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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차별금지법/검찰개혁/우크라이나/프랑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2. 5. 9.

전지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동조단식에 참가하고서

어제 동지들과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동조단식에 참가하고 저녁에는 문화제에 함께했다. 이종걸님과 미류님의 단식은 벌써 한 달에 다다르고 있다. 두 분의 결사적인 투쟁은 민주당 지도부의 태도 변화 등 이미 여러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많은 분들이 두 분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애타는 걱정의 마음을 보이고 있다.

그 애타는 마음만큼이나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가로막고 있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방치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당연히 이 법을 논의조차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혐오세력과 그들을 대변해 온 국민의힘, 윤석열, 이준석 등에 대한 불같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다.

이들은 차별금지는커녕 여성, 중국인, 장애인으로 표적을 바꿔가면서 혐오를 조장하고 선동하기 바쁘다. 요 며칠 이들 중에 하나인 한동훈이 자신의 자녀에게 입시스펙용으로 차별금지와 소수자 혐오 반대에 대한 전시회를 마련해줬다는 보도를 보면서 기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죽고사는 문제가 이들에게는 과시와 입시준비용 교양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 국민의힘에 가 있는 김한길, 금태섭, 신지예 등에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적도 있는 김한길,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 사진 찍었던 금태섭, 차별금지를 주장했던 신지예 등이 국민의힘에 가서 차별금지법이나 평등법을 위해 뭔가 하나라도 하거나 목소리를 낸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윤석열, 이준석이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거나 멸공 챌린지를 할 때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비판한 적도 없다. 이들의 소신과 용기는 왜 족벌언론들의 찬사를 받으며 개혁을 저지할 때만 발휘되는 것인가? 이들에게 차별 반대는 그저 인증샷과 정치스펙용이었던 것인가? (스스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이수정 교수는 제외하겠다.)

그 다음으로 민주당에서도 차별금지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소수의 세력들(대표적으로 김회재)과 대다수의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인 세력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혐오세력과 국민의힘을 탓하지만, 그런 반대와 방해를 극복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지도 못하는 무능과 실패가 지금 윤석열 시대를 자초했다고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에서 그나마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추진하려는 박지현, 권지웅, 박주민, 권인숙 등의 노력을 응원하고 더 많고 치열한 노력을 촉구한다. 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로막고, 방관해 온 세력들보다 더 문제라거나 더 비판받아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다는 말로 넘어가기에 너무나 실망이 많았고 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다.

윤석열 시대가 시작되면 이제 차별금지법 논의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종북혐오 등을 이용한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이명박근혜 10년이 재반복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커진다.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으로 넘어가면 어떤 개혁입법도 불가능해지고 오히려 역주행이 벌어질 수 있다. 트럼프가 알박기한 대법관들이 임신중지권을 짓밟고 있는 미국처럼 말이다.

탈북자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람을 청와대 비서관으로 임명하는 윤석열을 보면 결코 기우가 아니다. 5년을 허송세월하다가 차별금지법 제정은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는 꺼내보지도 못한 민주당이 이 상황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명백하다. 혐오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반드시 지금 당장만들어야 한다.

*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위한 동조단식 https://bit.ly/equality-together

차별금지법 제정 - 더 이상 나중에는 없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낮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앞 농성에 함께 했다. 저녁에 배재현 동지와 함께 문화제에 갔다가 남아서 1박 농성을 하고 아침에는 여러 분들과 피켓팅을 같이하고, 마침 오늘 있었던 비상시국회의와 기자회견에도 동참했다.

이제는 벌써 단식 18일째로 접어든 미류 님과 이종걸 님을 보면서 안타깝기만 했다. 길가의 천막에서 차소리를 들으면서 자는 것은 다른 농성장도 비슷했지만, 1인텐트가 좁아서 다리를 충분히 펼 수 없는 게 조금 힘들기는 했다. 그래도 아침에 같이 농성에 참가한 분들과 고깔모자를 장식하며 오랜만에 바느질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재미있었다.

오늘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보수개신교 쪽에서 온 사람들이 아침부터 우리 옆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었다. 한분은 마이크까지 틀고서 마르크스가 어릴 때 불우하게 자라서 인류를 파괴하는 사상을 만들어냈고...’ 이런 설교를 한참이나 했다. 저런 목소리 크고 극단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소수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소수를 따라서 위로 올라가보면 그 줄기가 우리 사회의 힘과 권력을 독점한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에 있다. 강남대형교회들은 우리 사회 파워 엘리트들의 허브 구실을 하고 있고, 극우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 카르텔의 핵심적 일부이다.

그들과 연결돼서 차별금지법을 가로막는 세력의 진정한 이해관계는 차별과 혐오가 기업의 이윤과 권력자들의 기득권과 보수적 질서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데 있다. 종교적 논리는 그것을 포장하고 지지자들을 묶어세우는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제 곧 등장할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바로 그 세력들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제 문재인 5년의 희망고문에 이어서, 희망조차 사라진 암흑의 5년이 올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퇴임 전에는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정말 중요해진 것이다.

더구나 검찰개혁법안도 (검찰과 우파의 협공적 반발 속에 또 알맹이들이 빠지긴 했지만) 어떻게든 일단락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정말 차별금지법(평등법)에 집중하라고 민주당을 압박해야만 한다. 5년 내내 선거 핑계를 대고, 기득권 우파와 혐오세력의 눈치를 보며 타협했던 민주당은 책임져야 마땅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나중에를 말해 온 동안에 우리 곁을 떠나간 소중한 이들을 생각하면 어떤 변명도 통할 수가 없다. 그나마 민주당에서도 권인숙, 박주민 등의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고, 당원들의 입법 촉구 연서명이 벌어지고 단식과 농성에 동참하는 민주당 당원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조짐들이다.

