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프랑스 총선 결과를 보며 생각하는 한국 정치
요즘 뭔가 힘이 날만한 희망적 소식은 많지 않다. 화물연대가 윤석열 정부 초기에 여전한 투쟁의 필요성과 힘을 보여 준 정도가 기억난다. 미얀마와 우크라이나 등 해외에서도 좋은 소식은 많지 않다. 미국에서 아마존, 스타벅스에서 새로운 노조 조직화의 물결이 시작됐다는 소식 정도가 있다. 덧붙여 최근 두 가지 선거 결과는 고무적이다. 하나는 콜롬비아에서 역사상 최초로 좌파 대통령과 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오랫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친미적이고 부패한 우파세력에 대한 환멸과 분노 속에서, 좌파 게릴라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콜롬비아판 트럼프라고 불리던 포퓰리즘적 극우익인 로돌포 에르난데스를 꺾고 대통령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콜롬비아를 뒤흔든 대중투쟁의 물결 뒤에 남겨진 결과다.
미국의 뒷마당처럼 취급되면서 마약, 범죄, 내전에 시달리며 부패하고 폭력적인 독재정부와 친미우파들에게 유린당해온 이 나라에서 이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마 지금 콜롬비아 민중의 심정은 97년에 반세기 만에 최초로 일당독재 체제를 벗어나 야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던 당시 우리들의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부 집권의 물결(핑크 타이드)의 중요한 디딤돌이 되면서 곧 있을 브라질 대선에서도 끔찍하게 반동적인 보우소나르 정부가 무너지고 좌파로 정부가 교체되는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응원한다. 또 하나는 프랑스 총선 결과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좋은 소식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극단적 중도’라던 마크롱 집권당의 추락이다. ‘좌도 우도 아닌 중도’를 말하던 사회당 출신의 마크롱은 집권 이후 갈수록 신자유주의적 우익으로서 본색을 드러내 왔고 결국 이번에 심판받았다.(마크롱의 정치적 궤적은 여러모로 안철수와 비슷하다.)
둘째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으로 비판받아온 르펜의 대도약이다. 인종주의적 혐오를 선동해 온 르펜의 국민연합은 이번 선거에서 극우를 결집시켜 5년전보다 10배의 성장이라는 섬뜩한 결과를 얻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이 빈민층과 노동계급적 기반을 강화하면서 전국적으로 골고루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경고 신호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셋째, 급진좌파 정치인 멜랑숑이 주도한 좌파 선거연합 ‘신생태사회민중연합(NUPES,‘뉘쁘’)의 성공이다. 이것은 사회당의 급속한 몰락에도, 프랑스 정치에서 좌파적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물론 좌파 전체가 얻은 득표 자체는 5년전과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구성이 변화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타협하고 온건개혁을 추구하던) ‘사회자유주의’적인 사회당이 몰락한 자리를 급진좌파인 멜랑숑의 정치경향이 대체하는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에 ‘뉘쁘’가 얻은 147석 중에서 멜랑숑 그룹 80, 사회당 29, 녹색당 21 공산당 13을 차지했다.
‘뉘쁘’는 이번 선거에서 최저임금 1500유로 인상, 부유세 재도입, 생필품 가격 동결, 개악노동법 원상회복, 연금제도 개선, 뉴딜 생태계획, 제헌의회 구성 등의 급진적 공약을 제시했다. 사회당 소속 정치인이었던 멜랑숑은 왼쪽으로 이탈 후에 지난 15년 동안 꾸준한 도전 끝에 결실을 맺은 셈이다.
주류언론의 외면과 마녀사냥을 당해 왔고, 경찰(검찰이 설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경찰이 가장 강력한 억압기구이다)과 가장 적대적 관계에 있는 정치인이었지만 말이다. 멜랑숑은 전통적 주류개혁정당인 사회당(한국의 민주당과 비슷)에 다시 흡수되거나, 별 볼일 없는 세력으로 주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 사회당까지 선거연합에 끌어들이면서 그들 내부의 좌우분열을 일으키고, 결국 사회당을 하위파트너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유럽 좌파들의 일부가 ‘프랑스 좌파가 샌더스나 코빈, 포데모스와도 다른 새로운 길을 보여 줬다’고 기대하며 평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아직 낙관하기는 이르고 몇 가지 불안 요인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프랑스 좌파의 성공은 한국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실 프랑스의 좌파들이 이번에도 과거처럼 각자도생으로 대응했다면 이런 성과를 낳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진보좌파들이 차이점을 비판하면서도 협력하고 공조할 필요성은 여전한 것이다. 또 멜랑숑은 온건 개혁정당을 단지 비난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왼쪽 그룹이나 지지기반을 자기들 쪽으로 가져올 수 있는 힘, 능력, 전술적 유연성을 보여 줬다.
