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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제2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7. 11.

마이크 태이버Mike Taber

번역: 두견

마이크 태이버Mike Taber가 밀레랑주의Millerandism, 식민주의, 이민, 여성 참정권, 군국주의에 대한 제2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에 대해서 하나씩 검토하고 소개하는 글이다. 이 글은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를 간단히 기각하고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와 내부 논쟁에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물론 마이크 태이버의 주관적 입장도 반영된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이 글은 태이버가 2022년 3월 27일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온라인 공산주의자 포럼(Online Communist Forum)에서 출판을 준비 중인 새 책에 대해 논의하며 발표한 연설의 편집된 버전이다. 태이버는 코민테른 역사에 대한 치밀하고 전문적인 탐구와 저술로 유명하다. 코민테른의 역사를 소개하고 관련 문헌과 자료들을 번역 소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해 왔고 특히 코민테른 사료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출처: https://johnriddell.com/2022/04/03/debates-in-the-second-international/

온라인 공산주의자 포럼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 여러분 중 일부는 2년 전 여기에서 내가 <사회주의 기치 아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당시 준비 중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책은 채택된 총회 결의문에 등록된 바를 통해서 1889~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포괄적인 그림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우파와 좌파 사회주의자 모두가 제2 인터내셔널을 보는 방식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14년 이전의 제2인터내셔널에 마르크스주의가 너무 많았고 정치적 현실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좌파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그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견해의 공통점은 제2인터내셔널을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 역사적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느 살아있는 대중 운동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의 강점, 약점,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맥락에 따라 정확하게 연구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나는 <사회주의 기치 아래>의 후속편으로 내가 작업하고 있는 새로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전의 책에는 1889년부터 1912년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채택된 모든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책은 1900년과 1910년 사이에 열린 제2인터내셔널 총회의 구두 토론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구성될 것이다. 이러한 토론은 결의안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그림을 더 풍부하게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2인터내셔널의 주요 인사들 - 칼 카우츠키Karl Kautsky,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쥘 게드Jules Guesde,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 에두아르드 베일랑Édouard Vaillant 등이 이 의견교환에 참여했다.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장 조레스Jean Jaurès, 헨드릭 반 콜Hendrick Van Kol과 같은 우파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칼 라덱Karl Radek,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Christian Rakovsky, 클라라 제트킨Clara Zetkin,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같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한 좌파 인사들이 있다.

물론, 2인터내셔널 총의에서는 많은 다른 질문들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중 내가 선택한 다섯 가지 토론은 밀레랑주의Millerandism, 식민주의, 이민, 여성 참정권, 군국주의였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밀레랑주의

첫째,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참여와 관련된 밀레랑주의에 대한 논쟁이다. 이것은 1900년과 1904년의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제기되었다. 알렉상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은 프랑스 의회에서 독립 사회주의 그룹의 일원이었다. 18996월에 그는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오랫동안 거부해 왔던 통상장관으로서 프랑스 자본주의 정부의 직위를 수락했다.

밀레랑의 행동을 둘러싼 노동계급 운동의 논쟁은 수정주의로 알려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의 도전이 낳은 논쟁에 뒤이어 나왔다. 베른슈타인과 밀레랑이라는 이 두 가지 도전은 당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종종 하나로 묶였다.

1900년 파리 대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주요 결의안은 칼 카우츠키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 결의안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정부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규탄했다. 그러나 그는 소위 "정상적" 상황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으며, 예외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었다. 카우츠키의 결의안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 정치적 상황이 이 위험한 편법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전술의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명시했다. 나중에 이어졌듯이, 카우츠키가 이렇게 행동한 의도는 사회주의적 통합을 추구하면서 혁명적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협이 될 수 있었다.

파리 대회에서 카우츠키의 결의안과 반대되는 결의안은 엔리코 페리(Enrico Ferri)와 쥘 게드(Jules Guesde)가 제안한 결의안으로서, 모든 상황에서 자본주의 정부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참여와 타협을 거부했다. 이 문제에 대한 긴 토론이 위원회와 대회 본회의에서 열렸다. 그 내용을 인용하겠다.

