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제목으로 출판된 낸시 프레이저의 책을 서평하면서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비판적 논평과 토론을 제기하는 글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저명한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이자 좌파 활동가이며, 이 서평을 함께 쓴 이리나 허브Irina Herb, 다나 압델-파타Dana Abdel-Fatah, 데보르시 차크라보르티Deborshi Chakraborty, 조지 에드워즈George Edwards는 사회재생산 이론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을 연구해 온 소장 연구자들이다.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 글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글이다.(번역: 두견)
레닌이 자본주의의 변천을 하나의 아바타에서 다른 아바타로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프레이저는 오늘날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여러 단계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현재 자본주의의 단계는 중앙은행과 글로벌 금융기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구성적 규범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공권력'에 의존하고 불로소득을 누리는 금융화된 자본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석된다.
새롭게 권한을 부여받은 이 글로벌 기관들은 대중이나 국가에 대한 책임 없이 주권적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기능은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녀는 이 같은 복합체들이 경제 위기(예: 2015년 그리스), 정치 위기(예: 2017~18년 브라질), 그리고 현재의 난민 위기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프레이저는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 정권들이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맹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득세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레이저는 대중적 사회운동이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그늘에서 '진보적 신자유주의 블록의 주니어 파트너'로 기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신자유주의와 깊숙이 얽혀 일반 노동 대중의 불신을 초래한 바로 그 탓에 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프레이저는 '사회주의가 돌아왔다'는 희망을 알리며 책을 마무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을 이어간다.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프레이저의 열렬한 지지는 학계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주류화되고 낙인을 벗기는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별개로 프레이저의 책은 미래에 대한 선언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정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녀의 주요 기여는 자본주의와 그 위기를 이해하는 데 맞춰져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으로 넘어가면 사회주의에 대한 짧고 제한적인 개입을 기대해야 하며, 이는 진정으로 성패가 걸린 몇 가지 질문을 외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패는 종종 민주주의의 부재와 사회와 국가의 기능에서 당의 패권적 존재에 기인한다. 따라서 의사 결정에서 포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과거의 사회주의 실험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포용성의 중요성에 대해 원칙적으로 이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에서는 종종 그 점에서 실패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포용성에 대한 요구를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사회주의로의 전환(그리고 그 안에서 폭력의 역할)과 혁명 이후 사회에서의 다당제 민주주의에 관한 까다롭고 핵심적인 질문은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둘째, 프레이저는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적 잉여에 대한 통제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고전적 사회주의 접근법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예를 들어 '레닌주의'에서 국가가 잉여의 관리자가 되어 잉여의 사회주의적 재분배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로 이어진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잉여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은 잉여의 축적과 재분배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포함하여 국가와 자본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지면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결론적 비평
프레이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가 무급 '가사노동', 자연, 정치, 인종주의(강탈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와 같은 '비상품화 영역'에 의존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등 마르크스주의의 원로들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영역의 새로운 목소리(엘리 자레츠키Eli Zaretsky, 리즈 보겔Lise Vogel, 낸시 폴브레Nancy Flobre, 바라라 라슬렛Barara Laslett, 요한나 브레너Johanna Brenner, 수잔 퍼거슨Susan Ferguson, 신치아 아루자Cinzia Arruzza,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뿐 아니라 생태 마르크스주의(제임스 오코너James O’Connor, 제이슨 무어Jason Moore) 인사들의 서로 다른 통찰을 하나의 확장된 자본주의 개념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분명 그녀의 공로로 인정받을 만 하다.
그녀의 프레임워크는 서로 다른 사상가들을 연결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전략적 함의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는 한 가지 예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에서 교사의 예를 들어 동일한 유형의 일(가르치는 일)이 사립학교에서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공립학교에서 비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프레이저는 이제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비상품화 영역에 대한 프레임을 추가했다. 그녀의 프레임은 잠재적으로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분법적 구분보다 더 복잡성을 허용한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중요한 논쟁거리인 국가가 위탁하는 비생산적 노동(요양원, 보육 등)을 이론화할 수 있는 여지를 더 많이 만들어준다.
프레이저의 프레임은 '어떤 영역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포착하고 정치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활동은 영역 간의 경계를 바꾸고, 따라서 그 규모와 힘을 변화시킨다. 프레이저에게 이러한 '경계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투쟁의 핵심이며, 마르크스가 특권화한 상품 생산과 잉여 가치 분배의 통제권을 둘러싼 계급 투쟁만큼이나 근본적인 것'이다. 그녀에게 경계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결정적으로 형성'한다.
