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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석열 정권이 10.29 참사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1. 6.

전지윤

10.29 대참사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는 윤석열 정권

윤석열 정부는 바로 얼마 전에 해외순방에서 있었던 막말과 욕설 파문에서, 온 국민이 다 보고 들은 것도 부정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바이든이라는 말도 욕설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막을 이상하게 단 MBC가 문제라고 책임을 떠넘기고 마녀사냥하면서 사람들을 겁주고 입을 막아버리는 태도로 모두를 기막히게 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을 속이거나, 긴가민가 하는 것은 우기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뻔히 모두가 보고 들은 사실을 거짓말로 우기고 덮어버리는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르다. 그것과 똑같은 방식과 태도가 이번 대참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기본적인 상식과 양심도 없는 이 정권의 태도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먼저, ‘배치한 경찰병력이 과거보다 적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았다는 거짓말은 기동대를 빼고 계산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1개 중대만 60명인 기동대를 더해서 계산하면 배치한 경찰병력은 지난해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법과 제도와 매뉴얼이 없어서 문제였고, 앞으로 주최측이 없는 행사도 대응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재난안전법, 도로교통법, 경찰관직무집행법, 압사예방 국가매뉴얼 등에 이미 모든 근거가 존재했다. “우리는 매뉴얼도 갖고 있고, 지침도 갖고 있고, 제도도 갖고 있고, 법도 갖고 있고, 심지어 조직도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권설아 충북대 재난안전혁신센터장)

문재인 정부의 탈북자 북송에 대해서 아무리 흉악살인범이라도 우리 국민을 북한에 넘긴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국가의 책임 방기라며 그토록 맹비난하던 이들이, 갑자기 주최측이 없으면 책임을 따지기 어렵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를 그토록 울궈먹으며 조롱하고 비난하던 이들이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피해자가 아니라 사망자객관적인 용어라고 우기고 있다. 심지어 검수완박 때문에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밝히기 어렵다는 한동훈 앞에서는 귀를 막고 싶다.

검피아-모피아-족벌언론 연합정권의 핵심 중 하나인 <조선일보>의 내로남불도 압권이다. 참사 직후부터 온갖 사진과 영상들을 홈페이지 대문에 돌아가며 자동 노출재생되도록 올리고, 확인되지 않는 속보들을 올리더니, 3일후 사설에서 무분별하게 사진이나 영상 등을 유포하는 행위... 확인되지 않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 문제라며 남들을 꾸짖고 있다.

그러면서 밀어라고 소리친 이들을 찾기 위해 CCTV를 뒤졌다. 사망한 희생자의 유가족과 병원에 있는 부상자들도 모두 불안에 떨게 했다. CCTV에는 음성이 없으니, 저 빡빡한 대열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태도를 보인 누군가가 지목되면 그 사람의 무덤 속에까지 돌을 던지고 압수수색하자고 할 자세였기 때문이다.

신고 전화를 받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파출소 말단 경찰들에 대한 윤석열의 격노와 특별감찰 지시가 전해졌다. 소수의 인원으로 파김치가 되도록 대응하고, CPR을 하고도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꼬리 자르려 했다.

경찰청 내부문건이 폭로되면서 이 정부가 진보적 시민단체 등을 사찰하고 있거나 사람을 심어서 감시하고 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해 다른 일정들은 연기 취소하도록 하면서 한미연합 전쟁연습은 더 고강도로 진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등으로 반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사실, 이번 10.29 대참사의 원인과 책임은 이미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촛불로 이루어진 성과들을 모두 지우고 되돌리는 것이 정책 방향의 중심이었던 이 정권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우선이 아니었던 게 핵심적 문제였다. 심지어 윤석열은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이전을 고집하면서 경찰력이 윤석열 경호에 낭비되기 시작했고, 더구나 집권 초기부터 지지율 폭락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 권력 핵심부의 관심은 반정부 집회와 시위를 대처하는 데 집중됐다. 또 윤석열과 한동훈은 마약과의 전쟁을 외치며 성과를 올리려고 조바심을 치고 있었다.

