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의 투쟁을 돌아보며
전지윤
[이 글에 원래 달려있었던 각주들을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 필요하면 오프라인 글을 참고하라.]
우리는 지금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을 위한 토대를 놓겠다고 여러 가지 모색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대로 된 변혁조직 건설을 통해서 이 야만적인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에 핵심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모여 있는 우리들은 거의 모두 노동자연대다함께(현 노동자연대, 이하 다함께) 속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활동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다함께의 멤버쉽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변혁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변혁조직이라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함께는 변혁조직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이상 다함께라는 수단이 아니라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 것일까. 변혁조직으로서 다함께가 어떤 결함이 있다고 보게 된 것일까. 설사 다함께가 변혁조직으로서 결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부에서 혁신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됐을까. 왜 다함께에서 분리해 나와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의 토대를 놓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을까.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답하려면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2월말까지 다함께 내에서 벌어진 분파 투쟁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이 분파 투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다함께가 제대로 된 변혁조직으로서 결함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다. 더 나아가 내부에서 이것을 혁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 글은 우리가 어떤 과정과 판단을 거쳐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됐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지난 분파 투쟁을 평가하고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을 위한 교훈을 끌어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지난 분파 투쟁 과정을 돌아 볼 것이고, 정치적 일반화를 시도할 것이다.
이견 제시에 징계로 답하다
이번 분파 투쟁의 출발점은 내가 다함께 지도부 내에서 몇 가지 정치적 이견을 제기하던 시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나는 <레프트21>의 편집자이자 운영위원으로서 오랫동안 다함께 지도부의 일부였는데, 지난해 9월초부터 중요한 견해 차이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내 주장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종북몰이의 핵심인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에서 다함께가 더 적극적 방어 입장을 취해야 한다. 둘째, 2012년 진보당 경선부정 사태에 대한 다함께의 입장이 틀렸다는 점을 자기비판하자. 셋째, 진보정당 분열 상황에서 마녀사냥에 타협하며 진보당만 배제하려는 진보연합체(노동정치연대)에 대한 참가를 재고하자. 넷째, 철도 파업에 개입하면서 정치투쟁과 경제 투쟁을 적극 결합시키자.
논쟁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나는 다함께 지도부의 입장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이 논쟁을 지도부 밖으로 공개하길 꺼리는 것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이견을 가진 채, 지도적 위치에서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는 구실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주장을 알리고 토론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고 주요 직위를 사퇴했다. 그 후 나는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글의 초안을 완성한 후에 그것을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토론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지도부에게 내가 편집자와 운영위원에서 사퇴한 이유를 조직의 내부 회보에 실어달라며 기고했다. 나는 지회모임 참가, 집회 참가, 신문 판매 등 행동통일을 하면서 이처럼 정치적 이견을 제기하고 토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함께 지도부는 나의 이런 제기에 매우 경직된 태도로 반응했다. ‘사실 왜곡’이라며 내 사퇴의 변을 싣기를 거부했고, 내가 회원들에게 지도부에 대한 이견이 담긴 글을 배포하며 토론할 경우 징계하겠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민주적인 토론이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왜곡, 사실 관계에 대한 왜곡을 자유롭게 선전 선동하도록 용인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 개인적으로 이 글을 배포할 시 즉시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에 제소하겠습니다.”
나는 지도부의 이런 대응에 큰 당혹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고, 곧바로 항의했다.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주요 직위를 사임하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겠다고 한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차단하려 하다니요. … 제가 정치적 견해를 선전 선동할 자유로운 권리를 가로막으려 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굽히지 않고 내 의견을 알리며 사람들과 토론해 나갔다. 그러자 다함께 지도부는 거듭해서 나에게 징계 위협을 가했다. 결국 나는 다함께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이하 규분위)에서 소환 조사를 받았고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내가 ‘조직의 규칙을 어기고 상시분파를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였다. 정치적 이견을 제시하고 토론하고자 한 것에 징계로 답한 것이다. 나는 항소이유서에서 당시 내 기분을 이렇게 썼다.
“저는 지난해 12월 22일 민주노총 침탈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가하고 밤늦게까지 체포된 동지들 면회를 하다가 징계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설마 소환조사를 받은지 3일만에, 더구나 민주노총 침탈로 모두 정신없는 상황에서 징계를 하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문자 통보를 받았을 때, 저는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습니다. 20년간의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이 이렇게 간단히 깎아내려진다는 것에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목디스크 통증을 견디며 밤새 신문을 만들고 택시비를 아끼려고 새벽녘 집까지 걸어가던 때도 결코 꺼지지 않았던 나의 희망과 투지가 잠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환 조사와 징계 과정은 내용뿐 아니라 절차상으로도 문제가 많았고, 속전속결식이었다. 그런데 소환조사가 징계로 이어진 이 3일만에 다함께 회원 50여 명이 징계 반대 연서명을 해 주었다. 그만큼 이 징계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기존에 제기했던 정치적 이견에 더하여, 조직 내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우리 조직의 토론 분위기가 좀 더 자유롭고 활발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소박한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앞서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조직 내 민주주의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갈수록 ‘분파를 만들지 않으면 협의회 때 내 글을 자료집에 싣거나 이견을 제기하기도 어려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나와 토론하던 사람들도 이에 대한 공감대가 커졌다. 결국 다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분파 결성 시도가 시작됐다.