이런 움직임을 더욱 확대 강화하면서 반드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벌써 족벌언론들은 민주당의 다음번 입법독주는 차별금지법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또 시기상조론보완 후 차기 입법론등이 등장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법을 충분한 논의와 부작용에 대한 대안도 없이 서두른다며 떠드는 정치인들이 등장할 것이고 언론은 소신발언이라고 부각할 것이다. 중재한다며 알맹이를 빼려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다. 또 민주당은 타협하고 후퇴하려 할 것이다. 이 모든 나중에를 넘어서 지금 당장을 위한 크고 넓고 강한 연대 전선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차별금지법 #평등법 #지금당장

검사들의 무력시위와 친구들의 응원이 사회를 뒤흔든 한 달

검찰개혁과 정상화가 결국 아쉬움을 남기며 한 고비를 넘어서고 있다. 법안은 중재과정을 거치며 알맹이가 빠지고, 이후 국민의힘이 난장판을 만든 통과 과정에서 또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됐다. 물론 이것마저도 엄청난 아래로부터 개혁 열망과 압력, 그것을 대변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속에 한 발짝 나건 것이기에 그 의미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 정부와 검찰이 지금 존재하는 틈을 이용해 검찰개혁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미 검찰은 윤석열 시대에 발맞춰 몇 년전 사건을 끄집어내 민주노총 활동가들을 기소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번 과정은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에는 억압적 국가기구들이 있고, 그것의 점진적 개혁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계급으로 분열된 자본주의에서 국가기구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강제와 폭력으로 지배계급의 이해를 관찰하는 무장한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인식은 좌파적 분석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막스 베버도 자본주의 국가를 물리적 폭력의 합법적 독점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누군가를 체포, 구속, 수사, 기소, 처벌할 수 있는 국가형벌권은 그 중에서 핵심이다.

군부독재가 아닌 경우에 가장 위험한 국가기구는 이 국가형벌권을 독점한 기구이기 쉽다. 한국에서 검찰은 특수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바로 그런 위치를 차지해 왔다. 선출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 이들은 거대언론과 유착할 뿐 아니라 전관변호사, 정치인, 장관, 재벌사외이사까지 회전문처럼 들락거리며 독자적 정당처럼 움직여 왔다.

이런 검찰이 어떤 짓을 저지르며 수많은 피해를 낳아왔는지는 수백 권의 책이 필요할 정도다.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등 온갖 간첩조작, 김근태 고문 은폐, 부천서 성고문 은폐, 광주학살 불기소,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삼성 X파일, 미네르바 사건, PD수첩 탄압, 용산참사 진상 은폐, BBK 무혐의, 장자연 리스트 은폐, 김학의 사건 은폐, 한명숙 사건 조작, 유우성 간첩 조작,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이 모든 사건들에서 국가 권력(공권력)의 힘으로 시민의 삶을 짓밟은 공안부, 중수부, 특수부의 정치검사들은 그야말로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손발”(김두식 교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30년 동안 계속돼 온 검찰개혁요구와 열망을 낳았다.

그러나 강고한 검찰권력과 그 옹호세력의 벽 앞에 거듭 좌절돼 왔고, 이제 검찰이 대통령까지 배출하며 검찰왕국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개혁의 마지막 기회”(검찰을 분석해 온 전문가이고 드물게 존경할만한 지식인인 서보학 교수의 <한겨레> 기고에서)가 온 것이다.

이 절박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역사는 지그재그로 발전하기에 개혁의 기회는 한번 놓치면 다시 오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회를 놓친 국가보안법과 차별금지법이 그 후 20, 15년 동안 미뤄진 경험이 그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국민을 믿고 나중으로 미루자는 것처럼 무책임한 주장도 없다.

그러나 검찰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카르텔의 힘과 네트워크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난 한 달은 이들이 힘을 과시하며 대한민국을 뒤흔든 한 달이었다. 당연히 정치검사들이 후배들을 줄세우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 이들은 뻔뻔하게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피해자들을 향한 사과와 반성의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을 밝힌 것도 검찰이었다. 검찰이 수사권을 잃으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할 수 없다는 논리까지 들고 나왔다. ‘검찰이 없으면 지구는 누가 지키냐는 수준의 논리들을 보면서, 검찰을 멋있는 정의의 사도로 그리는 판타지 드라마와 영화들(최신판은 <야차>)의 열성팬이 바로 이들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유우성 간첩 조작하고 보복기소까지 한 바로 그 검사들, ‘룸살롱 99만 원접대받은 바로 그 검사들이 사회정의와 국민의 인권을 위해 양심상 도저히 침묵할 수 없다면서 검찰개혁 반대 대열의 맨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할 때였다.

물론, 검찰의 절친은 서로 밀어주고 (죄는) 덮어줘 온 족벌언론들이었다. 이들에게 검찰의 권력 독점은 국가의 골간이고 개혁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조선일보>) 검찰이 이프로스게시판의 개혁 반대 댓글놀이를 공개하자 언론은 이것을 내부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시민과 소통하는 검찰이라고 포장했다.

이번에 거대하게 쏟아진 계곡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들도 국민의 알 권리와는 상관없었다. 언론은 클릭장사를 위해서, 검찰은 개혁 반대 논리를 위해서 사이좋게 그것을 우려먹었다.(여성범죄자를 선정적으로 병리화하며 활용하는 것은 검찰과 언론의 반복돼온 특기다.)