이것이 핼로윈 축제에 엄청난 사람이 몰리는데도 안전을 위한 별다른 대비와 인력 배치가 없고 마약단속을 위한 사복경찰만 더 많이 투입하는 것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참사가 터지면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사과하는 게 아니라 비판을 입 막으며 거짓말로 덮어버리고 희생양을 찾아서 마녀사냥하는 방식은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다.

결국, 1029일 밤에 죽어간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심장을 옥죄었던 진짜 범인들은 그날 밤 이태원 골목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용산집무실과 서초동 아크로비스타에 있었고, 총리실과 장관실에 있었다. 대참사가 벌어지고 제일 먼저 이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스러져간 생명들이 아니라 어떻게 이 책임을 피해가지였다는 것도 명백해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뒤지고 압수수색할 것은 이태원 CCTV와 파출소가 아니라 바로 이곳들이다. 이들은 말단경찰들을 상대로 특별감찰과 문책을 할 주체가 아니라 감찰과 수사를 받고 책임져야할 당사자들이다. 이들 중에서 특히 윤석열과 한덕수에게 제발 부탁한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반말하고 영어쓰고 이러지 마라.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진저리가 쳐진다.

무엇보다 지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대통령실, 국민의힘, <조선일보> 등의 압박이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피해자, 희생자의 유가족과 그 주변사람들이라는 것에 있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비극을 겪은 이 분들은 지금 상상하기도 어려운 충격, 슬픔, 고통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분들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유경근 전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님은 유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의지하고 함께 울고 분노할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요구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했다. 필요한 것은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같이 울어 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지적인데, 만약 그런 공간과 숨쉴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 분들의 슬픔과 분노는 밖으로 꺼내지는 게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서 곪아가는 말 못할 고통과 상처는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아서 몸과 마음을 파괴할 것이고 평생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힐즈버러 참사의 생존자 앤 에이어 박사도 지적한다.

“저를 도와준 것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저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믿어주며 그저 들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말할 것을 강요받지 않을 때, 제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애도만 해야 한다,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니다, 참사와 피해자가 아니라 사고와 사망자이다, 영정과 위패를 놓지 마라, 정부를 규탄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는 방침 하나하나는 전부 다 이 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지우고 입을 막으며 손발을 묶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지 말고 애도하라는 족쇄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피해자, 부상자, 유가족과 주변사람들 모두를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지금도 곳곳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 방울들은 모여서 거대한 분노의 바다가 되고 있다. 이제 매년 10월만 되면 고통과 슬픔의 기억이 떠오르며 우리의 가슴은 무너질 것이다. 벚꽃이 피는 4월에 이어서 단풍이 지는 10월도 우리 모두에게 지난날의 10월이 아니게 됐다. 윤석열 정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윤석열 - 잘못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2014416일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내가 세월호에 타고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은 이제 내가 저 이태원 골목에 같이 끼어 죽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시 우리 모두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슬픔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그것을 함께 느끼면서 위로하고 나누려고 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려고 작정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저기에 마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헛소문이나, SNS에서 드물게 보이는 악플들이 아니다. 주목할 가치나 퍼나를 의미도 없는 그런 반응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함께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려는 훨씬 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존재를 보면서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다.

문제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자꾸 볼 수밖에 없는 언론과 방송, 거기에 나오는 전문가, 정부와 책임자들의 태도와 주장들이다. 토요일 저녁에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알았던 속보부터 시작해, 일요일 하루 종일 뉴스를 틀어놓고 언론을 뒤지면서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모아지는 이야기는 주최측이 없는 자율적 행사이기에 누구의 책임을 묻기가 애매하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묻고 있었다. ‘외국의 종교적 전통이 상업적으로 뒤틀려 젊은이들이 술먹고 클럽가는 날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주변 상인들이 돈벌이 기회로 삼았고, 사고가 났는데도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안전불감증이 있었고, 인기 BJ가 왔다는 이야기에 몰려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사고가 났는데도 옆에서 춤추고 떼창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젊은이들에게, 상인들에게, 술먹고 놀다가 조심하지 않은 개개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제 저녁부터는 더 직접적인 책임자들을 찍어내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 그 골목길 바닥에 누군가 술을 뿌려서 더 미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젊은 남성들 5~6명이 밀어라고 소리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경찰이 CCTV를 입수하고 분석에 들어갔다고 한다. 행안부 장관 이상민의 말에 이 모든 이야기들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예년보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더 많은 인원이 몰린 것은 아니고, 미리 경찰을 더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서울 곳곳에 소요와 시위가 있어서 경찰이 분산된 측면이 있었다.’