에밀 반데르벨데Émile Vandervelde는 그가 카우츠키의 결의안을 지지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장관으로 갈 것이냐의 문제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의 문제라고 믿는다.” 장 조레스도 말했다. “나는 카우츠키의 제안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각의 특정한 상황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당의 판단에 맡기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 페리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카우츠키의 제안이 작성자가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는다. 시작은 알지만 끝은 어딘지 알 수 없는 비탈이다.” 토론 끝에, 카우츠키의 결의안은 1900년 대회에서 29 9의 표로 채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유연성 때문에 "고무도장 결의안"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명명된 이 결의안의 모호성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1903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SPD) 대회에서는, 카우츠키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초안을 잡아서 예외 없이 모든 사회주의자의 자본주의 정부 참여를 모호하지 않게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 노동자당은 SPD의 드레스덴 결의안을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제출했으며, 그곳에서 드레스덴-암스테르담 결의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반대되는 것은 빅토르 아들러Victor Adler와 에밀 반데르벨데가 제시한 또 다른 결의안으로, 1900년의 카우츠키 결의안을 모호함과 함께 재확인하려고 했다. 암스테르담 의회에서 밀레랑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사람은 조레스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 밀레랑주의에 대한 논쟁은 수정주의에 대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이 토론에서 공개적으로 베른슈타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의 관점을 단순하게 실제로 실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신뢰받던, 조레스는 군주제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스 공화국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이익이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할 것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계급투쟁의 원칙을 전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우구스트 베벨이 그에게 대답했다. 베벨은 사회주의자들이 군주제에 맞서서 공화제를 확실히 선호하지만, 둘 다 자본주의적 정권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아무리 우리가 당신들의 공화국에 대해서 당신들 프랑스인들을 부러워할 수 있고,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원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 우리의 머리를 깨지게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적 군주제이든 부르주아적 공화정이든 둘 다 계급 국가이며, 둘 다 그 본질상 자본주의 사회 질서를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나는 여기서 베벨의 공식이 민주적 권리 수호의 중요성을 좀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끼워넣고 싶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요지는 맞았다.)

드레스덴 결의안을 반대하는 대회의 거의 모든 연사들은 자신들은 밀레랑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든 개별 국가의 정당에 맡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 플레하노프 등 밀레랑주의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표명한 토론의 참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사회주의적 단결의 문제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라코프스키는 사회주의적 단결이 사회주의적 행동을 방해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명백한 진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적 단결은 계급투쟁의 토대 위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토론이 끝날 때 아들러-반데르벨데 결의안은 21 21의 동수 투표로 부결되었다. 그 후 드레스덴-암스테르담 결의안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투표율의 근접성은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세력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해준다.

식민주의

두 번째 토론은 1904년과 1907년에 있었던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다. 이 대회가 열릴 즈음에 세계 사회주의 운동은 아일랜드, 폴란드, 인도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로 거슬러 올라가 피억압 국가와 민족의 투쟁과 연대하는 전통을 획득했다. 이 전통은 1896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으로 재확인되었다. "대회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치권을 지지하며, 현재 군사적, 민족적 또는 다른 폭정의 멍에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나타낸다."

1896년 대회의 두 번째 결의안은 쿠바, 크레타, 마케도니아의 독립 투쟁에 연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다른 견해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 운동의 반식민주의적 입장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96년에 쓴 글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는 야만인들을 정복하는 특정한 방법을 규탄하고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야만인을 예속시키고 고등 문명의 규칙에 따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그러한 견해는 공개적으로 현장에서 표출되었다. 네덜란드 정당의 당수인 헨드릭 반 콜Hendrick Van Kol'사회주의적 식민주의'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회주의도 식민지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또한 식민주의의 "문명화 임무"와 현대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식민주의의 필요성에 대해 자본주의적 대변인들이 퍼뜨리는 견해를 옹호했다.