단결파의 탄생
징계 시도에 반대해 연서명에 동참한 사람중의 일부가 분파 결성 시도와 모임의 주축이 됐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다. 지도부는 모든 회원들에게 ‘전지윤 징계 1심 평결문’을 배포했고, 곧 나에 대한 부당한 공격으로 가득찬 ‘1차 협의회 자료집’이 발간됐다. 이 자료집에서 내가 제기한 정치적 이견에 대한 진지하고 정치적인 토론 자세는 찾기 힘들었다.
“1차 자료집을 보면 나를 ‘거짓말, 속임수, 부정직, 음모를 사용해 온 사람’이며 ‘엘리트주의, 선전주의, 이데올로기주의, 보수주의, 스탈린주의’ 등 온갖 나쁜 ‘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확증 편향, 허영심, 찌질한, 외골수, 좌익 포퓰리스트, 진보당 변호인, 경기동부연합의 파르티잔’ 등 온갖 용어들도 쓰이고 있다. … 정치적 토론이 이런 인신공격과 온갖 부정적 딱지 붙이기로 나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걸 보고 누가 이견을 제시하며 토론을 해볼 엄두가 나겠는가?”
순식간에 나는 정치적으로 쓰레기같은 주장이나 하면서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고 동지들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곤두박질쳤다. 나를 적극 도왔다는 이유로 내 파트너도 같은 취급을 당했다. 징계에 이어서 ‘여론재판’ 국면이 펼쳐진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징계에 반대하며 다함께 조직의 민주집중제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 소중한 동지들이 존재했다. 이런 동지들 32명의 서명을 받아내서 분파 결성 요건을 넘어설 수 있었다. 마침내 1월 1일 분파 출범식이 성사됐다.
나는 이날 첫 발언에서 “‘동지’라는 말이 이처럼 소중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며 ‘십자포화를 뚫고 이 자리에 온 용기있는 동지들’을 환영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난관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중 일부는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을 쥐고 서로를 격려하며 손잡고 나간다면 역사는 우리의 대의가 옳았다고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이하 단결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분파 발표문에서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협의회 토론 기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도부에 대한 이견 제시가 상시분파 결성 시도로 몰리고 징계까지 받는다면 토론의 자유를 위축할 뿐 아니라 진정한 행동 통일도 가로막힐 것이다. …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민주집중주의가 진정으로 어떻게 구현돼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활동에 대한 비판적 돌아보기가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결파가 직면한 첫 번째 난관은 협의회준비위원회(이하 협준위)에 분파를 등록하는 일이었다. 협준위는 ‘요구가 불분명하다’며 분파 등록을 한 차례 반려했다. 다함께의 규칙에도 없는 부당한 제약을 가한 것이다. 우리는 강력 항의하면서도 요구를 수정해 다시 등록을 요청했다. “협의회 준비팀과 실랑이를 하는 데에 시간을 쏟기보다, 회원들과 건설적인 토론에 나서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분파 등록이 반려된 이틀 동안, 지회간사 등이 단결파 구성원에게 전화해서 탈퇴를 종용하는 일도 있었다. 만약 이 때 2명 이상 이탈했다면 분파 등록은 실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이탈자는 없었다. 이 결집력은 이후에도 거의 빈틈없이 유지됐다.
1월 5일에는 협준위가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우리가 직면한 두 번째 난관이었다. 이 토론회는 일정과 방식, 토론 주제 등에 대해 우리와 아무 상의도 없이 조직됐다. 청중 토론 때 협준위는 6:2로 발언 기회를 분배하며 이것이 ‘공정하다’고 우겼다. 나와 단결파 회원의 발언에는 야유와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나키즘,”, “자율주의”, “선전주의” 등 갖은 딱지를 붙이며 단결파를 매도하는 발언들도 이어졌다.
특히 이날 다함께 지도부는 내가 거짓말, 속임수, 이간질을 일삼았다는 ‘고발과 폭로’를 쏟아냈다. 다함께 지도부가 준비한 ‘정치적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단결파의 한 동지는 그 힘든 상황에서도 눈물어린 반박과 호소를 했다.
“동지들이 이렇게 서로를 불신하고 원망하며 서로에 대해 고백을 해야하는 이 서글픈 분위기는 도대체 왜 조성되고 있는 겁니까? 지도부는 감정적 대립과 인간적 고통을 낳는 이런 분위기 조성을 중단하고 진정한 정치 토론을 조직해 주십시오.”
