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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병합 정치의 의미/ 동원 국가의 운명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10. 1.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병합 정치의 의미?

오늘은 제 인생에서 몇 안되는 충격의 날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상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충격은 그대로입니다. 오늘 푸틴은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병합에 대한 공식 선언을 발표해 사실상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의 가능성을 거의 차단해 놓았습니다. 앞으로는 미국과의 핵 대결이 미-러 협상으로 갈 수 있을지, 그 협상의 연장선상에서 우크라이나에서도 정전이 될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현지에서 전쟁 당사자 사이의 교전을 중단케 할 방법을, 이 조치 이후에는 찾기가 많이 힘들 것입니다. 일면으로 전쟁은 더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게 됐지만, 또 일면으로는 이 병합 조치는 푸틴이 기대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푸틴의 병합 연설을 들어보면, 그가 "서방 패권주의""우크라이나 파쇼 정권" 이상의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방의 패권주의야 실은 문제가 매우 많지만, 푸틴의 말을 들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그로서는 가장 중심적인 문제란 그 "서방의 패권"을 러시아가 나누어 가지지 못해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푸틴이 원하는 "정의로운 신질서", 사실 러시아도 그 영향권 안에서 "서방" (, 미국) 못지 않는 패권을 누려도 되는, 그런 질서입니다.

"서방" (미국과 그 일부 동맹국)이 이라크 등을 침략할 수 있었다면, 푸틴은 자신도 똑같은 특권, 즉 러시아 주위의 "말을 듣지 않는" 인접 국가를 마음대로 침범해 그 영토의 일부를 떼어 갈 수 있는, 그런 특권을 자신에게도 요구하는 것입니다. 푸틴은 서방 본위의 세계 질서를 "신식민주의", "약육강식"이라고 비난합니다.

꼭 틀린 말도 물론 아니지만, 결국 푸틴이 원하는 것은 러시아도 약자를 ""으로 삼을 수 있는 ""이 되어 그 주변에서 똑같은 "신식민주의"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는 - 일제 말기의 어용 지식인들처럼 - 서방 본위의 근대를 "초극"한다고 하지만, 이게 "초극"이라기보다는 러시아가 또 하나의 "미국 못지 않는" 패권 세력이 되자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지금 우크라이나 군의 공세에 밀려가고 있는 러시아 침략군의 연전연패, 징집 피하려고 인접 국가로 황급하게 도망하는 30만 명 이상의 인산인해, 오합지졸에 가까운 징집병들의 모습 등을 보면 푸틴의 "서방 못지 않는 패권" 쟁취 야망이란 그저 일개 촌극, 즉 참패와 정권 붕괴로 끝날 일이라고 판단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한데 저는 일단 판단을 보류하고 조금 더 관찰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푸틴 군의 매우 낮은 효율도, 특히 신흥 중산층의 징집 도피 추세도 다 사실인데, 이와 동시에 다른 사실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푸틴의 극도로 위험한 도박과 그 군의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지배층 안에서의 동요는 아직은 별로 없습니다. 서방 망명을 쉽게 신청할 수 있는 재외 러시아 외교관 중에서는 지금 그런 망명을 청한 이는 고작 1-2명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갑부 ("올리가르히")들 중에서는 틴코브 등 일부 반전의 목소리를 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죠. 그러니까 서방에 대한 푸틴의 노골적인, 거의 일제 시절 "귀축 영미" 선전 수준의 증오심을 모든 러시아 지배자들이 다 공유하는 게 아니지만, 러시아를 유라시아 패권 세력으로 만들려는 푸틴의 야망은 동시에 러시아 지배층의 야망이기도 합니다.

