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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윤석열/기후위기/우크라이나/신당역/영화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9. 28.

전지윤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 한국을 뒤흔든 5

지난 며칠 동안 바이든날리면으로 모두들 너무 지치고 힘들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뭐 저런 대통령이 다 있나, 후배들 데리고 폭탄주 먹으며 똥폼잡고 쌍욕하던 검사 시절 버릇이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싶었는데, 그 후에 족벌언론의 보도, 국민의힘의 반박, 윤석열 지지자들의 댓글들을 계속 보게 되면서 이제는 도무지 뭐가 뭔지 헷갈릴 지경이다.

즉 바이든이 노골적으로 못본 척하고 외면하는 속에서도 계속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결국 ‘48초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윤석열의 끈질긴 노력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모를 당하고서도 뒤 돌아서서 호쾌하게 농담을 하며 대담한 배짱을 과시한 용기와 자세를 보자는 것이다.

이어서 이 새끼들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이고,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는 신해석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머리 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따라서 <조선일보>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의견과 분석을 반영한 심층취재 탐사보도를 내보냈다.

“풍부한 수사기관 협조 경력을 가진 35년차 속기사는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으로 들린다”고 했다.... 또 다른 17년 경력 속기사도 “저속으로 들어보면 더 잘 들린다”며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며는’이 맞는 거 같다” 했다... 그럼에도 왜 미디어와 네티즌은 확신에 차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각인효과’라고 설명했다... 이 효과는 ‘바베큐성 사전각인 효과’로도 불리는데 ... 특정한 발음을 청자가 아는 다른 발음처럼 듣는 ‘몬더그린’ 현상도 같은 원리다.”

풍부한 경험의 35년차 속기사도 그렇게 들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려운 전문용어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1등신문다운 이러한 고도의전문적인 의견과 분석까지 읽고 보니, 더욱 더 내가 과연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이 돼서, 그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확인하게 됐다. 지난 5일간 도대체 몇 번을 보고 들은 것인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너무 지친다.

여기저기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전국민이 바이든파날리면파로 둘로 쪼개진 것 같다. 이것은 찍먹이냐 부먹이냐는 물론, 역사적인 노론과 소론, 개혁파와 쇄국파보다도 더한 거대한 국론 분열인 것 같다.

거기다가 국민의힘 의원 배현진의 이 새끼도 바이든도 없었다는 평화로운 결론에 대한 아주 확신에 찬 포스팅까지 보고나서 다시 그것을 들어보니, 이제는 정말 날리면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국제 뉴스를 보다가 바이든만 나오면 날리면이 떠오르고 온갖 연상작용이 되면서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고 모든 것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더구나 <조선일보>의 후속기사들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 모든 게 가짜뉴스로 광우병 파동을 일으켰던 MBC가 민주당과 권언유착을 통해 저지른 또 다른 조작과 음모였고, 그 뒤에는 민주노총과 언론노조와 빨갱이들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내 귀가 이상하고 내가 속았던 것인가? 윤석열은 잘못된 보도로 국익을 훼손한 진상을 밝히겠다고 한다. 이제 감사원이 감사에 착수하고 검찰이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하는 것인가... 에라이. 거짓말쟁이는 저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하고 나서

어제 동료들과 두 가지 집회와 행진에 참가했다. 먼저 청계한빛광장에서 열린 <약한, 아픈, 미친 사람들의 광장: 약자생존> 집회에 함께 했다. "비정상의 혁명을 기대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집회는 아픈몸, 장애인, 신경다양인, 트렌스젠더, 성노동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는 존재들이 발언하고 연대하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자리였다.

각종 전시와 부스 행사도 뜻 깊고 흥미로웠다. 전시와 부스들을 둘러보고, 집회에 참가해 발언들을 들으면서 약하다고, 아프다고, 미쳤다고 낙인찍히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 지금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고통에 빠져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게 됐고, 누가 그들을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지 더욱 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행진까지는 같이하지 못하고 우리 단체도 조직위에 참가한 기후정의행진으로 이동했다. 기후정의행진 또한 지금의 갈수록 심화하는 기후위기 속에서 아주 중요하고 뜻 깊은 자리였다. 집회에서 느껴지는 활력과 다양성도 인상적이었다.

집회의 규모가 곧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 35천에 가까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그 차제로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일단 그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은 바로 지구와 자연의 호출이었다고 생각된다.

