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윤미향 마녀사냥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다
지난주 민주당 대표 송영길은 ‘민주당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이상직, 박덕흠과 함께 윤미향 의원의 제명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윤미향 의원을 노동자 대량해고와 배임횡령을 저지른 이상직과 건설비리종합세트인 박덕흠에 묶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윤미향 의원에 대해서 그동안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이 제기한 혐의들은 지난 2년간 모두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져 왔다. 대부분은 검찰 조사단계에서 이미 사실무근이 밝혀졌고, 부동산 투기 의혹은 경찰 조사에서 누명이 벗겨졌다. 나머지 혐의들은 8차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하나하나 그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언론, 검찰, 국민의힘 뿐 아니라 민주당과 일부 진보진영까지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윤미향은 할머니들을 돕겠다면서 할머니들을 이용한 파렴치한 위선자’라고 다같이 낙인찍어 놓고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21세기의 마녀사냥이다.
중세 마녀사냥에서 마녀로 한번 지목된 사람은 물 속에 던저져서 가라앉으면 무죄가 됐지만, 떠오르면 마녀로 판명돼 화형에 처해졌다. 무죄여도 죽는 것이고, 유죄여도 죽는 것이었다. 오늘날 마녀사냥은 그 수단과 행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고든 올포트는 <편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인류학자] 클럭혼에 따르면 석기시대 이래로 모든 사회구조는 인간의 공격적 충동이 합법적인 배출구를 찾을 수 있도록 ‘마녀’ 혹은 그에 해당하는 기능적인 대체물을 허용해 왔다...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대부분의 사회가 어떤 ‘마녀’ 집단을 향해 공개적으로 적개심을 표출하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울포트는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대중매체, 즉 장편소설, 단편소설, 신문기사, 영화, 연극, 라디오, 텔레비전에 의해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사람들에게 되풀이해서 주입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그것은 족벌언론이고 유튜브 등 뉴미디어이고 대형포털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이익을 얻기 위해 편견을 전파한다.”
이렇게 형성된 편견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여성가족부 해체’에 대한 TV토론들을 몇 번 봐도 알 수 있다. 그 토론들에서 이준석 등은 매번 ‘여가부가 윤미향과 정의연에게 세금을 퍼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준석과 반대편에서 토론하는 사람들도 그것 자체는 사실로 인정한 상태에서 반론을 편다. 그러니 이준석은 두 팔이 묶인 사람들과 싸우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제 송영길은 이처럼 ‘누구도 감히 의심하거나 반론할 수 없는 기정사실적 편견’에 기반해서 윤미향 의원의 제명을 주장했다. 이번 대선의 결과와 무관하게 이미 이준석과 윤석열과 우파는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극우적 남초 사이트들에서는 ‘윤미향으로는 부족하다. 극단적 페미니즘을 편들어 온 민주당의 몇몇 여성위원들도 사퇴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오랜 세월을 일본군 전시 성범죄 피해자들과 연대해 온 윤미향 의원은 국회에 가서 사회운동의 의제를 더 확장하고 싶었겠지만, 민주당에 이용만 당하고 마녀사냥 초기에 진작에 손절당했다가 지금 또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이상직, 박덕흠과 윤미향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치욕을 준 것이다.
이런 마녀사냥은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침묵할수록 끝없이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면서 계속될 것이다. 중세 마녀사냥도 더 이상 거짓자백과 마녀 지목을 통한 동참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부터 가까스로 중단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침묵하고 외면한다면, 우리도 그런 식으로 공격당할까봐 걱정하면서 회계장부를 잘 정리해 두기에만 급급하다면, 재정의 투명한 공개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일부 소규모 극좌파 단체까지도 오히려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일이 지속된다면,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그래서 "윤 의원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이 걸어 온 30년 운동의 역사가 민주당의 한낱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며 목소리를 내준 진보당 김재연 후보 선대위의 용기가 반갑고 고맙다. 더 많은 진보좌파 정당과 후보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줬으면 좋겠다. 또 민주당의 개혁적인 의원들도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이번 대선에서 나에게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이다. 지난번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가세연과 족벌언론과 우파들의 비열하고 무자비한 인신공격과 전사회적 침묵 속에 물러나게 된 것에 이어서 말이다. 이번에 만약 국회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과 진보정당까지도 함께 윤미향 의원을 제명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2013년에 국회에서 이석기 체포동의안이 모든 정당의 합의 속에 통과된 것과 마찬가지의 역사적 비극으로 남을 것이다.
