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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러시아는 파시즘 국가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4. 21.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 온 박노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서 시작된 전쟁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망하는 글이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특히 서방 언론에서는 푸틴과 히틀러를 비교하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침략, 점령, 영토 확장 행위에 놀란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침략국들은 무조건 다 파시즘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가 일정한 위기 상황에 처할 때에 취하는 특수한 사회-정치-경제 형태입니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2014년 이후 경제 성장의 둔화, 생활 수준의 저하, 미국이나 중국과의 경제 격차 심화 등의 위기 상황에 처한 푸틴 정권이 취한 대응의 방식은, 고전적인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들이 다분히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럽 (독일, 이태리)의 파시즘 경험과 좀 다른 측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밑에서 현재 러시아와 파시즘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하나 하나씩 정리해봅시다:

공통점:

- 국가 통제하의 과독점 자본주의적 경제. 러시아 국영 기업들의 GDP에서의 비율은 약 36% (2016년) 정도며 오르고 있는 추세지만, 민영 대기업이라 해도 사실상 국가 관료들의 지휘 통제를 받습니다. 자본이 (예컨대 경쟁하는 정당들에 대한 기부 등 지원을 통해)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정통적 자본주의" (orthodox capitalism)의 특징이지만, 러시아의 국가 관료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자본의 정치 영향력은 제로입니다. 그러니 민영 자본에 당장 매우 불리한 우크라이나 침략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죠.

- 군사화의 과잉. 경제적으로 서방과 중국에 밀리고, 생활 수준은 동유럽 (폴란드나 라트비아 등)보다도 더 낮은 러시아지만, 군사력만큼은 계속 키워 나갔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군사력 이외에는 현 정권이 중점적으로 챙겼던 분야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선군 정치" (?)의 결과로,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 군비 예산은 6.5배나 늘어난 것입니다. 자동차나 여행기 생산 등은 다 고전하지만, 무기 생산은 러시아 제조업에서 유일하게 잘 나가는 부문입니다.

- "지도자 국가 원칙" (Fuhrerprinzip).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관료 독재 국가지만, 그 구조는 매우 심히 "지도자 위주"로 짜여져 있습니다. 대중적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 한 명이 사법, 입법, 행정부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고, 삼부 분립 원칙이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스탈린주의 (좌파적 권위주의) "당" 위주의 체제보다 훨씬 더 "지도자" 개인의 권력 절대화 쪽으로 치우친 체제죠.

- 반동성과 보수성. 스탈린 통제를 매우 긍정하는 푸틴 체제지만, 레닌이나 10월 혁명에 대한 푸틴의 태도는 철저하게 부정적입니다. 레닌에 대한 푸틴의 비판의 중심에는, 예컨대 우크라이나 등을 (소련 산하지만) 형식상 독립적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인정함으로써 소련 해체의 "가능성"을 만들어준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이 있습니다.

푸틴은 양성 평등 정책에 무관심한 한편 가정 폭력에 대한 형사 처벌 완화 내지 철폐하고 성소수자나 소수 평화주의 종파 (여호와의 증인)를 탄압합니다. 푸틴의 가장 믿음직한 우군은 국내에서는 철저히 보수, 반동적인 러시아 정교회이며, 국외에서는 르펜이나 빅토르 오르반 같은 극우파 지도자들입니다.

상이한 점:

- 다민족 국가인 만큼, 러시아의 극우 관료 독재 체제는 "민족"보다 "국민/인민"을 더 강조합니다.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등이 비난 당하지만, 민족 자치 공화국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안에서는 (비록 의무화되어 있지 않지만) 여전히 민족어 학교 교육이나 공문서에서의 민족어 사용은 가능하긴 합니다. 단, 소수자들에게 신분 상승의 조건으로서 국가의 언어인 러어의 구사가 강요되는 것이죠. 한데, 무솔리니 시대의 이태리만 해도 "민족"보다 "국가"가 강조되고 반유대주의가 애당초에 강하지 않았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소련이라는 좌파 권위주의 체제의 유산을 안고 있는 사회인 만큼 스탈린주의를 비롯한 각종 좌파 조직들의 활동은 (아직) 허용돼 있습니다. 단, 반전의 입장에 선 극소수의 국제주의적 좌파는 그 활동이 탄압을 받거나 불법화됩니다. 스탈린주의 좌파의 경우에는, 대체로 지배 체제에 의한 노동계급의 포섭에 도움을 주는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주로 비추어주고, 반체제 투쟁을 하지 않습니다/못합니다. 즉, 고전적 파쇼 국가와 달리 좌파가 단순히 탄압됐다기보다는 체제내 포섭된 겁니다.

- 이태리나 독일의 경우에는 파시즘이란 본래 불만에 가득찬 극우적 중신층의 "밑으로부터의 운동"이었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런 운동의 요소 (민족볼셰비키당의 활동 등)는 비교적 2차적입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달리 푸틴은 "체제의 사람"이지, 밑바닥으로부터 "치고 올라온" 극우 궤변가는 아닙니다. 소련 시절에 그 출세의 코스에 들어선 푸틴을 비롯한 러시아의 최고 지도부 (주로 보안 기관 출신: 보르트니코브, 나르스킨, 세친 등등)는 예컨대 특정 민족을 겨냥하여 "전멸"시키려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유대인 등 소수자 출신들에게도 "충량한 국민"이 되는 길을 원칙상 열어주죠. 한데 그들이 숭배하는 스탈린이 예컨대 포로가 된 2만 명 이상의 폴란드 장교 등을 일괄 총살했던 것처럼, 그들도 "충량한 국민"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적"에 대해 재판 없는 대량 살인 등의 수단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현단계 푸틴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아마도 일제 말기의 총동원 국가, 통제 경제, 익찬 정치[권력 독점의 획일적 정치구조], "서방으로부터의 아시아 해방", "동아 신질서/공영권", "국체 명징", <국체의 본의> 등등은 오늘날 러시아의 성격을 이해하기에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참고할 만한 전례들입니다. 일제 말기의 일본처럼 러시아도 밑으로부터 성장된 파시즘이라기보다는 위로부터 건설된 극우적 권위주의 체제의 한 사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민간 파쇼가 아닌 천황주의 국가 관료들이 운영하는 체제라고 해서 남경 대학살 등 끔찍한 반인륜 국가 범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푸틴의 러시아가 이미 저지른 전쟁 범죄를 생각하면 앞으로 또 어떤 학살들이 저질러질는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리고 말기의 일제하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의견 발표 등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했듯이, 현 러시아에서도 지식인이 단순한 기술자로 전락되지 않는 한 생존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식인으로서 계속 살려는 이들이 탄압에 맞서 투쟁을 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거나, 망명 길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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