지난 여름의 가뭄, 홍수, 폭염, 폭우 등은 지구가 들려주는 비명과 절규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이제 더 이상은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누구에게도 부정할 수 없어진 것이다. , 어제 그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지구와 자연의 부름에 응답한 셈이다.

또 어제 인상적인 것은 민주노총과 노동조합들의 조직적인 참가였다. 기후 위기는 이제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의제가 된 것이고, 그것은 기후정의 운동과 노동운동 모두에게 긍정적 상호작용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세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전국과 지역 곳곳에서 모인 시민사회단체들과 풀뿌리 단체들, 자발적 개인들의 대거 참가였다. 내가 살고있는 지역에서 이번 기후정의행진 참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옆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세월호 운동이나 탄핵촛불 때와 비슷해 보였다.

기후재앙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러한 폭넓은 참가와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하나 더 빼놓은 수 없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재생에너지 전환을 중단하고 화석연료 의존을 더 강화하며 핵발전으로 돌진하고 있다.

이처럼 기후대책에서 굵직한 전국적 반동도 뚜렷하지만, 지역의 현장에서 작은 변화라도 일구려고 노력하던 풀뿌리 활동가들의 경험하는 다양한 후퇴들을 들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고 피부에 와닿는다. 이제는 지역에서 뭔가를 하기가 너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공서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부서나 사업 이름을 모두 양성으로 바꾸고 있고, 조금이라도 진보적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단체들은 위탁과 사업에서 밀려나고 있다. 뭔가 공공기관들의 지원이나 협조가 필요한 사업들은 사업 계획이나 이름에서 여성, 생태, 기후, 사회적...’ 이런 것을 빼야 한다.

그래서 이런 활동을 하거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 모두 이런 시대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한탄과 걱정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이런 기층의 분위기가 이번에 지역 차원에서도 풀뿌리 단체와 활동가들이 발 벗고 나서서 기후정의행진 참가를 조직하게 만든 중요한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과 풀뿌리 지역 단체들과 자발적 개인들의 폭넓은 연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 윤석열 시대의 심각한 퇴행과 반동이 낳은 광범한 위기의식이, 그러한 퇴행과 반동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에서 거대한 행동으로 분출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어제는 기후정의 운동만이 아니라 반정부 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미 집권초에 윤석열 정권도 스스로 경고하며 걱정했던 가능성이다. “'권력비판 시민단체''동원부대 노동조합'이 결합하면 광우병, 탄핵촛불 등 대규모 동원과 기습시위가 가능하다며, 연결을 차단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대통령실 시민소통비서관실 작성 문건)

어제 시청에서 출발한 기후정의행진 대열이 광화문에서 진행중인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와 만나면서 같이 구호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연출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기후정의, 체제전환이라는 급진적인 구호 속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것은, 그만큼 지금의 심각한 기후위기가 매우 급진적인 대안을 필요로 하고 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그러한 급진적 방향을 어제 집회 대열 곳곳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었던 구체적 과제와 요구들로 채워나가며 그것을 다른 투쟁들과도 연결시키며, 이 모든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주체인 윤석열 정권에 대한 직접적 저지와 타격으로 연결시킬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기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9.24 기후정의행진

내일 9.24 기후정의행진이 준비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여러 위기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우선이라고 서열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지만, 기후위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 위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가 응축된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번에 파키스탄에는 몬순 폭우와 녹아가고 있는 빙하가 합쳐져 성경에 나올만한 대홍수가 나라를 집어삼켰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3500만 명이 이재민이 된 거대한 재앙이었다. 문제는 파키스탄은 전세계 탄소 배출량의 1% 미만에만 책임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가난하고, 경제와 산업이 덜 발전해 있고, 그래서 기후위기에 가장 책임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겪고 있는 부조리이다. 더구나 이런 대재앙이 닥친 상황에서도 파키스탄은 올해에만 125억 달러의 대외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다.

지금 미국이 금리를 높이고 강달러 현상이 심해지면서 이런 가난한 나라들의 부채 상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도 비슷하다. 구소련과 미국이 차례로 개입한 침공과 전쟁으로 수십년간 전쟁과 내전에 만신창이가 이 나라는 지금 기후변화가 낳은 계속되는 가뭄과 흉작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아이들까지 기아로 사망할 위기에 몰려있다.