[긴급] 윤미향 국회의원 제명 반대 공동성명에 동참해주세요.
국내외 시민의 이름으로 국회에 윤미향 국회의원 제명 반대 외침을 들려줄 것입니다.
https://forms.gle/b78i9eijegY4wkfy6
● 선택적 표적 보도와 사라진 언론개혁
김건희 씨의 통화 공개 전후의 족벌언론들의 반응을 보면, 공개 전에는 ‘사생활과 인권 침해’나 ‘말초적인 관음증’, ‘선정적인 취재와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방식이었다. 공개 이후에는 ‘별 거 없었다’며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오히려 ‘여장부’, ‘걸크러쉬’라는 반응들과 ‘김건희 팬클럽 회원수가 500%나 폭증했다’는 것을 부각하는 보도들이 이어졌다.
이것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이들이 결사 반대하면서 사생활과 인권을 침해하는 관음적이고 선정적인 자신들의 보도 행태를 ‘언론의 자유’,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정당화하던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태도다. 이런 행태를 사회적으로 규제할 필요성에 대한 족벌언론들의 반박 논리는 ‘그러면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그 ‘살아있는 권력 감시’라는 잣대가 유력 대선후보의 부인과 기자의 통화 앞에서는 갑자기 사라지고, 오히려 언론중재법 개정을 요구하던 사람들의 논리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런데 족벌언론들은 이처럼 한쪽에서 김건희 씨의 ‘사생활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면서, 동시에 같은 지면의 한쪽에서 다른 이의 사생활과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바로 조국 교수의 딸이 어느 병원에 전공의로 응시했는지 또 스토커처럼 추적해 보도한 것이다. 이 소식은 곧 우파 유튜브들로 번져갔고, 해당 병원에 ‘탈락시켜라’는 전화가 빗발쳤고, 심지어 피켓시위까지 벌어졌다. 결국 며칠 후 족벌언론에는 탈락됐다는 ‘만족감’ 가득한 보도가 나왔다. 그 기사들에는 또 조국 가족을 저주하고 매도하는 온갖 막말들이 달렸다.
이것은 명백히 지독한 반인권적 집단린치이며 폭력이다. 이제는 장관도 무엇도 아닌 조국 교수, 더구나 본인도 아닌 그의 딸이 왜 ‘사생활과 인권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조국 교수의 딸은 지난 몇 년간 이처럼 전사회적 동네북처럼 조리돌림과 괴롭힘을 당해도 거의 어떤 언론도 막아서지 않고 있다.
입시문제는 워낙 대중적으로 민감하니 그 자신이 공인이 아니더라도 유력인사의 자녀라면 언론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왜 더 심각한 입시비리 문제가 있는 동아일보 사장 딸에 대해서는 그런 식의 스토킹적 취재와 보도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가? <PD수첩>말고는 심지어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것을 취재하거나 보도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조국 교수 자녀의 입시비리 혐의들은 지금 그 결정적 근거(동양대 PC)의 증거능력이 사라지면서 검찰 기소의 정당성과 진실 여부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것도 봐야 한다(물론 대부분의 언론은 이것도 보도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결국, 조국 교수의 가족에 대해서는 “무간지옥”, “멸문지화를 위한 조리돌림과 멍석말이”(<조국의 시간>)라고 할만한 엄청난 분량의 대대적 취재와 보도가 쏟아진 반면, 김건희 씨에 대해서는 왜 언론이 이토록 너그러운 것인가? 조국 부부와 가족간의 사적 대화까지도 다 뒤지고 공개하던 족벌언론들이 왜 김건희 씨 앞에서는 ‘사생활과 인권의 수호천사’가 된 것인가?
사실 피의자와 담당검사가 같이 여행을 간 사실 인정, 검찰수사의 편파성 고백, 기자 회유와 매수 시도, 미투 피해자 모독 등 김건희 통화 내용에 나온 것은 하나하나가 심각하고 수많은 후속 취재가 이어져야 마땅한 데 말이다. 이 지독한 선택적 보도는 무엇 때문인가?
