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계급투쟁의 진실과 정의다
[이 글에 원래 달려있었던 각주들을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 필요하면 오프라인 글을 참고하라.]
전지윤
전후 스탈린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전망이나 뒤늦게 발전하던 동방뿐 아니라 서방 자본주의의 경제·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트로츠키의 예측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정말이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트로츠키의 말을 글자 그대로 뒤풀이하면서 실제 상황을 직시하기를 회피하는 것은 트로츠키에게 아주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를 매우 모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는 트로츠키를 초역사적 인물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마르크스주의라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제자들이 아니라 종교 분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곱씹어봐야 한다. ‘플라톤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진리다.’
위의 말은 토니 클리프가 정통 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주의의 이론적 전통을 확립하는 과정의 고뇌와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로서, 트로츠키의 예측과 분석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과정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는 내 마음도 마찬가지다. 1996년에 국제사회주의 정치를 받아들인 이래로 나는 그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군대 제대 후 분명한 정치적·조직적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제가 입수했던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팸플릿 <90년대 중반 남한에서 사회주의자의 행동지침>은 얼마나 가슴 벅찰 정도로 명쾌했던가요. 저는 그 팸플릿 속에서 제 청춘과 인생을 걸만한 길을 발견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저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말 매력적이면서 기존의 좌파들에게 찾지 못하던 대안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했고 국제사회주의자가 됐습니다. 물론 국제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속되기도 했고, 온갖 실수와 오류 속에 좌절하기도 했고, 생계와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2011년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였는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이 2013년말부터 2014년초까지 이어진 노동자연대다함께(현 노동자연대, 이하 다함께) 내부 분파 투쟁의 핵심 이슈중 하나였다.
단지 이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더 많은 의구심이 있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성폭력 추문에 대한 지도부의 대응은 과연 적절한 것이었나, 왜 우리는 2003∼2004년에 다함께로 쏟아져 들어왔던 젊은 활동가들 중 많은 수를 잡아두고 간부로 성장시키지 못했는가. 왜 신입 회원만이 아니라 조직의 핵심 활동가들이 회전문처럼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되는가.
민주노동당 엔트리 10년에 대한 평가는 왜 되지 않고 있는가. 왜 우리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개입에서 거듭 좌충우돌을 겪고 있는가. ‘신문을 통한 당 건설’은 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민주집중제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적용이 진정한 레닌주의에 부합하는가. 2009년부터 말해 온 ‘노동계급의 귀환’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나뿐 아니라 많은 동지들 속에서 이런 의구심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난 분파 투쟁의 진정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런 의구심은 토론과 논쟁으로 잘 조직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정치적 발전을 자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론과 논쟁은 가로막혔고, 결국 나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다함께에서 집단 탈퇴하게 됐다. 다함께 활동 속에서 쌓여 온 의구심들을 바탕으로 탐구․토론하며 새로운 정치적 방향을 세우는 것은 이제 다함께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됐다.
이 글은 먼저 왜 이런 의구심들이 쌓이기 시작했는지 다함께의 지난 궤적을 돌아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문제점들을 바탕으로 하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 제시할 것이다.
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바쳤던 조직이 어떤 한계에 부딪혀 갔는지 직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조직과 활동가를 모욕하는 것이리라. 다함께는 나에게 소중한 조직이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계급투쟁의 진실과 정의라는 게 이 작업을 수행하는 나의 기본 관점이다.
민주노동당 가입과 안착
남한국제사회주의자들(SKIS, 이하 IS)은 “90년 10월 국가자본주의 이론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저널 <새출발>을 발행하면서 … 진정한 조직 건설의 첫 발을 내 딛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시작해서 10여년의 시기는 IS에게 매우 엄혹한 시기였다. 국가보안법 조직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고, 조직은 성장하다가도 이런 탄압에 직면해 다시 쇠퇴·정체하기 일쑤였다.
국제사회주의자들 사건은 1992년 2월, 18명의 첫 구속자가 발생한 이후 2001년 5월까지 총 155명이 구속되었다. IS 사건은 국가보안법 사건 가운데 특이하게도 1992년 첫 사건 이후 무려 10년 동안 매년 구속자가 발생했다.
이것은 NL 경향을 제외하면 국가보안법으로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선전을 제외한 공개적인 정치 활동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고, 이것은 IS가 현실 운동에 개입해서 성장해 나가는 데 커다란 제약을 가했다. 그러나 1999년말 ~ 2000년초에 민주노동당 입당(엔트리)을 통해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우리는 신생 노동자 진보정당의 건설 과정에 함께하면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특히 대학에서 그 과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수도권 주요 대학에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곧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나중에는 학생그룹)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확한 정치적 주장과 집중된 개입 활동을 통해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특히 중요했던 것은 2000년 역사상 최초였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 등 국제사회주의 정치를 바탕으로 한 이런 분석과 노동자 투쟁 연대 활동을 통해 진지한 청중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그 직전까지 김대중 퇴진을 외치다가 갑자기 김대중의 품에 안긴 자주파의 약점도 파고들 수 있었다. 당시 자주파는 김대중의 탄압과 노동자 저항(롯데호텔, 사회보험 등)을 노골적으로 외면하며 민족주의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당시에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은 ≪열린 주장과 대안≫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성폭력, 동성애, 이주민 등 억압과 차별 쟁점들을 명확하게 다루었다. 무엇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며 분석을 제시했다. 각종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과 의의를 잘 소개하며 선거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이런 주장과 활동이 당시 급진화하는 청년학생들을 조직하는 데 효과적인 무기가 됐다.