국가의 구분을 지우고 보면 이런 부조리와 불평등은 더욱 심각하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억만장자 20명은 가장 가난한 10억명의 사람들보다 8000배나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기후위기가 낳은 재앙에서 더 고통받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다.

지난달 강남 폭우 때 고가외제차가 침수돼서 기분을 망친 부자들은, 이제 그 기억을 잊었을지 몰라도 반지하방에서 사망한 이들의 주변인들은 평생 그 슬픔과 고통을 잊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기후위기와 멸종을 막기 위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백년간 지속돼 온 탄소경제와 지금의 경제사회 시스템에서 늦어도 30년 안에 벗어나야만 한다.

그런데 상황은 거꾸로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대표적이다. ‘기후정의 운동이 지난 10년 동안 간신히 막았던 모든 행성 태우기 프로젝트(취소된 송유관, 금지된 파이프라인, 막아진 프래킹, 북극 시추의 꿈 등)들이 침공 몇 시간 만에 테이블로 돌아왔다.’(나오미 클라인)

더구나 기후위기와 인류의 멸종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극우익 세력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주민에 의한 이탈리아인의 멸종을 막자는 신나치 정부가 곧 집권할 것이라는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모든 기후위기 대책을 전부 거꾸로 돌리고 핵발전으로 돌진하고 있는 한국도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나마 약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미국에서 얼마 전 통과된 기후법안(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일 것이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 감축을 위해 약 480조 원을 투자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 15% 법인세를 부과한다는 게 그 골자다. 그러나, 공공투자보다는 시장에 의존하고, 화석연료 지원도 같이 늘린다는 내용은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런 허점 많은 전진조차도 미국에서 선라이즈운동과 민주당에 들어가 고군분투한 민주적사회주의자들이 얻은 작은 성과일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기후 위기를 벗어나고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큰 아래로부터 투쟁과 연대라는 것을 보여 준다.

개개인이 친환경 생활과 소비를 해봤자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남은 30년에서 1~2분만 줄어들 것이고, 체제전환을 위한 거대한 투쟁만이 10년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을 강조하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1~2분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개개인들이 마음을 모으고 연대할 때 그런 투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일 우리가 모든 생각의 차이를 떠나 더 많이 함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최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허를 찌르는 대대적 반격을 통해서 침략과 점령을 당했던 일부 지역들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아무리 서방의 군사적 지원과 무기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있는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갈수록 패배는 불가피하다는 분석과 관측들이 여기저기서 우세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침공과 전쟁이 부당하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근거없는 주관적 희망을 객관적 분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전쟁의 전망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사태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상황은 아무리 첨단무기 등으로 현대화된 전쟁 상황에서도 정당성과 명분과 사기로 무장한 군대는 무기가 3배나 더 많은 군대와 같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근래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서, 베트남전에서 민족해방전선의 1968년 구정공세를 떠올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을 등에 업고 압도적 군사적 우위에 있던 정부군을 뒤흔들었고, 결국 미국과 베트남 친미정부는 개별 전투들에서는 모두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하고,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패배하는 결과를 맞게 됐다.

이번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그런 승리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너무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러시아가 당황하고 있는 게 사실로 보인다. 러시아 군의 사기와 기강이 형편없고,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공공연한 푸틴과 전쟁 반대 주장들이 제기됐다고 한다.

상층 권력자들 속에서도 불만과 이견, 불협화음이 더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당황한 푸틴이 예비역 부분 동원령을 발표하자, 일부에서 반대 시위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극심한 탄압 속에서 금새 사그라들었던 전쟁 반대 시위가 다시 나타나는 상황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러시아 국민들 속에서도 푸틴과 전쟁에 대한 불만과 반대가 결코 작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전쟁에 대한 공개적 비판만으로 최대 15년 동안 감옥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상황에서, 압도적 푸틴과 전쟁 지지 여론조사 결과는 무의미하고, 진짜 여론은 무응답하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계속 제기돼 왔었다.

따라서 반전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강대국의 억압에 맞선 피억압 민중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진보좌파는 러시아 푸틴 정부의 야만적 침공을 규탄하며 당장 전쟁을 중단하고 철군해야 한다고 더욱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미국같은 서방 강대국들과 친서방적 우파들만이 진정으로 반전평화와 우크라이나의 자주적 권리를 지지하고 있고, 진보좌파들은 모두 우크라이나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러시아 독재정권과 그들이 저지른 야만적 침략과 전쟁을 지지한다는 기만적 주장들이 더는 번지지 못하도록 나서야 한다.