김건희 씨 자신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조국 수사를 이렇게 크게 펼칠 게 아닌데... 너무 많이 이렇게 공격을 했지, 검찰을. 그래서 검찰하고 이렇게 싸움이 된 거지...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구속 안 되고, 좀 이렇게 넘어갈 수 있었거든”
여기에서 ‘검찰’이라는 단어에 ‘언론’을 넣어보면, 똑같은 설득력을 찾을 수 있다. 즉 (족벌)언론의 문제점과 해악을 강하게 비판하면 할수록, (족벌)언론은 그 상징적 인물과 가족까지 더욱 더 짓밟아서 보복하고 본보기를 만드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역사상 이런 언론들과 정면으로 맞섰던 정치인은 거의 찾기가 어렵다.
이렇게 검찰의 선택적 표적수사와 언론의 선택적 표적보도는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과도한 수사와 기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조국 가족을 ‘가족사기단’으로 만들어야 했던 검찰과 마찬가지로 주류언론들은 다가오는 대법원 판결에서 정경심 교수의 유죄가 뒤집어지는 일은 절대 없기를 애타게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기존 보도가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김건희 씨의 통화에서는 또 다른 실마리도 찾을 수 있다. “조국, 정경심도.. 구속 안 되고, 좀 이렇게 넘어갈 수 있었거든? 조용히만 좀 넘어가면,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게 프로그램 보는 사람도 많고... 유튜버들이 너무 많이 키운 거야. 그런데 그때 장사가 제일 잘 됐죠. 슈퍼챗도 제일 많이 나오고... 그러니까 이게 자본주의 논리라고.”
김건희 씨는 ‘유튜버’를 지목하고 있지만, 여기에도 ‘(족벌)언론’을 집어넣으면 딱 맞고 훨씬 더 설득력이 생긴다. 사실 요즘 논란이 되는 유튜브 뒷광고와 슈퍼챗은 (족벌)언론들이 그동안 해온 클릭장사나 기사형 광고 등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한국 족벌언론들을 살펴보면 기사형 광고, 광고형 기사, 복붙기사들로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그 중에서도 최고봉이며 ‘기사형 광고의 맛집’이라고 불릴만 하다. 부동산 기사들은 이 언론사들의 부업이 부동산 투자인가 싶을 정도이고, 실제로 건설자본이 언론사의 오너인 경우도 많다.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느 정도인지는,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이 갈수록 사라지는데도 이 언론사들의 수익이 그대로거나 오히려 늘어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포털과 언론의 융합의 문제가 있다. 클릭수로 광고수익을 배분하는 포털 안에서 극단적 클릭경쟁이 벌어지면서 온갖 말초적, 자극적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포털의 ‘많이 본 뉴스’ 상단에는 온갖 낚시성 제목들을 볼 수 있고, ‘언론 윤리강령과 보도준칙 위에 클릭장사가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더구나 혐오와 갈등을 부추길수록 클릭이 늘어나는 구조 속에서는 표적이 된 인물에 대해 더욱 모질게 펜을 휘둘러야만 한다. 진중권, 김경율 등의 ‘비난 전문가’들은 여기에 엄청난 보탬을 주고 있다.
이러한 표적보도가 쏟아지면 그 희생양은 대중들에게 이름만 들어도 토할 것 같은 역겹고 비린내 나는 인간이 돼 버린다. 그렇게 낙인이 찍힌 사람은 이제 누구도 공공연히 편들기 어려워진다. 5년 전에 그렇게 몰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사람이 자신을 괴롭힌 기자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당신은 펜을 든 살인자요”)는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구조에서 비롯한 것인지 분석하지 않고 기자 개개인들을 ‘기레기’라는 혐오성 멸칭으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디지털 시대, 탐사 저널리즘과 (자본과 권력에 의한) 뉴스매체 포획>(양상우) 논문은 ‘일간신문사 200개, 인터넷 언론 4000개의 무한경쟁 구조 속에서 언론인들은 더욱더 자본, 포털, 사주, 광고주에 종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상업성과 정파성은 결합되고 있고, 클릭수 경쟁 속에서 족벌언론과 개혁언론의 동조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끝없는 클릭경쟁과 받아쓰기에 내몰리며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는 말단기자들도 이런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족벌주류 언론사들, 포털권력, 재벌광고주들에 맞서며 이런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지만, 대선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그런 목소리는 사라지고 있다. ‘소확행 공약’, ‘심쿵 공약’들 속에서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재벌개혁 등의 거대담론은 찾기 어려워졌다.