검찰 출신이거나 검찰에 약점이나 덜미가 잡힌 정치인들(예컨대 10년전 검찰 수사자료에서 성비위 문제가 불거진 이준석)이 맨 앞에서 검찰을 편들었다. 언론은 이들과 국민의힘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위해 숭고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포장했다. 반면, 검찰개혁과 정상화는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처럼 프레임화됐고, 따라서 그것을 추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격의 타겟이 됐다.

경악”, “후안무치”, “파렴치”, “비양심”, “비민주”, “폭주”, 심지어 테러이고, 이것을 추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괴물”, “징그러운 인간들이라는 것이었다. 민주당에서도 그나마 중대재해처벌법과 차별금지법 제정, 국가보안법 폐지 등에서 가장 개혁적인 입장을 취해 온 의원들이 또 가장 이상한 집단인 것처럼 표적이 됐다.

반면 가장 보수적인 의원들(예컨대 삼성 출신이고 중대재해처벌법도 반대했던 양향자, 검사 출신이고 차별금지법도 결사 반대하는 김회재)이 가장 소신양심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또다시, 정의당이 국민의힘과 같은 포지션을 취하면 진정한 진보라고 찬양하지만, 민주당과 같은 포지션을 취하면 이중대라며 가루가 되도록 두들겼다.

특히 이번에 안타까운 것은 개혁적 법조인들 속에서도 검찰 편에서 목소리를 내거나, 어떤 개혁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부작용과 미비점을 더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어떤 인권변호사소외받는 검찰의 절박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고 나서던 장면은 잊기 어렵다. 검찰이 소외된 약자라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연주 전 검사는 이것을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존 사법질서의 유지와 검찰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특히 검찰 산하의 각종 위원회에 속해서 편의를 받아보며 검찰의 힘을 경험하면 생각이 달라지기 쉽다는 것으로 설명했다. 나아가 학맥과 인맥, 사법고시를 통과한 사람들 속에서 형성되는 사시권력의 문제도 지적한다.

분명 수사를 전문으로 배우지도 않은 검사들에게 수사권을 맡겨야 한다는 논리의 밑바탕에는 그 어려운 사법고시를 통과한 똑똑한 엘리트들이 더 능력있고 믿을만하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국가기구의 힘을 더 약화, 분산시켜야 하고 설사 범죄자라도 인권과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적 원칙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프레임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먼저 집권 기간 동안 수많은 비리를 저지른 민주당은 문재인 퇴임 전에 검찰의 힘을 빼놓아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표층 프레임이 있다. 하지만 더 강력하고, 이러한 표층 프레임도 그 기반 위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심층 프레임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줘야 하고, 검찰은 공정한 수사와 기소를 통해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잘 작동하게 한다는 프레임이다.

이 심층 프레임은 자유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아주 오래된 핵심적 이데올로기인데, 한국 사회에서 특히 2016년 촛불과 적폐청산 수사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됐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이 덕분에 검찰은 전체 형사 사건의 0.6%에 불과한 부패 및 경제범죄에 대한 수사, 기소권을 독점한 상태에서 멋대로 칼을 휘두르고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검사들이 선택적 수사와 기소를 통해서 정치인, 기업인들과 유착할 수 있는 통로가 됐고, 이번에도 검찰은 ‘2대 범죄는 당분간 제외한다는 타협안을 통해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틈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크고 중요한 사건들은 역시 능력있고 믿을만한 검찰에게 맡겨야 한다는 강력한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지난 한달 동안 검찰에서 나온 가장 중요했지만, 가장 언론이 외면한 목소리는 바로 임은정 검사에게서 나왔다. 임은정 검사는 모든 검사들이 한 목소리로 밥그릇을 지키고 있을 때 홀로 아니오를 말했다. 임은정 검사의<뉴스타파> 인터뷰를 보면 그 용기가 정말 놀랍다.

임은정 검사는 이제 대통령이 되는 윤석열을 향해서 거침없이 비겁하다.” “너무 뻔뻔하다”, “지켜보고 있는 차가운 눈 하나를 기억하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리고 검찰의 개혁 반대 움직임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단칼에 잘라 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안에서 안을 비추는 CCTV 같은 역할을 계속 하겠다고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건을 크고 작은 것으로 나누면서 중요하고 유명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로 인간의 무게를 달리보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검찰에 찍혀서 공포에 떨었던 재소자들에게는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어요. 그들의 고통을 봐야 합니다. 사법 정의의 무게추에서 공정한 저울은 그것[고통]을 보는 것이지 이것이 유명한 사람이냐, 큰 사건이냐를 두고 인간의 무게를 달리 재는 순간 그런 위험한 시각을 가진 사람은 검사가 아니고 사표를 써야 합니다.”

지난 한 달간의 검사들의 난과 기대보다 쪼그라든 개혁의 결실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다독이고 싶은 이들은 반드시 이 인터뷰를 봐야만 한다.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역사는 결국 다시 전진할 것이다.

https://newstapa.org/article/Konst

https://www.youtube.com/watch?v=wkISgzdMVl4

철저히 삭제되고 있는 임은정 검사의 내부고발

검찰개혁과 검찰 수사권의 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할 때마다 솔직히 우리 사회 언론과 여론지형의 불공정함이 너무 심각하다는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렵다. 지금 만약, 어떤 외계인이 한국에 와서 언론과 방송과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의 입장을 살펴 본다면, 이 공동체에 검찰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라고 볼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검찰의 전방위적 로비, 압박, 청탁이 있을 것이다. 지금 검찰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 언론사, 정치권, 법조계 등의 영향력있는 주요인물들에게 전화를 하고 만나고 접촉하면서 안간힘 쓰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최강욱 의원에게 검찰총장이 직접 전화를 하고, 박주민 의원에게 검찰 국장이 연락할 정도라니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곳곳에서 온갖 명분과 논리로 검찰을 편드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이어서(https://alook.so/posts/G1towj3) 또 한 가지 검찰개혁을 가로막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추가하자면, ‘검찰개혁은 검찰의 이빨을 제거해 권력의 순한 양으로 만들면서 공수처같은 애완견을 하나 더 만들려는 시도라는 게 있다.