문제는 불행하게도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나토나치만을 끝없이 반복하면서, 러시아의 전쟁 범죄에 대해 외면하고 침묵하는 일부 좌파들이 이런 논리에 땔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존 벨라미 포스터같은 저명한 생태사회주의자조차 러시아의 해방 전쟁을 운운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좌파들은 우크라이나 사회와 정부의 부정적 측면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한다. 예컨대 항상 나오는 이야기들은 비슷하다.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리버럴 세력, 재벌, 우익민족주의, 군부라는 과두지배세력이 지배하던 국가다/ 우크라이나의 지배세력은 이런 전쟁 상황에서도 노동법을 개악하며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전쟁 속에서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남자의 입대와 여성의 지원을 강조하며 가부장 질서를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생겨난 에너지난은 유럽이 추진해 온 재생에너지 전환이 얼마나 부족하고 기만적이었는지 드러낸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이 전쟁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패권을 확대하고 싶어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국에서 일부 좌파가 정치검찰과 족벌언론의 반동적 공격을 외면하거나 동조하던 것과 비슷한 전형적인 정치적 혼동과 오류만 보여 준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고 서방 강대국들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그것은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을 정당화시킬 수도, 그것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기각시킬 수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사회주의자인 타라스 빌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나쁜 정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전쟁 전에도 노동권 축소 등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것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저항이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핵심은 젤린스키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가스와 전기 없는 겨울을 준비하고 하면서 승리할 때까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푸틴과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보리스 카칼리츠키는 그런 좌파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우크라이나 민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영토 양보나 국경 수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 이것이 원주민이 스스로 선택을 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식민주의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일부 좌파들은 답해야 한다. 영토 양보를 통해서라도 휴전하지 않으면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거나 심지어 핵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러시아와 푸틴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면 베트남전 때도 핵을 가진 미국과 닉슨을 자극하지 말고 양보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팔레스타인도 중동전쟁으로 확전과 이스라엘의 핵사용을 피하기 위해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과 이스라엘은 확전을 하고 핵무기를 사용할만큼 비이성적인 집단이 아니라고 보는가? 자본주의적 경쟁과 제국주의적 패권 논리 자체가 비이성적인 것 아니었나? 미국이야말로 핵을 실전에 사용했던 대표적 국가 아니었나? 정말 필요한 것은 핵무기를 독점한 강대국들의 패권 추구와 침략에 맞서서 반전, 평화, 반핵을 위한 민중의 저항과 국제적 연대가 아니었나?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의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들의 조직인 사회운동소속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전망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좌파의 운명은 이 전쟁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 영토와 주권을 잃고 패배한다면 우파적 정서가 높아질 것이다. 체첸을 예로 들 수 있다... 반면에 전쟁에서 (승리는 아니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면 좌파는 더 좋은 전망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화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좌파가 지지를 얻는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것은 정치적 투쟁이 좌우할 것이다.’

물론, 정치적 투쟁은 우리 편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푸틴과 러시아의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도 이 전쟁의 방향을 자신들의 패권 확대에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고 계속 계산대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가 미국 등의 군사적 지원과 무기에 의존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위험 요인이 분명하다.

이런 지원과 개입이 어느 선을 넘으면 지금은 부차적인 제국주의 양대 진영간의 대결이라는 요소가 이 전쟁의 중심 요인으로 변화할 가능성도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반전평화를 지향하는 진보좌파는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하면서도,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에 대한 비판과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베트남전에서 구정공세는 단지 미국이 철군하게 된 분기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 68 반란의 발화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전세계의 억압받는 민중과 좌파들이 베트남 민중의 고통과 저항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민중은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뒤따라 흑인해방전선’, ‘여성해방전선’, ‘게이해방전선을 만들며 투쟁에 나섰다.

지금, 러시아의 침공과 점령에 맞선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과 반격에서 우리가 힘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그것이다. 러시아의 전쟁을 반대하지 않고 속으로 푸틴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다면, 우크라이나 민중의 반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좌파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연대해야 한다.

혈연적 권력세습, 영국은 맞고 북한은 틀리다?