진보정당과 후보들조차 그런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이것들은 ‘금기와 성역’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2019년 ‘검언대란’을 주도한 세력이 바랬던 결과일 것이다. 그 속에서 ‘멸공과 여가부 해체’라는 반동적 거대담론을 내세운 윤석열의 지지율만 급속 회복되고 있다. 2016년 촛불 이후의 변화는 이처럼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 정은경, 기모란, 이재갑, 정재훈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항상 감사한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대응과 방역대책은 분명 성과와 함께 문제도 많았다. 특히 방역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여러 한계와 비판지점이 있다. 백신 문제에서는 주요 국가들과 거대 제약회사들이 만들어낸 백신 불평등과 그것이 낳은 변종, 불신 등에서 한국 정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백신이 적절할 수도 그것을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다. 백신 부작용과 후유증에 대한 대책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해도 반백신 음모론과 운동을 지지할 수는 없다. 국제적인 반백신 음모론과 운동 속에는 좌파적 버전도 존재한다. 그들은 코로나가 반대 세력을 탄압하며 자본주의를 재구성하기 위해 슈퍼리치와 글로벌 엘리트가 조작한 사태라고 주장한다. ‘지배계급 과 국가권력의 억압에 맞선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적인 반백신 음모론과 운동의 주된 흐름은 명백히 극우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과 백신 마피아와 거대 제약회사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백신을 맞으면 ‘돌연변이, 불임, 장애 등의 온갖 부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백신에 들어있는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칩이 인간의 유전자와 DNA를 변형시키고 무기력한 좀비로 만든다’는 황당한 음모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물론 반백신 운동이 대중적으로 힘을 얻은 것은 이런 황당한 주장 때문이 아니라, 강압적 봉쇄 정책과 방역 실패에 대한 고통과 반감이 오랫동안 쌓여왔기 때문이다.
반백신 운동은 이런 불만을 파고들며 ‘국가의 통제와 억압에 맞선 자유’를 주장하고, 나아가 ‘내 몸은 내 선택’이라는 유명한 페미니즘 운동의 구호까지 베끼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가 나서서 뭔가를 금지하고 강제하고 의무화하는 것은 폭압이라는 이런 구호와 주장은 언뜻보면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모순을 알아챌 수 있다.
우리는 의무화된 자동차 안전벨트, 금연구역, 신생아에 대한 의무적 예방접종들을 모두 자본주의 국가의 폭압이고 음모라고 해석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전염성이 강한 치명적 질병에 직면해 방역에 대한 협조를 거부해 타인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권리’는 정당화되기 어렵고, 바이러스를 타인에게 옮길 수 있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노엄 촘스키는 ‘백신 거부는 타인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며, 누구도 빨간신호등을 거부할 자유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자유는 자유시장주의적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런 노골적인 반백신 음모론과 운동이 아직 강력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족벌언론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정부의 방역 정책과 백신 정책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툭하면 꼬투리잡아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기모란 방역기획관을 비난한다.
‘왜 백신을 안가져오냐’고 하다가, 또 ‘왜 화이자가 아니냐’고 하고, 이제는 ‘백신 맞아도 효과없다’고 하고, 방역을 조이면 ‘자영업자 다 죽는다’고 하고, 풀면 ‘바이러스 확산을 방치한다’고 하는... 윤석열과 국민의힘도 ‘외마디 공약’에 반백신 불신 선동을 추가하고 있다.
이 속에서 일부 반백신 운동세력은 이재갑 교수와 정재훈 교수의 근무처나 심지어 집 앞에까지 찾아가서 비난하는 시위를 하고 온라인에서 막말과 욕설의 댓글을 달뿐 아니라 개인적 메시지를 보내서 조롱하고 협박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모든 비난, 매도, 괴롭힘에 반대하며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기모란 방역기획관, 이재갑 교수, 정재훈 교수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이 고통스러운 코로나 2년 동안 이 네 분으로 대표되는 의료방역 전문가, 노동자들의 헌신 덕분에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 모두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었고 코로나를 더 잘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이 진정한 '영웅'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 미얀마 쿠데타 1년 – 끝까지 연대하자
며칠전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군부 쿠데타 1년을 규탄하는 미얀마지지시민모임의 기자회견이 있었고, 이어서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와 스님들이 미얀마 무관부까지 2.5킬로를 오체투지로 이동했다. 미얀마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연대의 마음으로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다.