1904년 대회에서 비교적 짧은 토론 끝에, 친식민주의적 주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피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대회의 결정은 1896년에 채택된 독립 투쟁과 자결권 투쟁을 지지한다는 관점에서는 멀어졌다. 1904년 채택된 결의안은 대신 식민주의 자체가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학대를 규탄하는 것으로 제한되는 모호한 관점을 제시했다. 그 목표는 "식민지의 완전한 해방이 추구해야 할 대상임을 염두에 두고, 원주민들의 발전 상태와 양립할 수 있는 자유와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암스테르담 대회는 "인도인들이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 최상의 형태로 자치 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하는 헨리 하이드만Henry Hyndman이 초안한 인도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런 다음 하이드만은 자신의 결의안에 세 단어를 삽입하여 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었다. "영국의 최고 통치권 아래."

따라서 1904년의 암스테르담 대회는 일관된 반식민주의적 입장에서 후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대회에서 토론의 발판을 마련했다. 2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기회주의의 성장을 반영하여, "사회주의적 식민주의"의 지지자들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식민주의 위원회에서 절대 다수를 확보했다.

이 다수를 대회 본회의에 보고하면서 반 콜은 단순히 식민주의를 비난하는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대신 "긍정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명분 아래에 친식민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 토론의 분위기는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그 토론에서 직접 인용하겠다.

독일의 에두아르트 다비드Eduard David: "유럽은 식민지들이 필요하다. 그 나라들은 그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 식민지가 없다면, 우리는 경제적 관점에서, 중국에 비슷할 것이다."

반 콜: “확실히 식민주의의 범죄는 가증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줄이면서 식민주의 정책을 완화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 네덜란드인은 가장 오래된 식민지를 가진 민족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인, 고문, 화형, 약탈이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다.”

베른슈타인: “우리는 식민지를 포기한다는 유토피아적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그러한 견해의 논리적 결과는 미국을 인디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날카로운 반박을 받았다. 식민주의 반대자들은 그것들을 완전히 거부하고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적인 투쟁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연사 중에는 게오르그 레데부르Georg Ledebour, 에마누엘 웜Emmanuel Wurm 및 해리 퀄치Harry Quelch가 있다.

줄리안 마르클레프스키Julian Marchlewski는 식민주의의 "문명화 역할"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소위 문명에 대해 자만할 권리가 없으며, 아마도 훨씬 더 발전된 고대 문명을 가졌던 아시아 민족에게 그것을 강요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카우츠키는 두 그룹의 민족이 있는데 하나는 통치할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받을 운명이라는 견해에 대해 다루었다. 카우츠키는 대답했다. "이것은 노예 주인들의 주장과 똑같다."

본회의 토론이 끝날 무렵 반 콜은 반식민주의자들에게 답을 하려고 했다. 나는 청중의 감탄사와 함께 그의 말을 그대로 읽고 싶다. 이걸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친구 카우츠키는 식민지를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조언으로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우리는 기계와 도구를 아프리카로 가져가야 한다! ... 중앙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기계를 가져왔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그 기계로 무엇을 할까? 아마도 그들은 주위에서 전쟁 춤을 추기 시작할 것이다. [큰 웃음] 아니면 그들의 무수한 신들의 수를 하나 씩 늘릴 것이다. [웃음]…. 아마도 원주민들이 우리가 준 기계를 파괴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를 죽이거나 심지어 잡아먹을 것이다. [반 콜이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그러면 내 뛰어난 신체 발달을 감안할 때 내가 카우츠키보다 우선순위에 있지 않을까 두렵다. [웃음] 유럽인들이 도구와 기계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간다면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원주민들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카우츠키가 그것을 제국주의라고 부르더라도 우리는 무기를 손에 들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내 생각에는 대회 현장의 한 구역에서 나오는 역겨운 웃음소리가 반 콜의 그로테스크하고 인종차별적인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상반되는 위원회 결의안이 대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체가 위원회 소수파의 반식민주의적 관점을 채택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근소한 차이였다: 127표 대 108, 기권 10.

