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원래 달려있었던 각주들을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 필요하면 오프라인 글을 참고하라.]
전지윤
오늘날 자본주의에 맞서 근본적 변혁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몇 년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위기와 분열 과정에서 제기된 쟁점들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게다가 SWP의 위기와 분열은 같은 국제사회주의경향((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의 자매조직인 한국 다함께가 겪은 위기와 분열하고 결코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SWP 분열의 정치적 함의와 교훈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미 앞선 분석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영감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더 나아간 고민과 평가를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주로 SWP의 핵심 활동가인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몇 가지 주장을 논박하는 형태로 이것을 수행할 것이다.
첫째, 캘리니코스는 시대적 조건이 가한 한계에서 SWP가 위기와 분열에 직면하게 된 것의 변명거리를 찾으려 한다. 지난 시기 동안 급진화와 운동의 성장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존재했던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부정적인 경험 탓에 자본주의에 맞서는 저항은 마르크스주의는 고사하고 사회주의의 특정한 형태마저 자동적으로 취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SWP에 젊은 청년학생들이 대거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당 건설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캘리니코스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의 저항 물결 속에서 SWP에 가입한 대학생들이 곧 대거 이탈한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문제는 SWP로 결합시켰던 그들이 운동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이를 통해 왜 그토록 많은 학생당원들이 분쟁위원회 논란 과정에서 SWP를 버렸는지 설명할 수 있다.
운동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칫 혁명적 정치에 기초를 두고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는 작업이 불필요하거나 종파적이라는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운동주의적인 압력은 2007년 이래로 SWP가 지속적으로 겪어온 위기의 반복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즉, 투쟁 속에서 급진화가 이뤄지더라도 급진 개혁주의 수준에 머무르거나 운동주의가 영향을 끼치는 풍토였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혁명적 정치와 변혁정당 건설 주장이 호응을 얻고 성공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물론 스탈린주의의 실패와 사회민주주의의 배신이 낳은 부정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부정적 경험 속에 자본주의가 아닌 대안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상식’은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그것을 어느 측면에서는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급진 개혁주의와 운동주의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대중의 의식은 흔히 모순돼 있고 일상적 시기에 대체로 지배적 사상의 영향 하에 있다.
불만이 있더라도 체제 자체보다는 체제의 결과를 손봐야 한다는 개혁주의에 기우는 게 당연하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하기 전에도 그것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미 6~70년대에 대부분의 공산당도 개혁주의와 유로코뮤니즘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운동의 고양기에도 ‘대중의 의식이 급진 개혁주의 수준에 머물고 운동주의가 횡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구에서 가장 투쟁이 활발했던 ‘68년 반란’ 때마저도 대중의 의식은 단순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대중의 모순된 의식 때문에 심지어 혁명적 시기마저도 개혁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20세기 초의 혁명적 시기에 러시아와 독일에서 먼저 지지를 얻었던 것은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혁명적 투쟁에 나서는 대중이라도 처음부터 ‘우리는 혁명과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며 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시기 급진화 속에 내재한 어떤 특별한 한계에서 변혁정당 건설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설득력이 없다.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정상적 시기 대부분에 변혁정당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캘리니코스는 반전운동 등을 통한 급진화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해 온 산업투쟁에서도 문제를 찾으려고 한다.
현재 급진화 방식에서 드러난 것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계급 투쟁의 중심적 구실이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재계에 더 깊이 연루되면서 주류 정당들이 위축된 것과 함께) 현대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정치 조직이 미심쩍은 시선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사상으로 사람들을 획득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투쟁 수위가 낮을 때에는 매우 어렵다. …
작업장에서의 투쟁이 거리와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수위와 맞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로 투쟁의 수위는 계속 낮았다.
즉 산업투쟁의 상대적 열세로 노동계급 중심성을 말하는 변혁조직의 입지는 강화되기 힘들었고, 이 상황에서 공동전선의 필요가 더 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의 설명은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먼저 알렉스는 ‘산업투쟁만이 계급투쟁은 아니다’라는 그동안 자신의 주장과는 모순되게도 산업투쟁(경제적 계급투쟁)과 거리 투쟁(정치적 계급투쟁)을 구분한 다음, 전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 운동이 건설된 상황에서도 산업투쟁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계급 투쟁이 충분치 못했다’고 깍아내린다. 그러면서 슬쩍 자신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을 외부적 조건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렇게 ‘변혁조직의 성장 기반이 취약한 상황이니 공동전선으로 운동을 건설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첫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의 한복판에서, 그것도 SWP가 그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데도 당원 규모가 반토막이 난 것은 단지 산업투쟁의 상대적 부족함으로 설명될 수 없다.