2001년 6월에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은 ‘다함께’로 조직을 전환한다. 조직상의 집중주의를 분명히 하면서 정치적 독자성도 강화한 이 전환은 논쟁과 이탈도 수반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이후 다함께는 2002년 공공 3사(철도, 가스, 발전) 파업에 적극 연대했고, 여중생 압사 항의 투쟁에도 함께 했다. 대선에서는 노무현에 대한 환상을 과감하게 공격하며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무엇보다 다함께는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서 이라크로 번지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분석과 주장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것이 국제 정세의 핵심 고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함께는 회원을 늘리고 골간 조직들을 다지며 간부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성장의 기회를 잡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됐다.
엄청난 성장, 이어진 국면의 변화
커다란 성장의 기회는 2003∼2004년에 찾아왔다. 첫째, 다함께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전후해서 시작된 국제적 반전운동을 한국에서 가장 앞장서 건설해 나갔다. 다함께는 날카로운 분석·주장을 제시할뿐 아니라 자주파, NGO 등과 함께 반전 공동전선을 구축해서 대중적 반전운동을 건설했다. 그래서 반전 평화를 바라는 젊은 세대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둘째, 다함께는 국제적 반자본주의 운동과 정서를 국내에 소개하고 그것을 반전 운동과 접목시키는 데서도 성공적이었다. 다함께는 2004년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등에 대거 참가단을 보내서, 활력있는 대열을 이루며 영감을 얻어왔다.
셋째, 다함께는 노무현 집권 초기에 크게 상승하던 노동자 투쟁 물결에 효과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굵직한 노동자 투쟁으로는 화물연대 결성과 파업, 전교조의 네이스 반대 연가파업, 공무원노조 건설과 투쟁, 철도 파업 등이 있었다.
넷째, 다함께는 2004년 우익이 노무현 탄핵을 시도하는 국면에서 유연하고 신속하게 전술을 전환했다. 노무현의 파병과 노동자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급격히 방향을 바꿔서 우익의 노무현 공격에 맞선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회주의자들이 뛰어난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한 좋은 사례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함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성장이 이뤄졌다. 이런 성장세는 2004년에도 어느 정도 이어져 조직의 규모는 거의 1천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앞서 지적했듯이 미리 골간 조직과 간부들을 잘 형성해 놓은 것이 중요했다. 동시에 다함께는 당시 급진화하는 청년학생들에게 매우 개방적으로 다가갔다. 기존 좌파와 달리 위계적이기 보다는, 개방적이며 자발성을 고무하는 방식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공동전선’의 원리를 과감하게 적용하면서 개방성을 강조했다. … 우리 정치의 일부이기도 했던 ‘민주성’은 그 당시 남한 좌파운동에서 필요로 하던 가치를 정확하게 담아낸 것이었다.
2005년은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해였다. 노무현의 배신이 거듭되고 본격화하면서, 노무현 당선 이후 진보와 개혁에 대한 대중적 기대가 실망과 환멸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실망과 환멸이 노무현 왼쪽의 진보․좌파에 대한 지지보다는 우파 득세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사회변혁 활동가들은 이런 정세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며 전술적 변화를 추구했어야 했다. 대중의 투지와 자신감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공동전선 구축과 운동 개입, 켐페인을 계속 같은 수준으로 강조할 수는 없었다.
개입의 수준과 속도를 조절해 여유를 확보하며, 2003∼2004년에 들어온 사람들을 교육, 훈련시키며 단단한 간부층으로 끌어올리는 게 필요했다. 이것은 단지 이론 탐구와 학습이 필요했다는 뜻이 아니다.
개입의 수준은 줄이더라도, 지난 개입 활동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평가와 일반화에 더욱 인력과 자원을 집중해야 했다. 개입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필요한 곳에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개혁 정부의 배신 속에서 제기되고 있던 노동운동, 학생운동 위기론 등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토론도 필요했다. 그러나 다함께는 이런 변화에 둔감한 채 정세에 대한 계속된 낙관 속에 ‘급진화하는 청년들 속으로 개입하자’는 방향을 지속했다.
“올해[2005년]도 운동은 고양될 것 같다. … 급진화하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광범하게 건설해야 하며 … 민주노동당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한다.”
“2006년은 2005년보다 좀더 좋은 기회를 다함께에 제공할 것 같다. … 청년(청소년)들의 급진화가 괄목할 만했다. … 올해 우리는 주간 신문 발행을 시작할 것이다.”