이게 민주당이 집권여당일 때는 정말 잘 먹혔다. 어쨌든 대통령과 집권여당이라는 살아있는 권력이 사정기관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니까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은 야당이 되고 원래도 검찰, 언론, 재벌, 관료 등과의 강한 연결 때문에 결코 죽은 권력이라고 할 수 없던 국민의힘이 이제 진짜 살아있는 권력이 된다.

그럼 이제 민주당은 권력을 놓고 물러나면서, 국민의힘을 위해서 사정기관인 검찰의 이빨을 빼주고, 윤석열이 휘두를 수 있는 몽둥이를 하나 더 만들어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말이 된다.(이렇게 이타적인 정당이라니!) 실제로 제도상 공수처뿐 아니라 중수청도 윤석열과 집권여당이 정파적으로 악용할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을 압박하며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검찰 수사권의 분리와 기소 전문기관으로 제자리 찾기를 요구하는 이유는, 이것이 민주당에 유리하냐 국민의힘에 유리하냐가 아니라, 검찰이라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권력 독점이 낳아 온 온갖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검찰을 좋아하냐 미워하냐, 검찰 구성원들이 전부 정파 편향적이고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지금의 구조가 검찰에 아무리 좋은 사람이 들어가더라도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300배가 넘는 검사와 일반시민의 기소율 차이는 이것 말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지금 검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앞장서며 온갖 핑계를 내세우는 고위 검사들을 보자면 좋은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 온갖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개혁을 반대하는 그런 검사들과 그런 목소리를 받아쓰기 바쁜 언론들을 보자면, 역시 이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검사들을 묶어세우는 기득권의 핵심에는 연간 10조에 이른다는 검사 전관 변호사 시장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개혁을 지지하는 검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검사들마저도 철저히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내부 질서와 언론이 앞장서 몰아가고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침묵하며 따라가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크고 작은 조직이라는 곳에서 활동해 본 경험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상층부나 다수의 흐름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것은 지도부에게 밉보이고, 선후배 동료들과도 오랜 인간관계들이 끊어지면서, 고통스러운 왕따의 처지를 자초하게 되는 일이다.

조직의 명예를 훼손하고, 조직의 성장을 파괴한 사람으로 낙인찍혀서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조직이 검찰이라면? 한국사회의 가장 강력한 국가기구이고, 이제 대통령까지 배출했고, 언론과 손잡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 도저히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조직과 등을 돌린다는 말이 된다.

이 공포에 가까운 엄청난 압력과 맞서면서 검찰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정말 오래 동안 실천해 온 사람이 바로 임은정 검사이다. 검찰 역사에서 거의 찾기 어려운 진정한 내부고발자이다.

아 물론, 김학의 출국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용기있게고발해서 족벌언론들의 엄청난 찬양을 받았던 내부고발자가 한 명 있기는 했다. 다만 그 내부고발자는 검찰 지도부와 조직에 의해서 왕따를 당할 일은 전혀 없어 보인다. 충분한 보은과 출세의 길이 보장돼 있는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반면 임은정 검사가 당해 온 고난은 정말 지독한 것이었다. 이명박근혜 10년이야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문재인 5년 동안 임은정의 고난이 더 깊어진 것은 정말 역설적인 일이었다. 진중권 씨같은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임은정 검사를 친정부 검사로 낙인찍고 조롱했다. 진중권 씨는 같은 논리로 <뉴스타파>친정부 언론으로 딱지 붙였다.

이런 논리라면 문재인 정부 내내 충돌하며 청와대와 여당 정치인들을 압수수색하고 칼을 휘두른 검사는 소신있는 반정부 검사’, 누구보다 나서서 문재인 정부를 사사건건 비판한 족벌언론들은 용기있는 반정부 언론이 된다.

실제로 검찰과 족벌언론들은 이 논리와 프레임을 자신들의 기득권과 정파적 이익을 지키는데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그것에 힘을 실어줬다. 예컨대 진중권 씨는 한동훈 검사를 거듭 칭찬해 왔다. 그러나 지난 5년간 임은정 검사나 <뉴스타파>가 해 온 일들을 제대로 엄정하게 지켜 본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모두의 찬양 속에서 윤석열이 검찰총장에 임명될 때 그의 비위를 고발한 게 <뉴스타파>였다. 김오수가 문재인 정부에서 중용될 때 그도 검찰의 썩은 환부를 가리는 데 윤석열과 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한 것도 임은정 검사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를 잣대로 행동해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이라고 이들의 잣대가 달라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제 임은정 검사는 윤석열 당선으로 더 깊은 고난의 늪으로 들어가고 있고, <뉴스타파>는 인수위 출입조차 가로막히고 있다.

따라서 지금 검찰과 언론과 주류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검찰개혁에 대한 지배적 반대 여론에 뭔가 흔들리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임은정 검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검찰에 대해서 누구보다 신뢰할만한 판단과 평가와 주장을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지금, 검찰개혁 나중에론을 펴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그분들이 검찰의 편에서 그럴 리는 없고 나름의 소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먼저 검찰의 문제점들을 분명히 비판하고, 그 피해자들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고, 검찰 권력 독점을 해소할 다른 해법을 제시하면서 그런 주장을 폈으면 좋겠다.