프레이저의 프레임에서 추가 논의가 필요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프레이저의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대한 개념화는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볼 때, 프레이저가 (재)생산 영역에 (강탈을 더한) 각각 특정한 유형의 지배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젠더 억압은 무급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 인종 차별은 수탈의 과정을 통해, 자연 영역에서는 생태적 파괴가, 정치 영역에서는 '정치적 지배'가 발생한다는 간단하고 명쾌한 답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럴듯한 제안으로 보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프레임이 '현시대의 모든 억압, 모순, 갈등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통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억압에 대한 이야기는 교차하는 억압의 문제와 그녀의 좁은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소외의 형태와 관련하여 더 복잡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장애인 차별이 언급되지 않는 동안에, 퀴어와 퀴어 혐오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사실에 놀랄 수 있다. 특히 퀴어 혐오의 경우 각 형태의 차별이 하나의 상자에 깔끔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누락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프레이저가 인종차별을 개념화하기 위해 강탈을 강조한 것은 분명 중요한 방식으로 논쟁에 가세했다. 그러나 프레이저가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너무 적은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은 아닌지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착취와 강탈'이 그녀가 제안하는 것처럼 인종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분석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의미에서 지나치다는 것이다:
현재 금융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와 강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에 대해 논의한 후, 프레이저는 옳게도 '왜 인종주의가 착취와 강탈의 뚜렷한 구분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향후 논의를 위한 과제로 남겨져 있다:
강탈은 종교, 민족, 카스트와 같은 다른 범주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역사적, 세계적 형태의 인종주의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프레이저가 우선순위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사례는 다른 맥락으로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프레이저는 인종화된 집단으로부터 토지와 노동력을 빼앗는 것을 포착하고 정치적 질서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강탈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인종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비롯한 중요한 상부 구조적 요인을 무시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또한 인종주의에 대한 그녀의 설명이 오늘날 어느 정도까지 유효한지도 불분명해 보인다: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인종화의 동역학을 어떻게 개념화할 수 있을까? '착취와 강탈'의 결합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가? 프레이저의 모델은 과거를 적절히 포착하고 있지만 현재의 인종화 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할까? 아니면 프레이저의 모델을 더 일반적으로 의심스럽게 만드는 더 깊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까?
프레이저가 강탈의 범위를 더 일반적인 지배와 억압이 아닌 인종주의를 설명하는 데 한정하는 이유가 경험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강탈의 적용이 너무 미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은 투표권, 특정 형태의 노동 또는 자신의 은행 계좌 보유에서 법적으로 배제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프레이저는 (규범과 함께) 가부장적 법률이 어떻게 여성들을 무급 '가사노동'에 취약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그녀는 가부장제의 맥락에서 강탈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녀는 토지 강탈이 있기 전에 여성의 몸이 강탈되었다는 페데리치와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흥미롭게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사회적 재생산, 정치, 경제는 (재)생산이 일어나는 영역인 반면, 착취와 강탈은 보상이 없거나 부족한 방식을 설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강탈을 비상품화 영역에 인접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개념화하기보다는 경제 영역 내에서, 경제와 배경 조건들 사이에서, 그리고 배경 조건들의 영역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개념화해야 하는 것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둘째, 반자본주의 투쟁이란 무엇인가? 프레이저는 경제가 상품화되지 않은 영역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배경으로 하면서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간주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확실히 유효한 (새로운 것은 아니더라도) 지적이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투쟁이 반자본주의적이고, 어떤 투쟁이 자본주의의 생명을 연장하는지에 대한 정말 까다로운 질문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어떤 투쟁이든 경제 영역의 배경 조건들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더구나 프레이저는 그 투쟁들 속에서 반자본주의적이지 못한 운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녀는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에 포장지를 씌워 [...] 앞잡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부정한 동맹은 대다수의 삶의 조건을 황폐화시켜 우파를 키우는 토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오늘날 상당수의 반자본주의 사상가들과 좌파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인 견해'를 비판하며, 이들은 '너무 자주 [...] 돌봄, 자연, 직접 행동, 공통화 또는 (신)공동체주의를 본질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취급한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자본주의에 대한 낭만화된(그리고 종종 탈정치화된) 아이디어에 대한 그녀의 비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점은 분석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의 문제이다. 활동가들이 어떤 형태의 운동이 '너무 낭만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반자본주의 투쟁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하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여기서 프레이저는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질문을 경시한다: 투쟁은 어떻게 공동화되는가? 그리고 때때로 반자본주의 저항과 연관되어 있는 비상품화 영역에서의 돌봄 노동은 언제 뜻하지 않게 그 배경 조건을 유지함으로써 체제를 지탱하고 영속화할 수 있을까? 비상품화 영역은 언제 저항의 거점 역할을 하며 대안의 형성을 촉진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식인 자본주의는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놓쳐서는 안 될 책이다. 또한 사회적 재생산, 인종주의, 국가, 생태학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는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프레임워크에 대한 분석적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기사 등록 202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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