2006년 초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켜 5천5백여 표를 얻은 것은 큰 성과였지만 동시에 일종의 덫이 됐다. 이를 계기로 다함께는 오히려 민주노동당에 대한 엔트리 수준과 개입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지방의 노동자 당원 등에게 다함께의 주장을 더 많이 자주 전달해야 한다며 신문도 격주간지에서 주간지로 전환했다. 그래서 나온 게 <맞불>이다. 주간 신문은 분명히 다양한 쟁점들에 더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무기였다. 하지만 객관적 정세가 가라앉고 있었고, 주관적 역량도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주간지로 전환하며 개입주의를 강화한 것은 어려움을 낳았다. 실제로 신문 판매 부수는 이때부터 장기적인 하락 추세로 접어들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강조된 것은 “중앙 강화”였다. 그것은 지역·대학 활동 속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을 중앙 기구로 충원하는 것을 뜻했다. 이것은 변혁조직의 중앙 간부를 육성할 필요에 부합할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정치적 활력과 지도력이 조직 전체에 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타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실상은 기대와 달랐다. ‘중앙 강화’가 추진되면서 기층 회원들의 자발성을 고무하며 개방적으로 조직하던 2000년대 초반의 장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기류는 기층에서 대중과 접촉점을 유지하던 활동가들이 대거 중앙 간부로 이전하면서 더 강화됐다.
“이 과정에서 비판된 것이 ‘연방주의’였고, 그러다보니 성장의 동력으로 기능했던 각 지회의 자율성은 연방주의로 재평가되었다.”
2004년에 몇 차례 진행됐던 전국위원회 회의도 어느 순간 사라지면서 활동을 둘러싼 평가와 토론은 줄어들어갔다. 원래 조직의 지도부인 운영위원회는 정기적으로 전국위원회 회의를 소집해서 지난 활동을 보고 평가하도록 규약에 규정돼 있었다. 2005년 초에 열린 협의회에서 이 조항은 삭제됐다.
현실을 직시하는 전술적 조정이 필요했다
2007년초 쯤에는 상황이 좋지 않고, 각종 모임과 행사 참가자 수와 주변 청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함께 지도부는 여전히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했다.
“2006년 다함께는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 모두 성장했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은 우리의 규모 이상으로 성장했다. … 2006년 성장도 급진화한 청년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물론 2007년에 한미FTA 저지 투쟁, 이랜드 파업, 일심회 마녀사냥 반대 투쟁 등에서 다함께는 여전히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조직의 정체·하강 추세는 계속됐고 평등파의 우경화 시도 속에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면서 엔트리가 지속돼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커졌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당선하면서 노무현 배신이 낳은 결과를 보여 줬다.
물론 공식정치 지형의 이런 변화가 기층의 불만과 분노를 없앨 수는 없었다. 이것은 이명박 집권 3개월 만에 1백만 촛불항쟁이 터져 나오는 것으로 드러났다. 촛불항쟁 속에서 다함께는 신문 이름도 <저항의 촛불>로 바꾸며 적극 뛰어들었다.
다함께는 촛불항쟁이 의제를 확장하며 이명박 퇴진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노동계급의 파업이라는 핵심 고리가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촛불항쟁의 고비마다 전술과 주장을 제기하며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덕분에 다함께는 촛불 속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가입시켰다. 그러나 촛불항쟁 이후에 극심한 회전문 현상이 나타났다. 촛불항쟁 속에서 가입한 사람중에 제대로 남긴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것은 2005년부터 반복돼 온 현상이다. 2006년에도 “활동 회원 수는 점점 줄어들거나 정체하는 현상”, “가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탈퇴하는 ‘회전문’ 현상” 등이 보고되고 있었다.
2008년은 촛불항쟁과 함께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시작된 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배자들도 촛불항쟁 보복과 함께 공안탄압을 강화하며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말에 경찰이 수배자를 찾기 위해 다함께 사무실 압수수색을 한 것은 그 연장선이었다. 이 침탈로 다함께는 일단 주간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이 상황에서 다함께는 지난 몇 년을 분명히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객관적 정세의 변화와 모순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주관적 역량을 솔직하게 평가해야 했다. 그러나 1백만 촛불항쟁이 낳은 이해할만한 도취 분위기 속에 이것은 또 가로막혔다.
2009년 초의 다함께 대의원협의회는 낙관을 지속했다. 촛불항쟁의 ‘외부충격’ 속에서 사기를 회복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격에 맞서 대거 저항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고, ‘제2의 촛불’을 기대했다.
“상당기간 지속될 ‘산업 소요기’의 도래를 예고한다”, “극심한 경제 위기와 이명박의 정치 위기 상황에서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 “새로운 운동이 분출할 수 있는 전운이 감도는 상황”, “투쟁이 중요한 대기업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즉, 1998년 현대차 투쟁 방식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것이 전국적 초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전망은 무리한 과제와 계획 제출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노동자 회원들은 노동조합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활동가조직을 형성해서 활동할 필요가 있다. … 이른 시일 내에 노동자 회원 총회를 개최하고 활동가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계획이 제출됐다. 격주간 신문 <레프트21>과 계간 이론지 ≪마르크스21≫ 동시 발행 계획도 세워졌다. 둘 모두를 성공적으로 발행할 역량이 존재하느냐는 고민은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9년의 용산참사 항의 투쟁, 노무현 사망 정국, 쌍용차 점거 파업 등은 거듭해서 계급투쟁이 직면한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쌍용차 파업의 패배는 ‘노동계급의 사기 회복’에 대한 전망이 과연 옳았는가라는 의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활동가 조직 건설’ 계획 등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저런 계획들이 전국위원회에서 우리 활동의 우선순위로 제출될 수 있었지만 이후 두 차례쯤 전국위원회가 지나고 나면 아무 설명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누구도 감히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는 것이다.
