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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해방'/'혁명'이 '독재'로 귀결되는 이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2. 21.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모택동, 김일성, 로버트 무가베, 줄리어스 니에레레, 피델 카스트로, 호지명 (胡志明)...서로서로를 알고 지냈던 20세기의 제3세계 정치의 리더들인 이들에게는 공통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다 해방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죠. 김일성, 모택동, 호지명, 카스트로, 무가베의 경우에는 목숨을 내걸고 기약할 수 없는 무장 투쟁을 통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고, 극적으로 생존해 결국 '집권'에 성공한 겁니다.

집권을 해서 이들이 일종의 "위민" (爲民), "인민을 위한" 정치를 시도한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꼭 나오는 내용은 아니겠지만, 김일성의 북한만 해도 1950년대말에 이르러 제3세계에서 그 때만 해도 거의 유일한 무상 의료/교육/보육의 나라가 된 거죠. 쿠바의 5세미만 유아 사망률 (천명당 5,5), 지금도 미국의 그것 (6,5)보다 낮은 만큼 무상 공공 의료 건설 정책이 많은 면에서 큰 효과를 낸 겁니다.

, "위민" 정치에 있어서는 이들의 - 적어도 부분적인 - 성공을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데 이들 모두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그 어떤 정치 경쟁도 불허하는, 집권 세력 교체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었거나, 적어도 매우 장기적 집권을 한 것입니다. , "위민"에 열중한 것과 달리 이들은 실질적 "민주"의 영역에 그다지 나아가려 하지 않았던 거죠. 이들 "해방 영웅"들이 세운 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매우 어렵게, 천천히 도래했거나 아예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일단 우리가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먼저 안고 가야 합니다. 자본, 즉 경제적 자원도 그렇지만, 권력, 즉 정치적 자원도 보통 그 누구도 자의적으로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로버트 오웬처럼 자신이 소유한 공장에서 "나눔"을 실천한 극소수의 "착한 자본가"들을 역사 책에서 찾아내려면 찾아낼 수 있지만, 이는 예외입니다. 보통 자본의 축적에 성공한 이들은 그냥 확대재생산을 계속 하려 하는 거지, 그저 "마음이 착해서" 스스로 "나눔"을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권력 축적의 과정은, 사실 그 본질상 자본 축적과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의로운 해방 투쟁을 통해서라 하더라도, 일단 권력을 축적한 사람/세력은, 보통 "나눔"이 아닌 독점화를 지향합니다. 예컨대 북한사에서 김일성 직계 ("빨치산파/만주파")가 연안계, 파북고려인, 남로당계 등을 숙청했거나 주변화시켰거나 개인적으로 포섭한 것이 그 사례인데, 그런 정치적 행동의 논리는 사실 보편적입니다. 정치 자본, 즉 권력도 경제 자본 못지 않게 독점화에의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정치 자본의 소유자, 즉 집권 세력의 집권 경로 (해방 투쟁 등)와 무관한 정치학의 보편 법칙이죠. 아무도 막지 않으면 정치 자본의 소유자, 즉 정치인은 늘 보다 오랫동안, 그리고 보다 독점적으로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독점화 내지 장기 집권을 막을 수 있다는 게 과연 무엇이고 누구일까요? 일단 한국사를 생각해봅시다. 이승만의 종신 집권 야망을 박살낸 4.19의 배경은 미국 원조 감소에 의한 경제 사정의 악화, 실업률이 매우 높은 가운데 각급 학교 학생들이 느꼈던 미래 불안과 불만 등이었습니다. "국부" 행세나 하려는, 즉 시혜적인 "국민적 대가부장" 노릇을 맡으려는 독재자에게는 피치자들의 불만을 잠재울 경제적 재화도 없었고, 또 불만 세력의 주도층을 미연에 효율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비밀 경찰 등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학생들이 주도한 혁명에 "국부"의 세력들이 며칠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죠. 그다음에 신군부 정치를 끝낸 6월 항쟁의 경우에는 중산층의 급진적인 일부 계층 (학생층)과 노동 계급이 손을 잡아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들을 쟁취한 것입니다. 1987년 그 당시에 그들에게 그 어떤 사회적 권리 - 예컨대 무상 교육이나 노후연금, 무상 의료 등 - 도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어떤 재분배 시스템도 없는, 집권층인 신군부에게 민족적 명분이 전혀 없는 사회에서는, 신흥 노동계급이나 급진적 중산층의 일부 계층으로서는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란 "시민"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그 "최소한의 자유"이었습니다. , 한국사에서 집권 세력의 장기/종신 집권 내지 권력 독점화를 막을 수 있었던 배경은 노동계급/새로운 중산층의 성장과 집권세력에게의 재분배시스템 및 민족적 명분의 부재 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권력의 독점화/집권 장기화를 막을 수 있는 계급의 성장이란, 어떤 과정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계급이 형성되자면 그 계급에 대한 소속 의식부터 확산, 정착돼야 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그 의식 형성에 필요한 매체 (예컨대 노동 운동이 발행하는 신문, 노동 운동 웹사이트)와 조직 (노조), 집단 행동 (파업 등) 경험, 계급 문화 (노동자들의 가요, 노동 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 등) 등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계급 형성의 과정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산업 노동자들이 산업 혁명, 18세기말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계급 형성의 과정은 차티스트 운동의 시기, 1830-4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된 것이죠. 한국만 해도 1987년 대투쟁으로 그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린 6.25의 대대적 파괴 이후의 새로운 노동 계급의 형성에는 30여년이 걸린 겁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권이 노동 운동의 탄압에 혈안이 됐지만, 맹아적인 재분배 시스템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소해버려는 움직임들은 노태우 집권기에 이르러서야 시작한 것입니다. 한데 예컨대 중국이나 북한, 아니면 소련/러시아의 경우에는 적어도 대도시 노동자들에 한해서 나름 복지 체제의 구축은 바로 혁명과 혁명적 엘리트의 독점적 집권과 함께 시작한 것입니다. , 해방 투쟁을 통해 집권한 세력들은 권력 독점과 동시에 재분배를 본격적으로 가동시킨 것이죠. , 이와 동시에 예컨대 노동자들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자율적 노조 운영 내지 매체 운영 등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게임룰"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지 제도가 있어도 자율적 노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집권 세력의 독점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대타적인 노동 계급의 의식은 과연 쉽게 발전될 수 있을까요? 중국에서는 주로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파업들이 매우 흔히 일어나지만, 노동자들에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전히 "노동 계급 구성원"보다 개별적 "개인", 가족 구성원, 아니면 주민/공민으로서의 의식이 더 1차적입니다. 이 상황은 앞으로 또 바뀔 수 있지만, 역시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리라고 봐야 합니다.

'해방'이 바로 '독재'로 이어지는 것은 20세기 혁명 운동의 슬픈 변증법입니다. 자본주의의 총체적인 위기 국면이 앞으로 -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 다시 도래하겠지만, 앞으로 '혁명'을 꿈꾸는 그 어떤 세력도 20세기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혁명의 성공 이후에도 집권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 정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체제를 미리부터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은 혁명가 (일부)의 독재가 아닌,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서 가는 길목이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되자면 성공한 혁명가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저항력이 사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선한" 정치가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부터, 즉 견제를 받지 않는 그 어떤 권력자도 결국에 폭군이 된다는 점부터 기억해두어야 하는 것이죠.

(기사 등록 20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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