결국 한마디도 없었다. 총리 한덕수가, 대통령 윤석열이, 서울시장 오세훈이 등장할 때마다 그래도 한마디는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것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잘못된 대응에 죄송하다는 그 한마디를. 그러나 끝까지 그런 말은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그 말만은 피해가면서 기자회견을 하고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지금은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니라 다같이 추모할 때라면서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조선일보>지금은 희생자들과 가족들에 대한 위로에 온 마음을 모을 때라면서 비극적인 참사마저 정쟁의 도구로 삼는 행태는 용납될 수 없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그러면서 당국 대응의 문제점에 대한 시청자 제보를 부탁한 ‘PD수첩에 좌표를 찍고 공격을 시작했다.

어제 하루 종일 언론과 방송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느꼈을 것이다. 왜 누구나 알만한 상식적인 이야기를 정면으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언론인이나 전문가가 이처럼 보기 힘든가?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통행로를 확보하면서 인원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은 집회나 행사에 관여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규모가 어느 선을 넘으면 지하철역의 무정차 통과와 차량 진입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촛불집회에 참가해 본 사람이라면 다 경험해 본 일이다. 주최측이 따로 없는 행사를 통제하기 위해서 바로 국가와 지방정부와 경찰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행사에는 구급차, 소방차, 공무원이 빨리 출동할 것이 아니라 옆에서 비상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 윤석열, 서울시장 오세훈, 행안부 장관 이상민은 바로 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또 정치적, 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 민방위복의 색깔을 바꾼 것 말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밝혀야 한다.

모든 언론인과 전문가들은 바로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것이 언론과 전문가들의 존재 이유이고, 그런 목소리가 나와야 지금 이 엄청난 슬픔과 분노가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연결되고 위로받는 느낌일 것 같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전대통령 박근혜의 가장 큰 문제는 단지 7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비극이 벌어졌는데도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도,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하고 미안해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은 것이 핵심적인 문제였다. 오히려 어떻게 이 책임을 벗어나고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만 계속 신경쓰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 비극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 정부의 대응 태도도 돌아왔다.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 가장 정치적(정략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윤석열 정부와 이들을 지지하거나 눈치보는 주류언론들이다. 이 비극의 본질과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하고 책임지겠다는 진정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핼로윈을 즐기기 위해서 토요일 밤 이태원으로 갔던 이들의 마음과 모습을 상상해 본다. 코로나도 이겨내고 학업, 취업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끼며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개성을 뽐내기 위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 친구들과 셀카를 찍으며 즐거웠을 것이다.

그 설레고 즐거웠던 마음은 어느 순간 걱정과 공포로 변해갔을 것이고, 비명과 절규 속에서 결국 영원히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리고 말았다. 그 영혼들 앞에서 아무런 사과의 뜻도 보이지 않고 책임지려는 자세도 없는 자들을 보고 있으니 슬픔과 분노는 계속 커지기만 한다.

브라질 대선 결과에 안도할 수만은 없는 이유

우리가 이태원 참사에 절망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심이 없는 윤석열 정부에게 분노하고 있는 지금, 브라질에서는 브라질판 윤석열같은 보우소나르가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안도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많다. 겨우 1.8% 차이로 패배한 보우소나르는 부정 선거를 말하면서 반동을 위한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보우소나르 세력은 상하원과 주의회에서 여전히 다수이고 강력하다. 룰라 지지자라는 이유로 폭행과 살인을 당하는 정치 폭력과 테러도 갈수록 심각해질 수 있다. 브라질 군부와 경찰이 여전히 보우소나르 편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번 결과를 보면서 생각나는 몇 가지가 있다.

