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선 닐Jonathan Neale
번역: 두견
마르크스가 얼마나 생태적 고찰을 많이 했었는지 찬양하고, 탈성장에 대한 추상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넘어서 시급하고 과감한 생태사회주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다소 논쟁적인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조나선 닐(Jonathan Neale)은 미국과 영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 왔고, 제국주의, 기후정의, 젠더 억압과 젠더 정의 등에 대한 많은 글을 써왔다. 조나선 닐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 <두 개의 미국>, <기후변화와 자본주의> 등은 국내에도 출판돼 있다.
출처: https://www.fighthefire.net/the-ecosocialist-project-climate-changes-everything
우리는 생태사회주의 프로젝트에 몇 가지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생태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단어는 생태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간다는 기본 사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결된 그것들은 세상의 희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좌파들이 생태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 온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 이제 기후가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생태사회주의 프로젝트를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 – 좌파가 아닌 인류 – 는 끔찍한 결과를 맞기 전에 기후 변화를 멈춰야 한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모든 대부분의 석유, 석탄, 천연 가스의 사용을 대신해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전기로 작동하고, 그 모든 전기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생산돼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다른 일들도 있다. 그러나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면 적어도 70%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사회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 의미가 있는 생태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유일한 정의이다. 이제 생태사회주의에서 생태는 기후를 의미해야 한다. 아니면 우리 모두 길을 잃는다.
틈새 생태사회주의는 더 이상 없다
많은 사회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생태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정당 사업의 일종의 틈새 부분으로 사용했다. 당의 생태사회주의자 부분은 녹색당 및 무정부주의자들과 논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실제로 이것은 원자력이 답이 아니며, 자본주의가 환경 위기의 원인이며, 우리는 성장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선전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즉, 형식주의와 추상적 논증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중 운동을 구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보다 더 잘하는 정당, 사회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나는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시작했다. 많은 면에서 기후 위기는 좌파에게 살금살금 다가왔고 우리는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빨리 변화해야 한다.
일반적인 환경 위기가 아니다
한동안 많은 환경론자들은 일반적인 환경 위기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다른 모든 위기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를 멈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류의 관점에서 볼 때 기후 변화의 위협은 다른 환경적 위협을 왜소하게 만든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환경운동가들에게 ‘기후 부정’의 한 형태이다. 기후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기후 변화를 멈추는 것은 온실 가스 배출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실 가스 배출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의 모든 화석연료의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숲을 파괴하지 않고 새로운 숲으로 세상을 뒤덮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체의 약 14%인 농업에서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수와 매립지에서 배출량을 약 절반으로 줄이고, 프레온 가스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자세히 보여주는 <불과 싸우기Fight the Fire>라는 책을 썼다. 다른 많은 연구에서도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완벽하지도 않고, 100% 삭감도 아니고, 환상적인 넷제로net-zero도 아니지만, 충분히 좋다. 그것이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화석 연료를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만든 전기로 대체하지 않고서는 배출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은 실질적 과업이다.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중 운동이, 세상을 재연결하는 데 필요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며 온실 가스 배출을 중지하는 데 필요한 다른 모든 작업을 수행할 사람들을 권력에 앉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생태사회주의의 생태적 부분이다.
마르크스 걱정은 그만하자
생태사회주의 운동의 많은 지적 작업은 마르크스가 환경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데 바쳐졌다. 이 작업의 대부분은 마르크스와 그의 사상의 발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연에서 비롯한 사회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난으로부터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그 작업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운동을 구축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 나는 이걸 아주 강하게 얘기할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가 환경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내가 마르크스가 말한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말 중 하나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였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모든 계급 투쟁의 어머니 없이는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에 대해 말했던 것은 그의 일생의 작업이었고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가 말한 또 다른 정말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했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환경에 대해 조직하고 글을 쓰는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기후 변화를 막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말이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중요한 질문은 문제의 기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대신, 기후 행동을 방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자본가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으로 다가가게 된다.
성장
우리는 또한 성장, 탈성장, 생태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20년 전인 2002년으로 돌아가보면, 조엘 코벨Joel Kovel이 <자연의 적>을 출판하고, 코벨과 마이클 뢰비Michael Lowy가 더 짧은 <생태사회주의 국제 선언>을 출판했다. 코벨은 1968년 세대 중 한 명으로 오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반인종주의 지식인이었다. 20세기말, 소련이 몰락하고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절정에 달하면서 코벨은 젊은 시절의 꿈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코벨은 환경 위기와 기후 변화에 대해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태학적 사고의 한 줄기가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 가닥은 지구상의 살아있는 것들을 위한 환경이 끝없는 성장을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경제 성장의 역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엘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이해했다. 그는 경쟁과 성장이 자본주의의 생명줄임을 알고 있었다. 성장의 논리를 뒤집는 것은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의 기본이다. 그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우파적 경제학자들의 이해에도 기본이다.
