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들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 우크라이나 침략: 비관의 이유
이미 누누히 지적됐지만, 국민 국가 사이의 관계는 담임 선생님의 통제가 잘 안되는 학급에서의 불량배적 남학생 사이의 관계와 묘하게 그 패턴이 엇비슷합니다. 학폭 방지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지 않고 선생님이 수수방관하고 폭력적 아이들이 좀 있는 학급이라면 남학생 사이에 매우 쉽게 "힘의 서열"이 정해집니다.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가 비공식적 "짱"이 되고, 그 주변에 또 다른 - 그러나 그보다 좀 안되는 - 싸움꾼들이 중간 보스 노릇을 맡고 나머지 남학생들이 그들에게 맞고 살든지 줄을 서든지 별로 달갑지 않는 선택을 강요 받고....국민 국가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힘의 서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 뒤에는 엄청난 "보너스"가 되지요. 예컨대 1990-2000년대의 미국의 '독주',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룰'의 강요를 생각해보시지요. 제2차 대전 전승국에다 냉전 전승국이 아니었다면 가능했겠어요? 반대로 패전국인 독일이나 일본은 그 주권의 일부분을 상실한 만큼 계속해서 각종의 "불이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만약 미국과 일본이 서열이 동등한 국가이었다면 과연 차후 엔고와 초저금리, 증시 버블, 그리고 버블 경제의 내파와 장기 침체로 이어질 1985년의 플라자 합의라는 매우 불리한 '딜'에 일본은 꼭 동의해야 했을까요? 동의한 배경은 단순치 않지만, 전승국이자 군사적 후견국인 미국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는 패전국 일본 특유의 상황이 크게 작동된 것도 그 배경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니 국민 국가 세계에서는 승산이 있는 전쟁 만큼의 좋은 투자처도 없습니다.
'전승'이 중요한 만큼 지는 전쟁이 '설욕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1904-5년 러일 전쟁에서의 패전이 결국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뇌관이 됐지만, 나중에 1917년 혁명이 보수화된 결과로 그 권력을 굳힌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설욕"을 오랫동안 도모했다가는 1945년에 미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패전을 이용해 그 뜻을 이루었죠.
스탈린이 그 때에 얻은 전리품이란 바로 1904-5년 패전으로 잃은 사할린의 남부와 요동반도의 요충지 (여순과 대련), 그리고 38선 이북의 조선반도이었습니다. 1904-5년 러일 전쟁을 앞둔 러-일 교섭 국면에서 러시아가 줄기차게 조선반도 39선 이북 지역에서 일본군 주둔 포기를 요구한 것까지 염두에 두면 1904-5년과 1945년 사이의 '연관성'은 더 뚜렷해집니다. 하기사, 1945년 소련의 참모본부에는 러일 전쟁 참전을 경험해 본 사람도 몇 명 있긴 있었습니다. 40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것도 아니지요.
'전승'과 '패전'의 이분법으로 본다면 1991년 이후의 러시아는 좀 중간적이고 애매한 입장이었습니다. 일면으로는 냉전에서 미국에 패배해 '소련 연방 붕괴'의 트라우마를 안게 됐지만, 또 일면으로는 '주권 상실'까지 겪지 않았습니다. '주권 상실'까지 겪지 않은 만큼 처음에는 신생 러시아의 주도층은 '주권 존중'을 조건으로 해서 구미권 중심의 세계 질서에의 편입을 시도했습니다.
지금 '나토 문제'를 우크라이나 침략의 명분으로 삼기도 하지만, 사실 러시아야말로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에다 자국의 '나토 가입'의 가능성을 타진해 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러시아의 '나토 가입' 제안 등에 시쿵둥한 반응만 보였죠 (러시아가 가입했다면 나토 회원국에게 자국의 무기를 판매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미국의 경쟁자가 됐을 겁니다). 거기에다 1999년 유고 공습 등의 결정적 국면마다 러시아 지배층의 이익이나 의견을 깡그리 무시했죠.