다른 단결파 성원들도 모두 용기있게 앞으로 나가서 진정성있고 설득력있는 발언들을 이어갔다. 단결파 동지들은 놀라운 잠재력과 용기를 발휘했다. 그래서 패배가 확정적이라고 봤던 이 날 토론회에서 우리 단결파는 나름대로 선방했다. 그날 단결파에서는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았고 오히려 2명이 새로 단결파에 합류했다.
징계 반대 운동과 ‘바닥내기’ 공세
우리는 1월 5일 토론회가 끝나자마자, 2차 자료집 기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백 페이지가 넘고 19편에 달하는 글들을 기고했다. 1차 자료집이 다함께 지도부가 퍼부은 ‘전지윤 규탄 특집호’였다면, 2차 자료집은 단결파의 조직적 반격이었다. 당시 단결파 내부 뉴스레터의 머리글에서는 이 경험을 이렇게 평가했다.
“1월 8일은 우리 분파의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뜨거운 겨울날이었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서 협력적으로 이 많은 글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감격적인 연대의 경험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내가 쓴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돌아보자 2 – Q&A’는 무려 63가지 질문에 답하고 있었는데, 이 글은 질문을 수집하고 답을 제시하려 한 단결파 성원들의 집단적 협력 덕에 나올 수 있었다. 단결파는 점점 조직적 틀을 갖추고 더 체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해 갔다. 이런 활동 속에서 지도부가 소위 ‘냉담 회원’이라고 폄하했던 동지들이 대단한 열의를 보여줬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일이 아니었다.
“우리 분파는 분파활동을 통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회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토론과 우리 단체의 활동에 관심을 갖도록 참여를 조직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이처럼 분파 성원들의 정치적 자의식이 고양되면서 성과도 늘어났다. 분파 성원들은 지회모임에 가서도 당당하고 효과적으로 주장을 펼치며 지지자를 확보했다. 이런 토대 위해서 우리는 징계 반대 서명자를 늘려나갔고 분파원도 꾸준히 증가해 갔다. 이런 뒷받침 속에서 나는 희망을 키워가면서 이렇게 마무리되는 항소이유서를 써냈다.
“저는 이 부당한 징계를 철회시키는 데 제 모든 정치적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 간 혁명가로 살아온 저의 명예와 자부심을 지키는 일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건강한 혁명적 전통과 혁명조직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이미 많은 동지들의 소중한 지지가 있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우리는 사실의 왜곡과 과장을 통한 인신공격과 인격모독에, 즉각적인 감정적 대응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리는 진심이 통하리라 믿으며 거듭해서 동지적인 정치 토론을 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함께 지도부는 우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도부는 오히려 앞장서서 ‘전지윤과 분파에 대한 신뢰 바닥내기 공세’를 부추겼다. 이런 방향은 2차 자료집에 실린 다함께 지도부와 지지자들의 글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전지윤의 야비한 실체’를 고발하는 글이 중요하게 실렸고, ‘전지윤을 당장 자격정지하자’는 글도 실렸다.
무엇보다 핵심은 다함께의 핵심 지도자인 동지의 글이었다. 이 글에서 그 동지는 나를 ‘비열한 도덕적 파탄자’인양 묘사했다. 내가 “회원들을 편 가르기 갈라치기 하거나 음모적으로 조직”하려 했고, “회원들에게 값싼 위로를 제공하며 다가가 운영위원회와의 감정의 골을 더 벌려” 놓으며 “적나라하게 비윤리적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 행위는 “접선”, “추파”, “이간질”, “비열한 행위”, “음험한 모략”으로 매도됐다. 단결파 분파원들은 “가차없고 무자비한 훈련을 받다가 … 자존심이 상해 중앙으로부터 멀어진 회원들”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 동지는 이렇게 통첩했다.
“우리는 노동자 투쟁 개입을 위해서 지금까지처럼 엄격하기 이를 데 없고 무자비한 훈련을 해 나아갈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자존심고 마음에 상처를 입든다든가, 그래서 중앙에 원한을 품고 복수나 응징을 한다든가 해도 우리는 모두 '부수적 피해'로 간주할 것이다.”
이런 ‘가차없고 무자비한’ 공세는 계속됐고 오히려 확대됐다. 전지윤과 그 파트너에서 시작된 인신공격과 신뢰 바닥내기는 이제 다른 분파원들에게로 확대됐다. 단결파 분파원들은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이 때 단결파 구성원들의 심정은 다음과 같은 글에 담겨 있었다.
“동지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를 비난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내 가족이라는 점입니다. 이 참혹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함께 삶을 이어갈 사람들이란 점, 이 점을 잊지 말고 대응해 나갑시다.”