임은정 검사같은 사람들이 검찰에서 큰 목소리를 가지기 시작한다면, 그 때는 검찰의 자체적인 내부개혁도 가능하고 나중에를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아래는 지난 며칠간 임은정 검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이다. 지금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검사, 법조인, 지식인들의 목소리만 집중적으로 띄워주는 주류언론들이 이런 목소리를 주목하고 키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것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성공한 혹은 실패한 표적수사 피해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종 사냥감은 물론 사냥감을 포획할 수 있는 진술을 끝내 해야만 할 참고인들도 검찰의 중간 표적이라, 영혼이 너덜너덜해지곤 합니다. 자살이나 암 등으로 돌아가셔서 이제 말을 못 하거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때의 일들을 애써 잊으려 하거나 또는 검찰에 찍힐까봐 두려워 말을 하지 않으려 하지요.
검찰에 의해 자행된 인권침해와 검찰농단 반성에 인색하면서 검찰권을 지키기 위해서 집단행동도 불사하는 검사들에게 막강한 검찰권을 이대로 맡겨도 되는지 걱정하는 많은 분들에게 저는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사과는 남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저 역시 검찰의 오늘에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사과해야 할 주체 중 한 명이지요. 깊이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eunjeong.im3/posts/4871571526244691

“사람들이 저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데, 저는 수사지휘권을 남용한 원죄가 있어 말할 자격이 없기도 하고, 검찰권 오남용에 순응하거나 침묵한 검찰 구성원으로서, 검찰을 해체하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라 생각하며... 검찰 구성원으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금번 국회에서 지혜롭고 담대하게 검찰개혁 법안을 논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eunjeong.im3/posts/4878934355508408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지하며

검찰이 무력시위를 하며 힘을 과시하고, 대다수 언론이 그것을 온갖 논리로 포장해주고, 많은 지식인들도 여기에 힘을 보태고, 민주당이 그것에 타협하면서 검찰개혁의 희망이 또다시 줄어들어 가는 국내 정치 상황을 보자면, 이래서 윤석열의 대선 승리가 가능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울한 것은 국내 상황만이 아니다. 미얀마에서는 쿠데타 군부의 테러적 통치가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데, 잊지 않고 함께 하겠다고 말을 하지만 도대체 어떤 힘을 줄 수 있을지 미안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기만 하다.

더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참혹한 전쟁 상황은 너무나 참담하다. 이 전쟁은 코로나 팬데믹, 심화하는 기후 위기와 함께 강탈적, 기생적 축적 단계에 도달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어두운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모든 사안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도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차이를 낳고 있다. 약간의 단순화를 무릅쓰면서 그것을 나누어 보자면 첫째, ‘친러시아/반미국(반서방)’의 관점에서 이 전쟁을 사실상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방조하는 입장이 있다. 현재로서는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완전히 잘못된 입장이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군의 폭격, 민간인 학살, 전시 성폭력, 전쟁 범죄들을 지지하거나 방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반미반제를 주장했다면, 이제 그토록 강자의 억압과 폭력에 반대해 약자의 저항을 지지했던 그 진정성은 어디 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논리도 순전한 억지이다. 오히려 극단적 인종주의와 동성애 억압으로 국제적인 신나치와 극우세력에게 백인의 희망이라며 지지를 받아 온 것은 푸틴이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는 이들의 성장을 낳을 것이다.

둘째, ‘친미국(친나토)/반러시아의 관점에서 미군과 나토의 군사적 개입과 참전, 확전을 주장하는 입장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1999년 유고연방을 폭격하고, 2003년 이라크를 폭격해서 학교, 병원까지 파괴하며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바로 미군과 나토였다.

조지 부시가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은 결과가 오늘날 푸틴이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는 상황을 낳았다. 2020년 현재 전세계 군사비의 57%를 쓰고 있는 게 나토이고, 유럽 전역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것도 나토이다. 3차 세계대전을 불러오자는 입장은 답이 될 수 없다.

셋째, ‘반러시아-반미국(서방)/ 반러시아-반우크라이나입장도 있다. 양쪽 다 문제와 잘못이 많고, 따라서 양쪽 다 지지할 수 없고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어떤 자본주의 국가나 정부도 지지할 수 없다는 좌파적 원칙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 상황과 맥락에서는 모순을 낳을 수 있는 잘못된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지금의 상황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서방의 대리전이라고 본다. 결국 우크라이나 뒤에는 미국, 나토가 있고 무기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두 세력의 대리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본다면 과거의 베트남전도 뒤에 소련과 중국이 있었던 대리전인가? 지금의 팔레스타인 저항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의 대리전인가? 이런 모순은 넷째 입장과도 연결되며 겹치는 점이 있다.

넷째, ‘러시아 반대 우선/ 우크라이나 비판적 방어의 입장이다. 당장, 침공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 강대국인 러시아에 대한 반대가 우선돼야 하고, 우크라이나 젤린스키 정부를 양비론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장 타당해 보이는 입장인데, 막상 셋째 입장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 둘 다 패배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승리도,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서방의 승리도 나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어적 무기 지원도 반대한다. 전쟁에서 어느 한쪽도 이기지 말아야 하며, 양쪽 모두에서 자국의 패배를 주장하며 집권세력에 맞서는 혁명적 저항이 벌어지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다.(혁명적 패전주의?)

여기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어적 수준의 무기 지원은 불가피하다는 다섯째 입장의 비판이 제기된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지한다면, 탱크와 전투기에 죽어가는 이들에게 무장하지 말고 맨손으로 저항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민중은 러시아에 항복하고 싶은데 젤린스키의 강요 때문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얀마에서 쿠데타 군부에 맞선 시민저항군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게 불가피하듯이,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2차대전 때 그리스 빨치산 부대도 연합군의 무기지원을 받았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1938년 트로츠키의 주장을 소개한다.

