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대외적으로 소련의 가장 중요한 "명분 차원의 대외 정책"은 바로 "세계 진보/민족해방 운동 지원"이었습니다. 1917년10월 혁명을 가장 중요한 상징적 자본으로 삼는 정권인 만큼, 이런 대외 정책은 당연했습니다. 소련이 "세계적 진보/민족해방 운동"의 "보루"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상 그 존재의 역사적 의미부터 의문에 붙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스탈린 집권기에 사실상 (세계 혁명이 아닌) 인민 (국민) 국가 건설의 노선 ("일국 사회주의")으로 선회 (내지 퇴보)한 이상, 그런 해외 혁명 지원 정책에 중요한 모순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국민 국가가 된 소련은 해외 혁명가들을 소련의 "국익" 차원에서 이용하려 했고, 잠재적으로 반기를 들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스탈린 집권기에는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1936-38년에는 코민테른의 조선 혁명자들이 대부분 학살을 당했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예컨대 모택동이 신중국 국력 신장만 하면 바로 소련에 대한 반기를 들고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죠. 한데 그건 그렇고 소련 "국익"에 반대되지 않는 이상 소련은 1991년 이전까지 계속해서 온갖 해외 진보/민족 해방 운동들을 지원했습니다. 정식 "공산당"이나 "형제 국가"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ANK나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같은 단체에도 계속 돈과 무기, 교육, 군사 훈련, 정보를 제공했죠.
그 정책들은 소련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지원이 끊긴 북한에서 1990년대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가 생기기도 했죠...). 1990년대에는 러시아가 누군가를 "지원"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서방 국가들에게 한 때에 "지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데 2000년 이후, 푸틴 정권이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어느 정도의 "잉여"를 얻은 뒤로는 상황이 또 다시 역전했습니다.
러시아는 다시 한 번 필요하면 지원도 할 수 있는 해외 "우군"들의 찾기에 나섰습니다. 한데에 그 대상은, 러시아가 바뀐 만큼 너무나 급진적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과거에는 해외에서 연대하려는 대상은 "진보/민족 해방" 운동이었다면, 지금 이 세 핵심어 중에서는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로 "민족"이라는 단어죠. "진보"도 "해방"도 사라지고 만 거죠.
한반도는 러시아의 일차적인 관심 대상은 아닙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분담" 구조에서는 한반도는 중국의 책임입니다. 즉, 남한에서는 러시아의 국가 기관들이 기본적 "네트워킹" 등 하겠지만, 어떤 특정 정치 세력 등을 "키운다"든가, 이런 일을 안할 것입니다. 한데, 러시아쪽의 적극적 정책은 없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국의 공론의 장에서 푸틴의 국가주의/패권 정치를 "지지"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해"해주는 몇 가지 부류의 논객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자칭 "국익주의자"들인데, 실은 저들의 "국익"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회사 이익"에 더 가까울 겁니다. 그들에게는 러시아는 일차적으로 미래성이 있는 차와 휴대폰 시장이고, 푸틴은 그 시장의 - 나름대로 유능한 - "관리자"이기에, 그 "관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주장은 골자를 이룹니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강한 일부 나이 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푸틴은 "개발 독재"의 화신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또 하나의 부류는, 역설적이게도 "민족"의 코드를 가지고 박정희의 "국가"와 싸운 사람들의 일부 후계자들입니다. 즉 일각의 - 좌파적 뿌리를 지니고 있는 - 민족주의자들이죠. 그들에겐 개발 독재자 푸틴이 아닌 반미주의자 푸틴이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치란, 아마도 미국이 약해지고 중-러가 강해지는 세상이 될 경우 한국이란 나라의 상대적 자율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그런 미래 비전일 것입니다.
푸틴은 좌파적이 아닌, 우파적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김일성을 ("스탈린의 수제자"라고) 존경하고 평양에서 통치하고 있는 그 손자 분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로서 정치적으로 백러시아와 북한 이상으로 러시아에 가까운 나라는 없습니다), 그 스스로의 정치/경제적 모델은 아무래도 김일성보다 박정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이념적 복고주의도 그렇고 국가가 재벌들을 관리하는 구조도 그렇고 복지 지출보다 군사 지출을 더 우선시하는 재정 정책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박정희의 딸이 집권했을 때에 그 정권과 각을 세웠던 NL적 색채의 좌파 민족주의의 일부 논객들이 이런 푸틴이 반미 자주 노선을 걷는다고 해서 그 행위를 "나름대로 평가"해주고 두둔해주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 걸 보면 느껴지는 것은 바로 "민족"과 "주권" 코드가 이루는 자장의 월경적인 호소력과 강고함 같은 것입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민중들을 도륙하고 러시아 자국 안에서도 노조 운동가들을 투옥하고 민주 노조를 탄압하고 반노동 정책을 펼치지만, 그가 미국에 "핵 전쟁"으로 위협을 하는 그 순간, 한국의 일부 NL 계열의 논자들은 "민중"이나 "노동"을 바로 망각합니다.
그 순간에는, "반미의 깃발"을 든 세계체제 주변부 국가의 지도자에게 그들의 동감이 바로 가는 겁니다. "핵 전쟁"만큼의 반민중적인 일이 세상에 없지만, "민족"과 "자주"가 절대화되면 민중이나 인류 보편의 모든 가치들이 다 망각됩니다....
한국의 독특한 탈식민지적 상황에서는 일부의 민족주의자들이 좌파일 수 있습니다. 한데 유럽에서는 '민족'과 '좌파'는 이미 완벽하게 분리돼 있죠. 민족주의자라면 이미 자동적으로 '우파' 진영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사실 유럽에서는 2000년대부터 "푸틴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은 대체로 극우적 중산 계층 일부의 이해를 반영하고, "국가/민족주의적 자본주의"를 원하는 극우 정당들입니다.
푸틴의 "단결된 러시아"라는 여당과 공식적 자매 관계를 맺고 있는 몇 안되는 유럽 정당 중의 하나는 오스트리아의 극우인 오스트리아 자유당 (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입니다. 이외에 러시아 여당의 또 한 군데의 공식적 유럽 파트너는 의태리의 살비니 총리 동맹 (Lega per Salvini Premier)같은 전형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이죠.
한반도와 달리 유럽은 중-러의 분담 구조에서는 러시아의 "차지"입니다. 그래서 지원 정책을 열심히 펼쳐왔지만, 그 주된 수혜자들은 바로 불란서의 레펜의 "국민 전선"과 같은, 집권 가능성이 있는 민족주의적 극우파 정당들입니다. 코민테른 시절의 선열들이 모스크바가 좌파의 철천지원수인 파시스트들의 후계자들을 지원하는 오늘의 이 광경을 봤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NL적 마인드"라고 해서 다 무의미한 건 당연 아닙니다. 대미 자율화, 국가 주권 회복의 쪽으로 간다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유의미한 목표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한국으로서는 바로 자주적이고 중립적인 포지셔닝은 도움될 수 있는 거죠. 한데 그렇다고 해서 좌파의 본령인 계급적 내지 인류보편적 시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크라이나 상황도, "대미 투쟁"보다는 차라리 우크라이나 민중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 것이죠. 한데 국내 일부의 자칭 "친러파"들에게는 동유럽의 민중이란 멀고도 먼 존재인 것 같습니다...
(기사 등록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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