1. 보우소나르와 극우세력이 단지 기득권 카르텔의 중심일뿐 아니라 브라질의 가난한 변두리 지역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더딘 중서부와 내륙 지역이 이들의 본거지였고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영국의 브렉시트 승리와 마찬가지로 주류언론과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은 숨은 표가 많이 나왔다. 반주류, 반기득권 정서를 극우반동 집단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보우소나르는 옥실리오 브라질이라는 빈민층에 대한 선별적 직접 현금지원 정책으로 표를 매수했다.

2. 주로 제도권에서 군부와 경찰력을 통해 지배를 유지해 온 브라질의 기득권 우익세력이 대중을 동원해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였다. 룰라의 후계자인 호세프 대통령 때부터 반정부 정서를 이용해 대중 시위와 행진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최근 황대권 선생님은 박근혜 탄핵을 기점으로 수구 세력들도 대오를 갖춰 길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경찰력만으로 대처했지만 촛불시위, 특히 백남기 농민의 죽음 이후로 보수세력은 경찰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민민대결로 국면을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3. 이것은 결국 부정부패와 뇌물을 빌미삼아서 2016년 호세프를 탄핵하고 이어서 룰라를 구속하게 되는 2016의회쿠데타로 이어졌다. 더 이상 브라질 극우세력은 군부를 앞세워서 직접 총칼을 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언론과 지식인들을 이용해 프레임을 만들고, 의회와 사법부의 제도적 절차를 이용해서 합법적 방식으로 권력을 잡아간 것이다. 이것이 결국 2019년 보우소나르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도 '정상적' 절차를 통한 것이었지만, 그 본질은 역사적 반동이었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의 0.7% 차이 당선도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4. 보우소나르 집권 4년은 브라질의 민주주의, 환경, 복지, 노동, 소수자, 인권 모두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코로나 대응 실패의 결과는 참혹했다. 그런데도 왜 겨우 1.8%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는 룰라와 노동자당이 진보적인 개혁가로 알려져 있지만, 브라질에서 룰라와 노동자당은 사탄, 빨갱이, 부패한 범죄자 집단으로 깊이 각인돼 있다.

2018년에는 검찰과 사법부, 정치권, 언론, 지식인, 일부 좌파들까지 모두 한목소리여서 당시에 룰라의 부패 혐의와 구속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악마화와 혐오는 지금도 강력해서 보우소나르가 싫어도 룰라를 지지하기는 꺼려지게 만들고 있다.

5. 룰라와 노동자당은 이런 압박에 계속 타협해 왔다. 당과 정부에 대자본가들, 우익 정치인, 신자유주의자들, 복음주의 종교인을 끌어들여서 탈색을 시도해 왔다. 그럼에도 노동자당 왼쪽의 대표적 급진좌파인 사회주의해방당’(PSOL)사회주의좌파운동’(MES)은 이번에 보우소나르에 맞서서 룰라를 지지했다. 룰라의 후퇴와 타협을 비판하면서도 우익반동에 강력하게 맞서면서 지난 대선 1차투표와 함께 치러진 하원과 주의회 선거에서 30명이 넘는 당선자를 내는 큰 성과를 거뒀다.

결선 투표에서도 룰라에게 투표하고 무엇보다 정치적 차이를 넘어서 보우소나르에 맞서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기계적 양비론이 아니라 우익반동에 맞서면서 중도개혁의 후퇴를 막고 좌파의 기반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 다시 집권여당이 된 룰라의 노동당과 관계 설정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과 가능성은 기계적 정답을 거부하고 그 쉽지 않은 과제에 계속 도전해 온 사람들에게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를 추모하며

한국에도 꽤나 많은 책이 번역돼 있는 독립 사회주의자인 마이크 데이비스가 최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많은 책들을 썼지만,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를 처음 알게 된 계기였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이다. 이 책은 왜 미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민주당과 독립적인 제3의 좌파 정당이 만들어지지 못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특히 지금의 양당구도가 만들어진 1930~40년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GM공장 연좌 파업과 전후 거대한 파업 물결 등 역사적일 정도의 거대한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이 독립적 좌파 노동정당 건설로 나아가지 못했는지를 분석한다. 어떤 악법과 제도가 그것을 뒷받침했는지, 또 어떻게 노조 상층부에 보수적 관료지도층이 형성됐고 자본가들도 그들의 역할을 인정했는지 등을 지적한다.

