대 쪽에서 나오는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각각 구체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이 부분에서 ‘근거와 자료 없이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으려 했다’는 마르크스의 자세를 상기하고 싶다.)
이재빈 동지는 “현재 내 처지와 역량은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적극 개입할만한 수준이 못”된다고 변명하지만, 이것이 진정 “독립적”인 자세인지 납득가지는 않는다. 결국 이런 ‘분석’을 통해서 이재빈 동지가 내놓는 대안은 단지 “양쪽을 중재”하자는 것에 그치고 있다.
나는 특히 이재빈 동지가 노동자연대의 뒤를 따라 ‘복수심’이라는 프레임으로 내 태도를 설명하는 것에 실망했다. “분파 투쟁에서 받았던 상처가 너무 컸던”나머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빈 동지는 지난 분파 투쟁을 거치면서, 정당한 비판이 ‘상처받은 자존심과 복수심’으로 취급될 때의 억울함을 직접 겪지 않았던가?
나는 노동자연대 동지들을 수렁으로 빠트리려는 게 아니라, 수렁에서 구하길 바랄 뿐이다. 나의 행동에서 아래 말한 것과 다른 어떤 의도를 찾지 말아 달라.
“나는 내가 몸담았던 노동자연대가 이 나라의 진보운동과 변혁운동에 큰 기여를 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곳곳에서 헌신하고 연대하는 노동자연대 동지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진보운동 내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연대에 대해 나는 이견도 있고 비판도 해 왔다. 특히 이번 문제는 분명하다. 나도 이 잘못에 핵심적인 공동책임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 제발 이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가자.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노동자연대가 그동안 쌓아 온 신뢰와 명예를 더욱 더 높이는 것이다.”(2014.11.28)
여섯째, 내가 “조직의 일원이었던 가해지목인(민사소송 당사자)과 피해호소인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갈등에 대해서도 마치 없는 일인 양 무시”했다는 이재빈 동지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노동자연대에서 나온 이후 지난 반년 간 있었던 과정을 모르지 않을 이재빈 동지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정말 그것을 ‘없는 셈 쳤다’면 왜 지난 5월에 장문의 글을 써서 소송 취하를 주장했겠는가? 왜 두 달 넘게 몇 차례나 회의를 하며 ‘가해지목인’ 동지를 설득하려고 했겠는가? 왜 대책위를 만나서 일단 서로 만나달라고 부탁했겠는가? 왜 지금도 계속해서 ‘가해지목인’ 동지가 노동자연대의 잘못된 대응에 피해를 입었고 “자신의 잘못보다 더 큰 짐에 눌려 괴로워해 온 것”을 말하겠는가?
정말 이재빈 동지는 소송 결과가 나온 후 이 모든 사태 악화를 뻔히 보면서도 소송을 중단하지 않은 게 옳았다고 보는가? 그게 정말 ‘가해지목인’ 동지를 위해 올바른 동지적 충고였다고 보는가? 소송 결과는 사태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사태 악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내 우려가 틀렸는가? 정말 ‘가해지목인’ 동지에게 맡겨둔 채 우리는 손을 놓고 있었다면, 지금 벌어지는 사태 발전 속에 우리가 자유로웠을 것이라고 보는가? 우리가 이런 일과 떨어져서 여유있게 “이론적 차별성을 구축”할 수 있었겠는가?
일곱째, 노동자연대에서 나온 이후 내가 걸어 온 길에 대한 이재빈 동지의 논평에 대해서도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객관화를 전혀 하지 못하는 순수하고 우직한 성격”, “모든 문제를 선악 구도로 해설”, “조직의 제한된 역량을 이론적 차별성을 구축하는 데에 쏟기를 두려워했고”, “정치(전략과 전술, 효과의 문제) 문제를 자신의 도덕의 영역으로 단순화” 등등
여기서도 이재빈 동지는 구체적인 근거 제시가 없이 부당한 단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을 반박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통합진보당을 방어할 때 방어만 해야 [한다]”고 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만 올해 초 분파 투쟁 때의 글로 답을 대신한다.
“나는 결코 그게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이처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나는 진보당과 우리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정치적 비판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 방어와 비판 중에서 무엇이 더 우선이고 더 강조돼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 이런 제기는 1차 자료집의 내 글을 읽어봤는지 의심스럽게 한다. 이 글은 곳곳에서 진보당 당권파가 추진한 강령 후퇴, 참여당과의 통합,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맹 추구 등을 강력 비판하고 있다. … 이것이 무비판적 방어인가.”(함께 분파 투쟁을 했던 동지에게 이 글을 다시 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재빈 동지는 이렇게도 말한다.
“계급투쟁의 상황이나 경제 위기 정도, 계급 간 세력관계, 좌파들의 이데올로기와 기반, 그들의 구체적 조직적 실천과 성패 등에 대한 분석은 전지윤 동지에게 사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이것은 정말 부당한 데, 우리 <변혁 재장전> 블로그에는 내가 거의 매주 이런 문제에 대해 분석하며 쓴 30여개의 글과 논문이 지금도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할 순 없어선지 이재빈 동지는 이렇게 덧붙인다. “몇 편의 글을 쓰기는 했지만, 내용은 사실 기대 이하였다.” 내 분석이 “기대 이하”였다면 나도 유감스럽다. 그런데 나는 이재빈 동지 등의 분석에 대해서 비판한 바도 있다.
특히 SWP 분열과 위기의 진정한 원인과 교훈, 거리 투쟁과 작업장 투쟁의 변증법 문제,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을 위한 과제와 방법론 등에 대해 말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내용이 기대 이하’라고 지나가듯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진지한 반박과 답변을 대신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 휴식의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는 이재빈 동지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견 때문에 노동자연대에서 분리한 것이며, 새로운 조직 건설에 나선 것이다.
이 과제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라 힘들기도 하지만 나를 사명감으로 벅차오르게 한다. 이미 지난 반년 넘게 동지들과 함께 이 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
따라서 나는 이재빈 동지가 이 과정에 동참했던 것을 “내가 저지른 최대의 오류”라고 후회하는 것이 참 안타깝다. 이재빈 동지와 함께 토론하고 협력해 온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다른 많은 동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재빈 동지 등이 나의 비판에 답변하지 않고, 만나서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고, 연락도 잘 받지 않고, 이번에도 우리의 앞길을 “재앙”이라고 저주한 것이 서운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앞으로도 이재빈 동지와 함께 했던 분파 활동의 경험을 고마운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재빈 동지와 토론하고 협력할 자세가 돼 있다. 이재빈 동지가 사회변혁과 인간해방의 길에 계속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그 길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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