그 점에서 이 나라에서 요즘 여기저기서 나오는 선거 평가들을 보자면 참 답답하다. 한편으로 민주당에 대해서 ‘검찰개혁, 언론개혁, 강성 지지층, 처럼회가 문제였고 그래서 중도층을 놓쳤다’는 이야기만 무한반복되고 있다. 즉 ‘기득권의 핵심들과 정면 대결하며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기보다 윤석열 정부와 협치도 하면서 중도로 확장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를 넘어선 수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의 만장일치된 견해로 족벌언론들뿐 아니라 개혁언론들의 각종 지면과 토론회에서도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계속 반복되고 있다. 특히 개혁언론과 지식인들은 스스로도 ‘검찰공화국이 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검찰과 싸운 게 문제였다’고 지적하는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 전에는 ‘검찰공화국은 허구’라며 검찰개혁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니, 선거 후에는 ‘그렇게 싸우니 오히려 검찰공화국이 왔다’고도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검찰, 족벌언론에 맞서는 것이 차별, 혐오, 반노동에 맞서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멜랑숑이 경찰, 주류언론에 맞서는 것은 이슬람포비아와 극우혐오정치에 맞서는 것과 대립되지 않았다.
진보정당들에 대해서도,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과 구조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새로운 대안을 건설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놓는 게 아니라, 민주당과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진로를 제안하는 이야기들만 넘쳐나고 있다. ‘민주당과 더 강하게 맞서라’는 식의 이런 평가들을 보고 있자면, 지금 집권여당과 정부가 여전히 민주당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또, 진보정당들이 아주 긴 분열과 반목 끝에 정말 오랜만에 선거연합을 이루어서 낳은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 준 작은 가능성이라도 평가하기는커녕, ‘진보정당들은 의견과 이념을 넘어서 원칙과 상식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뭔가를 도모하기 어렵다’는 ‘저주’를 평가라고 내놓고 있는 이들마저 보인다.
진보좌파가 어떻게 힘을 모으며 윤석열 정부와 정면으로 맞설 진정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그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며 개혁 추진에 머뭇거리던 민주당에 실망한 지지자들을 왼쪽으로 견인할 것인가라는 고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진보정당들 속에서 ‘법사위도 그냥 국민의힘에 넘겨주자’는 주장까지 들린다.
‘멸공은 시대정신이고, 문재인 정부는 사회주의적이었고, 민주노총과 연대는 틀렸다’는 박성민같은 정치평론가가 좌우를 넘나들며 불려가서 각 정치세력의 진로를 코치해주고 너도 나도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내부적 균열과 위기 속에서도 ‘이명박근혜 시대로의 복귀’를 거침없이 추진 중일 것이다.
엊그제 <조선일보> 김대중은 전통적 특권 엘리트들이 다시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있는 것을 만족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의 등장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정 환경과 전문 교육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들이 리더로 부상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자상(像)을 정상화하는 의미가 있다.” 촛불의 도전으로 크게 흔들렸던 한국의 기득권 체제는 이렇게 ‘정상화’되고 있다.
● 누가 하든 침략전쟁은 침략전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반전평화와 반제국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명백히 러시아를 규탄하고 당장 철군을 요구해야 마땅하다. 여기에는 어떤 유보나 (푸틴도 문제고 젤렌스키도 문제다는 식의) 양비론이 있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을 보자면 푸틴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요즘 서방 강대국 지배자들과 주류언론이 보이는 위선적 이중메시지는 지적하고 싶다.
마침 최근에 노엄 촘스키가 인터뷰에서 이것을 아주 신랄하게 지적했다. 이번 전쟁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 전반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이것은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다. 촘스키는 먼저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의 글을 언급한다. 여기서 프리드먼은 푸틴을 비난하면서 ‘이런 전범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 우리는 히틀러 이후로 이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촘스키는, 미제국주의의 악행을 굴하지 않고 고발해온 백전노장답게 이렇게 답한다.
“이 말을 들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워싱턴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는 전범들이 있다. 바로 최근 <워싱턴 포스트>에 이라크를 침공한 전범인 조지 W. 부시와 인터뷰가 실려있다. 그는 손주들과 놀고, 농담을 하는 사랑스러운 할아버지로 그려진다. 또는 동시대의 주요 전범인 헨리 키신저를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는 그를 정중하게 큰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다. 캄보디아에 대대적인 폭격을 지시한 게 바로 키신저다. 그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폭격하라’고 했다.”