“우리는 노조를 부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대량생산을 위해서 노조 지도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도부의 책임을 증대해야 한다. 노사관계 수행에도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처럼 기술적 숙련도와 결정이 필요하다.”(1946년, 헨리포드 1세)

그러나 역시 핵심은 당시 좌파(주로 공산당)가 루스벨트의 민주당을 지지하고 독자적인 정치 활동과 정당 건설이라는 과제를 포기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공산당 활동가들이 어떻게 무비판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포기해 갔는지, 심지어 독자적 제3당 건설을 반대하고 가로막았는지를 설명한다.

이런 데이비스의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고, 그동안 좌파들 속에서 거의 정답으로 여겨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의 대표적 이론가이며 활동가인 에릭 블랑(러시아 혁명에 대한 혁신적 재해석을 주도하고 있기도 한)은 이러한 분석에 도전하며 대안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에릭 블랑이 좀 더 주목하는 것은 매카시즘 마녀사냥의 구실과 동력이다. 당시 친소반미 좌파로 낙인찍히고 표적이 된 좌파 활동가들은 같은 좌파들 속에서도 외면당하고 고립된 채 제거돼 갔고, 그것이 노동운동의 분열과 약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이것을 루즈벨트 시대와 연좌파업 물결에 대한 위로부터의 반격으로 규정한다. 이 반격을 주도한 것은 거대 자본가, 공화당, 남부의 민주당 보수파, AFL의 우파 노조관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동은 공화당의 선거 승리와 민주당의 우경화, 법과 제도의 개악 등을 낳았고 무엇보다 정치지형 자체를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면서 에릭 블랑은 당시에 좌파 3당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거듭된 시도가 왜 대중적 기반을 만들지 못했는지를 더 주목한다. 그것을 단순히 좌파 활동가들의 의지로 돌파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주장은 오늘날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의 시도와 그것을 반대하는 좌파들 간의 논쟁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

솔직히 정답으로 여겨져 온 마이크 데이비스의 전통적 분석보다 에릭 블랑의 새로운 접근에 더욱 흥미가 가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이것은 종북몰이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촛불의 반격과 다시 윤석열 집권이라는 반동이 이어진 지난 한국의 상황을 돌아볼 때도 매우 시사적이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똑같다고 하면서 제3당을 강조할수록 그 기반이 줄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 자신이 이런 새로운 분석에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기존의 주장에 대한 의문과 새로운 문제제기에 열려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좌파는 이론적 탐구만 아니라 실천적 활동과 연결돼야 하고, 그 속에서 대중에게 배워야 하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끝없이 생각을 혁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으니 말이다.

“학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칭하고 많은 학회에 참석하지만 피켓라인에서 행진하거나 투쟁의 궂은 일을 돕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 나쁜 것은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 존중심을 가지고 기꺼이 가난한 법외자가 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그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마르크스'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회주의자는 특정 강령이나 진영보다 더 넓은 운동과 꿈에 대한 동일성을 뜻한다. 나는 모든 전통적 문제들에 대해, 독특하지만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위치들은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국면에 맞춰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한다. 우리는 항상 비타협적으로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며, 아무리 강력해 보이는 정답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서로 사랑해야 하고, 방어해야 하고, 함께 싸워야 한다.”