협준위는 ‘전지윤 징계 반대 서명 문안’과 여기에 서명한 다함께 회원들의 명단을 절대 회원들에게 배포하지 못하게 차단했다. 자료집에 실어주지도 않았고, 허락없이 배포하면 징계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징계 반대를 위해 결성된 분파가 그 핵심 활동을 못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공세에 대처하면서 불리해지는 상황을 만회할 기회로 협준위가 제안한 1월 26일 토론회를 기대했다. 발언자들을 사전에 충분히 조직한다면 1월 5일 토론회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29:1의 전지윤 규탄대회’
하지만 토론회가 다가오면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협준위는 토론 방식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려 하지 않았다. 특히 “플로어 토론을 공정하게 운영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에 대해서 “협의회준비위원회의 진행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답할 뿐이었다. 마침내 1월 26일 토론회가 열렸고, 그날 단결파 구성원들은 충격 속에서 한가닥 기대가 좌절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토론 기회를 보장할 거라는 순진한 믿음’은 무참히 꺾였다.
“청중토론 때 드러난 것은 지도부가 회원들에게 분파회원들의 주장을 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1월 5일 토론회와 다르게, 발언신청을 한 회원들 가운데 지지 및 반대 의견의 비율조차 따지지 않고, 분파와의 협의도 없이, 번호표를 준비해 선착순으로 지도부 지지자들만의 청중 발언을 조직했다. … 청중 토론은 29대 1의 완전한 불비례 속에 우리 분파와 분파구성원들에 대한 규탄대회가 됐다.”
“1월 26일 ‘토론회’는 토론회로 불릴 가치가 없었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의장은 사실상 운영위원회의 변호사로서 운영위원 측에 해명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분파 측에는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청중 발언은 일방적으로 운영위원회를 지지하는 동지들에게 몰렸다. 이 모임을 주최한 협의회 준비위원회(이하 협준위)는 거듭하여 분파에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 … 지도부가 여전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이 망각되길 바라야 한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도 담담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참담한 일을 겪은 후에도 단결파 구성원들은 그날 자정이 마감이었던 3차 자료집에 맞추어 2차 자료집 때보다 더 많은 총 25편의 글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날 저녁 우리의 심정은 매우 불편하고 복잡했다. ‘29:1의 규탄대회’ 이후에 다함께의 각 지회모임에서도 단결파 구성원들의 발언 기회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3차 자료집에서도 ‘바닥내기’ 공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계속됐다.
이제 ‘이처럼 편파적인 심판과 일방적으로 상대편만 응원하는 응원단, 무엇보다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경기를 끝까지 뛰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의문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징계 반대 서명을 더 받고 분파 회원을 늘리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의문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우리는 다함께 지도부가 분파를 인정하고 분파 활동을 허용하고 공정한 협의회를 진행할 뜻이 거의 없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따라서 우리는 협준위에게 ‘29:1 규탄대회’로 상징되는 불공정한 협의회 진행에 대해 사과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2월 6일 협준위에 공문을 보냈고 네 가지를 요구했다.
1. 1월 26일의 ‘토론회’ 조직과 진행에 대해 협준위는 주최기구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2. 1월 26일 ‘토론회’의 의장이었던 김인식 동지는 특히 이 사태의 정치적 책임을 지고 공개적으로 자기비판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3. 협준위는 단결파에 대해 근거없는 비방을 한 당사자인 최일붕․김하영․전주현 동지가 단결파에 사과하도록 조직해야 합니다.
4. 협준위는 단결파의 징계 반대 서명 문안을 게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지금이라도 게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협준위에게 “만약 협준위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단결파는 우리의 주장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구하기 위해 더 적극적인 방식을 모색”할 것이라고 했다. 또 “공정하고 민주적 협의회가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벌어질 이후 상황의 정치적 책임은 협준위에게 있음을 분명히” 했다.
2월 초중순에 있었던 다함께 대의원 선출 과정과 결과도 실망스러웠다. 단결파의 규모는 다함께 회원중에 거의 10분의 1에 달했지만 대의원 중에서는 10분의 1은커녕 한명도 당선하지 못했다. 다함께 지도부는 ‘전지윤 징계에 찬성하는 사람들’로 대의원을 구성하려 애썼고, 단결파에서 출마한 사람이 당선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다함께 지도부는 전형적으로 ‘토론에서 이기길 원하는 자신감있는 지도부’가 아니라 ‘표결에서 이기길 원하는 자신감없는 지도부’였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 분파 투쟁 과정에서 이안 버철이 말했듯이 말이다.
“표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지도부는 당대회의 자리를 지도부에 찬성하는 대의원들로 최대한 채우려 애쓸 것이고, 그래서 반대파의 주장할 권리가 제한되도록,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은 당원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토론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지도부는 반대파에게 입장을 표현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허용할 것이고, 당대회 대의원들이 균형을 이루어 반대파의 가장 명확한 대변자들이 참석하게 할 것이다. … 이런 지도부는 자신들의 입장의 우월함과 소수파를 설득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이렇게 할 것이다.”