투표의 근접성은 제2인터내셔널과 그 정당들 내에서의 기회주의적 경향이 강력함을 나타내며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고했다. 친식민주의 세력이 슈투트가르트에서 물러서는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제2인터내셔널의 약점 중 하나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적 운동이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2인터내셔널의 범위가 많은 국가로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유럽과 북미의 운동들이 지배적이었다.

1904년과 1907년의 식민주의 논쟁에서 크게 빠져 있는 것은 식민지 대중 스스로를 자기 해방의 의식적인 건설자로 보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적어도 한 명의 주요 인물인 V. I. 레닌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그의 1913년 기사 "후진적 유럽과 선진적 아시아"를 읽거나 다시 읽을 것을 권한다. 레닌의 접근 방식은 나중에 초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채택되고 옹호되었다.

이민

제가 다룰 세 번째 토론은 1904년과 1907년 대회에서의 이민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민은 중요한 세계적 정치 문제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1880년에서 1920년 사이에 2천만 명이 넘는 이민자가 도착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 수치가 거의 5백만 명에 달했다. 호주에서는 약 백만 명이었다.

이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비백인 이민자들의 도착은 특히 미국과 호주에서 심각한 인종차별적 캠페인을 촉발했다. 1882년 미국 의회는 중국인 배제법을 채택하여 중국인 이민을 금지하고 이미 온 사람들도 시민권 취득이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법은 1892년에 의회에 의해 갱신되었고 1902년에 무기한적인 것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일본 이민자를 배제하는 법을 제정했다. 호주는 훨씬 더 제한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1901년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은 비유럽 이민자의 입국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백호주White Australia" 정책을 수립했다.

미국과 호주의 인종차별법은 이들 국가의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주요 부분에서 지지를 받았다. ‘미국 노동 연맹은 중국인 배제를 지지했고 호주의 노조는 백호주 정책의 가장 큰 지지자 중 하나였다.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압력에 굴복하여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과 인종차별을 조장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우파적 사회주의자 빅터 버거Victor Berger는 곧 이 나라에 매년 500만 명의 "황색인"이 침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몇 세대 안에 반드시 흑인과 황색인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890년대에 제2인터내셔널은 이민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893년 결의안은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들이 찾아오는 이민자를 옹호할 것을 촉구하면서 노동자 운동이 이들 속에서 조직을 확장하고 국제적 연대의 원칙을 전파할 것을 촉구했다.

1896년 대회에서 에드워드 에이블링Edward Aveling이 다수의 영국 노동 단체를 대표하여 제안한 발의에서는 노동조합이 외국인 이민에 대한 제한적인 입법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그것은 채택되었다. 1896년 두 번째 결의안은 반이민 폭동의 표적이 된 스위스의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반이민 정서의 영향이 느껴졌다.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는 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위원회를 설립했다. 미국 사회당American Socialist Party의 모리스 힐키트Morris Hillquit가 이끄는 이 위원회의 소수파는 "후진적 인종(중국인, 흑인 등)의 노동자"를 겨냥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인터내셔널이 그러한 이민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위원회의 과반수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이주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법안"을 규탄했다.

현장의 위원회들에서 상반되는 결의안들이 상정되자 전체적 논의를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릴 차기 국제 대회까지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전에 미국 사회당은 인터내셔널에 요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낮추고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실현을 지연시키고 노동자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계획된 값싼 외국 노동력의 고의적 수입을 하는 그들의 명령에 맞서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해야 한다."

비록 이 결의안이 이민 제한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금지는 암시되었다. 이민자를 배제하는 모든 법률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이민 위원회의 대다수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응답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특히 치열했다. 아시아계와 흑인 이민자에 대한 공공연한 편견과 함께 힐퀴트 등은 이민 제한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서 두 가지 말을 인용하겠다.