물론, 이것이 지금, 여기서 자행되고 있는 푸틴의 전쟁범죄를 변호하거나, 눈감아주는 정치적 태도에 이용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런 오류에 빠져서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다. ‘미국이 하면 전쟁범죄이지만 러시아가 하면 반나치 해방전쟁’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서방 강대국 지배자들, 그들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던 서방 주류언론들, 그 뒤를 쫓아가던 친미 국가의 지배자들과 조중동같은 언론들이 피로 얼룩진 과거를 세탁하는 것에 면죄부로 이용돼서도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서방 강대국 지배자들과 주류언론들이 러시아를 규탄하면서 펼치는 논리와 주장들을 잘 기억하고 저장해 둬야 한다. 그리고, 만약 또다시 서방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폭격하며 전쟁을 벌이거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을 옹호하는 일 등이 벌어진다면, 그 때 우리는 그것을 그들의 얼굴에 들이대야 한다. ‘너희가 하면 중동 민주화와 반테러의 전쟁이고 남이하면 전쟁범죄냐’고. (덧붙여, 지금 당장은 북한의 광명성 발사는 ‘평화 위협의 도발’이라더니, 어제 누리호 발사 성공은 찬양하기 바쁜 조중동과 국힘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 그럼에도 ‘기레기’ 표현을 쓰지 말았으면 하는 이유
한국의 족벌, 주류언론들에 문제가 많고 이것이 언론에 대한 대중적 신뢰도를 바닥으로 끌어내려 왔다는 것은 온갖 사실들로 확인되고 있다. 주류언론의 문제들이 낳는 수많은 폐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수많은 이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주류언론, 특히 족벌언론들에 대한 많은 이들의 불만과 분노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그것은 정당한 분노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에 <조선일보>를 비판한 글마저도 이적표현물이라고 검찰에 기소당해서 감옥에도 갔다온 적이 있는 경험당사자로서 더욱 그렇다.
요즘 윤석열 정부와 주요 인사, 정부의 정책과 방향에 대한 족벌언론들의 철저히 편향적인 뻔뻔스럽고 낯간지러운 보도를 보면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목놓아 외치던 이들이 내로남불의 초절정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많은 부분,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류언론의 위치와 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도 결국 이윤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기업이고 자본이다. 한국에서 주요언론들은 족벌가문의 소유이거나 건설, 금융자본들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기성체제의 핵심질서를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대변하기 쉽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에서 ‘동의와 설득을 통한 지배’에서 언론의 구실은 핵심적이다. 그래서 언론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지배(국가)기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이것은 검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와의 협력과 유착을 낳기 마련이다. 더불어 주류언론의 구성원들은 대개 이 사회의 엘리트들로서 특권의식과 시각, 관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개혁언론들은 이런 족벌언론들과 분명 다르지만, 중요한 국면에서는 결국 족벌언론들이 짜놓은 프레임을 따라가면서 갈수록 그 차별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실망하게 된다. 특히 언론 피해자들을 외면하면서 (‘자율 개혁’을 주장하며) 언론개혁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데서는 거의 대동단결이 이뤄지는 양상이었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이토록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언론과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성찰하며 더 앞장서 개혁을 추진해도 모자란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니 주류언론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갈수록 커지고, 더 강한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언론 종사자들을 ‘기레기’라고 매도하고 모욕주는 것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개별적 기자 등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인신공격적 조롱과 막말, 욕설 등을 하는 것은 지지할 수가 없다. 언론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이겠지만, 이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은 스스로 돌아보고 자제했으면 한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족벌언론들이 보여 온 기막힌 막장 행태들을 보라. 그것을 주도한 기자들이 그동안 함부로 낙인찍고, 편견을 부채질하고, 조롱과 혐오를 부추겨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해 온 피해자들을 보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것은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그것이 낳은 피해규모는 지금 일부 언론과 기자들이 겪고있는 불편함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규모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언론과 기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그 반대편에서 대상만 바꿔서 (아무리 소규모라도) 따라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는 없다.
첫째. 낙인, 편견, 혐오, 조롱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 그것이 대규모이든 소규모이든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너도 그만큼 당해봐라’는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누구도 혐오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일관돼야 한다.