둘째, 설사 산업투쟁이 반전운동과 결합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해도 공동전선의 필요성은 감소되긴커녕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예컨대 리스펙트같은 노동당 왼쪽의 공동전선적 당 건설은 더욱 탄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투쟁의 상대적 정체 때문에 혁명정치의 청중이 줄면서 공동전선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당 건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셋째, 캘리니코스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이제 공동전선을 통한 운동 건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에 맞선 계급투쟁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과 성격이 다르다. … 당연히 경제적 계급투쟁에서는 조직된 노동자 계급이 중심에 서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운동에] 강한 보수적 압력을 가할 노동조합 관료층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기반을 가진 노조 안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즉, 경제 위기에 맞선 노동자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여러 세력의 연합이 아니라, 노조관료주의에 발목 잡히지 않을 현장조합원 운동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장조합원 운동을 조직하는 데에서는 날카로운 정치를 가진 당 조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공동전선을 강조하거나 현장조합원의 힘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은 ‘운동주의’,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회피’라고 비판한다.
운동의 물신화는 혁명정당을 제치는 것으로 나아간다. 낮은 수위의 투쟁은 노동계급을 우회하거나 심지어 노동계급을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주장이 정치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계급투쟁의 차이를 불필요하게 과장한다고 본다. 과연 정치적 계급투쟁에서는 여러 세력의 연합이 중요하지만, 경제적 계급투쟁에서는 현장조합원 운동을 조직할 날카로운 정치가 더 중요한가? 과연 경제적 계급투쟁에서는 관료주의에 발목잡히지 않을 현장조합원들의 힘이 중요하지만, 정치적 계급투쟁에서는 그런 위험과 필요가 덜한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이 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2013년 연말 철도파업 때는 현장조합원 운동을 고무할 날카로운 정치뿐 아니라 직종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여러 사회세력의 연합도 중요했다.
반면, 2013년 봄의 국정원 촛불운동 때는 여러 세력의 연합뿐 아니라 민주당을 추수하며 운동을 통제하는 ‘시국회의’ 지도부에 맞서는 날카로운 정치도 중요했다. 철도파업 때도 노조 지도부의 투쟁 회피에 맞설 현장조합원의 힘이 필요했지만, 국정원 촛불 때도 촛불에 찬물을 끼얹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에 맞선 기층 노동자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정원 시국회의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치인들과 철도 파업을 주도한 노조 관료들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노조 관료들이 국회를 공을 넘기며 적당한 수준으로 투쟁을 마무리하려 할 때, 중재자 구실을 하며 그 공을 받아서 국회로 가져간 것은 개혁주의 정치인들이었다.
이것은 개혁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도 부합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와 자본가를 중재하는 특수한 계층이 노조 관료이고, 노조 관료의 정치적 표현이 개혁주의 정치인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노조 관료과 개혁주의 정치인은 분업 관계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며, 정치는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의회 내 협상으로 풀고, 경제는 노동자의 일이지만 주로 노조 관료들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거부하며 정치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계급투쟁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
그 점에서 위에서처럼 두 영역의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은 양편향을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계급투쟁에서 공동전선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며 노조관료에 기반한 개혁주의자들을 추수할 수 있다. 반면, 경제적 계급투쟁에서 날카로운 정치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며 노동자 단결과 공동전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다.
결론을 짓자. 영국 SWP 분열에서 ‘공동전선 건설이 중심이냐 당 건설이 중심이냐’는 식의 잘못된 대립이 나타났다. 예컨대 캘리니코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최고의 인재들이 [1999년 이후 당 건설 보다는] 운동 건설에 완전히 스스로를 내던지게 됐다. … 이것은 우리가 가진 자원이 당 건설 작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운동 건설에 치중하다보니 당 건설에 소홀해졌다’고 아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전 운동과 대안세계화 운동이 활발하게 솟구치던 이 시기는 공동전선 등 운동 건설이 중요했던 시기다. 따라서 ‘공동전선 건설이 중심이냐 당 건설이 중심이냐’, ‘거리의 정치투쟁이냐 작업장의 경제투쟁이냐’는 식은 잘못된 대립이다.