엔트리 종료의 타이밍을 놓치며 수렁에 빠져들다
다함께는 2010년에도 ‘노동계급의 귀환’을 전망했고, 격월간 ≪대학생 레프트 리뷰≫ 발행도 추가로 시작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우파가 참패한 것이 낙관적 전망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복수노조와 타임오프 시행에 대한 민주노총의 대응은 역부족이었고,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 파업의 패배도 다시 한 번 노동운동의 안타까운 현실을 드러냈다. 반값등록금 촛불 시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이 일시적으로 솟구치긴 했지만 상황을 크게 바꾸진 못했다. 계속해서 개혁주의자들의 자기제한적 전술, 민주당과의 동맹 추구,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노동자·학생들의 자신감 수준이 문제가 됐다.
물론 2011년 아랍 혁명은 이런 갑갑함을 잊어버리게 할 고무적인 소식이었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도 우파의 선거 패배는 계속됐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10월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우파는 패배했다. 하지만 이것은 투쟁보다는 선거에서 민주당과 손잡고 정권교체하자는 개혁주의를 강화했다.
민주노동당은 이 논리에 따라 강령 후퇴와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다. 다함께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런 인민전선 전략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막아내는 데 실패했다. 결국 참여당과의 통합을 막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다함께의 엔트리는 종료될 필요가 있었다. 엔트리 전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효과가 의문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누적된 토론과 평가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다함께는 일단 통합진보당에 남는 길을 택했을 뿐 아니라, 2012년 초에는 당내 청년비례 경선에 출마까지 하게 된다. 혹시 의원 자리를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까지 하며 통합진보당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것에 역량을 집중되면서, 힘겹게 이어지던 ≪마르크스21≫의 발간은 중단됐다. 격월간 ≪대학생 레프트 리뷰≫는 이미 4호 이후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 판단 착오와 역량 허비는 큰 후유증을 남겼다. 통합진보당이 총선 이후 경선부정과 마녀사냥의 대혼란에 빠져들면서 다함께도 휘말리게 된 것이다. 10년 넘게 이어진 엔트리 전술은 이 소용돌이 속에 황급하게 종료됐다.
진보당 경선부정 사태를 이용한 마녀사냥의 광풍 속에서 진보는 분열했고, 대선에서마저 박근혜가 당선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갑갑해졌다. 이 상황에서 다함께는 2009년부터 이어져 온 ‘노동계급의 귀환’이라는 전망 아래 철도 민영화 쟁점에 ‘올인’식으로 ‘베팅’을 했다.
이것은 엔트리 종료 이후 뚜렷한 정치 환경을 찾지 못한 것과도 관련 있었다. 또 학생 쪽에서 성장에 계속 실패해 온 것과도 관련 있었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 투쟁과 쟁점에 대한 개입이 돌파구로 제시된 것이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의 기세는 계속 높을 수가 없었다. 박근혜는 집권 초반부터 이미 선거부정 의혹 때문에 정통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촛불시위가 급속히 커지기 시작했고, 박근혜는 진보당을 고리로 하는 종복몰이로 국면을 전환하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박근혜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쌓이는 속에서 2013년 연말 철도파업은 그것을 표출하는 초점 구실을 했다. 철도노조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 이어졌고, 경찰의 민주노총 폭력 침탈 이후에는 10만여 명이 참가한 항의 집회도 조직됐다.
그러자 다함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사기가 회복되고 투쟁이 고양될 것이라던 예측이 옳았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014년 초의 분파 투쟁에서 다함께 지도부가 ‘무자비한’ 태도를 취하는 데 근거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이견을 제시할 게 아니라 지도부가 옳았음을 인정하고 행동통일 하라’는 식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토론․평가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분파 투쟁 과정에서 제기됐지만, 다함께 지도부는 전혀 귀를 기울이거나 토론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견과 의문 제시에 대해 돌아 온 것은 징계 위협과 실제 징계였다. 온갖 딱지 붙이기와 인신공격과 인격 매도도 뒤를 따랐다. 결국 분파 투쟁은 40여 명의 집단적 탈퇴로 마무리됐다.