 

용기를 담은 말하기, 사랑을 담은 듣기

반올림이 기획하고 희정 작가가 쓴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을 읽어보고 내가 쓴 서평이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무게가 느껴지는 이런 좋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게 된 것은 참 고맙고 좋은 기회였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MPT_CD=M0111&CNTN_CD=A0002874866&PAGE_CD=N0002

직업병 피해가 2세 질환으로 연결되는 태아산재가 보여주는 고통의 연결은 너무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고통은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연결되기에 그럴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서 더욱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내 옆에 있다는 이유로, 나와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그것이 가져오는 고통은,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마음은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문제가 된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수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더구나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 고리를 파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문제를 덮으려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오늘 아침부터도 어제 삼성전자 회장으로 취임한 이재용의 마음을 세심하게 보살피는 기사들로 뒤덮인 언론들을 본다. 그러면서 많은 새로운사실들을 깨달았다. 이재용은 중고차직접운전해서 이동하고, 심지어 구내식당에서 직접식판을 들고 밥을 먹고, 비서도 없이 직접캐리어를 끌고서 출장을 다닌 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직접하지 않고 다 남들이 해주는 것을 편안하게 즐기면 되는 것일테니... 읽을 때마다 어리둥절해지고 쉽게 이해가 안 가는 이러한 이재용의 미담과 선행기사들은 잊을만하면 한번씩 주류언론들을 도배하고 있다.

또 오늘도 <조선일보>는 이재용 회장이 또다시 수사와 구속이라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에 발목 잡히지 않고 삼성 신화를 만들어주길 애타게 기도하고 있었다. 저들이 말하는 삼성 신화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봐야 할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이 부디 꼭 많이 판매되고 읽혔으면 좋겠다.

“"진실을 전달하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는 진실을 전하는 자요. 또 하나는 진실을 경청하는 자이다. 진실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내포된 말만이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한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활동을 지켜보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가 언젠가 인용했던 이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1980~1990년대의 미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낳은 생식독성 물질과 백혈병, 뇌종양, 고통, 죽음들이 바다를 건너온 과정이었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글로벌 가치사슬'은 바뀌었고, '글로벌 산재사슬'도 바뀌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일하는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지만, 유기적인 몸을 지닌 채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인간은 일회성 존재가 될 수 없었다. 피해마저 연결됐다." 이제 '문제'가 돼야 할 것은 '태아 산재와 2세 질환'이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들의, 그 자녀들의 목소리이고, 그것을 듣고 함께 손잡아 준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 부딪히는 네 가지 장벽 자기 검열, 입을 막는 세력, 듣지 않는 사회, 메신저에 대한 공격 - 을 함께 넘어서기 위한 사다리가 된다.”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2580244

예스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4251853

<우크라이나 전쟁과 진보진영의 대응> 토론회에 다녀와

어제 국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진보진영의 대응>에 대한 토론회에 갔다 왔다. 정성진 교수님과 경상대사회과학한국연구단이 주관한 이 자리는 그 패널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있었다. 이 전쟁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펼쳐온 박노자 교수, 이해영 교수, 한상원 교수가 발표하고 서로 논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론회는 기대한만큼 유익했다. 세 분의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이 전쟁의 성격과 상황, 국제적 좌파들 속에서의 논쟁, 중요한 사실들을 더 많이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아무래도 내가 지지하고 비슷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박노자, 한상원 두 분의 발표와 토론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박노자 교수가 토론과정에서 인용한 조선말기 외교관 유길준의 나라 위에 나라없고 나라 밑에 나라없다는 말도 기억에 남았다. 물론 이해영 교수의 주장도 도움이 됐다. 무엇을 우려하고 걱정해서 그러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스탈린주의라는, ‘트로츠키주의라는, 규정이 등장하면서 약간 긴장이 높아지는 시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반박하고 토론하는 태도가 유지됐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의 항복이 전쟁 종식의 현실적 방안이고 우리도 친미중립의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해영 교수에게 청중토론 과정에서 강하게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좌파가 아니라 서방 강대국과 국민의힘과 족벌언론들이 반전평화와 인권, 약소국의 자결권을 더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 같은 황당한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내로남불의 극치가 아닐 수 없는데, 바로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전쟁에서 이들이 그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전평화, 자유와 인권,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일으킨 전쟁이고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인가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미국의 침략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후세인의 독재, 쿠르드족 학살, 화학무기 개발과 사용을 지지하는 것인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이 쏟아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180도 뒤집어진 구도 속에서 또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나토의 동진, 젤렌스키의 신자유주의 정책, 돈바스 주민 탄압을 지지하는 것인가라는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강대국의 패권에 맞서서 이라크 전쟁과 한미FTA 등에 반대했던 이해영 교수같은 분들이 이제, 태도를 바꿔서 러시아의 전쟁을 비판하면서 철군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윤석열 정부에게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국익만을 우선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현실주의적 지정학과 외교를 강조한다.

