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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오늘날의 반정신의학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7. 22.

이안 파커Ian Parker

번역: 두견

이 글은 정신적 고통을 의료화하려는 정신의학의 시도와 그것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반정신의학적 대안의 의미와 발전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반정신의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운동으로서, 정신질환의 표준적 치료법(정신경련치료, 뇌엽전리술, 항정신병 약물 사용 등)이 가지고 있는 잔혹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기존의 정신의학이 '광기'를 뇌의 질병으로 간주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별하고,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정신질환자들을 분리-격리하는 것을 ‘과학’으로서 합리화시켰다는 비판이었다. 반정신의학은 이러한 전통적 의료모델을 거부하고, ‘광기’를 사회적 구성물이나 사회가 특정인들에게 부과하는 압력의 효과로 간주했다. 대표적 학자들로는 토마스 사자스, 로널드 랭, 프랑코 바자리아 등이 있다. 이 글의 필자인 이안 파커Ian Parker는 맨체스터에 기반을 둔 정신분석학자이자 영국의 좌파 단체인 ‘반자본주의 저항’의 활동가이다.

출처: https://anticapitalistresistance.org/anti-psychiatry-now/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류 정신의학에 의해 행해지는 해로운 '치료'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면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이 과정의 더 깊고 은밀한 형태가 있다. 정신의학은 종종 다른 '심리'적 훈육(심리학, 심리 치료 및 정신 분석과 같은)과 혼동되지만,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의도적이고 명시적으로 의학적이라는 것이다.

정신의학은 고통의 '의료적 모델'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우리가 기분이 나쁠 때 느끼는 것을 전문 의사는 마치 그것이 물리적인 유기적 원인이 있는 '질병'인 것처럼 치료하고 물질적인 일반 약물 투입으로 '치료'할 수 있다.

질병과 치유에 대한 그러한 추정이 하는 일, 그리고 그들이 '정신 장애'를 전문으로 하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로서 의료 훈련을 받을 때 강조되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 살아가면서 겪는 소외, 착취, 억압, 비참함을 효과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대신 정신과 의사는 빈곤, 배제, 긴축, 인종차별 및 성차별이 의사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훈련된 증상 아래에서 감지한 것을 강화하거나 '촉발'할 수 있는 단순한 추가 요인인 것처럼 취급하며 '실제' 근본 원인을 찾도록 훈련받는다. 의료적 정신과 의사가 실제로 '생물 심리 사회적' 모델에 따라 작동한다는 허구는 가망없는 망상이다. 문제가 닥치면 생물학적으로 고통을 줄이거나 정신의학과 결별한다.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다른 의료 전문가와 마찬가지로 DSM(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또는 ICD(국제 질병 분류법)에서 범주를 선택하여 신속한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시행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고통을 물리적 원인으로 축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 절차이다. 이러한 압력은 제약 회사들이 점점 더 많은 수의 새로운 '장애'에 대해서 마케팅을 하고 뇌의 화학적 불균형을 문제로 삼으며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인해서 더 심해지고 있다.

그 투자에는 이미 작성된 연구 보고서에 저자로 이름을 추가하거나 승인받기 위해 의료진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며, 의료 모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생각하는 사람들, 내부 고발자 및 정신과 의사들을 비방하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 접근법은 효과가 있다. 확실히 약물에 의해 증상이 완화되고 환자들은 기록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은 진단을 받고, 그들의 고통에 대한 어떤 종류의 해답을 찾고, 그들이 종신형으로 선고받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 즉 질병이 그들 안에 깊이 있고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체념한다. 근본 원인이 발견되었다는 환상은 종종 환자뿐 아니라 의사에게 위안이 되지만, 그것은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

모순

그러나 정신의학의 시작부터, 18세기 말에 오래된 정신병원에 있는 광인에 대한 보다 인간적인 접근에 뿌리를 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많은 초기 정신과 의사들은 물리적 치료(즉 억제와 최악의 경우 전기충격 및 수술)를 선호했지만, ‘요크 리트릿’York Retreat[광인에 대한 인도적 대우로 유명한 18세기 영국의 시설]의 퀘이커 교도와 같은 일부는 직장으로 돌아가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도록 격려하는 '도덕적 치료'를 고려했다. 1950년대 주요 항우울제의 발견인 '화학 혁명'은 논쟁의 장을 바꿨다.