레닌주의 모델?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쌓여 온 정치적 이견과 혼란은 토론을 활성화시키면서 정치적 혁신과 조직적 발전을 자극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을까? 이것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구조와 민주집중제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해석·적용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다함께는 지도부가 주요 기구와 간부의 추천, 임명, 선출 과정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 왔다. 조직 내 규율 문제의 제기·처리 과정과 연례 대의원대회의 운영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기존 지도부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 쉽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다함께는 연례 대의원협의회가 있기 전 3개월 동안에만 분파를 허용하는 규칙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함께 지도부는 이번 분파 투쟁 과정에서 이 규칙을 ‘지도부에 대한 중대한 이견과 비판 제시는 이 3개월 동안에만 가능하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런 구조는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팀으로 운영위원회를 추천하고 선출하는 제도와 결합돼 있다. 이것은 지도부가 스스로 인원을 교체·충원할 수는 있어도, 지도부의 핵심 인물과 직위들은 거의 종신직처럼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요 기구들이 지도부의 지침을 충실히 수행하는 전업활동가들로 구성되는 경향을 낳았다.
더 문제는 다함께 지도부가 이것을 ‘레닌주의적 민주집중제의 적용’이라고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조직 형태와 구조는 영국 SWP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일 뿐이었다. 팻 스택은 이 모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는데, 이는 다함께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특징이다.
• 분파는 당 대회 이전 3개월의 토론 기간에만 허용된다.
• 중앙위원회(CC)는 미리 제출된 명단(slate)의 승인을 통해 선출한다.
• 연례 협의회의 다수결 투표로 모든 논쟁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표차가 얼마나 근소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영구 분파는 금지한다.
• 중앙위원회가 바뀌지 않는 한 당의 전략은 이후 9개월 간 유지된다.
팻 스택은 이 모델이 “‘레닌의 유산’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시기의 특정 문제를 해결할 특수한 필요에서 비롯했다”고 설명한다. 가입해서 사람을 빼가려는 소종파들, 밀정을 침투시켜 혁명조직을 파괴하려는 경찰 등에 대처하기 위한 구체적 필요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영국에서 채택된 모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처음부터 이 모델의 문제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모델은 영국 SWP에서 그동안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 다음 진술들이 그것을 보여 준다.
지난 15년간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당지도부의 노선에 대해 단 한번도 당내에서 중요한 도전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경선도 치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정상이 아니다. … 현재, 당에는 상층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서 전국위원회나 지부, 당대회 때는 단지 그러한 결정을 추인하게 만드는 경향이 너무 강력하다.
CC 구성원들은 [정치적 책임 논란선 상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렸고, 이따금 누군가는 특별히 지독한 실패가 벌어지면 그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되었다. … 그러나 여기에는 전반적인 해명이나 책임성이라는 것이 없다.
… CC에 새로 충원되는 대부분의 동지들은 학생이거나 지구 조직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의 유급 상근자 중에서 충원된 것이었고 그들이 전에 하던 직업은 바로 지도부의 관점을 당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 CC는 마치 두 레벨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론가와 정책 입안자들이 모여 있는(우월한) 그룹과, 그저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같은 나머지가 모여 있는(열등한) 그룹 말이다. … 중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폭은 더욱 더 좁게 만드는 꼴
조직자들의 역할은 결국 중앙위원회의 지혜를 전달하는 데 한정됐다. … 크리스 하먼은 조직자 회의가 마치 본사에 실적을 보고하려 경쟁하는 영업사원 모임 같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지도부 내 차이를 제한된 범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습관은 지속됐다. 그 결과, 문제는 곪다가 영문도 모르는 평회원들의 머리 위로 터져 나오곤 했다. 상당 기간 동안 평회원들은 지도부 내 전략과 접근법의 차이를 애매한 뜬소문으로만 접하다 핵심 결정이 내려진 뒤에야 공개 토론으로 알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현재의 구조[에서] … 만약 한 쟁점이 중앙위원회를 분열시키기에 충분히 중요하다면, 중앙위원회 멤버들 사이에서 이 문제는 곪아터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익숙했던 권위적 위치들(그리고 아마, 경력들)을 포기하기보다는 조직을 떠나는 경향이 있다.
위의 언급들은 대부분 구체적 사례만 바꾸면 다함께에 대한 설명으로 보일 정도다. 이것은 다함께 지도부가 영국 SWP의 조직 모델을 거의 그대로 복사해서 적용했기 때문이다. 구체적 조건과 맥락이 다른 데도 말이다.
심지어 다함께는 ‘회원 3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분파를 구성할 수 있다’는 규칙까지 그대로 가져 왔다. 한국 다함께의 회원 규모는 영국 SWP의 10분의 1이 안 되는 데도 ‘30명’ 규정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기계적으로 SWP 모델을 답습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2003~2004년에 다함께가 급성장하고 회원들도 활력이 넘치며 사기가 높을 때는 이 조직 모델의 문제점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거나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갑갑한 정세 속에 조직이 성장을 멈추고 회원들의 사기가 가라앉으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회전문처럼 나가는 일이 계속됐고, 특히 중간 간부의 구실을 하던 젊은 활동가들마저 사기 저하되면서 조직·활동에서 멀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변화된 상황에 대한 치열하고 제한없는 토론·평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 구조와 제도는 그것을 쉽지 않게 만들었다. 더구나 다함께 지도부는 형식적 다수결과 규칙 준수, 조직 기구의 권위 인정을 과도하게 강조해 왔다. 솔직한 평가와 함께 교훈을 배우는 과정보다는 특정 개인에게 책임이 넘겨지는 경우도 많았다.