호주의 빅터 크로머(Victor Kromer): “우리 노동자들은 원칙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않지만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이 얻은 이점을 빼앗기 위한 자본주의적 책략에 불과한 이민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태도가 사회주의적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힐키트: “우리는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전혀 없지만, 그들이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야 한다. 프랑스의 벨기에인과 이탈리아인과 같이 역사적 발전 속에서 잘 진보한 인민만이 계급투쟁을 위해 조직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조직화하기에는 너무 뒤쳐져 있다.”

그러나 많은 대표자들이 이러한 반사회주의적 견해에 답하며 이민자들과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다.

프랑스의 줄스 어리Jules Uhry: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는 우리의 통일된 슬로건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추방하라!'라는 선언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미국 사회주의노동당의 줄리어스 해머Julius Hammer: “이민과 이주 문제에는 중간 지점이 없다. 이민 제한을 지지하거나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힐키트의 결의안은 … 완전히 반사회주의적이다.”

일본의 가토 토키치로Kato Tokijiro: “왜 일본인만 배제되는 것인가? 인종 문제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인들은 '황색 위험'이라는 유명한 현상에 분명히 영향을 받고 있다.”

토론이 끝났을 때 미국과 호주의 제안은 부결되었지만 위원회와 본회의 모두에서 이러한 결의에 대한 투표는 불행하게도 공식 절차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주의에 대한 논쟁과 마찬가지로 이민에 대한 논의에서 드러난 인종주의와 쇼비니즘은 1914년 이후에 일어날 분열을 예고했다.

여성의 참정권

내가 다룰 네 번째 논쟁은 1907년 대회에서 펼쳐진 여성의 참정권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배경을 검토할 가치가 있다. 수십 년 전에 이 문제에 관해 베벨과 엥겔스가 책을 저술한 이래로,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여성 억압이 자본주의와 계급 사회에 곧바로 뿌리를 두고 있고, 여성 해방의 길은 사회주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을 통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여성 억압, 특히 참정권과 같은 완전한 시민권의 부정에 대해서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지속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지지해 왔지만 주요한 약점도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전체 프롤레타리아트 투쟁 내에서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의 중심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많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한 구체적 투쟁에서 비켜서 그것을 방향의 분산으로 보면서, 여성해방을 단순히 사회주의의 부산물로 보는 경향이 존재했다.

몇 년 후에 이 상황을 회상하면서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말했다. “여성의 활동은 다소간 당이나 노동조합의 심부름꾼으로 간주되었고,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에서 의미 있는 요소로서 진정한 가치는 인정되지 않았다.” 1907년 이전에 제2인터내셔널은 여성 참정권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여 여성 해방에 관한 여러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처럼 공식적으로 채택된 결의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권리와 함께 여성의 참정권 문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서 소수파인 여성들과 그들이 할당받은 최소한의 구실을 반영했고, 그들의 노력과 능력은 지속적으로 과소평가되고 평가절하됐다.

다른 여러 이유들 속에서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 직전에 국제사회주의여성운동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의 주요 주최자이자 리더는 체트킨이었다. 1907년 여성 협의회에서 개괄된 중앙 정치적 캠페인은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두 가지 방향에서 발생했다.

첫째, 영국의 페이비안 협회Fabian Society와 독립 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의 대표들은 재산 자격에 따라 제한된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단계로 보고 지지했다. 그러한 재산에 따른 자격 제안은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로 정확하게 특징지을 수 있는, 더 특권을 가진 여성의 일부 조직에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둘째, 오스트리아에서 온 일부 대표들은 최근에 있었던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사회민주당의 입장을 지지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남성의 보편적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 진행 중이었고, 당은 여성의 참정권을 자신들이 더 중요한 투쟁으로 본 것보다 부차적인 문제로 보면서 문제로 삼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트킨은 두 가지 견해 모두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여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은 남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전술적 이유로 여성의 참정권을 미래의 투쟁과 분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반대한다.” 제한적 참정권에 대해 제트킨은 "제한적 참정권은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재산에 따른 특권이다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시민권 박탈은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타격이다라고 설명했다.