어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이 있었다. 이번에 이 과정을 보면서 놀라고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로 평생 헌신한 여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윤석열이 조문외교를 가서 조문을 못한 것은 놀랄 일에 들어가지 않는다. 윤석열이 그토록 떠드는 자유라는 게 저 정도 수준이라는 것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유럽 어느 나라의 이 죽었다고 전 세계 200여개 나라에서 500여명의 국가 정상과 왕족들이 찾아와 거대한 조문을 펼친 것은 좀 놀라운 일이었다. 영국 일부 시민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여왕을 조문하기 위해 이틀간 밤새서 줄을 서 있는 모습도 약간 놀랍기는 했다. 결국 장례식에 무려 100백만 명이 모였다니 그것도 좀 놀라웠다.

새로 국왕이 된 찰스3세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선출한 적이 없다고 외치며 시위하던 사람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도 놀라운 점이 있었다. 이런 왕실에 매년 1400억 원 정도가 국가 예산에서 지출되고, 여전히 영국 국왕은 총리 임명, 의회 개원, 주요 입법과 정부 명령의 승인 등의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도 새삼 놀라웠다.

놀라면서도, 자본주의 국가 형태는 원래 다양하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군주제와 자유민주주의결합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시아만해도 태국 왕실의 권력은 여전히 대단하니 말이다. 영국 시민들이 슬퍼하며 추모하는 모습을 단지 비웃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 그런 정서와 의식이 만들어졌고, 그 모순은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세계 권력자들과 주류언론들, 특히 한국 족벌언론들의 뻔뻔스러운 이중성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혈연으로 지위와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고 북한을 비난해 왔다. 김일성과 김정은이 사망했을 때 눈물 흘리는 북한 주민들을 보여주며 미개한 야만인들처럼 묘사했다.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왕조국가라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에 영국 여왕의 사망과 왕위 계승과 대대적 추모도 이렇게 동참하고, 이런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무리 영국과 북한 권력구조의 차이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에서는 아무런 모순과 이중성에 대한 인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북한의 권력 3대세습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족벌언론들도 삼성재벌의 부의 3대세습에 대해서는 비난한 적이 없다.

그렇긴커녕 요즘 이재용에 대한 족벌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미담과 선행 제조기가 따로 없다. 바로 얼마 전 비리로 감옥에 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건 자본주의이니 원래 그런 것이라고 정당화될 여지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왕실의 권력 세습은 기업과 사유재산의 세습도 아니다. 영국과 연방국가들에 미치는 권력의 혈연적 세습이니 말이다.

이제 이렇게 한바탕 대대적인 국왕 찬양과 애도의 잔치를 벌였으니, 앞으로 서방 강대국과 주류언론, 한국 족벌언론들의 북한 권력세습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까? 전혀 아닐 것이다. 또 그들은 영국 왕실과 권력세습을 당연시하고 찬양했던 그 입으로, ‘미개하고 야만적 왕조국가운운할 것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중성과 비일관성에 대해서 겸연쩍은 척이라도 하면 좋겠다. 권력과 부의 혈연적 세습은 틀린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디서든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왕과 권력자와 재벌총수들이 아니라 부와 권력에서 밀려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든, 북한에서든, 어디에서든 마찬가지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어느 책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구조적 차별은 없다며 여가부 해체하려던 시대가 낳은 비극

강남역의 악몽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번에는 신당역이다. 우리는 다시 여자라서 죽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여성들의 절규를 듣고 있다. 가부장적인 여성차별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고, 배제당하고, 성차별과 성폭력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죽어왔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다시 터져나오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법과 제도의 부재와 부족함이 낳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 사회에는 가정(가부장)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의 범죄를 간섭하지 말아야 할 개인적인 문제, 좋아하고 사귀던 사이에 벌어진 사사로운 문제로 취급하는 인식과 문화가 존재하고, 그것이 법과 제도에도 반영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청년여성 의원들과 민주당의 권인숙 의원, 서지현 전 검사 등이 진작부터 제안했던 법과 제도의 부족함과 입법 강화 방안들을 하루빨리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서 받아들이고 이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런 행위들이 왜 용납될 수 없는 폭력이고 범죄인지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고 새로운 규범을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인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는 배제하면서, 오로지 처벌 강화로만 접근하고 방향을 몰고 가려는 일부 보수언론과 윤석열 정부와 한동훈 법무부 등의 대응에는 우려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여가부 장관 김현숙도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단지 몇몇 괴물같은 가해자들이 문제이고 그들을 신상공개하고, 전자발찌를 채우고, 더 강하게 처벌하고, 더 오래동안 감옥에 가둬두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런 논리가 가장 강하게 작동했던 것은 레이건 시대의 미국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했고, 그것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경쟁하는 개인들로 모든 것을 보게 됐다는 뜻이었다. 범죄도 몇몇 괴물같은 개인들의 문제가 됐고, 그들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법정 최고형을 선고하면 해결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산자유주의적 민영화와 결합해 사설감옥까지 번창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감옥 수감자 수는 70년대 30만명 수준에서 2000년대 230만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특히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재적 강도, 강간, 살인범으로 지목됐다. 흑인남성 3명중 1명이 크고 작은 전과를 가지게 됐다.