내일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민족독립의 기치 아래 반란이 일어나고 이탈리아 정부가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서 반군에 무기를 보낼 준비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무기 수송을 막아야 하는가? 어떤 좌파라도 이 질문에 긍정적 대답을 못할 것이다.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은 그러한 대답을 분개하며 거절할 것이다.’

확전을 위한 공격적 무기 지원은 지지할 수 없지만, 러시아의 침공과 폭격에 맞서기 위한 방어적 무기 지원은 불가피하다는 이런 입장은 반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어떤 폭력도 반대하는 입장에서 무기 지원이 결국 어느 쪽에서든 물리적 충돌과 희생과 피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방어적 무기와 공격적 무기가 칼같이 구분되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그래서 노엄 촘스키도 추악한 양보와 평화를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복잡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쉽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억압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눈으로 사태를 보고 그들이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일 것이다.

모든 인간, 동물,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의 전쟁 상황 속에서 또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반려동물들이 처한 상황이다. 전쟁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상처받고 굶주리고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강제로 이별하게 된 인간과 반려동물의 사연들도 눈물겹다. 러시아의 폭격과 점령 속에 고립된 반려동물들을 구출하고 도우려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조직적 캠페인 소식을 보면서 그 연대의 마음에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보통 러시아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리고 2차대전에 참전한 소녀병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낸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폭격이 쏟아지는데 갑자기 염소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뛰어든 거야. 녀석도 우리와 같이 바닥에 엎드렸지. 우리 옆에 엎드려서는 꽥꽥 비명을 질렀어. 폭격이 멈추자 녀석이 우리를 따라오며 우리한테 자꾸 달라붙는 거야. 저도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무서웠던 게지. 마을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을 여인에게 염소를 부탁했어. ‘데려가세요. 불쌍해서요.’ 염소를 구해주고 싶었지……”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은 다음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인간과 동물이 결국 서로 별로 다르지 않은 소중한 생명이고 서로 공감하며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 병사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어. 하지만 강기슭에서 독일군 기관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지. 사방에서 비명소리, 신음 소리, 고함소리가 들리는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어…… 나는 비록 여자지만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싶었어. 단 한 명이라도……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물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떠올랐다 가라앉고 떠올랐다 가라앉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을 힘껏 붙잡았어…… 뭔가 차갑고 미끈한 게 만져지더군…… 부상당한 병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폭발에 옷이 다 찢겨져나간 거라고. 사실 나도 거의 알몸이었거든…… 그 병사를 데리고 간신히 강기슭에 도착했는데…… 마침 하늘에서 신호탄이 터지면서 순간 사방이 환해졌어. 그런데 보니까 내가 데리고 나온 게 사람이 아닌 거야. 글쎄, 상처 입은 커다란 물고기더라니까. 사람 키만큼이나 커다란 물고기. 흰 철갑상어였어…… 죽어가고 있었지…… 나는 녀석 옆에 털썩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어찌나 속상하고 화가 나던지 눈물이 났어…… 이렇게 물고기까지 고통을 당하는 게 너무 속상해서……”

또한, 알렉시예비치가 주목하는 것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것은 결국 살인, 살상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어느 편에서 있든 마찬가지다.

“결국 그를 쏘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마음을 다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이잖아. 비록 적이지만 저자도 사람이야.’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면서 오한이 나기 시작했어. … 맞히고 나니까 총을 쏘기 전보다 더 떨리고,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공포가 밀려들었어. 하지만 나는 곧 그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지. 그래…… 한마디로 끔찍했어! 결코 못 잊을 거야…”

서로를 증오하며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이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가 같은 사람이고 원래부터 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독한 증오와 적대의 시간을 지나서 고통의 시간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다.

“우리 병실에 부상병 둘이 있었어…… 독일군 병사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우리 전차병이었지. 그들을 살피러 갔어.

—좀 어때요?

—난 좋아요.

우리 전차병이 대답했어.

—하지만 저 친구는 안 좋은 거 같아요.

—저 사람은 파시스트인데……

—아니, 나는 괜찮다니까요. 저 친구가 안 좋지.

그들은 이미 적이 아니었어. 그저 사람들, 부상당해 옆에 나란히 누운 사람들이었지.”

알렉시예비치는 이 작품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은 위대한 승리가 아니라 하찮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다보면 그 하찮은이야기들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어디서든 위대한 승리의 이야기를 강요하는 세력과 구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끝없이 서로를 증오하고 적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전쟁이 다 끝나고, 다시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는 고백을 보면서 그 커다란 좌절감을 공감하게 된다.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는… 우리는 도저히 그게…”

우리가 서로를 가엾게 여기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 달라지려는 것을 가로막는 세력과 구조, 그것이 지금 푸틴이 일으킨 침략 전쟁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푸틴이 일으킨 또 다른 전쟁인 체첸전쟁을 다룬 영화 <더 서치>를 보면, 그 작동방식이 나온다. 거기서 평범하고 순진한 한 러시아 청년은 군대로 끌려가서 학대를 당하고 살인을 배운다. 그리고 체첸으로 가서 자신이 겪은 모든 억압과 폭력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분출한다.