국제 여성 대회는 47 11의 투표로 보편적 여성 참정권을 위한 국제 캠페인을 촉구하는 제트킨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 후 여성 대회의 결의안은 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총회에 제출되었으며, 여기서 먼저 위원회에서 논의된 다음 전체 총회에서 논의되었다. 위원회에서 오스트리아당의 정책을 대체로 유지하자는 빅터 아들러의 발의는 9표 대 12표로 부결되었다. 본회의에서 결의안은 페이비안 협회 대표의 반대 1표 속에 채택되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제트킨이 강력하게 대변한 여성의 권리 옹호는 사회주의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의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서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역할에 대한 설명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이것은 새 책에 포함될 것이다.

군국주의와 전쟁

내가 다룰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토론은 1907년과 1910년 대회에서의 군국주의와 전쟁에 관한 것이다. 1889년과 1912년 사이에 제2인터내셔널의 9개 대회 중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국주의와 전쟁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른 어떤 쟁점도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양한 결의안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장한 시민 민병대로 대체하라는 요구, 자본주의적 군사비 지출에 반대할 필요성,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군축 및 구속력 있는 중재 요구, 비밀 조약에 대한 반대, 기타 등등.

그러나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있었던 토론이었다. 원래 네 가지 결의안이 그 문제를 다루는 대회 위원회에 제시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대표하여 아우구스트 베벨이 제안한 주요 결의안은 대체로 자본주의적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이전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들의 재진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위협에 대응하여 노동계급이 취할 조치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이 부족했다. 프랑스 대표단의 대다수를 대변해 장 조레스와 에두아르드 베일랑에 의해 제안된 두 번째 결의안은 총파업으로 전쟁 위협에 대처할 필요성에 대해 프랑스 대표단이 수년간 추진해 온 입장을 제시했다.

이 견해의 보다 극단적인 버전은 봉기와 군사적 불복종으로 전쟁 위협에 대처할 것을 요구한 구스타프 에르베Gustave Hervé의 결의안이었다. 쥘 게드가 내놓은 최종 결의안은 사회주의를 위한 총체적 투쟁을 제외한 어떠한 특별한 반전 조치도 거부했다. 토론에서, 베벨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의 결의안을 옹호했다.

"우리는 육군, 해군, 그리고 다른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지배적인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우리는 당의 활동과 특정 상황에서 당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투쟁 방법을 사용하도록 압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런 다음 에르베는 자신의 초좌파 입장에 대해 다소 익살스럽게 변호했다. 그의 연설에 정치적인 내용이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오락적 가치로 보충되었다. 조레스와 베일랑은 자신들의 결의안을 옹호했다. 베일랑의 말에 따르면,

“인터내셔널은 더 이상 사건을 지원하면서, 무기력하게 매달린 팔과 함께 무기가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커다란 세력이 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적들을 전멸할 수 있는 날이 올 때 적을 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살아있는 힘이 돼야 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논쟁이 1914년에 명백하게 될 제2인터내셔널의 쇼비니즘적 퇴보에 대한 몇 가지 암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SPD 내의 저명한 기회주의자인 게오르크 볼마르Georg Vollmar는 말했다. “사회주의가 국제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이 내가 훌륭한 독일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토론에는 흥미로운 순간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초점이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발언권을 얻어서 그녀, 레닌, 줄리우스 마르토프Julius Martov가 준비한 베벨 결의안에 대한 일련의 수정안을 발표할 때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수정안은 베벨 결의안을 상당히 날카롭게 하여 노동계급이 이러한 전쟁에 공식적으로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구체적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명시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대표자들에게 말했듯이 우리의 선동은 단순히 전쟁을 끝내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계급 지배의 전복을 앞당기기 위해 그것을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 수정안들은 결국 베벨의 초안에 포함되었고, 수정된 결의안은 위원회와 전체 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좌파의 큰 승리였다. 이러한 수정안에서 나온 결의안의 결정적인 마지막 단락은 1910년과 1912년에 제2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안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내가 그것을 읽겠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의 신속한 종식을 위해 개입해야 하고, 인민 대중을 선동하여 자본주의 계급 통치의 몰락을 재촉하기 위해 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에게 이 혁명적 호소는 단지 단어들에 불과했다. 3년 후인 1910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군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논의는 군축 요구와 분쟁의 국제적 중재에 초점을 맞추었다. 군국주의 위원회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약간의 토론이 있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칼 라데크는 많은 군축 요구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적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대부분의 다른 위원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 위협에 맞서는 공격적인 국제적 행동을 요구하는, 슈투트가르트에서의 베일랑-조레스 결의안과 유사한 수정안이 케어 하디Keir Hardie와 에두아르드 베일랑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 수정안은 차기 세계 대회에 상정되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결의안은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의 결론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논의에서 그것이 실제로 실행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은 거의 없었다.