둘째, 주로 대도시 중산층에 속하는 약 30만 명에게 출국해서 외국에서 징집을 피하도록 사실상 편의를 봐준 것은 (러시아는 얼마든지 국경 폐쇄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안했죠) 일면으로 중산층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산층 이하의 계층들 같은 경우에는... 다게스탄 등 일부 소수자 지역에서는 격렬한 시위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크게 번지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는, 아직도 푸틴을 위시한 지배층에 대한 계급적인 적대심보다는, 푸틴이 지난 10여년 동안 선전 매체를 통해 가르쳐 온 "악마적 서방"에 대한 국가/민족적 적대심이 더 강한 편입니다. "국민" ("인민") 의식에 눌려 계급 의식이 아직 미발달의 상태에 있는 거죠. 미래에는 보다 강한 혁명적 기운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푸틴의 패권주의적 야망을 "국민화"돼 있는 러시아 대중들의 상당부분 역시 공유합니다.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이죠.

푸틴의 패권 추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는지 저는 지금 당연히 "예언"할 수는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결국 모종의 타협으로 언젠가 일단락되겠지만, 지금 당장에는 그 타협의 청사진마저도 전혀 가시권에 들어있진 않죠. 중요한 것은, 서방이 가하는 제재가 서방에 대한 악마화를 그 주된 담론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정권을 전혀 약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야만적인 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잠재적인 주체는 바로 러시아의 광의의 노동 계급, 즉 노동자, 종족적 소수자, 여성 등, 같이 손을 잡는 약자들의 "연합"이죠. 러시아의 탈푸틴화는 러시아에서의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 성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한데 이 길은 결코 간단치 않을 거고, 아마도 수십년이나 걸릴 것이라고 내다 보고 있습니다....

동원 국가의 운명?

열강 각축의 새로운 "시즌"을 연 러-우 전쟁은, 이제 심화의 국면을 맞이합니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침략자인 러시아 쪽에서도 이제 "동원령"을 내린 것입니다. 말은 "부분 동원"이지만, 사실 그 "부분"의 한계선이 어디인지 명령을 내린 자만이 알 일입니다. "부분"은 어디까지나 기만적인 수식어이며 동원은 동원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병력의 규모는, 전투 중의 병력만 보면 약 70만 명이며 전체 동원된 병력은 거의 100만 명에 가깝답니다.

일단 영토 "잠식"을 계속하자면 러시아의 전투 병력은 이상적으로 3, 적어도 2배 정도로 우크라이나의 전투 병력보다 많아야 합니다. 그러니 러시아 국방 장관의 말대로 러시아의 "잠재적 동원 자원" (동원 가능한 예비역 병력 숫자)2500만 명이라면, 그들 중에서는 궁극적으로 적이도 5-10%나 전장으로 끌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와 같은 규모의 병력을 훈련시키고 장비 등 갖추는 데에는 적어도 3-6개월이 소요됩니다. , 지금 예상할 수 있는 전쟁의 기간은 그것보다 훨씬 더 길 것으로 봐야 할 듯하여, 내년에 접어들어도 전투의 끝이 안보일 것이 아닌가, 라는 심각한 우려가 생기게 돼 있습니다. 이제 두 개의 "동원 국가" 사이의 전쟁은, 총동원 상태가 된 징병제 국가인 남북한이 싸운 한국 전쟁을 보다 더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동원, 즉 국가의 "비상 상태"는 근대 국가로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동원을 가동시킨 국가는, 수년간 소모적인 전쟁 끝에 전통적인 의미의 군사적 "패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1945년의 제국 일본인데, 그 때 그 패배의 한 가지 배경이 바로 독일과 일본이 아닌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이와 같은 전례는 아마도 주요 핵 보유국인 러시아에 해당되지 않을 겁니다. 또 한 가지 가능한 결과는 전형적인 총동원 국가인 제국 독일이 1918년에 맞이한 것이죠. 군사적으로 독일은 오히려 비교적 선전을 해서, 그 군은 프랑스 밑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소모전 끝에 불만이 쌓이고 쌓였던 사회는 드디어 "내파"되고, 독일 혁명의 매개체가 된 것은 바로 전쟁 기간에도 계속 그 존재를 유지했던, 그리고 상당한 내부적 독립성과 동원 능력이 있었던 사민당이었습니다.