돌아보기는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물론 솔직한 평가와 토론을 위한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2009년 초부터 발간된 ≪돌아보기 내다보기≫가 바로 그 시도였다. ≪돌아보기 내다보기≫ 1호에는 다함께 지도부를 가감없이 비판하는 한 동지의 글까지 실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돌아보기 내다보기≫ 2호에는 운영위원 등이 쓴 6개의 글이 실려서 이 동지에게 십자포화를 쏟아부었다. “자율주의”, “불평”, “사실왜곡”...특히 “분파적”, “분파주의”라는 비판이 반복됐다. 이런 식의 대응이 회원들에게 낳을 효과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결국 ≪돌아보기 내다보기≫는 몇 개월 지나서 더 이상 발행돼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 뭔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탈퇴하거나 활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한때 1천 명이 넘었던 회원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해가 갈수록 기관지 판매 부수와 매년 여는 조직 최대 행사인 맑시즘 참가자 수가 계속 줄어들었다.
조직의 분위기는 자유롭고 회원들의 능동성을 고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것은 사회변혁 조직에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동성’이야말로 사회변혁 조직 안에서 제거해야 할 독소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당은 기층으로부터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특징지워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기층 기관들은 모든 예기치 못한 그리고 예고되지 않은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2011~2012년을 거치면서 더욱 문제가 됐다. 앞서 봤듯이 이 시기에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은 유례없는 극심한 분열과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이견들이 커졌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활발한 토론과 회원들의 능동적인 제기, 고민이 절실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토론과 평가를 위한 정기적인 회원 모임이 있었고, 회의가 있었고, 포럼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문제들은 충분히 토론 평가되지 않았다. 존 몰리뉴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조직 내의 모든 정치 토론에서 빠져 있다. 물론 각 지부는 정치 토론을 한다. 그러나 중앙의 전략과 체계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에 개입하고 이를 통해 중요한 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토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부는 충분히 지도부의 전략 문제에 대해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 또는 더 중요하게는 지도부 내에 존재하는 의견 차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직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정보도 회원들에게 충분히 보고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 상태에서 각급 기구에서의 토론은 지도부의 결정과 지침을 전달하는 과정이 되기 쉬웠다.
현실을 직시하는 문제와 정직한 설명, 그리고 당내 민주주의의 수준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당원들에게 당의 상태에 대한 정직하고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당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민주적인 논쟁에 참여하기는 매우 어렵다.
내가 2013년 연말에 다함께 지도부 내에서 몇 가지 정치적 이견을 제기했을 때 나타난 문제도 이것이었다. 내가 제기한 쟁점은 그동안 충분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쌓여 온 문제들이었다. 지금의 구체적 정세 변화와 발전 속에서 진지한 사회변혁조직이라면 치열하게 고민·토론해서 답을 내놔야 하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에 이렇게 제기했다.
나를 이런 활동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이 끔찍한 체제가 낳은 부조리, 불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이었다. … 나는 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억압, 착취, 모순에 맞서는 활동 속에서 희망과 해방감을 느꼈다. … 그런데 …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해 온 이런 가치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기존 분석과 입장을 위협하는 진실이 드러나도 애써 못 본척하지 않았던가? 나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있는가? 나는 거짓과 불의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가?
민주적이고 공개적인 논쟁을 하는 것만이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다함께 지도부는 내 의견과 이 논쟁을 회원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 나아가 이것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며 회원들 속에서 주장하기 시작한 나에게 징계를 가했다. 이런 대처는 곪고 있던 문제점을 드러냈고, 분파 투쟁은 결국 파괴적으로 마무리됐다.