둘째, 지금 주류언론들이 나타내는 문제들의 원인과 책임은 일선의 말단 기자들 보다는 구조적인 것에 있고 언론사의 사주, 대주주, 데스크와 고위임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단 기자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기 보다는 진짜 고위 책임자들을 분명히 겨냥해서 더 정면으로 강력하게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게 더 필요한 일이다.
셋째, 혐오성 멸칭의 사용과 조롱성 비난의 남발은 말단의 일선기자들의 반성과 성찰보다는 심정적 반발 속에 오히려 그들이 언론개혁의 반대세력의 편으로 더욱 더 밀착해 가도록 내치는 역효과를 불러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론개혁 운동진영의 힘을 키우고 세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많은 이들이 언론피해자들에 대한 커다란 공감, 언론개혁에 대한 강력한 열망 속에서 일부 과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이에 대한 대부분의 언론과 구성원들의 반응도 참 씁쓸하다. 댓글창을 막아버리고, 고소와 고발을 하고,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몰상식한 집단으로 몰아버리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검찰개혁 지지자들을 모조리 비이성적 팬덤으로 몰아가듯이)
그러기 전에, 먼저 언론과 기자들이 그동안 함부로 낙인찍고, 편견을 부채질하고, 조롱과 혐오를 부추겨서, 기사와 댓글의 소용돌이 속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해 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개선 노력을 약속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좌표 찍히고 매도를 당해보니, 그동안 우리에게 그런 괴롭힘을 당해 온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공감하겠다’며 말이다. 그런 것이 선행되지 않기에 언론과 기자들의 이런 반응은 ‘내로남불과 선택적 공감’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기레기’라고 매도하고 모욕주고 조롱, 막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그것이 진실과 정의를 쫓는 정말 훌륭한 기자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시대에 정말 보기 싫고 욕 나오는 기사와 보도들이 넘쳐나는 속에서도 너무나 소중하고 그래서 더욱 빛나는 기사와 보도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탐사보도들이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윤석열 시대를 버티고 이겨낼 중요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아주 큰 도움과 감동까지 얻었던 보도들을 소개한다.
<잇따르는 죽음.. 벼랑 끝에 선 '발달장애’> https://www.youtube.com/watch?v=lgMAHuwQ77s
‘스트레이트’의 지금 꼭 필요한 방송이었다. 특히 독일 상황이 너무 부러웠다.
<‘한동훈 처가 연루’ 주가조작범, 검찰로부터 특혜 정황> https://www.youtube.com/watch?v=kC3Zm_eh_xo
‘살아있는 권력 감시’가 무엇인지 그 답을 보여 주는... 역시 ‘뉴스타파’였다.
<한동훈 장관 일가의 ‘스카이캐슬’ 논란> https://www.youtube.com/watch?v=QMP3lGxVQaI
권력2인자를 겨누는 ‘PD수첩’... 윤석열이 가장 없애고 싶어할 언론중 하나.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 특집 2부작; 제1부 포화 속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wvQyKEXQFJI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 특집 2부작; 제2부 테티아나의 일기> https://www.youtube.com/watch?v=2WcB_i5cR7s
전쟁의 참상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 더불어 매주 토요일 방송하는 ‘KBS 세계는 지금’은 정말 유익하고 풍부하다.
<GPS와 리어카> https://www.youtube.com/watch?v=tvZ0D0CuCs8
최근에 가장 감동받았던 탐사보도였다. 과장과 외면 속에 있던 ‘폐지수거노인’의 진실에 대한 철저한 탐사취재. ‘시사기획 창’이 만든 몇 달전 ‘혐오 팬데믹’도 유익했다.
<난민, 우리가 몰랐던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vj4FZX8CETo
아프간 난민, 우크라 난민만이 아니라 벽을 허물고 모든 난민을 환영해야 한다.
● 우크라이나 민중의 눈으로 보는 것을 잊지 말자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어두운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참혹한 전쟁 상황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사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은 최대 3만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국외로 탈출한 난민이 650만 명이고, 국내 난민은 7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러시아의 폭격과 포격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사회 기반 시설(교량, 도로, 철도, 상수도 등)이 파괴됐다. 학교와 병원과 아파트와 쇼핑센터가 무너지고 잿더미로 변했다. 나아가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넘어서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유가와 식품 가격 인상을 낳고 있다. 가난한 저소득 국가일수록 더욱 더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수백만 명이 기아에 직면해 있다.