벌써 1년이 지났고 다시 봄이 오고 있지만, 얼어붙은 미얀마의 정치상황은 풀리지 않고 있다. 수천 명을 학살한 군부의 도살자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잡아가서 고문하고, 어린아이까지 불에 태워죽이고, 훼손된 시신을 보란 듯이 방치하고 있다.
포기하고 굴복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런 끔찍한 미래가 닥칠 것이라는 의도적 협박이다. 이미 미얀마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군부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고 있다고 한다. 대자본가들은 군부가 더 능력있고 효과적인 사업파트너라고 볼 것이다. 한국에서도 검찰, 사법부, 거대언론이 그렇듯이 기득권 상층부일수록 기존 구조의 유지를 지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총칼로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속 깔고 앉아있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미얀마 민중의 대다수는 전혀 군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천기홍 교수에 따르면 군부에 대한 세금납부 거부로 예컨대 전국민의 9%만 전기세를 납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군부의 재정상태는 악화되고 있고, 군인급여도 불안정하게 지급되고 있다.
반면, 지난해 11월에 미얀마 국민통합정부가 온라인 국채를 발행하자 10시간만에 전국민의 80%가 구입했다. 또 수많은 이들이 앞장서서 용기있게 싸우고 있다. 일상적으로 차별받던 소수민족과 여성들이 그런 저항의 선두에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지난해 연말 군부에 체포된 여성병사들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군부의 촬영 카메라를 노려보던 당당한 표정은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며 미얀마 시민들의 가슴에 남았다. 이런 불굴의 의지들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 아무리 막아서도 봄은 오고 꽃은 피는 법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국경과 국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한국에 있든, 미얀마에 있든, 홍콩에 있든, 타이에 있든, 카자흐스탄에 있든, 우크라이나에 있든 결국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패배하고, 함께 승리할 것이다.
#SaveMyanmar #save_myanmarpeople #StandwithMyanmar #StopCoup #RejectMilitary
● 혐오의 바이러스와 차별금지법
며칠전 저녁에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만들기 유세단’의 동대문 일정에 함께하고, <평등길1110>영화도 보고, 끝나고 이야기마당도 들었다. 곳곳을 돌면서 헌신적으로 차별금지법을 알리는 분들을 응원하고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다. 영화도 여러 가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너무 잘 만든 다큐였고, 이야기마당에서도 지역에서 차별금지법을 위해 애쓰는 분들의 고민과 경험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2016년 촛불 이후에 새로운 정부에서 제일 먼저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길 기대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다. 탄핵당했던 세력이 부활해 앞장서 차별금지법을 막고 있고, 민주당은 의지도 능력도 없고, 진보정당들은 역부족이다. 탄핵부활 세력의 지도자인 윤석열은 여성가족부 해체, 멸공을 내세워서 지지층을 결집했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온갖 폄하와 혐오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청년들 속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나 기본소득 등은 노력과 능력을 배신하는 ‘불공정’을 상징하는 인기없는 의제가 됐고, 청년층의 표를 얻기 위해 ‘여성가족부 해체’ 다음엔 ‘통일부 해체’가 나올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이준석이 윤석열에게 ‘자주 들어가서 눈팅이라도 하라’고 조언했다는 청년남초사이트에 가보니 온갖 밈과 짤로 혐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서 가장 증오받는 여성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윤미향 의원과 정경심 교수였다. 그리고 이제 국회는 전당적으로 윤미향 의원을 제명한다고 하고, 정경심 교수에 대한 전사회적 증오는 대법원의 확인사살까지 얻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켜니 조선일보가 아주 신이 나고 힘을 얻어서, 윤미향 의원을 비난하는 글을 계속 올리면서 거기에 “[윤미향을 옹호한] 한 네티즌”이라며 내 글까지 인용하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끈질긴 조선일보다.