다함께 지도부가 이런 구조와 태도를 고수한다면 앞으로도 솔직한 토론은 활성화되지 못할 것이다. 기층의 능동성을 고무하기 보다는 몇몇 뛰어난 지도자의 입만 쳐다보는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조직과 전술의 경직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경직성은 다시 성장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2013년 연말의 나처럼 의문을 품게 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토니 클리프의 경험에서 배우기
우리는 올해 초에 분파 투쟁 끝에 다함께에서 분리해 나온 후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을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다. 변혁조직 건설은 초기에 운동 건설과 개입보다는 혁명적 원칙과 전략에 대한 탐구, 토론, 선전을 중시하는 선전그룹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IS도 마찬가지로 이런 단계를 밟아야 했다. 당시 IS는 자신들의 과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혁명적 선전 그룹의 첫째 임무는 정치적 명료화, 혁명적 사상들에서 개량주의적 사상들을 솎아내기, 그리고 헌신적 혁명가들을 그러한 이념들로 무장시키기이다. … 트로츠키의 말을 빌면, 조그만 도끼는 날이 날카롭게 서 있어야만 거대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 선전 그룹은 규모가 성장해야 하는 동시에, 신구(新舊) 구성원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줄 아는 사람들을 중핵으로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먼저 다함께가 조직적·정치적 문제점 때문에 제대로 분석하거나 포착하지 못한 쟁점들을 탐구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분파 투쟁 속에서 이런 문제점이 다함께가 현실을 직시하고, 정치적·이론적 혁신을 수행해 나가는 데 걸림돌 구실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혁명적 원칙과 전략상의 커다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다함께에서 이탈해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토니 클리프가 1940년대 말에 정통트로츠키주의 조직과 분리해 나왔을 때의 과정과 문제의식과 비슷한 점이 있다. 1940년대의 정통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대부분 트로츠키가 말년에 내놓은 세계에 대한 예측(예측은 크게 네가지였다. 1.스탈린 체제는 곧 붕괴할 것이다. 2.자본주의는 위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제3세계의 부르주아적 과제는 연속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다. 4.제4인터내셔널이 다가올 혁명의 주도세력이 될 것이다.)을 문구 그대로 고수하려 했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1938~1940년에 내놓은 세계 전망과 예측들이 자구 하나하나까지 정확하다고 고지식하게 믿었다. … [그래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대부분 ‘1938년 상황’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의 세계는 트로츠키의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여나갔다. 이에 따라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에 대해서도, 서유럽 장기호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설명과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고수하려는 트로츠키의 문구에 현실을 끼워 맞추었다. 즉, 소련이 동유럽에서 혁명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했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파국에 처해 있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논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트로츠키의 예측이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 때문에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노동계급 의식의 실제 변화, 계급세력 관계의 변화를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평가하고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얻기 위한 전술들을 변경하기(이것이 레닌의 정치적 실천의 핵심이다.)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스탈린 군대가 동유럽에서 혁명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심각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과 자기해방 과정이 없이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된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보존하려 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대한 부정인 셈이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지적처럼 이런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역설은 트로츠키의 이론의 자구를 보존하려고 함으로써 실제로는 그 이론으로부터 그것의 본질적 내용을 제거했다는 데 있다.” 토니 클리프는 이와 같이 “트로츠키가 말한 문구에 집착하면서 트로츠키의 말에 담긴 정신을 제거하는 교조적인 트로츠키주의”에 심각한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세계를 제대로 해석하고, 그래서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과제에 정면 도전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트로츠키의 예측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직시해야 했다. … 그의 예측이 틀렸다면 그의 원래 분석을 의심해 봐야 마땅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역사적·국제적 경험을 일반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험은 항상 변화·발전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도 항상 변화·발전한다. 변화를 멈추는 순간 마르크스주의는 생명을 잃는다.
클리프는 변화․발전한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혁신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가자본주의 이론, 영구무기경제 이론, 일탈한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서 변화된 현실을 설명해 냈다.
진정한 레닌주의 전통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도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는 다함께가 충분히 해내지 못해 온 현실에 대한 올바른 설명과 그에 따른 적절한 이론적 혁신, 전략·전술적 혁신을 해내야 한다. 이런 탐구와 토론에 필요한 진정한 레닌주의적 민주집중주의도 바로 세워야 한다.
물론 지금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이 직면한 처지가 2차 대전 이후 정통 트로츠키주의와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스탈린이 혁명을 확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심각한 위기다, 국제 혁명이 임박해 있다’는 등의 주장은 대개 직관적으로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와 제국주의 변화에 대한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의 분석에서 아쉬운 수준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IST는 우파나 자유주의자들, 개혁주의 진영, 나아가 같은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다른 논자들보다도 더 날카롭고 명확하게 이 세계를 분석하고 또 변혁하려 시도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설명이 충분치 못하거나, 설명의 일관성이 떨어진다거나,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하거나, 분석·주장을 현실에서 전술로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일이 늘어나 왔다. (예컨대, 나는 SWP 일부의 ‘특별한 종류의 공동전선 이론’은 리스펙트 성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본다. ‘하강기-상승기’로 정세를 단순하게 구분지은 것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계급투쟁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부추긴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변화와 노동계급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일부 과소평가도 존재한다. ‘혁명적 신문’ 이론에서 SWP는 오늘날 생산력 발전과 기술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 이집트 혁명에서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태도도 혼란스럽다. SWP는 당내 성추문 사건에서 여성 억압 이론을 실천으로 적용하는 데 실패했다. 레닌주의 조직 모델에 대한 SWP의 관점은 매우 불완전하며 경직돼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사회변혁조직이라도 직면할 수 있는 어려움과 한계다.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이끌었던 조직들도 언제나 수많은 판단 착오와 오류에 직면했었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혁명적 조직의 진정한 의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직시하고 그것에서 배우며 반복하지 않으려하는 데 있다.
그러나 SWP는 리스펙트의 일시적 성공과 뒤이은 실패, 경제 위기의 도래와 노동자 투쟁의 지체 등을 거치면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70년대에 특정한 필요에 따라 도입된 조직 모델을 ‘레닌주의’라면서 교조적으로 고수하며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결국 SWP는 민주적이고 제한없는 토론 속에 평가를 끌어내고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혁신해 나가는 것에 실패했다.