전쟁이 불러온 서방의 경제제재와 경기침체, 푸틴 정부의 징집과 억압 통치의 강화 때문에 평범한 러시아인들에게 피해와 고통이 다가온 것은 물론이다. 푸틴 정부는 전쟁 초기에 반전시위에 나선 러시아 시민들을 신속하고 가혹하게 탄압하며 그 싹을 잘라버렸고 갈수록 독재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더 나아가 전쟁은 전세계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과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과 환경 파괴를 더 가속화하는 효과도 낳았다. 반면에 전쟁의 살육과 파괴 속에서 군수산업체와 무기사업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이 전쟁은 푸틴 정부와 국영언론과 관변언론들이 말하는 구차한 명분 때문이 아니라,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패권적 제국주의가 진정한 이유였다. 최근에 푸틴은 ‘표트르 대제 탄생 350주년 기념행사’에서 "(러시아 영토를) 되찾고 강화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는 연설을 통해 이것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푸틴의 지정학적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묵시론적 세계관이나, ‘강한 러시아의 부상은 세계적 구원이 될 것’이라는 러시아 국영선전 출판물(RIA Novosti)의 기사를 봐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노자는 푸틴의 진정한 목적은 유라시아와 흑해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고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천연자원들을 강탈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한 소련식 중공업 복합체를 복원하는 것”이 노림수라는 것이다.
나아가 “군사력을 이용해 완결된 영토적 제국을 건설한 뒤에 서방과의 경쟁으로부터 차단된, 즉 보호 받는 경제 영토 안에서 은행 자본과 IT 자본 등을 키우려는 게 러시아쪽의 장기적 계획”이라고 분석한다. 그래서 푸틴 정부는 이미 개전 초기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NATO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약속한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의 영토 장악과 강탈을 노리며 전쟁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현재 돈바스에서 크림 반도까지의 회랑을 장악한 러시아 정부는 오데사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집게발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러시아의 잘못이 나토의 확장으로 지금의 상황을 부추긴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전쟁 상황을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익과 동맹 강화에 이용하려는 냉혹한 계산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아프간 철군에 이어서 미국 힘의 한계를 다시 드러냈다. 유엔총회와 유엔인권이사회 등에서 러시아를 반대하는 각종 결의안에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 남아공, 브라질, 심지어 멕시코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지배자들 속에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통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뉴욕 타임스〉가 그러한 타협을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고, 냉혹한 미국패권 전략가인 헨리 키신저도 그런 해법을 촉구하고 있다. 바이든도 “푸틴의 축출과 러시아의 약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고,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도 “러시아에 굴욕감을 줘서는 안 된다”며 거들고 나섰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냉정한 현실적 이해타산이다. 미국으로서는 이 전쟁이 낳은 효과 속에서 이미 무기와 화석연료 판매시장에서 지분 확대, 나토 신규 가입과 동맹 강화 등 많은 것을 얻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유럽국가의 지배자들도 ‘내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더 이상 ‘남의 나라를 위해’ 난민을 수용하고 자금을 지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을 편들다가 결국 ‘이스라엘의 합리적 방안을 수용하자’며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라는 압력을 가하던 과거 아랍국가 지배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세계를 자신들의 패권 다툼과 약육강식의 거래가 횡행하는 ‘거대한 체스판’처럼 여기는 강대국의 지배자들이 보여 온 ‘냉혹한 현실주의 지정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얼마 전 러시아 외교장관이 서방지배자들을 향해 “우크라이나는 팔레스타인이고, 러시아는 미국이라고 상상해보라”며 ‘공감과 동병상련’을 호소한 것도 참 시사적이다.)
그러나 현재 우크라이나 민중은 그러한 타협과 양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최근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시민 중 82%가 러시아에 대한 영토 양보를 반대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77%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억압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눈으로 사태를 보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들으려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모든 사안들은 언제나 다양한 측면의 결합이다. 2019년 ‘검언대란’이 검찰과 언론의 반동이면서 교육불평등에 대한 불만도 일부 섞여있었듯이 말이다.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방어 전쟁이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 정부와 친러 분리주의자들 사이의 충돌,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러시아-중국 블록 간의 경쟁이라는 요소도 섞여 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을 보면서, 러시아와 중국이 손을 잡고 새로운 유라시아 패권블록을 만들 수 있다는 관측과 이러한 과잉 팽창 시도가 오히려 러시아의 쇠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 모두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질서의 지각변동은 세계를 더욱 불안정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 진영 속에서 이 전쟁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 차이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차이와 논쟁 속에서도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방조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민중의 고통과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지정학적 질서 변화만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반제국주의 좌파의 핵심 정신을 놓치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아가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권리를 지지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이 침략과 폭격을 중단하고 러시아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2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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