협준위는 단결파가 보낸 공정한 협의회 진행을 위한 항의와 시정 요구 공문에 대해서도 끝내 답하지 않았다. 대신 협준위는 단결파에게 ‘전지윤에 대한 대의원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요구해 왔다. 즉 ‘기울어진 경기장과 편파적인 심판이 개선되지 않으면 경기 참가의 의미를 못 느낀다’는 항의에 ‘잔 말 말고 한번 더 불공정한 경기에 나와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단결파는 다음날 이런 거부 답변을 보냈다.
“실망스럽게도 협준위에게서 단결파의 요구에 대한 어떤 성의 있는 개선 시도나 심지어 답변조차 없었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29:1’의 플로어 토론으로 상징되는 1월 26일 토론회의 확대과장판이 될 게 분명한 ‘청문회’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단결파는 이제 더 적극적인 방식을 통해 우리의 주장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구해 나갈 것입니다.”
이어서 단결파는 협준위가 차단함으로써 회원들에게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징계 반대 서명 문안과 명단을 그동안 확보해 놓은 회원들의 메일로 발송했다. 동시에 단결파 내에서는 이런 시도마저 협준위가 차단하고 나설 것이고 대의원대회 결과도 뻔히 예상된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분파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따라서 대의원대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전에 총회를 열어서 지난 활동을 평가하며 분파를 해소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사라진 다함께 혁신 가능성
그런데 분파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단결파 내의 일부 동지들이 ‘우리는 다함께 내의 분파로서 협준위와 대의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대의원대회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에게 협준위가 제안한 청문회에 나가야 한다고도 요구하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대의원들의 권위를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우리 단체의 민주적중앙집중중의 해석과 적용에 문제점이 있지만 논쟁을 통해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이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분파주의적이지 않은 분파’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협의회에서 전지윤 동지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고 심지어 징계가 강화되고 저에게 징계가 내려지더라도 이를 따를 것입니다”
나를 비롯한 단결파의 주요 동지들은 이런 주장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비판했다.
“이번 협의회가 소수파의 주장을 회원들에게 알리며 정치적 토론을 조직하는 과정이었나? 전혀 아니었다. 이것은 정치적 토론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딱지 붙이기와 인신공격과 인격적 매도가 난무했던 과정이었다. … 나는 충분한 민주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정치적 설득과 동의를 얻으려는 과정이 있고, 최종적으로 다수결로 결정한다면 언제든지 이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협의회 과정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논쟁은 이제 막바지에 달한 분파 활동이 끝나면 각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돼 있었다. 처음에 단결파 구성원 중에서 누구도 다함께 탈퇴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히 ‘29:1 규탄대회’ 이후에 나와 단결파의 다수 구성원들은 다함께 내에서 혁신을 시도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나는 단결파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어디서든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 분파는 부당한 징계에 반대하며 정치적 이견이 진지하게 토론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레닌주의 전통과 민주집중제를 구현하자고 주장했다. 이 문제의식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며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을 조직 안에 남아서 혁신을 시도하며 이루겠다는 동지도, 조직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며 이루겠다는 동지도 있다. 이 모든 동지들이 우리의 소중한 문제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진지하게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
단결파에 대한 다함께 지도부의 공세도 계속되고 있었다. 협준위는 징계 반대 서명 문안과 명단을 받은 회원들에게 또다시 나를 매도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전지윤의 인격과 신뢰 바닥내기’의 종합정리판이었다. 특히 이 부분은 압권이었고 희극적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12월 25일 (분파 결성을 위한 초동모임이었던) 징계반대 서명자들의 모임에서 전지윤 회원이 ‘분파 활동이 실패하더라도 신문사 사무실 등이 조직에 있는 상황에서 지금 우리의 역량만 가지고 탈퇴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한 점입니다. 조직의 자산 빼 가기를 언급한 것은, 조직을 통째로 분열시키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결파가 공중분해되는 일은 피해야만 했다. 그것은 단결파에 대한 다함께 지도부의 공세에 엄청난 힘을 줄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 모두 끝까지 함께 평가를 잘 마무리하고 진정 아름다운 이별을 하자”는 목소리가 지지를 얻었다. 결국 단결파는 마지막 남은 일주일 동안 평가 이외의 모든 분파 활동을 중지하고, 2월 22일 해산 총회에서 분파를 해산한다는 타협점을 찾았다.
강요된 쓰라린 선택
그리고 다음날 단결파에게는 그나마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전지윤 징계 2심 평결문’이 나온 것이다. 나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서 정치적 생명을 끊겠다는 의도는 이 평결문에서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이 평결문은 1심과 달리 ‘자격정지 3년과 집행유예 4년’이 아니라 ‘경고’로 징계 수위를 대폭 후퇴시켰다. 이것은 명백히 단결파와 징계 반대 운동의 성과였다. 두 달 동안 그 십자포화 속에서 32명에서 43명까지 거의 한 명의 이탈도 없이 성장해 온 단결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다함께 지도부는 징계 수준을 유지하거나 더 강화하지 못한 것이다. 다함께 규분위는 굳이 “전지윤 회원과 분파의 서명 캠페인의 결과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말이다. 특히 단결파가 협준위의 경고도 무릅쓰고 직접 회원들에게 서명 문안과 명단을 뿌린 직후에 더 강한 징계가 아니라, 감형이 이뤄진 것은 시사적이었다. 물론 이미 나의 정치적 명예, 인격은 짓밟힐 대로 짓밟힌 후였다. 나는 이미 다함께 안에서 정치적 시체가 돼 있었다.