그래도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 혐오의 물결이 결국은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집어삼킬 것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은 ‘우리 청년들은 중국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고, 청년남초사이트들에서는 ‘착*죽*’(죽은 중국인만 착한 중국인), *족(*같은 조선족)이라는 말이 올라온다.
가장 인기있는 청년극우유튜버라는 윤서인 ‘윤튜브’에 가보니 ‘멸공 챌린지’를 옹호하면서 ‘공산주의자는 암세포이므로 멸해야 한다. 암세포이므로 비슷하기만 해도 다 때려잡아야 한다. 멸공을 반대하면 공산주의자’라고 하고 있었다. 지지하는 열광적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이고 지금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나같은 사람은 뭐가 되는가.
그걸 보면서 너무 맛있게 음식을 만드는 우리동네 단골 중국집의 조선족 아저씨 얼굴도 떠올랐다. 그 아저씨는 스스로는 국민의힘 지지자였지만, 내가 ‘멸공과 반중국’을 말하는 정치인들에 대해 말하자 걱정하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만큼이나 심각한 이 혐오의 바이러스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가.
● 활동가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의 차이
얼마 전 <레디앙>에 실렸던 윤소영 교수의 인터뷰를 보고서 여러 가지로 놀랐었다. 이재명을 “파시즘”과 “소시오패스”라고 하면서 윤석열을 지지한 것 말고도, 놀라운 대목이 많았다. 기본으로 윤교수는 2016 촛불에 매우 부정적이고, 반백신적인 주장까지 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친북연중”이고, 따라서 “반일반미”라고 비판하는 것도, 그것이 너무 전통적 우파의 입장과 유사해서 놀라웠다. 게다가 윤교수가 “이낙연 후보는 제 장인과 동향”, “해평 윤씨의 후손으로서” 등을 언급하며 연고를 내세우는 것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였다. 예컨대 그는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주도하는 학자들이 자신의 “서울대 경제학과 후배들”이라는 것을 부각했고, 이낙연을 긍정 평가하는 근거로 그가 “서울법대”를 나온 “엘리트”라는 점을 들었다.
나아가 대선 후보가 꼭 “고졸자이든지... 검정고시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물으며, “ 안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끊임없이 ‘자기향상’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는 특히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 인사들에게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내가 윤석열, 진중권, 금태섭 등을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언제나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투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에서 좌파 학자나 활동가들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운동사회에서도 학벌, 학맥, 전문직 출신(변호사나 교수나 의사 등)인지 여부 등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인 것도 사실이다. 한때 저명한 좌파 이론가였던 윤소영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인터뷰를 보면서 이런 씁쓸한 생각들과 함께 윤교수의 글과 책들이 유난히 읽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그러다 마침 활동가적 글쓰기와 학술적 글쓰기의 차이를 지적한 조나선 닐Jonathan Neale(내가 아주 좋아하는 미국의 생태사회주의자)의 글을 발견했다. 두 글쓰기가 서로 다른 것은 그 대상과 용도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닐의 주장에 역시나 크게 공감하게 된다.
“급진적 지식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일은 대중운동의 핵심 논거 중 하나를 파악한 다음, 최대한 곰곰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운동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못 이해했더라도 시도를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논쟁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운동 내부에서 기사와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회의에 참석하고, 행동에 동참하고, 행진하고, 점거하고, 무엇보다도 듣는 것을 의미한다. 논의는 모임에서 시작되고, 그 후에 인쇄물로 나오기 전에 술자리에서 시작된다. 오직 운동의 일부가 됨으로써 여러분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학술적 글쓰기는 활동가적 글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청중을 찾는다. 학생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독서를 배정받고 그것에 대해 검사를 받는다. 만약 그들이 독서가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작가의 어리석음과 서투름의 증거가 아니다. 대신에, 학생 독자는 미련하고 서투른 것으로 추정된다.
“때때로 글에 담긴 생각이 수준이 높을수록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에 대한 증거는 별로 없지만 학계에서는 강력한 주장이다. '저 책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만뒀다. 글을 못 쓰는 사람을 읽으면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은 학계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다.
“학술적 언어는 학생들을 종속시키고, 겁주고, 모호하게 하고, 경쟁하고, 배제하는 데 사용된다.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이해하기 어렵다. 활동적 언어는 이해하고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기사 등록 20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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