이렇게 미국은 세계최고의 대량감금 체제, 군사화된 경찰기구를 가지게 됐다. 이것은 미국의 범죄를 줄이고 안전한 나라로 만들었는가? 아니다. 이것은 경찰의 흑인 살해와 계속되는 총기난사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트럼프같은 정치인은 법과 질서’, ‘범죄와의 전쟁을 말하며 지지층을 결집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 듯이 대부분의 범죄는, 특히 여성혐오 범죄는 사회구조적 원인이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차별받는 사회적 구조,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이나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적 규범,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남성에게 당한 무시는 참아도 여성에게 당한 무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도록 남성을 길들이는 사회적 문화 등이 존재한다.

이런 구조, 문화, 규범,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고 또 오래도록 남아있는 곳이 보수적 사법체계와 경찰, 검찰, 사법부같은 국가기구들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검찰은 바로 서지현 검사에 대한 조직적 2차가해가 벌어졌던 곳이고, 김학의나 한동훈 처남의 성범죄를 덮어주려 했던 곳이다.

이런 검찰을 핵심적 기반으로 등장한 윤석열 정권은 대선 때부터 여성가족부 해체를 선동하면서 구조적 여성차별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국민의힘 의원 하태경은 "페미니즘 자체가 반헌법적 이념"이라며 여성차별에 맞선 사상과 운동을 공격했다.

집권 직후에 윤석열 정권이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법무부에 파견돼서 성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하던 서지현 검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여성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무기로 하는 극우익 유튜버들을 개국공신으로 대우하며 취임식에 초청하는 등 한껏 자신감을 심어 준 것도 윤석열 정부였다.

이들은 그런 자신감으로 더욱 공공연하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여성 정치인과 활동가들을 상대로 막말, 욕설과 그야말로 스토킹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며 계속 코인팔이를 해 왔다. 족벌언론들은 그것을 부추겼다. 우리가 신당역 사건에 더욱 더 분노하게 되는 것은 이런 흐름과 방향 속에서 벌어진 비극이기 때문이다.

대선 때부터 윤석열을 돕던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자신의 사회적 권위를 이용해 이런 방향과 흐름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페미니스트라면서 여성가족부 해체를 지지하는 이수정 교수는 얼마 전 <조선일보>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페미니스트 운동을 ‘피해망상 페미니즘’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이 있다.” “성폭력 범죄는 ‘차별 타파’가 아니라 ‘개별적 피해 회복’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페미니즘이 등장했을 때, 사회주의 이론이 근간에 있었다. 남성은 지배계층, 가부장, 가해자이고 여성은 피지배계층, 전업주부, 피해자라는 인식이다. 구조적 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을 주목하는 관점을 사회주의’, ’좌파라고 낙인찍으며, 여성들의 불안을 피해망상으로 치부하고, 처벌 강화 등 개별적 해법만을 추구하는 이런 목소리가 커질수록, 신당역 사건이 드러낸 문제들의 해결책은 더욱 멀어져갈 것이다.

영화 <경아의 딸>: 폭력의 피해자와 가족의 굴레

이번 추석연휴에 본 가장 좋았고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 영화는 <경아의 딸>이다. 디지털성폭력을 주제로 한 이 영화는 아주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고 잘 짜여진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이별 통보에 대한 보복으로 성관계 영상을 곳곳에 퍼뜨리면서 끝없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드는 연수와 연수의 어머니인 경아가 영화의 두 주인공이다.

영화는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 기쁨이 폭력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성폭력 사건의 피해 속에서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대인기피증 등 온갖 후유증에 시달리며 삶이 파괴되는 피해자를 보여 준다.