다함께 지도적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전지윤은]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돼, 그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나쁜 영향력은 최소화돼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지윤에 대한 실제적인 징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다.” 참 잔인한 태도였다. 나아가 그 동지는 “[다함께에] 남기로 한 분파 출신자들과 정치적으로 타협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토론을 해가며 그들의 정치 생활이 분파 가입 전으로 원상 회복”되도록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더구나 다함께 규분위는 2심 평결문에서 “[전지윤이] 만일 또다시 분파주의적 행동을 할 때는 그 즉시 제명 처분 할 것임을 확언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따라서 나와 단결파의 다수 구성원들의 머리 속에서 ‘다함께를 내부에서 혁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욱 사라져갔다. 탈퇴해서 제대로 된 새로운 변혁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단결파는 예정된 대로 2월 22일에 다같이 모여서 두 달 간의 활동을 평가하는 해산 총회를 하고 분파를 해산했다. 해산 선언문은 다함께에 남으려는 동지들과 나가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려는 동지들의 의견을 절충해서 쓰여 졌다.
“우리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단결파)는 전지윤 동지가 부당하게 징계를 받은 것에 반대하여 만들어졌다. … 우리는 바람직한 민주집중제를 확립함으로써 우리 단체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사실 왜곡과 과장을 통한 온갖 인신공격과 인격적 모독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 전지윤 동지의 징계가 대폭 낮춰진 것은 징계를 바로잡고자 했던 단결파의 목표에 일정한 성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지윤 동지의 징계를 반대하며 서명에 동참해준 67명의 동지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32명으로 출범한 단결파는 해소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 43명으로 성장했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번 협의회 기간에 우리 단체의 민주집중제에 대한 해석과 실천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 … 우리가 이루지 못한 과제는 이제 우리 단체의 과제로 남기고 민주집중과 단결 분파는 오늘 해산한다.”
이어서 나와 단결파에서 함께 투쟁했던 다수의 구성원들은 함께 다함께를 탈퇴했다. 우리는 연서명한 집단 탈퇴서를 다함께 지도부에 보냈다.
“노동자연대다함께가 혁명운동에 기여해 온 성과에는 우리의 땀과 눈물도 스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협의회 토론을 거치며 우리는 노동자연대다함께의 노선 및 원칙 일부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차이점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 민주집중제가 제대로 해석되지도 운영되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이것이 가능하리라는 마음 속 희망의 불씨도 꺼져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노동자연대다함께에 더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 물론 앞으로도 우리는 노동자연대다함께 동지들과 … 우호적 토론과 협력적 실천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폐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당과 계급의 변증법적 관계맺기를 위해서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생각했던 조직·동지들과 이별하는 우리의 마음은 정말 쓰라린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분명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함께 지도부는 끝까지 비동지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대의원 일동의 명의로 우리를 비난하는 성명서도 냈다. 그 성명서에서 다함께 지도부는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순전히 조직 파괴를 위한 분열주의자로서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집단 탈퇴한 동지들은 “이미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져 활동은커녕 회비도 안 내던 이들”이라고 폄하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삶과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다짐은 “허세뿐인 자기기만”, “허풍”이라고 매도했다. 그리고 “그들의 탈퇴가 우리 단체에 미친 영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우리가 탈퇴한 직후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도 다함께 지도부의 이런 냉혹한 태도는 계속됐다. 다함께 지도부는 나에 대한 징계 수준을 더 높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후에 외부에 공개됐을 때, 정치적 이견을 징계로 대처한 것이 정당화되긴 힘들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단체 외부에 이 논쟁이 공개된다면, 제명이라는 결과가 두드러지기보다는 전지윤의 행동이 왜 비판받았는지 정치적 내용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다함께 지도부의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인 태도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 구성 취지와 결정에서도 드러났다. 이것은 분파 투쟁 동안 다함께 지도부가 부추긴 인신공격과 비방의 진실을 밝혀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앙금을 풀겠다는 취지가 전혀 아니었다. “분파에 참가했던 회원 … 몇몇은 분파 활동 시기의 (분열적) 주장을 계속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기조차”하기에, 이들에게 “규율과 규칙 위반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분파 내부에서는 어떤 사항들이 어떤 식으로 논의됐는지를 들어보면서 진실을 파악”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전지윤과 단결파가 얼마나 해악적인 일을 저질렀는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결파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에 협조하고 반성함으로써 화해를 이룰 수 있다’는 식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함께 지도부가 조직 내 민주주의를 더 옥죄는 방향으로 규약을 개악한 것에 있다. 먼저 원래 협의회 전 3개월 동안에는 보장하기로 돼 있던 ‘협의회 준비 토론’을 ‘1∼3개월 전’으로 개정했다. ‘협의회 준비 토론’ 기간을 단 1개월만 보장해도 문제없도록 바꾼 것이다. 또 분파도 “협의회 준비 토론 기간에야 형성”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회원 자격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앞으로 분파를 만들려면 이 기구에서 분파원들이 “자격을 충족시킨 회원”들인지 승인받아야만 한다. 결국 지도부에 대한 비판적 이견 제시는 더욱 어려워졌고, 특히 협의회 기간에 지도부에 대당하는 분파를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혁명가다운 자세, 혁명가다운 가치관”을 강조하면서 이런 잘못된 결정들을 추진한 다함께 지도부의 모습을 보자면 딱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쌓여 온 문제점과 모순의 폭발
이번에 매우 파괴적인 방식으로 분파 투쟁이 벌어진 것은 다함께 내에서 오랫동안 쌓여 온 문제점과 모순의 결과였다. 이것은 먼저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다함께는 지도부가 주요 기구와 간부의 추천, 임명, 선출 과정을 사실상 거의 독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 왔다. 조직 내 규율 문제의 제기·처리 과정과 연례 대의원대회의 운영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기존 지도부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 쉽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냈다.
