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2019년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 유대인 젤렌스키가 당선됐을 때에는, 솔직히 저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아예 제 눈을 의심할 정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에서의 반유대주의"란 세계 유대인 역사상 하도 "전설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폴란드 내지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바로 우크라이나 땅에서 살았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약 2백7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건 그 당시 세계 유대인 총인구의 약 5분의 1에 가까운 숫자이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미 국무부의 블린켄이라든가, 미국의 양심으로 불러지는 촘스키 등은 바로 우크라이나 유대인의 후손들이죠. 한데 우크라이나에서의 유대인 인구가 많은 만큼 유대인에 대한 혐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었습니다. 중세나 근세의 폴란드에서는, 상공인, 즉 일종의 "중간 계급"으로서의 유대인들은 대개 폴란드 대지주와 우크라이나 농민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부재 지주인 폴란드 귀족을 만나볼 일은 별로 없었지만, 지주 마름이나 주막 주인, 상인으로서의 유대인을 계속 만나야 했습니다. 계급적 반감이 종족적 혐오로 발전되는 데에 교회까지 열심히 도와주고 (?)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정교회의 불구대천지원수"라고 농민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17세기 이후로는 우크라이나는 유대인에게 "고향"이자 "공동 묘지"로 종종 됐던 것이죠.
우크라이나에서의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 "모체"인 헤트만국(Hetmanate)의 탄생은 1647-48부터의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반란 이후부터입니다. 흐멜니츠키 반란이란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 "맹아"의 탄생이자 폴란드 대지주를 향한 우크라이나 소농/중농 사회의 투쟁이었습니다. 정교회인들의 천주교회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죠.
한데 흐멜니츠키의 군이 가장 열심히 학살했던 것은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으로 인식됐던 폴란드인이 아닌,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때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적게는 약 2만 명, 많게는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헤트만국에서의 유대인 거주는 금지됐습니다. 즉, 초기 우크라이나의 농민 민족주의에 있어서는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이념이 강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1768년, 폴란드의 귀족 국가가 약화되는 국면에 우크라이나에서 하이다막(Haidamak, 의용군) 농민 반란 때에 또 우만(Uman)이라는, 주로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살았던 도시에 약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집단 학살됐습니다. 학살 당한 영아들의 시체를 돼지나 개들이 먹었다는 장면을, 당시 관찰자들이 서술하곤 했죠.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은 18세기말에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는데, 경찰력이 약한 제정 러시아에서는 위기 국면마다 극우들이 이끌었던 유대인 학살이 반복되고, 그 학살의 상당부분은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습니다. 1882-4년, "유대인"으로 오인됐던 인민주의 혁명가에 의한 황제 암살 등이 촉발시킨 유대인 포그롬 이후에는 바로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미국 이민이 시작됐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유대인들의 상당수는 바로 그 뒤에 학살을 피해서 우크라이나에서 도미한 사람들의 후손이죠. 1903-6년의 일련의 포그롬 이후에는 바로 오데사 등 여러 우크라이나 도시에서는 좌파 시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민병대들이 생겨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이 가속화됐습니다. 굳이 이스라엘의 역사적 뿌리를 찾자면 바로 거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1918-21년의 러시아 내전은 우크라이나에서는 "포그롬의 시대"이었습니다. 대개는 그 당시에 민족 국가의 건설을 시도했던 페틀류라 등 우크라이나의 우파 사민주의 지도자들이 포그롬을 말리려 해도, 농민 출신의 일선 군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살의는 하늘을 찌를 정도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약 9-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일부의 도시에서는 그 당시 포그롬들은 "민족 청소"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키이우 근방의 티티이브(Tetiiv)에서는 19세기 말에 약 2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지만, 1920년대 초반에는 2백명도 안남았습니다. 내전 시대의 포그롬 속에서 2만 명 중의 대다수가 학살된 겁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유대인을 목조 교당(시나고그)에 몰아놓고 불질러 그 전체를 생화장하고, 서로 경쟁하듯이 영아들을 공중에 던져 죽이는 등 잔혹 행위를 자랑했던 걸로 누명 높았습니다.