더 인도적인 정신과 의사들은 그들의 전임자들이 환자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전시하는 것에 반대했던 것처럼 화학적 회초리에 반대했다. 그때 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의학과 완전히 결별하고 '()정신의학anti-psychiatry'이라고 불리는 이질적 운동에서 대안을 찾았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광범위한 대안적 접근법, 약간의 영감, 막다른 골목, 그리고 때때로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에 매달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가난한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름이었다. 가장 저명한 '반정신의학자' 중 일부는 그 이름을 싫어하고 반대했다. 때로는 실제로 모든 정신의학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의학과 사회학 교과서에서 이 전통의 주요 대표자로 등장하는 토마스 사자즈Thomas Szasz는 우익 자유지상주의자였는데, 그는 사람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신질환'이라는 개념 전체에 반대했다. 또한, 의료적 정신의학은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관행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들의 나쁜 행동에 대한 핑계를 줬다고 말했다.

'도덕적 대우'에 대한 사자즈의 견해는 사람들이 두 발로 일어서서 자신의 삶에서 잘못 된 일에 대해 개별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기꺼이 사이언톨로지스트scientologists[인간의 정신을 과학기술로 치료할 수 있다는 믿는 신흥종파]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진보적인 대안이 아니라 정신 건강 분야의 신자유주의이며, 최근에는 정신의학에 대한 다른 비평가들도 반백신과 음모 이론에 손을 댔다.

좌파

좌파의 일부는 정신의학자들이 마이너스를 넣는 것에 무조건 플러스를 넣는 함정에 빠졌고, 일부 '반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서는 광기가 일종의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인 것처럼 보이게끔 고통을 낭만화하려는 유혹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표면상 잠시 동안 왼쪽에 있었지만 R D 랭처럼 그들은 술 취한 길을 따라서 절반쯤 영적인 허튼소리들로 여행을 떠났고, 한때 그들이 생각했던 감옥이 아닌 피난처로서 가족을 찬양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급진적인 실험 중 하나이자 랭이 '공산주의적'이라고 폄하한 것은 1980년대 초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정신병원의 폐쇄였다. 이것은 정신의학적 학대에 반대하는 공산당을 끌어들인 극좌의 대규모 캠페인과 성공적인 국민투표 후 이탈리아 정신의학 시스템의 선제적 부분 개혁에 뒤이은 것이었다.

이 시기는 정신건강이 정말로 정치적 이슈가 된 시기였다. 그 정치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토론하고 지역 정신건강센터의 형태로 대안을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그 실험은 셰필드의 정신과 의사 알렉 제너Alec Jenner에게 영감을 주어 트리에스테에 관한 회의에서 남은 돈을 사용하여 민주적 정신의학 잡지를 자처한 <피난처>Asylum를 만들었다. '민주적 정신의학'은 의학적 훈련을 받은 동료들과 결별했던 정신과 의사인 프랑코 바살리아Franco Basaglia이 이끄는 이탈리아의 개혁 운동의 이름이었다.

이 잡지는 또 다른 정신과 의사 마리우스 롬Marius Romme이 개발한 '목소리 듣기'에 관한 혁신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들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롬은 깨달았다: 그 때의 과제는 경험을 화학적 회초리 아래 두거나 목소리를 잠잠하게 하기 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피난처> 잡지가 조직한 모임에는 비판적 정신의학 네트워크의 또 다른 반골적 의사 그룹도 포함되었다.

의료적 모델에 반대하여 사실상 '반정신의학자'가 된 새로운 세대의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조안나 몬크리프Joanna Moncrieff였다. 그는 획기적인 책인 <화학적 치료의 신화>에서 정신과 약물이 어떤 식으로든 무질서한 두뇌 과정의 재균형을 낳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신 알코올, 니코틴 또는 기타 기분 전환용 약물과 마찬가지로 정신과 약물은 뇌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켰다. '약물 중심적' 가정은 실제로 1950년대의 이른바 화학 혁명 이전의 연구를 인도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질병 중심적' 가정에서 벗어나려면 이것이 제약 회사의 연구 및 광고 캠페인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결과를 따라야 한다.