한편, 지도부 내에서 벌어지는 이견은 회원들에게 잘 공개되지 않았고, 조직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정보도 충분히 공개되지 않아 왔다. 이 상태에서 각급 기구에서의 토론은 지도부의 결정과 지침을 전달하는 과정이 되기 쉬웠다. 이런 문제점은 2003∼2004년에 반전 운동 등의 고양 속에 다함께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힘겨운 정세가 이어지고 다함께의 성장세가 정체·하락 추세로 바뀌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변화된 상황에 대한 치열하고 제한없는 고민·토론을 통해 전략·전술적 혁신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경직된 조직 구조와 제도, 민주집중제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은 그것을 쉽지 않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입했다가 회전문처럼 나가는 일이 계속됐고, 특히 중간 간부의 구실을 하던 젊은 활동가들마저 사기 저하되면서 조직·활동에서 멀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함께 지도부나 회원들 속에서 뭔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고민이 자라났다. 그러나 뚜렷한 언어와 형태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진지한 접근과 시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보통 개인적 차원으로 탈퇴하거나 활동에서 멀어지는 식이었다. 자기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직적 문제라고 느끼더라도 무엇을 어디서부터 제기할지, 과연 진지한 호응이 돌아올지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2011~2012년을 거치며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이 시기에 민주노동당의 참여당과의 통합, 경선 부정 사태 등을 거치며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은 극심한 분열과 위기로 빠져들었다. 기대와 달리 총선과 대선 결과도 우파 정권 연장으로 나타나면서 분위기는 더 어두워졌다. 이 과정에서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해소되지 않는 의문과 이견들이 커졌지만 충분한 토론과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앞서 누적된 문제들이 이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내가 지도부 내에서 몇 가지 정치적 이견을 제기하며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제기된 쟁점은 그동안 충분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쌓여 온 문제들이었다. 지금의 구체적 정세 변화와 발전 속에서 진지한 변혁조직이라면 치열하게 고민·토론해서 답을 내놔야 하는 문제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함께 지도부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다. 정치적 이견과 비판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징계 경고와 징계 강행이었다. 다함께 지도부는 2013년 연말에 솟구쳐 오른 철도 파업을 이런 대응을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 이용했다. ‘철도 파업으로 이렇게 바쁜 데 말도 안 되는 이견을 제시하며 조직을 파괴하려 한다’는 매도가 쏟아졌다.
다함께 지도부의 이런 대처는 역설적으로 곪고 있던 문제점을 드러냈다. 즉 민주집중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한 뒤틀린 조직 구조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문제는 내가 처음 제기한 쟁점에 대한 지지나 반대 여부가 아니게 됐다. 과연 다함께가 제대로 된 혁명조직의 민주집중제를 구현하고 있는가, 과연 이 조직에서 민주적 토론과 비판적 돌아보기가 가능할 수 있는가, 이런 구조에서 전략·전술의 혁신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핵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다함께 지도부는 나와 단결파에 대한 비난·비방과 ‘여론재판’을 통해 ‘절차와 표결에서 승리한 지도부’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다함께 지도부의 정치적 승리가 아니었다. 이런 비정상적 공격을 주도하는 지도부에 대한 신뢰도 함께 깎여 나갔기 때문이다. 조직에 대한 냉소와 자괴감을 키우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다함께는 조직이 더욱 경직되고, 줄 세우기 분위기가 커지고, 제대로 된 평가나 이견 제시를 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바로 트로츠키가 경고했던 바다.