김정은 감독의 재능과 노력이 빛나는 영화였는데, 아마도 같은 청년 여성으로 디지털성폭력에 대한 더 구체적 고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김정영 배우(드라마 <안나>에서도 안나 어머니로 출연)가 감동을 더하고, 드라마 <우영우>로 낯익은 하윤경 배우가 <우영우>에서보다 훨씬 더 살아있는 캐릭터로 나온다.

영화는 성폭력 사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든다. 성폭력 피해자로서 연수에게 가장 큰 고통과 상처를 준 것은 온라인 댓글로 달린 온갖 막말과 주변 사람들의 뒷담화보다도, 오히려 가족이며 엄마인 경아의 반응이었다. 경아는 그러한 연애를 하고 영상을 찍은 연수를 탓하고 가슴에 칼로 박히는 말을 한다.

이것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고 언제나 무조건 내 편이라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묻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고 본다. 가해자 상현의 가족을 보면, 상현의 엄마는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 아들의 인생과 앞날을 더 걱정하며 연수에게 합의를 압박한다. 상현의 엄마가 바로 언제나 무조건 자식을 믿고 편드는 부모인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단지 가족과 편들기에 대한 것일 수 없다. 그보다는 사회구조적 폭력을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과거에 경아가 가정폭력의 피해자일 때, 동네 사람들은 경아를 탓하고, 상처를 주는 소문을 냈고, 경아와 연대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경아의 편에서 우는 경아를 달래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준 것은 어린 딸 연수였다.

특히 경아에게 상처가 된 것은 가장 가까운 동네 친구가 자신을 탓하고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성폭력 피해자들이 공동체에서 자주 직면하는 고통이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친구나 가족이 자신을 불신하고 가해자들의 편에서 돌을 던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에 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라스트 듀얼>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 장면이었다. 중세유럽의 성폭력과 마녀사냥을 다룬 그 영화에서 피해자인 마르그리트에게 가장 큰 상처는 절친이었던 마리의 반응이었다. 마리는 마르그리트가 과거에 가해자를 보고 잘생겼다고 말했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피해 주장을 불신하고 재판에서 반대 증언에 나선다.

그것이 가족이든 아니든,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들의 편에서 나를 불신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같이 돌을 던지고 있을 것을 볼 때, 피해자의 가슴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아의 딸>에서 웬만하면 눈물을 보이지 않고 억누르던 연수는 경아 앞에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어떤 마음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봤어?’라고 절규한다.

다행히, 경아는 나중에 피해자의 눈으로 폭력을 보게 되고, 연수에게 사과하고, 적극적인 연대자가 된다. 경아 자신이 과거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경아의 동네 절친도 과거에 자신이 경아의 반대편에서 괴롭힘에 함께 했던 것을 사과한다. 경아는 재판부에 가해자의 엄벌을 부탁하는 탄원서를 제출한다.

“저도 처음에는 가해자가 아닌 제 딸을 탓했고,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제라도 딸에게 힘이 돼 주고 싶어서 이 탄원서를 보냅니다.”

물론, 가족인지 아닌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는 없다.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족이 더 큰 상처와 고통을 주게 되는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가족은 내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 사회에서 가족의 관계와 인연이라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거나 끊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에 경아가 연주를 데리고 죽은 남편의 무덤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비록 자신에게 가정(가부장)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이지만, 경아는 남편을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아는 한 성폭력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피해자도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던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가해자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하고 피해를 부정하고 심지어 재판에 진술서까지 제출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것은 성폭력 피해사실을 덮어버리고 피해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됐고, 피해자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또 피해자는 가족모임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래서 명절은 그 피해자에게 가장 힘든 시간이 됐다. 모든 가족들이 모여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보고싶은 다른 가족들과 사랑스러운 조카들도 보지 못하고 혼자 눈물 흘리는 시간이 됐다.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그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피해자는 삭제됐고, 누구도 그 순간을 피해자에게 돌려줄 수 없다.

과연 그 피해자에게도 연수에게 사과하며 탄원서를 제출해 준 경아와 같은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을까. 피해자를 믿지 말아 달라고 재판부에 진술서까지 제출한 그 가족구성원이 피해자만 빠진 가족모임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됐다. 과연 그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사진을 보면서 피해자의 마음은 또 어떨까.

(기사 등록 202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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