그 미국이 아직 '힘'의 이미지를 과시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지배층은 대응을 자제하면서 내부 정리 (권위주의적인 권력 피라미드 공고화 등)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의 미국 패색이 짙었던 2007-8년에, 더 이상 미국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해서 친미 지향의 조지아 (그루지아)를 2008년에 처음으로 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의 권부는 사실 같은 프로젝트를 계속 실행해온 것이고, 우크라이나 침략은 그 프로젝트의 논리적 결과물입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1991년 패배에 대한 설욕전, 즉 (아마도 발틱 공화국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제정 러시아/소련의 영토적 복구입니다. 그 프로젝트 실행의 한 수단이 구소련 국가와의 경협 증진 (무관세 무역 지대 구축 등)이라면 또 한 수단은 바로 '무력'입니다. 2013년 마이단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경협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유럽 연합 가입에 올인하자, 결국 경협이 아닌 무력 수단 적용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표면적으로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의 명분으로 말이 되지 않는 '탈나치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을 가족으로 둔 사람입니다)나 '탈군사화' (러시아야말로 우크라이나 이상으로 군사화된 사회죠)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 내부의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냉전에서의 패전, 그리고 소련 몰락의 결과며, 이 패전에 대한 설욕을 하자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취소시키거나, 적어도 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해야 한다는 논리죠. 이 논리의 차원에서는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라기보다는 서방을 상대로 한 러시아의 '설욕전'이 벌어지는 '전장'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를 탈주체화시켜 대상화시키는 이 제국주의적 '설욕전'의 논리에 러시아 지배층뿐만 아니라 그 대중의 대부분 역시 동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침략에 대한 '결사 반대'를 하는 전체 인구의 약 15-16%는 주로 대도시 지식인층이나 젊은 전문가층이라면 대부분의 노동자층은 아직도 국가의 '영토 수복'의 논리로부터 자신들을 독립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옛 제국 영토 복구'라는 지배자들의 이해 관계와 정반대의 완전히 다른 이해 관계를 노동계급이 가지고 있다는 그 계급 의식이 아직도 익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 신분의 대물림이 되는, 계급적 위치가 정지된 사회의 틀이 공고화되어버리면 그 계급 의식의 형성이 어쩌면 더 빨라질 것이고 정부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에 대한 비판 의식도 높아지겠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그 단계에 전혀 와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단기, 중기적 예상은 다소 비관적입니다.
아마도 푸틴 정권의 의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장악 내지 초토화는 러시아 내부에서 크게 제재를 받지 않고 몇개월, 길어지면 몇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초대형 국가 범죄에 의미 있는 제동을 걸 수 있는 대중적인 좌파적 동원은 아직도 러시아 사회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1-2의 세대가 교체돼야 그 때 가능해질는지 모르죠.
● 다원형 사회와 일원형 사회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서로 거의 접점이 없고 그 체제상으로 상호적으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1990년대말까지만 해도 그 두 나라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도 않았습니다. 양쪽에서는 소비에트 당-국가가 망한 뒤에는 그 빈 자리를, 서로 경쟁하는 몇 개의 과두재벌/관벌 집단들이 메꾼 것입니다. 내용으로 보면 주로 합법적인 방식도 아닌 각종 "뒷거래"나 아예 암살,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비방, 사생활 폭로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그 집단 사이의 경쟁은, 적어도 겉으로 봐서는 "민주주의"와 엇비슷한 외모를 보이긴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경쟁적 선거들이 이루어지고, 부정 행위는 있다 해도 그 개표 결과는 민심의 방향을 대체로 사실대로 보여주기도 했죠. 단, 과두재벌 집단들이 장악한 매체들이 그 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999년까지만 해도, 가장 힘이 강한 (신흥 재벌 베레조비스키 등이 뒷받침한) 옐친의 정치적 집단과 전면 경쟁하는 루즈코브 (모스크바 시장)-프리마코브 (전 대외 첩보부 부장, 동양학자) 집단도 엄연히 있었던 것이죠. 그 경쟁은 법적 "룰"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좌우간 그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그렇게까지 다른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한데 약 1999-2000년쯤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길은 갈려져 버렸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지배 집단들이 가면 갈수록 차후 유럽연합이나 나토 등 서방 체제에의 편입에 더 큰 관심을 나타내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경쟁 체제는 일원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옐친의 후임으로 "황위"에 오른 푸틴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포섭하거나 (프리마코브나 루즈코브의 경우) 제거하고, 재벌들을 무력화시켜 자본을 정치에 복종케 했습니다.
주로 첩보 기관 출신의 푸틴의 측근들이 그 최상위를 차지하고, 그들의 정치적 후원을 받는 일부 행정, 경제 관료들이 중간과 밑에 있는 일원적 체제는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가면 갈수록 강화시킨 것입니다. 지역에서도 그 일원적 시스템에 맞지 않는 지방 정치인들이 (하바롭스크의 전 도지사 푸르갈처럼) 제거되고, 지역 "토호"들이 제거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푸틴의 측근들이나 그 꼬봉들에게 줄을 대고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원적 관료 독재 시스템은 위로부터의 정치적 시혜 ("보호")와 아래로부터의 "충성"과 상납의 맞교환으로 운영되며, 생각보다 상당히 강고하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 침략 개시 이후 서방과의 관계 단절로 상당수의 재벌, 관벌들이 서방에 있는 재산을 잃는 등 막대한 손실을 봤지만, 아직까지는 그 사이에는 망명자는 몇 명에 불과하고 (과거의 고급 경제 관료인 추바이스나 드워르코비치 등) 공개적 비판자는 거의 없습니다. 최고 "보스"에 대한 하위자들의 속 생각은 어떻든간에, 일원 체제는 어느 정도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을 보장하긴 합니다.