우리는 이 모든 전쟁과 폭력과 학대와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지난 몇 년간에 나온 가장 빼어난 반전영화 중에 하나였던 <1917>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난다. 모든 병사들이 진군 명령에 따라서 총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는 속에 주인공 병사는 공격을 멈추라는 명령서를 전달하기 위해 그 거대한 대열을 거꾸로 가로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간다. 모든 생명체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고,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

프랑스 대선 결과가 보여주는 절망과 희망

프랑스 대선이 어제 2차 투표까지 마무리되면서 결판이 났다. 대개 신파시스트로 분류되는 르펜과 국민연합의 당선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차악에 투표하면서 마크롱이 재선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2차 투표에 기권한 사람이 28%나 달하고, 투표에 참가해서 무효표를 찍은 사람도 9%에 이른다는 것은 마크롱의 집권 5년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마크롱은 연금 개악, 노동권 공격, 경찰력 강화를 추진하며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으로서 성격을 나타내 왔다. 특히 마크롱이 노란조끼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휘두른 경찰 폭력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실명이 되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것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세속주의를 명분으로 한 이슬람에 대한 혐오 선동과 갈라치기였다. 그는 반대파를 이슬람좌파’, ‘이슬림분리주의로 몰아가며 공격해 왔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를 억누르는 각종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마크롱이 재선에 성공한 것은 공화당과 사회당의 몰락이 보여주듯이, 전통적인 보수-개혁 진영 구도를 넘어서 프랑스의 기득권 지배세력 대부분이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 속에서 마크롱의 뒤로 결집한 결과일 것이다.

역시 주목할 것은 파시즘적 극우정치의 위험이 다시 크게 성장한 것이다. 전통적인 기성정당들이 몰락하고, 그것을 마크롱의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적 중도가 대체한 속에서 기득권 엘리트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이용해 인종주의 극우와 파시스트들이 성장하고 있다.

물론 르펜은 동성결혼을 긍정적으로 본다거나 기후 위기를 인정하는 등 소위 정상화를 꾸준히 추구하면서 스펙트럼을 확장해 왔다. 그러나 그 본질적 성격이 바뀐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번에 르펜의 정상화가 낳은 틈을 공략한 에릭 제무르의 등장과 급성장은 극우정치의 힘과 위험을 모두 보여줬다.

제무르는 인종주의적 혐오와 폭력을 날 것 그대로 선동하면서 청년(남성)들 속에서 급성장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그 전쟁을 피해온 난민들에 대한 환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르펜과 제무르의 전진에 제동이 걸릴 수 있었다.

이들이 과거부터 푸틴의 극우적 민족우월주의에 공공연히 찬동해 온 것이 부메랑이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난민까지 공격하는 주장은 인기를 얻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극우와 파시스트 진영은 이번에 1차에서 총 32%, 2차에서 무려 42%를 얻으며 권력에 바짝 다가섰다.

다행히 1차투표에서 멜랑숑(‘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이 얻은 22%의 득표가 프랑스에서 급진적 좌파의 희망을 보여 줬다. 만약 1~2%만 더 얻었어도 분열한 르펜과 제무르를 제치고 결선 투표에 나설 수 있었을 수준이다. 프랑스 대선 역사에서 급진좌파가 얻은 최고 수준의 득표였다. 멜랑숑은 특히 청년, 여성, 이민자들 속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다만 이것을 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작년 연말까지도 멜랑숑의 지지율은 5년 전보다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상위 4위의 후보 중에 좌파 후보는 없었다. 갈라져 나온 크고 작은 8명의 좌파 후보가 얻은 지지율 총합이 25% 정도였다. 위기 의식 속에서 좌파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30만 명이 서명했다.

끝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다양한 좌파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전략적 판단으로 멜랑숑에게 표를 몰아준 결과가 1차투표의 지형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회당은 완전히 몰락했고, 공산당과 녹색당 후보는 지지율보다 더 적은 표를 얻었고, 극좌파 후보들은 1%도 안되는 사상최저의 득표를 했다.

만약 정식 단일화가 이루어져서 급진좌파 후보가 마크롱과 결선에서 대결할 수도 있었다면 좌파의 중요한 전진이 됐을 것이다. 지나치게 일인지배적인 멜랑숑의 정당과 연금, 퇴직연령, 유럽연합, 이슬람 문제 등에 대한 좌파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연대를 가로막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와 투쟁은 단지 자신의 원칙과 차별성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위한 전술이 필요한 공간이다. 어떨 때는 두 개의 악 중에서 맞서 싸우기에 더 나은 악을 택할 때도 있다. 결선투표에서 멜랑숑이 지지자들에게 절대 르펜에게는 투표하지 말라고 호소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는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공산당, 녹색당, 극좌파 세력들 간에 선거연합과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자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멜랑숑을 총리로 만들자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마크롱 2기 정부에 맞서서 투쟁을 확대하고 커지는 극우와 파시즘의 위험을 막기에 더 나은 길일 것이다.

프랑스의 이런 상황은 한국의 진보, 좌파들에게도 보여주는 바가 있다. 어떤 사회에든 대개 20~30%에 달하는 진보, 좌파 지지자들이 있다. 좌파가 어떤 효과적인 전술과 연대를 통해서 이것을 묶어내는냐에 따라 정치적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분열과 절망을 키울 것인지 연대와 희망을 키울 것인지는 어떤 것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한동훈과 검찰을 편드는 박유하 씨의 글을 보고

박유하 씨가 <중앙일보>나는 고발한다시리즈에 기고한 글을 봤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64129) 글의 내용은 유시민 작가에 대한 한동훈의 명예훼손 고발이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한동훈의 고발과 검찰의 구형을 옹호하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의 문제제기가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사회분열과 혼란을 증폭시킨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통해서 학문적 비판을 제기했을뿐인 자신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과 정의연 등에 의해서 ‘8년 동안이나 입에 재갈을 물려있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고 내로남불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이 글은 전형적으로 펙트의 왜곡과 논리의 비약을 통해 이루어진 글이다. 먼저 박유하 씨는 단지 학문적 비판만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가 자긍심을 가지고 일본병사를 위안했고 서로간에 동지적이고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적 내용과 논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도 하나의 학문적 주장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위안부’(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매우 큰 상처와 고통을 준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이 박유하 씨를 고발한 것은 동의하긴 어려워도 일부 이해가 가는 점이 있었다.