그런 정당은 오늘날 러시아에는 없습니다 (연방 공산당은 푸틴 체제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않죠). 그 전 해인 19172월에 러시아 제국도 내파했는데, 거기에서는 수도 무산 계급의 반란을 제도화시킨 것은 역시 상대적 독립성을 유지했던 국회 (두마)이었습니다. 이런 국회 역시 오늘날 러시아에는 없지요 (러시아 국회는 정부가 내리는 지령대로 법률을 찍어주는 "기계"에 가깝습니다).

총동원으로 이기고 그 생명력을 증강시킨 국가의 대표적 사례는 스탈린의 소련입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침공과 여러 모로 매우 흡사한) 핀란드 침공이 개시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실상의 동원 상태에 있었으며, 결국 28백만 명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적 손실을 감수했지만, "국가 생존""영토 확장" 등에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은 종전 이후 40여년 간의 소비에트 체제의 "연장"을 가능케 하고, 그 체제에 전반적인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적어도 소련의 공민 입장에서 말입니다.

물론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 등을 분해시킨 뒤에 히틀러로부터 침략을 당한 스탈린의 입장과, 오늘날 우크라이나 침략하고 있는 푸틴의 입장을 단순 비교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상황"은 여러 모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죠. 흡사한 것 하나 있다면 이는 전쟁 동원의 내재적인 "논리"입니다. 동원이란 모든 자원에 대한 국가 장악력의 극대화, 군수공업에의 중점, 외부 정보로부터의 차단, 주민 이동의 제한 등을 의미하는데, 세계에서 "국가"가 가장 절대화된 소련 체제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금 푸틴 체제도 대체로 이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는 아직도 법적으로 인정되지만, 군수 물자 조달 실패에 대한 형법상의 책임 등의 법적 조항이 신설돼 사실상 "전시 동원 경제"로의 이행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군수 공장들이 3교대 체제로 운영되는 것은 1939-45년간과 똑같고요.

푸틴의 동원은 "도박"입니다. 동원해서 수년 동안 다수의 피동원자들에게 납득될 만한 모종의 "성공"이 없다면, 아마도 정권 차원에서 독재자의 인적 교체가 불가피할 것입니다. 이 정도의 치명타를 입어 푸틴이 계속 정치적으로 생존하기가 힘들 겁니다. 그런 납득할 만한 "성과"가 입증된다면 (예컨대 우크라이나 영토의 절반 내지 상당부분이 획득된다면) 푸틴이 후임자를 임명해 그 정권을 계속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 정권의 생명력은 아마도 수십년으로 연장될 겁니다.

이외에는 정권의 성격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태까지는 푸틴 정권은 대중을 원자화시켜 "탈동원" (demobilized) 된 상태로 두고 있었지만, 동원 전쟁 이후의 대중을 계속 이념, 정치적으로 동원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그 동원에 사용될 이념이란 극우적인 국가주의적 색채의 민족주의일 겁니다. 그러니 한국사로 치면 일제말기의 총동원 이데올로기가 "영구화"되는 셈이 될 거죠.

그리고 동원 전쟁 과정에서 정권과 대중이 "공범" 관계에 들어간 이상, 정권이 대중들과 사회적 잉여를 나누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 돼 아마도 국가적인 재분배 시스템이 대대적으로 보강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 마디로, 분배 메커니즘까지 돼 있는 동원형 극우 국가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오랫동안 지속될 셈이 될 겁니다.

푸틴이 패배를 맞이해 혁명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입니다. 문제는, 패배의 여부를 차지하더라도 그런 "혁명"을 일으킬 조직력을 지금 러시아의 좌파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산발적인 반란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만, 당분간 "혁명"을 기대하기가 아쉽게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극단적인 극우 정권 치하에서 러시아 좌파가 앞으로 그 조직의 힘을 얼마나 키울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극우적 국가주의에 맞설 수 있는 좌파적인 "대안적 미래"에 대한 담론을 얼마나 제대로 구축, 유포할 것인지 관건입니다. 여태까지 푸틴 정권 22년간 러시아 좌파의 활동은 사실 매우 미약했죠. 과연 우크라이나 침략 현장에서의 시쳇더미를 본 러시아인들은, 궁극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요?

(기사 등록 202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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