이런 곳곳에서의 작은 "민족 청소"들은 사실 어쩌면 우크라이나에서의 홀로코스트의 "서곡"이기도 했습니다. 홀로코스트 속에서는 우크라이나 유대인 인구의 60% 정도 학살되고 없어졌는데, 그 과정에서는 독일 파시스트의 하수인 역할을 자주 담당했던 것은 바로 현지인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보게 되면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의 인연이 정말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어느 세기의 역사를 봐도 "학살, 학살, 학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런 학살을 저질렀던 민초들의 내면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이 고되고 위험했습니다. 대부분이 농민인 그들은, 모든 도시민들을 "우리보다 삶이 더 나은", 그리고 "우리를 등쳐서 먹고 사는" 이들로 치부했습니다. 구조적인 고통은 집단적 혐오로 이어졌던 것이죠. 그런데 이 혐오는 "계급적인 모순"에 대한 자각에 따라 "계급화"되려면 그들에게는 우선 "계급"이라는 사회과학적 개념이라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개념조차 도입이 안된 문맹자 농민의 사회에서는 이 집단 혐오의 성격을 규정했던 것은 결국 그들에게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이데올로기, 즉 정교회 기독교이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적"이었기에 "모든"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는 것은 마치 "선행"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포그롬은 계급적 모순 등에 따라 생긴 집단 혐오가 종교화, 종족화되는 경우에 속했는데, 이런 차원에서는 현대 저소득층 유럽인들의 이민자 혐오 정서와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포그롬은 약탈전이기도 했지만, 종교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단,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일방적인 학살로 그치고 만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죠. 수백년 동안 이 폭력의 도가니에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늘 정당하다"는 생각이 계속 굳어져 갔습니다. 나중에 이 집단 통념에 입각한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현지인들과 무장 대립하게 된 20세기 초기 유대인 민병대들의 행동 방식이었는데, 여기부터 이제 이-팔 갈등의 끝이 안보이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한데 제2차 대전 이후에는 이 폭력의 악순환은 드디어 차차 차단되는 쪽으로 갔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도시화됐고 교육 수준은 계속 올라갔습니다. 후기 소련 사회는 분명 위계서열적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도시 상공인과 농민 사이의 괴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주민들은 "같은 소련 공민"으로서 어느 정도 동질화됐습니다. 그러다가는 과거와 같은, 극도로 폭력적이고 살인적이었던 반유대주의도 "과거"의 기억 속에만 남았습니다.
1978년생인 젤렌스키의 증조부 등 일가의 상당부분은 홀로코스트 때에 학살됐지만, 교수의 아들로 공업 도시 그리위 리흐 (Kryvyi Rih)에서 태어난 젤렌스키 본인은 약간의 폭언 이외에는 반유대주의를 경험한 일이 없었으며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연예인, 그리고 기업인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별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에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된 것은, 그 만큼 반유대주의가 극복됐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집단 혐오라는 사회적 병리가 "치유 가능하다"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혐오의 최악의 폭력적 형태들이 차차 역사 속에만 남게 되더라도, 비록 덜 폭력적이라 해도 국민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환경이 계속해서 새로운 배제나 차별의 대상들을 만들고 새로운 배제, 차별의 메커니즘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1931년에 재한 화교에 대한 포그롬이라고 할 "만보산 사태"를 경험한 한반도에서는 오늘날에는 물론 집단 폭력 사태까지야 일어나지 않지만, 약자 집단이 고립되어 갑질의 대상이 되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사회인 만큼 예컨대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출신의 2세 이민자들이 계속해서 "왕따" 등의 문제에 부딪칩니다.
몇 년 전에 인천에서 한-러 혼혈 가정 출신의 아이가 가혹 행위를 당하다가 죽게 된 사태까지 일어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발생되는 약자에 대한 폭력 형태의 혐오 문제입니다. 그러니 계급 사회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완전히 "극복"된다기보다는 그 대상이 바뀌고 그 형태가 바뀐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대상, 형태가 바뀌어도, 그 심도나 농도는 좀 얇아져도 혐오의 흐름은 지속됩니다. 그래서 반혐오, 반차별 투쟁이 늘 필요한 것이죠.
(기사 등록 20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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