다함께도 그동안 ‘노동계급이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작업장에서부터 투쟁이 부활하고 계급이 귀환하고 있다’는 분석에 집착해 왔다. 이와 어긋나는 현실은 외면하고 이에 대한 의문과 이견은 외면해 왔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조건·의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왜 계급의 귀환은 지체되고 있는지, 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가 성공적이지 못한지, 왜 진보정당들이 사분분열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고자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더 진지하게 탐구하고, 자유롭게 토론해서 길을 찾아보고자 한다.(나는 우리가 더 탐구하고 토론하며 혁신을 시도할 쟁점들이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국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오늘날 노동계급의 구성과 상태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중국의 부상이 제국주의 질서에 어떤 변화를 낳고 있는가, 진정한 민주집중제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혁명적 신문은 어때야 하는가, 오늘날 연속혁명 전략의 의의는 무엇인가...) 팻 스택은 이런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에 필요한 진정한 민주집중주의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 간부 중 다수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민주집중주의의 관점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당에 끌어오고, 충성심에 대한 걱정이나 죄의식 없이 이견을 개진하고, 혁명 정당은 솔직하고 개방된 토론과 논쟁 속에서만 제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의적인 시간 제한이나 규칙에 방해 받지 않고 광범한 주제를 둘러싼 토론, 의견 교환과 논쟁을 할 수 있는 민주적 개방성이 필요하다. … 민주주의는 3개월 내로 제약돼서는 안 되고, 규약으로 짓밟혀서도 안 되고, 명령으로 금지돼서도 안 되며, 집중주의의 문을 두드릴 때 무시돼서도 안 된다.
전통의 계승과 창조적 혁신
이 토론과 모색 과정에서 우리가 다함께에서 배운 혁명적 원칙과 이론들을 부정하거나 잊어버릴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거기서 도움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적극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클리프가 사회구성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법과 자본주의에 대한 국제적 차원에서의 분석틀, 연속혁명 이론 등에 도움을 얻어서 혁신을 성공시켰듯이 말이다. 클리프는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문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관점과 국제주의를 진정으로 계승했다. 오히려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보다 더 철저히 말이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을 출범시킨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로 현실을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무기로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하려 했다. … 우리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 - 우리가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라는 사실 - 도 분명히 해야 했지만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했다. 그것은 전통의 지속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클리프의 스탈린주의 분석은 그 기본적인 준거틀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채택했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따랐다”고 지적했다. 또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맑스가 가장 핵심적 중요성을 부여했던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을 복권시켰다”고 강조했다.
즉, ‘거인의 어깨를 딛고’ 더 멀리 내다보려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사회주의 전통에 대한 계승이 핵심으로 포함돼 있다. 물론 그것은 문구와 도식의 계승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창조적·발전적 계승이 돼야 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게 뭘까? 몇몇 신성한 공식을 아무 생각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종파는 스탈린주의자들뿐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에도 많다. 그러나 진정으로 전통을 구현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창조적 혁신을 필요로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의 통합이므로, 혁신 과정은 지적인 차원과 정치적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고,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 그에 맞춰 발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창조적 혁신뿐 아니라 전통의 계승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그것을 적용해 구체적 분석과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리프의 이론적 혁신은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철저하고 구체적인 추적과 분석 시도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또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내면서 올바름을 입증할 수 있었다.
국가자본주의, 상시 군비 경제, 빗나간 연속혁명이라는 세가지 이론은 …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각 지구상의 세 지역, 즉 소련과 동유럽, 선진 자본주의 공업국들, 제3세계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발전 상황을 오랫동안 탐구한 결과였다.
따라서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커지는 제국주의 갈등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진보당 마녀사냥에 어떻게 대처할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 박근혜 정부에 맞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을 계속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한국 자본주의 현실에서 계급투쟁의 핵심 고리들을 움켜쥐고, 전체 사슬을 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려 해야 한다. 이것을 이론적 혁신 시도와 연결시켜야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를 이론과 실천의 종합으로 여기는 사회주의자들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사회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변화한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또 그것을 구체적 현실에 적용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는 이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쳐지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다. 우리는 개혁주의, 스탈린주의가 아니라 트로츠키가 그 핵심을 보존해 우리에게 물려 준 국제주의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변화된 세계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런 창조적 혁신을 위한 고민과 토론을 뒷받침할 진정한 민주집중제와 21세기 레닌주의의 길을 찾고 있다. 나는 지난 분파 투쟁 때 이렇게 쓴 바 있다.
저는 오히려 저와 우리 분파야말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진정한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통은 확고한 원칙과 유연한 전술을 결합하며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오류를 직시하고 그것에서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민주적 토론을 통해 정치적 확신을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가장 강력한 행동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1917년 10월의 봉기는 당원 다수의 확신과 노동계급의 지지 속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통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혁신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분명하고 커다란 공통점을 바탕으로 함께 나가야 한다. 이런 공통점이 바탕이 된다면 치열한 토론과 논쟁은 우리가 힘을 집중해 길을 찾아 나가는 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될 것이다. 토론과 논쟁 속에서 가능해지는 정치적 설득과 확신만이 우리의 힘을 집중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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