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비성우 유명 배우" 더빙과 성우, 그리고 작품의 수난시대
박철균
1. 얼마 전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대한 소식을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던 전태일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드디어 올해에는 개봉한다는 것이고 크라우드 펀딩 투자와 개봉이 되면 꼭 극장에서 관람하길 바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전태일재단이 제작에 많은 노력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개봉이라는 사실에 저 역시 기뻤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조그마한 돈이라도 투자(후원)을 하지 않았기에 이 참에 후원도 하고 꼭 다른 사람들과 함께 봐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첫 포스터를 보는 순간 저는 큰 개인적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목소리 출연에 온통 적힌 분들은 유명한 영화배우들로만 가득히 그리고 빼곡히 적어 놓았지, 애니메이션이나 외화 등을 목소리 연기하는 성우의 존재는 어느 곳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비성우 유명 연예인" 더빙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 그래도 홍보 차원에서 일정 부분 "비성우 유명 연예인" 더빙일 수도 있고, 이제는 백번 양보해서 주인공 전태일은 비성우 배우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확인해 보니 주역이란 주역은 전부 비성우 연예인이더군요. 전태일은 장동윤이고 이소선은 염혜란이고 전상수는 진선규, 그리고 평화시장에 나오는 걸로 보이는 캐릭터는 박철민, 권혜효네요. 그 밖에 저 목소리 출연에 적힌 태인호도 배우입니다.
여기서 딜레마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노동자가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근로기준법 보장을 외치며 산화했으며, 한국 노동운동사와 인권운동사에서 제일 중요한 상징이기도 한 전태일 열사를 다룬 애니메이션에서 정작 성우의 연기와 노동이 존중받지 못해 보이는 아이러니에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2. 사람들이 어쩌면 놓치기 쉬운 점이 기존 드라마, 영화에서의 연기와 애니메이션과 라디오드라마 외화 더빙에 속하는 목소리 연기에 대한 차이입니다. 혹자는 그게 그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배우가 목소리부터 표정까지 다양한 부분을 설계하는 부분과 목소리와 억양, 청각적 효과가 주요한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엄연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전자의 영역에서도 드라마에서의 연기, 영화에서의 연기, 연극에서의 연기, 개그프로에서의 연기 방법이 각자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과 전혀 상이한 방법인 목소리 연기를 단순 비슷한 거 아니냐고 하는 것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은 똑같은 중국음식이니 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3. 만약 이번에 나오는 "태일이"가 실사 영화였다면 저는 앞서 언급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면 저는 무리를 해서라도 한번은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애니메이션 더빙과 관련해서 너무나 쉽게 비성우 연예인이 주역을 다 가져가고 정작 성우는 뒷전으로 밀려서 비중 없는 조역이나 심지어는 단역으로 밀리고, 심지어는 아예 캐스팅조차 되지 않은 성우에 대한 노동의 가치를 부정받아 온 역사가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례를 얘기합니다. "쾌걸 조로리"라고 2000년대 중반 투니버스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그 작품이 2013년에 한국에서 극장판이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이미 7년이나 연기를 했던 김정은이란 성우가 존재를 함에도 개그맨 정태호에게 떡하니 조로리 배역을 캐스팅하고 김정은 성우는 조로리의 아버지 역할로 전략시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결과는 더빙에 대한 평가, 흥행 결과 모두 대참패했습니다. 기존 성우에겐 어쩌면 모욕적인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연예인이란 화제성으로 대박을 치려다 도리어 실패한 상황이죠.
이런 상황은 그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고 마침내 "너의 이름은" 더빙에서도 비성우 배우인 지창욱, 김소현을 메인 주조연 더빙으로 맡으면서 또 폭발됐던 적이 있습니다. 수입사인 미디어캐슬에서 이미 초대박을 친 ‘너의이름은’ 한국어 더빙은 오디션을 통해서 잘 정해 보겠다고 했는데 막상 결과물은 또 비성우 배우 캐스팅인 것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졌습니다. 그것에 대해 미디어캐슬은 제대로 듣지도 않거나 심지어는 대표되는 사람은 SNS에서 그런 비판적인 목소리를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물은 역시 처참했습니다.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안드로이드가 되어 버린 미즈하와 타키 뿐이었죠.
4.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또한 제작사의 "정치적인 결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흥행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화제성을 만들고 싶고, 그 화제성을 위해 연예인을 자꾸 주역으로 더빙에 캐스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캐스팅 후에 철저하게 그 비성우 배우와 캐릭터를 오랜 제작 기간 동안 다듬고 다듬어서 작품성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다행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대개 그 정치적 결정은 비성우 유명 배우에게 그저 마이크만 대는 안일한 제작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대개 작품에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화제성과 흥행을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더라도 작품 퀄리티를 해치지 않고 캐스팅에서 성우가 배제되지 않는 케이스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비중이 살짝 적은 조연으로 출연했던 바다나 "노비타의 우주영웅기"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맡았던 심형탁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상당히 드물고 주역에 비성우 연예인을 모조리 밀어 넣는 무리수가 일반적입니다.
이미 ‘태일이’의 공동제작사인 명필름은 "마당에 나온 암탉"이란 전적이 있습니다. "마당에 나온 암탉"은 원작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품성을 바탕으로 훌륭한 연출과 스토리텔링으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한국 애니메이션 흥행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흥행 요인이 "마당에 나온 암탉"에서 캐스팅 된 비성우 배우들이 훌륭하게 연기를 해서 대박이 났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날고 긴다는 문소리, 최민식, 유승호 모두 연기가 아쉽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단, 희극에서도 코믹 연기를 자주 펼치는 박철민 배우에 대한 평가는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기억 나는 연기는 비성우 유명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마지막 부분 추운 겨울 새끼를 지키기 위해 아등버등 어쩔 줄 몰라 하던 족제비 애꾸눈역의 성우 김상현의 연기입니다.
언제까지 흥행과 화제성을 단순하게 연결시킨 "정치적인 결정"을 봐야 하는지 회의적입니다. 그런 정치적인 결정이 반복되면 될수록 정작 일상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는 성우라는 직업군의 노동은 존중받지 못하고 멸시 받는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에서만 유독 그런 것이 허용되는 것은 저는 애니메이션이란 작품 자체도 얼마나 한국 사회에서 너무 쉽게 다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5. 이렇게 앞서서 길게 늘어 놓았던 비성우 연예인의 더빙과 관련된 악연의 역사 때문에 저는 사실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명필름 단독 제작이었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전태일재단과 공동제작이란 점에서 더 안타까움이 큽니다.
물론, 그럼에도 저는 이 작품이 12월 개봉 후 흥행이 잘 됐으면 좋겠고, 그래서 노동운동과 인권이 이 작품을 통해 일상에 잘 스며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련 직업군 중 하나인 성우가 또 등한시 받는 것을 확인하는 이 순간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전태일이 바라는 세상이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입니다. 특히나 관련 컨텐츠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목소리 연기를 펼치는 성우들이 제발 작품 제작에서 존중받았다는 소리를 이후에라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사 등록 20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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