실제로 영국 SWP는 공동전선과 거리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던 시기에도 위기를 겪었고 결국 카운터파이어가 분리해 나갔다. 역사상 최대규모의 반전 시위와 리스팩트의 부상 과정에서도 SWP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시사적이다. 존 몰리뉴는 2006년에 이렇게 지적했다.
급진화의 시기에 외적인 성공을 거두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엄격히 헤아려보면 90년대 대비] 최고 5000명(50%)까지 당원들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카운터파이어의 분리 뒤에 당 건설과 작업장에서의 계급투쟁을 그토록 강조하던 노선 아래서도 SWP는 성장하지 못하며 위기에 처했고, 이번엔 RS21이 분리해 나갔다.
당과 공동전선, 또는 당과 계급은 분리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다. 당은 계급의 일부이며 계급 속에서 배우고 동시에 가르치면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당이 계급 속에서 배우고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바로 당 건설 과정이다.
따라서 공동전선 건설에 치중하느라 당 건설에 소홀했다는 주장은 형용모순이다. 물론 당 건설 과정에서 독자적인 선전과 토론을 중시하는 방식과 공동전선과 대중행동 건설을 중시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당 건설의 서로 다른 방식이지 어느 하나가 당 건설이고 어느 하나는 아닌 게 아니다.
정세가 침체돼 있고 이데올로기적 고립이 심할 때는 혁명가들이 독자적 선전과 토론을 통해 변혁적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한 당 건설 방식일 것이다. 예컨대 서유럽에서 80년대의 계급투쟁 침체기에는 혁명가들이 독자적 선전을 통해서 혁명적 정치와 원칙을 방어하는 데 치중하는 게 불가피했다.
반면 정세가 고양되며 대중행동이 나타날 때는 공동전선을 건설하며 적극 뛰어드는 게 중요한 당 건설 방식일 것이다. 예컨대 1999년 시애틀 WTO 반대 시위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는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 운동이 대중적으로 부상했다. 그 속에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지지 대중과 손잡고 강력한 운동을 건설해야 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가진 대중이 참가하는 운동은 공동전선을 통해서 건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독자적 선전에 치중하던 혁명가들이 이제 공동전선과 개입주의적 운동 건설에 나선 것은 필요하고 정당했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과 정치의 필요성을 입증해야 했다.
변혁조직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도 무엇에 더 치중할지는 또 달라질 것이다. 정치적 중핵 형성이 중요한 변혁조직 건설의 초기에는 독자적 선전과 분석이 중요할 것이고, 어느 정도 간부가 형성된 이후에는 대중운동 속의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정세의 변화나 어떤 외부적 조건이 가한 한계는 SWP의 분열과 위기를 설명하는 데서 핵심이 아니다. 1980년대의 침체기 때도 SWP의 위기는 이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분열 과정에서 논쟁이 된 신자유주의의 성격, 여성억압 등을 둘러싸고 각 세력들이 강조한 정치적 주장의 차이도 핵심이 아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차이의 발생은 건강한 변혁조직이라면 당연한 것이고 언제든지 자유롭고 발전적으로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SWP는 반전운동의 성공, 리스펙트의 일시적 성공과 뒤이은 실패, 경제 위기의 도래와 노동자 투쟁의 지체 등을 거치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60년대 말 특정한 필요에 따라 도입된 조직 모델을 ‘레닌주의’라면서 교조적으로 고수하며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이 속에서 SWP는 동지적 토론 속에 평가를 끌어내고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환과 혁신으로 나가가는 것에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신자유주의의 성격, 노동계급의 상태와 전략·전술적 혁신의 과제 등에서도 정치적 난점과 이견이 커지기 시작했다. 모순은 누적돼 갔고 이것은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해서 폭발했다. 그런데 SWP 지도부는 또다시 ‘레닌주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강력한 지도부’를 뜻한다고 강변하며 경직된 대응으로 일관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토론은 차단당하기 일쑤였고, 분파 투쟁은 파괴적으로 발전했으면 조직은 분열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런 SWP의 위기와 분열에서 올바른 교훈을 배우고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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