이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인데, 먼저 윤석열 정부는 결코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우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국내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을 짓밟고 있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난민이나 러시아의 징집거부자조차 받아들인 적도 없다.

또 바로 그런 논리가 이라크 전쟁 때 한국군의 파병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그 때도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에서 반전평화의 가치보다 국익을 고려해서 파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강대국의 침략과 학살을 동조하는 결과만 낳았다.

무엇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뉴스타파>의 방송 마지막에 항상 나오는 리영희 선생님의 말을 다시 들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서 리영희 선생님은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것은 애국, 국가 이런 게 아니고 오로지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 반전평화, 민주주의와 인권, 약소국의 자결권에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하면서 반전평화를 위한 국제적 민중연대를 건설하는 것이지, ‘냉혹한 지정학적 현실과 국익을 고려한 외교적 판단이 아닌 것이다.

오랜만에 철학책을 보면서 고민해 본 경험과 추천

<현대 철학의 최전선>, 나카마사 마사키, 이비

현대 철학 연구의 가장 뜨거운 5가지 테마를 한 권으로 정리해서 담고 있다는 이 책을 선물받은 것은 한 달 전이었다. 하지만 워낙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또 철학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뒤로 미뤄오던 처지라서 쉽게 손이 가지가 않았다.

어려운 철학 책을 뒤지며 읽어보고 한 적이 까마득한 옛날같다. 알튀세르와 각종 포스트주의들에 맞서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생긱에 사로잡혀 있던 때이니 말이다.

그때는 정말 철학자들을 앞으로 추동한 것은 순수한 사유의 힘이 아니라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산업의 힘이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의나 진리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머리 속에서 찾지 말고 생산양식의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자연과 역사에서 쫓겨난 철학에서 남는 것은 순수사유의 영역, 즉 사유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학문인 논리학과 변증법 뿐이고 독일 노동운동이 독일고전철학의 계승자라는 엥겔스의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던 시기다.

이런 기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으니, 이 책의 서문에서 나카마사 마사키가 5가지 테마에 대한 철학사적 기초지식과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거나 최소화했다. 철학을 현실과 유리된 탁상공론 취급하며 사회문제 해결의 편리한 도구로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에 더 읽기에 주저하게 됐다.

그렇게 계속 미루다가 부담감을 무릅쓰고 틈이 날 때 조금씩 읽어보는 중인데, 롤스의 정의론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는 1장은 상당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이 부분을 읽어보면 신자유주의와 연결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는 것인지, 왜 롤스가 우파들에게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비난받는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인종, 젠더, 계급을 떠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닌가’, ‘자유주의 국가의 중립성을 가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롤스에 대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그러한 비판을 수용해서 재화의 재분배에서 다문화 사회에서 정의 문제로자신의 정의론을 보완하고 확장하려는 롤스의 자세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런 롤스의 고민과 유사성이 크다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숙의정치, 롤스의 정의론이 서유럽 선진국에서 주류 남성들의 경험과 시각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기에 개발도상국과 비주류 여성들의 경험과 시각을 통해 논의를 더욱 심화시키려는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의 시도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이처럼, 번역자의 추천대로 이 책은 현대 철학에 대한 좋은 개론서라는 게 분명해 보이니, 나머지 4개의 장도 여유될 때마다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이다. 물론 여전히 복잡한 이론과 다양한 사상가들을 생각하면 부담이 생기지만, 기존의 좌파 이론가들이 이 문제들을 다루면서 쓴 논문이나 글보다 더 잘 읽히는 면이 있다.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것에 다시 감사드리고 이런 문제에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기사 등록 202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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