물론, 형사적 고발보다 정치적 비판이 옳았다고 보는데, 문제는 검찰이 그것을 적극 받아서 기소까지 한 것에 있었다. 언제나 정치적 맥락을 살펴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할 기회를 노리는 정치검찰다운 반응이었다. 검찰이 칼을 들고 나서면 누구도 피하기 어렵다.

박유하 씨를 고발한 것은 나눔의 집에서 기거하는 피해자들이었는데, 나눔의집은 지금 그 운영진의 후원금 유용과 내부고발자 억압 등 여러 문제가 드러난 바로 그 단체이다. 나눔의집은 정의연과는 완전히 다른 단체인데 보통 언론은 그것을 잘 구분하지 않고 일부러 혼동을 유발하며 윤미향 마녀사냥에 이용했고 많은 이들이 거기에 편승해 왔다.

박유하 씨가 고발당했을 때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은 그것을 적극 지지하거나 환영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의연의 주요한 인물들은 당시에 이것은 학문적으로 토론하고 비판할 문제이지 법적으로 처벌할 문제가 아니다는 취지의 성명에 같이 이름을 올렸다.

유시민 씨도 (자유주의자답게) 당시에 검찰의 기소가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지식인 중 하나였다. 또 정의연은 나눔의집의 여러 내부적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도 그것을 비판하며 내부고발자들을 방어하는 행동들에 함께해 왔다.

그런데 박유하 씨의 이번 글은 윤미향 의원, 정대협, 정의연을 언급하면서 이분들이 지난 30년 동안 일본 비난만 반복해왔다.... 핀트 어긋난 비판으로 일관한 탓에 한일관계를 최악으로 치닫게했다고 매도하고 있다. 이어서 자신이 이렇게 위안부지원단체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훼손 고발을 당했다고 말한다.

즉 마치, 자신이 정의연 등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하다가 정의연에 의해 고발을 당해 입에 재갈이 물렸던 것처럼 혼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더구나 박유하 씨는 이어서 지원단체의 가장 큰 문제는 공금횡령이 아니다... 북한이 일본에 배상을 받아낼 좋은 재료로 삼은 게 모든 문제의 배경이다라고 쓴다.

이것은 명백히 악의적인 문구이다. 마치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이 공금횡령을 했다고 읽히는 것만이 아니라, 이 분들이 친북적이어서 일본의 태도를 비판해 온 것처럼 쓰면서 종북몰이까지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박유하 씨가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을 비판해 온 핵심에는 항상 이것이 있었다.

결국 박유하 씨는 자신이 검찰에 기소당할 때 그나마 그것을 반대하거나 검찰을 비판하는 입장을 밝혔던 정의연, 유시민 작가 등이 지금 검찰과 보수언론에 공격당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검찰과 보수언론 등의 공세에 힘을 실어주면서 나한테 당신들이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박유하 씨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이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 사회를 끝없는 갈등으로 몰아넣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도대체 누가 누가에게 할 말이지 돌아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박유하 씨가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언론과 검찰의 마녀사냥에 편승해 같이 돌을 던져온 것은 참 씁쓸한 일이다. 물론 당시에 박유하 씨가 일부 언론의 과도한 선정주의적 접근과 검찰의 기소 속에서 고통스러운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의 소극적 태도와 정치적 입장에 상처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형사 고발과 검찰의 기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만으로도 정의연의 태도는 충분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 더 적극적으로 박유하 씨를 방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적극 연대해 왔고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마크 렘지어와 마찬가지로 박유하 씨같은 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실에 근거한 학문적 반박일텐데, 자신들을 주류 학설에 맞서서 이견을 밝히며 학문적 주장을 하다가 입에 재갈을 물린 피해자들로 포지션하는 데 집중하는 게 역사수정주의자들의 태도인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다.

, 유시민 작가에 대한 지금 한동훈의 보복 고발과 검찰 수사와 기소는 과도하고 불의한 것이 명백하다. 2019검언대란당시에 누구도 감히 나서서 검찰과 언론의 대대적 여론몰이에 맞서지 못할 때 다른 목소리를 냈던 유시민 작가가 이후 검찰의 보복 대상이 됐다는 것은 채널A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드러난 사실이다.

검찰의 최고 실력자에서 이제 새정권의 법무장관과 윤석열의 후계자로 승승장구하는 한동훈의 아이폰은 풀지도 않고 면죄부를 주면서, 유시민 작가만 압박하는 검찰의 태도가 굥정하다고 볼 사람은 윤석열 밖에 없을 것이다. 박유하 씨의 이번 글과 한동훈을 모델 포스-비주얼 깡패”, “조선제일검이라고 추켜세우는 언론들을 보며 윤석열 시대를 실감한다.

* 사족: <중앙일보>저격시리즈에 이어서 나는 고발한다시리즈를 하고 있다. 마녀사냥에 반대했던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슬로건이 이렇게 마녀마냥 전문 매체에 의해 이용되는 현실이 그로테스크하다. 거듭 말하지만, 족벌언론들, 특히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에 글을 써주거나 협력해주는 진보 정치인, 지식인들을 자신들이 그 족벌언론들에게 피해와 고통을 당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이것은 왜 ‘2차 피해가 아니란 말인가.  

(기사 등록 20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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