세계체제 핵심부 ("선진권")의 정치가 다원형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다양한 이해 집단 (지배층의 여러 분파와 총노동 등)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이해 관계들을 조절해주는 방식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죠. 주변부의 사정은 좀 다릅니다. 대체로는 혁명을 거치지 않은 사회들은, 그 경쟁은 비록 명문화된 법률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쨌든 몇 개의 유력 집단들이 경쟁하는 다원 시스템을 유지합니다.
우크라이나도 그렇지만, 예컨대 규모가 좀 더 큰 제3세계 국가 중에서는 브라질이나 남아공은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단, 중국과의 경쟁에 밀리고 낙살리트 등 모택동주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는 인도에서는 요즘 모디 총리 밑에서 다원형 시스템에도 일부 일원형 시스템의 요소를 도입하는 모양입니다.
혁명을 거친 사회의 경우는 많이 다릅니다. 혁명 과정과 그 "냉각", 즉 보수화의 결과로 금일 중국, 북한, 베트남과 같은 당-국가들이 생겨 날 수도 있고 이란과 같은 신정 국가가 태어날 수도 있죠.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러시아를 일원적인 방식으로 지배하는 첩보 기관 관료 출신들도 1917년 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비밀 경찰 ("체카" 및 그 후계 기관들)의 정치적 후예들입니다.
보통 혁명은, 기존 사회적 세력 (재산가, 기성 정치인 등)의 제거 내지 무력화,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지배 세력 영향력의 절대화를 의미하는 거고, 그 과정에서는 일원적 지배의 틀이 잡히는 것은 다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일원적 지배가 해당 주변부 국가로 하여금 추격형 경제 성장과 지정학적 경쟁에서의 참여를 보다 쉽게 하도록 돕는 기능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예컨대 총노동을 국가에 종속시키고 지식인들의 창작의 자유를 무참히 빼앗기도 하지요.
한국의 경우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북한에서 사회 혁명이 막 진행됐던 1940년대말에는, 남한에 있어서의 미국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다름이 아닌 "혁명 방지"이었습니다. "혁명 방지"란, 신생 이승만의 정권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김성수 등의 민주당계 등을 포함해서 기존의 사회 세력들의 위치를 보장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죠.
미국은, 미국과 연줄이 있는 몇 개의 보수 세력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한 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면 다른 세력이 국정 운영을 맡아 반공 전선을 계속 지키는 행태를 일단 자국 이해 관계의 입장에서는 이상적이라고 봤죠. 조봉암의 진보당이 강제 해체를 당했을 때에 미국은 침묵했지만, 자유당 정권의 민주당 압살 시도만큼 미국은 단연히 막아주었죠.
그러니 자유당이 1960년4월에 몰락한 뒤에는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인계해서 친미 반공 노선을 별 문제 없이 지속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미국은 1970-80년대에 박정희, 전두환으로 하여금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등 궁극적으로 어떤 대안적인 친미적 세력이 자라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측면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배려" 속에서 큰 민주당 세력들은, 나중에 1980년대의 격변기가 배출한 급진적 노동, 시민 사회 운동가들의 상당 부분을 포섭, 보수화시켜 한국 사회에 미국의 신자유주의 모델을 도입할 수 있는 정치적 배경이 된 것입니다.
지금 극우 세력들이 다시 집권했지만, 몇 년 후에 세계적 경기 침체에 따른 한국 부동산의 위기, 부동산 가격 하락 등으로 극우들이 힘을 잃으면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집권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원형의 일종인 한국의 양당제 모델 속에서는 극우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의 권력 교체는 정기적이며 비교적 순조롭습니다.
그렇다면 한국형 정치적 다원주의를, 뉴라이트들처럼 찬양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형 다원 체제의 문제는, "다수"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수의 노동 인구나 영세민들은 정치적으로 보수 양당의 "식민지"에 불과하고, 그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진보 정당들은 원내 극소수 정당 내지 원외 정당의 입장에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형 다원주의는 미국형 양당제의 모든 문제점들을 다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지식인들의 창작의 자유나 노동자들의 결사권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지만, 총노동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무력합니다....
(기사 등록 20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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