지금의 전쟁터

이 모든 짧은 역사들은 '반정신의학'이 매우 혼합된 기획이고, 우리는 의료적 모델에 대한 많은 대안, 즉 고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겁을 먹고 근본적인 생물학적 설명의 유혹에 넘어갈 큰 위험이 있다.

의료 모델을 재건하고 대안을 희화화하며 축소시키려는 최근의 시도와 함께 이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것이 고통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좌파의 일부가 대형 제약회사가 퍼뜨리는 가정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우리가 유물론자라면 고통의 원인이 되는 메커니즘 중 적어도 일부는 생물학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왜 문제를 매우 넓은 의미에서 '의료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리고 뇌에 그러한 인과적 메커니즘이 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를 가려내고 실제로 차이를 만드는 약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일까.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칼을 비틀어서, 자본주의의 어떤 부분이나 서로 다른 형태의 억압이 정확히 어떤 부분의 고통을 야기하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우파적 주장의 한 버전이다. ‘개인의 고통과 억압 사이의 연관성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관찰하고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주의(또는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 등)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의 불평등이 비참함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정신적 수준'에 대한 작업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건강 분야뿐만 아니라 대안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기 위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있고 급진적인 실천-이론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몇 년 전인 2020년에 좌파 내에서 정신의학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려는 시도에 대한 의학적 논쟁을 보았고 급진주의자들의 정신의학적 반동에 대한 좋은 답변을 보았다.

그것이 우울증인지 아니면 의료적 모델에서 '조현병'으로 분류한 더 심각한 소외인지 여부를 단순하게 '진단'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우리가 사람들에게 - 민주적 정신의학과 비판적 정신의학 운동이 요구했던 진정한 '피난처' - 공간과 진정한 보살핌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주사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대신, 약물의 효과와 '가짜약' 사이의 무작위적으로 통제되는 시험은 모두 뒤틀린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기본적 규칙은 기초적인 '생물학적' 이유가, 오래 전에 피난처가 지어지기 전에 악마들의 소행이 종교인들에게 설득력 있었던 것만큼 유혹적인 대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참여하는 친구와 동지들은 이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이지만, 약물 치료를 배제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계속해서 잃는다. 그 동안 그들은 사람들을 고쳐야 하고 더 나은 정신의학 연구를 희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필사적이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정신의학에 근거를 제공하는 잘못이다.

대안들

자본주의 하에서 제도적 권력에 대한 다른 모든 도전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이해관계는 잘못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그들이 대응할 방법은 집단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단기적으로 의료적 치료의 대상이 된 환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수용하고 싶은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을 평가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집단적 기관은 그들의 목소리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하는 사람들의 그룹인 '목소리 듣기'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그 경험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의사들의 손에서 그 권한을 제거했다. 그것은 또한 제약 회사의 연구 의제를 폭로하기 위해 정신의학과 결별하고 여전히 결별하고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맞다. 우리는 다른 조건들에서는 약물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는 탐색에 자원이 투입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치료해야 할 근본적 질병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약물 중심' 모델에 따라 무엇이 작동하는지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우리는 뇌를 파헤치기보다 권력의 문제와 급진적인 임상 대안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 건강 관리 서비스 내에서 정신의학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끔찍하고 비참한 사회에 대한 치료법을 찾는 것이며, 그 집단적 과정은 일반적으로 '미친' 또는 '병든' 또는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희망, 에너지, 열정,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겉보기에 '균형잡힌' 그리고 '중립적인' 주장은 제약회사의 선전에서 화학적 '재균형'이라는 허구가 '중립'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균형잡힌' 것이 아니다. 좋은 연구는 중립적이지 않지만 어떤 선택이 왜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의제와 관련이 있는지 알고 있다. 의료적 모델은 사람들을 고통과 생물학에 가두는 반면 우리는 함께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사 등록 202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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