“비판이라면 모조리 분파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 성실하고 규율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체제가 굳어지거나 아니면 그들이 분파를 만드는 산태가 벌어질 것이다. … 당의 공식 견해는 의견 대립과 견해 차이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구호나 지령 등의 형태로 당에 기여하는 기구 안에서만 이런 과정이 이뤄지도록 제한한다면 당은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황폐해지고 말 것이다.”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을 향하여
다함께 지도부는 이번 분파 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중심이 된 경제적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막대기를 구부렸다. 단결파를 ‘조직 노동자 운동 중심성을 믿지 않고 거리의 정치 투쟁만 강조하는 포퓰리스트’라고 매도하면서 말이다. 분파 투쟁 직전의 철도 파업이 낳은 일시적 고취 분위기를 이용해 더욱 이런 주장을 강조했다. 더 큰 배경으로는 이미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때부터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오던 맥락이 있었다. 더불어 민주노동당 입당 정책 종료와 학생부문에서의 거듭된 실패 속에서 새로운 정치 환경을 찾기 힘든 막막한 상황이 작용했다. 이 속에서 노동조합으로 향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다.
다함께 지도부의 주장은 이런 식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곧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가지고 투쟁을 폭발시킬 것이고, 그러면 박근혜의 마녀사냥이나 진보의 분열과 위기도 잘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베팅·올인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매우 복합적인 정세 속에서 전략과 전술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다함께 지도부의 이런 대응은 봉합일 뿐이다. 앞서 봤듯이 이번 분파 투쟁은 오랫동안 쌓여 온 다함께 내부의 문제점과 모순의 반영이었다. 이런 신호가 나오면 그것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마땅했다.
이견과 비판에 대한 민주적 토론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서 정세의 변화와 발전이 요구하는 전략·전술적 혁신을 시도해야 했다. 나아가 이런 돌아보기와 토론을 가로막아 온 경직된 구조와 제도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다함께 지도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것을 억지로 덮어버린 후, 기존의 문제점을 더욱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이것은 모순과 문제점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곪게 만들 뿐이다.
결국 이번 분파 투쟁은 다함께가 쌓아 온 결함과 문제점뿐 아니라, 그것을 다함께 내부에서 혁신을 통해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도 보여 줬다. 그런 시도는 무망할뿐 아니라, 내부에서 더 큰 감정적 상처와 대립만 낳을 뿐이라는 점도 말이다. 그래서 단결파에 속해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다수는 다함께 지도부가 제시하는 방향에 대해 갈수록 동의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다함께 내부에서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진정으로 발전시키기 어렵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렀다. 다함께에서 나와서 새로운 변혁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 다함께의 동지들과의 우호적 토론과 협력적 실천을 위해서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무엇보다 실천 속에서의 검증을 위해서도 말이다. 이것은 사실상 다함께 지도부에 의해서 우리에게 강요된 선택이다.
물론, 제대로 된 변혁조직의 토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난관이 예고되는 길이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더구나 단결파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도전에 필요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다함께 활동 속에서 벽에 부딪혔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탈퇴하고 사기저하되거나 운동에서 멀어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단결파 활동을 통해 정치적 고민을 발전시켜서 그것을 자산으로 남겼다. 우리는 진지한 토론을 통해 진정한 변혁조직의 민주집중제는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고, 전략·전술적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켰다. 다함께 내에서 그동안 토론되고 평가되지 못했던 문제들을 돌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나온 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에 담겨졌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함께 지도부가 “냉담 회원”이라고 폄하했던 동지들의 정치적 자의식을 고무하고 잠재력을 끌어올렸다. 우리 자신에게 이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뿐 아니라 주변 동지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변혁 활동가로서의 자질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변혁조직 건설의 토대를 놓을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단결파 활동을 통해서 사회변혁을 준비하기 위해서 진정한 레닌주의 전통과 민주집중제를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치열한 평가와 토론을 통해 전략·전술을 혁신하자고 주장했다. 이 문제의식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며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변혁과 인간해방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 반드시 제대로 된 변혁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다함께 지도부는 우리를 “인생의 진로도 정견도 다 달라서 집단 탈퇴를 해도 하나의 조직을 만들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함께를 집단 탈퇴하면서 이렇게 다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번에 혁명조직의 진정한 강화와 민주집중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삶과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결파 활동 경험과 그 속에서 우리가 쌓은 동지적 연대와 신뢰는 이 새로운 투쟁을 위한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때로 힘들고 지치겠지만 그 때마다 트로츠키의 이 말을 떠올리며 서로 어깨를 두들기며 나아가자.
“내가 살아 숨쉬는 한 나는 희망을 간직하리라. 내가 살아 숨쉬는 한 미래를 위해 투쟁하리라. 인간이 강물처럼 흐르는 저 역사의 주인이 되고 역사의 물줄기를 아름다움과 환희와 행복이 펼쳐진 땅으로 돌리게 될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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