토론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2인터내셔널 내부에는 국가적 전쟁 문제와 공격적 분쟁과 방어적 분쟁의 구분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그러한 구별은 정복 전쟁과 국가 주권 수호 전쟁을 구별할 수 있었던 19세기에 발생한 일부 전쟁에서 의미가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베벨은 "어떤 경우에도 그 전쟁의 성격이 방어적인지 아니면 공격적인지 여부를 쉽게 결정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러한 구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공세적 갈등과 방어적 갈등의 구분은 제국주의적 전쟁의 시대에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 중에 제2 인터내셔널 내의 모든 국가의 사회애국주의자들은 각자의 국가가 방어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을 사용하여 분쟁에서 한쪽 또는 다른 쪽을 지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국가 방위와 국가 주권의 문제가 전쟁 시기에 노동계급 운동이 직면한 과제를 어떻게 모호하게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보았다. 나는 여기서 분명히 우크라이나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1914년 이후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취한 접근 방식을 일관되게 따른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완전히 반대하고 규탄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자본주의 체제와 그 미국 및 NATO 후원 세력들에 대한 조금의 지지도 거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미합중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기 정부의 전쟁 책동을 반대하는 것을 제1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2 인터내셔널의 유산

내가 이야기한 토론들에 대해 세 가지 짧은 논평을 하며 결론을 내리겠다.

“첫째, 그들 각각은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 기회주의의 발전과 성장, 그리고 경향으로서 구체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그들이 제출한 공식적인 서면 결의안에서 표현된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둘째, 단지 제2인터내셔널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보여준다. 많은 기회주의적인 주장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신으로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반박되었다. 세 번째는 시간에 맞춰 자신을 배치하고 이러한 논쟁을 뒤늦은 깨달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자는 그 대신 주인공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서, 그들이 당시에 본 것처럼 사안들을 봐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논쟁을 읽으면 1914년 이후의 분열이 불가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4년 이전에는 단 한 명의 좌파 지도자도 그러한 분열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레닌도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아니다. 그들 중 누구도 제2인터내셔널의 단결에 도전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14년 이전에 제2인터내셔널은 단순한 사회주의자들의 국제 조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노동계급 운동의 일종의 세계 의회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똑같이 보였다. 이 의회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모든 측면에서 사실상 원칙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더 일찍 분열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는가? 그들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눈이 멀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살았던 기간 동안의 모든 수치를 배치하고 당시에 알고 있었던 것과 당들이 실천에서 직면한 것을 기반으로 평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처음에 말했던 요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2인터내셔널은 운동이었다. 다양한 경향, 모순, 강점 및 약점을 포함하는 인간들의 살아있는 운동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노동계급 운동의 반영이었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고는 1914년 이전의 제2인터내셔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토론을 읽는 것이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평가를 얻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이 사회주의의 유산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도록 돕는다.

(기사 등록 202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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