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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퇴보하고 있는 세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7. 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침략을 결사 반대하는 러시아 출신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국가의 "퇴영적 성격"은 늘 중심적 화제 중의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러시아 국가와 군대의 행동이 21세기에 벌어진다는 것조차를 가끔가다 믿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타국에 대한 침공을 미국도 최근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벌였지만, 러시아는 침공에 더하여 이제 슬금슬금 군사 점령한 우크라이나 국토를 러시아에 병합하려는 움직임까지 본격화합니다.

군사 침략을 통한 자국 영토의 확장은 1945년 이후에는 거의 그 전례를 찾기가 어려운데, 러시아의 행동은 전후 세계가 아닌 아예 18세기의 "영토 전쟁"들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사실상 용병 (고용 군인, 모병제 군인)인 러시아 군인들이 벌이는 전쟁 범죄상은, 17세기 30년 전쟁 때의 무차별 살인과 강간, 약탈 등을 연상케 합니다. 그 때도 대부분의 군인들은 (주로 가장 가난한 계층 출신의) 용병들이었죠....

전쟁 수행의 방법은 17세기 수준, 전쟁의 목표 (영토 확장)18-19세기 수준이라면, 차후 러시아 정부의 국가 발전 계획인 "요새 러시아 건설", "외래 기술의 국산화," "수입 대체," "국가 주도의 재공업화" 등은 많은 면에서 20세기의 국가주의적 개발주의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에 가깝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국가주의적 개발주의란 스탈린 시대의 공업화인데, 푸틴의 전략과 스탈린 전략의 차이란 전자가 혼합형 재벌 경제를 전제로 하고 완전 국유화를 지향하지 않는 점 정도입니다.

사회주의 지향을 포기한 러시아가,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누구나 지금 쉽게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데... 러시아만도 아니고 지금 눈을 씻고 생각해보면 아예 전세계가 퇴보의 리듬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선 1945년 이후 서방 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인 '노동 계급의 중산층화'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노동 계급은 분절화 당하고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는 워킹 푸어들의 삶은 1945년 이전의 빈곤 문화를 더 연상케 합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도시인 런던에서는 저임금 근로자들의 비율은 17%, 사실 서울보다 약간 높습니다. 하층/불안 노동자 계층은 조금씩 늘고 "중산층화된" 노동자 계층은 조금씩 줄고 있는 추세는, 특히 영미권이나 일부 서구 국가에서는 확연히 관찰됩니다.

노동 부문뿐만 아닙니다. 유럽의 대부분은 지금 폭염에 시달리고 있지만, 사실 기후 문제에 있어서의 후퇴는 가시적입니다. 지정학적 불안으로 인해 유럽에의 가스 공급이 문제가 되자 다시 석탄 채굴과 에너지 생산을 위한 석탄 이용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사회가 석유 회사 등 '탄소 자본'에 대한 통제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데, 유가 폭등의 상황에서는 석유 회사들이야말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기후 문제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관심" 자체가 유럽에서 가시적으로 둔화됐습니다. 살인적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에너지의 최소한의 필요 불가결한 '소비' 자체가 문제된 하층이나 중하층 구성원들의 입장에서는, 기후 정의 문제는 '생존' 문제에 비해 다소 2차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기후 변화가 차후 우리 상상 이상의 희생과 파괴를 초래할 상황인데, 이와 같은 '관심의 상실'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입니다.

젠더 문제도 마찬가지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임신중단권 판례를 무효화한 미 연방대법원 결정에 대한 보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 최근에 지구촌 곳곳에서 임신중단권에 대한 공격이 가해진 것입니다. 예컨대 작년에 폴란드의 극우적인 집권 정당은 정권에 사실상 예속화된 사법부를 통해서 임신중단권을 거의 박탈했습니다. 지금 폴란드로 몰려 있는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게는 이 임신중단권 박탈 상황이란 엄청난 충격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소련의 법률을 대체로 계승한 우크라이나의 임신중단권 관련 법규는 그것보다 훨씬 개방적이기 때문입니다. , 우크라이나의 피난민 대다수가 '여성'인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18-60세의 남성의 출국을 대부분의 경우에 지금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외국에 가서 안전한 곳에서 아이를 돌보고 남자는 군복을 입어 싸워야 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당연시하는 젠더적 역할 분담인데, 이런 의식 자체가 젠더 문제에 있어서의 상당한 보수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의 극우 정권의 행보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1주당 최장 92시간 근무"를 허용하려는 방침이나 여가부 폐지 움직임 등은, 노동이나 젠더 문제에 있어어의 "퇴보"에 대한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후 문제에 있어서는 문재인 정권의 로드맵을 대체로 계승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문별 감축 목표 수단 현실화" 등을 거론하는 걸 보면 그것도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퇴보적 행보는, 아쉽게도 최근 전세계의 퇴보적 '경향'의 일부로 보이기도 합니다. 조금씩 불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2008년 공황 이후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주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양적 완화"라는 미봉책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한 자본주의 세계는 지금 거의 '진보'에의 능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대중적인 좌파적 급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이 퇴보의 속도는 빨라지기만 할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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