자본주의와 탈성장의 양립 불가능성은 장기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거의 즉시 시작된다. 만약 정부가 성장을 안정적인 상태로 제한하기로 결정한다면, 사실 그 나라는 경기 침체에 빠질 것이고, 영원히 거기에 머물 것이다. 고용과 소득이 탈성장의 지점까지 감소할 것이며,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그 국가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다른 국가 경제와 경쟁할 수 없다. 아주 빠르게 주식 시장과 고용 시장은 자유 낙하로 들어갈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의 탈성장 환경론자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그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년에는 정부가 국민 총소득과 고용을 3%, 4%, 5% 삭감하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정당이나 후보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 코벨은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이해했다. 생태학자들이 옳고 성장의 종식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성장을 멈추기 전에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장을 멈추고 환경 위기를 멈추기 위한 생태사회주의 운동을 제안했다. 그 생각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100여 년 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윤율 하락에 대해 이야기했던 방식을 생각나게 한다. 그 당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자본주의가 최종적 위기에 처하고 사회주의로 대체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미래는 우리 편이었다. 자본주의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그저 기다렸다가 다음날 아침 청소를 해야 했다. 성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이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으며 지금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장에 대한 코벨의 주장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문제와 같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더 나쁜 것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탈성장주의자들degrowthers에게는 성장을 멈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대조적으로 현재 온실 가스를 거의 100% 줄이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한 매우 방대한 문헌이 있다. 나는 이러한 연구 중 일부와 관련이 있었지만 현재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작업하고 있으며 수백 개의 연구가 있다. 이러한 연구는 수십 개의 나라들에 대해 정말 상세하다.
그들은 어떤 산업이 어디에서 몇 년 동안 문을 닫아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일자리를 얼마나 빨리,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만들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제안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온실 가스 감축 결과가 나올지 추정한다. 물론 다른 전문가들은 그들의 숫자에 대해 견해가 다르다. 그러나 숫자들은 그들이 논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
탈성장에 관한 매우 방대한 문헌이 있다. 그 중 어느 것도 그러한 숫자를 다루지 않는다. 어떤 산업이 폐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하지 않는다. 골프 코스? 요트? 모든 항해? 자동차 제조? 보석류? 패스트 패션? 1인당 1년에 한 벌 이상의 옷? 트레이너? 부츠? 정신과 약물들? 대학원? 개인 노트북? 스트리밍 비디오? 테이블 서비스? 패스트 푸드? 슬로우 푸드? 생수병? 사회 복지사? 모든 플라스틱? 무기?
그리고 어디에서? 영국에서 10년 동안 매년 3% 절감을 달성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직업이 사라져야 하는가? 어디에서? 1인당 배출량이 영국보다 높은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아프리카, 브라질, 러시아는 어떤가? 고용 삭감은 여전히 없는 것인가? 이 숫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문헌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심지어 무엇을 삭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더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계획은 더 적다.
왜냐하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작은 종파보다 더 큰 정당이 그러한 세부적인 제안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기반 위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아무도 영국의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아니면 캐나다. 아니면 브라질. 볼리비아. 나이지리아, 프랑스, 폴란드, 인도, 방글라데시. 아니면 아무데서든. 과반수가 이것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탈성장 계획이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아무도 현실 세계에서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또한 탈성장이 기후 변화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향후 20년 동안 세계 총생산을 50% 줄이고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완전히 길을 잃을 것이다. 향후 20년 동안 세계 총생산이 50%만 성장하고 화석 연료 사용을 모두 중단한다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가혹했다. 그러나 현실이 가혹하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23.6.19)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010 - 8230 - 3097 / http://www.anotherworld.kr/608
'이론의 혁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젠더 비판 vs 젠더 폐지 (0) | 2023.07.21 |
---|---|
니코스 풀란차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0) | 2023.07.06 |
모자와 인간: 마르크스의 잘못된 대칭 (0) | 2023.06.03 |
트랜스포비아의 뿌리와 사회적 재생산 (1) | 2023.05.15 |
어떤 노동자를 '전략적으로' 조직해야 할까? (0) | 2023.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