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파니치Leo Panitch
번역: 두견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대한 고전 중에 하나인 랠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의 출판 50년을 기념해서 돌아보는 글이다. 이 글의 필자인 레오 파니치(Leo Panitch: 1945 ~ 2020)는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 교수였고, 25년 동안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로서 국제적 좌파의 이론과 실천에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위기 속의 노동계급 정치>, <다른 종류의 국가>, <의회 사회주의 종말>, <미국 제국과 국제 금융의 정치경제학>, <세계 자본주의 만들기>, <사회주의를 찾아서: 벤에서 코빈으로 가는 노동당 신좌파의 프로젝트> 등의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자난해 연말에 코로나19로 인한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으로 많은 좌파 활동가들의 추모가 이어졌는데, 앞으로도 가능한 파니치의 주요 글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출처: https://socialistproject.ca/2019/07/states-and-capitalist-society/
신자유주의 시대의 환상 - 시장이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거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또는 자본주의 세계화의 멈출 수 없는 과정이 심지어 가장 강력한 국가들마저 우회하고 있다는 - 이 갑자기 사라졌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국가와 시장이 서로 대립한다는 개념이었다.
그 이후에,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반대로, 그들은 자본주의적 시장 관계를 전 세계 구석구석, 삶의 모든 측면에 확산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한편, 이것이 촉발시킨 위기를 억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개입해왔다.
그것은 '시장 대 국가'의 이분법이 얼마나 헤게모니적으로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며, 심지어 시장의 확산과 국가의 행동 사이의 결정적 연결고리를 인식한 대부분의 사람들조차도 국가가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고 알려진 시대로의 회귀를 요구했다.
랠프 밀리밴드(Ralph Miliband)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읽는 것은 출판된 지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귀환'을 이해할 수 있는 필수 불가결한 도구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이전에 세계에 대한 그러한 환상을 없애주기 때문에 매우 유익하다.
1956년에 출간된 앤서니 크로스랜드(Anthony Crosland)의 <사회주의의 미래>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뉴딜, 노동의 세대와 사회민주주의 정치인과 지식인 전체의 생각을 잘 요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전후 '자본주의의 전환'은 '기업주 계급에서 국가로의 권력 이전', 산업에서 '경영에서 노동으로 힘의 이전', 그리고 심지어 '자본시장과 금융 회사들의 경제력이 훨씬 약했던' 것에 의한 기업주 계급 성격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모순: 사회적 성격과 사적인 목적
1980년대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수십 년의 경험 이후에는, 이것이 얼마나 오판이었는지는가 명백해졌다. 그러나 1962년에 밀리밴드가 국가 안팎에서 대기업의 지속적인 힘을 보여주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구상했을 때, 그는 (서구 사회에서 권력은 경쟁적이고, 파편적이고, 분산돼 있다는) 정치적 다원주의 이론과 (공공 정책이 자본주의적 이윤으로부터 자율적이었다는) 전후 케인스주의 경제 이론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있었다.
관리된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적 화합과 경제적 안정에 대한 환상을 누렸던 사람들과 달리 밀리밴드는 여전히 그 속에서 ‘100년 전에 마르크스가 말한 그 최고의 모순, 즉 그것의 더욱 더 많은 사회적 성격과 그것의 오래된 사적인 목적 사이의 모순에 의해, 사실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지속적으로 두드러지는 원자화된 시스템’을 인식했다.
결론 부분의 시작 문장에서 나온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실은 사유화되고 더욱 집중된 경제력의 지속적 존재'라는 밀리밴드의 서술은 오늘날 너무나 명백해져서 우리는 이 서술이 대처와 레이건이 취임하기 10년 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 자본가 계급이 루즈벨트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이 무엇이든 간에 1960년대의 관점에서 밀리밴드는 뉴딜정책의 효과가 ‘지배적 계급에게 적은 비용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유럽과 일본의 지배계급은 전후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응집력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특히 옛 귀족들이 '산업, 금융, 상업 기업의 세계와 동화'되면서 '부르주아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민당들이 정부에 선출되고 보수 정당들이 그들의 많은 개혁안을 수용하면서 전후 시대에 일어났다고 하는 이른바 '평등을 향한 극적인 진전'에 대해서는, 그것이 선언했던 것들보다 덜 극적이고 더 제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노동에서와 같은 그런 평등화 추세는 '자연법'의 지위로 승격되어 미래에 투영되어서는 안 되는데, 밀리밴드는 저명한 사회정책학자 리처드 티머스(Richard Titmuss)가 1965년에 한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큰 규모의 경제에 내재된 많은 제도적 요소들에 의해 공급되어, 정반대로 작용하는 다른 힘들이 있다.’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약속은 실망스러웠고, 단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는 억압의 힘'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를 보여주었다 - 그것이 자본가 계급에 의한 '의도적인 분투의 결과'이든, 아니면 '제도 자체의 무게'이든 말이다. 그러나 밀리밴드의 결론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가 '이것이 그 이야기의 전체는 결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당시의 또 다른 중요한 책에서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불렀던 것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밀리밴드는 1960년대 후반까지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통해 퍼지고 있는 광범위한 '불복종 상태'를 통해서 그가 나중에 더 완전하게 분석하게 될 것의 중요성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 깊은 불안감, 성취감을 못 느끼는 개인과 집단적 가능성의 만연한 감각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을 관통하고 부식시킨다. 모든 통합과 중산층화 등등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그 감각은 지금처럼 거대한 적이 없었다. 선진 자본주의 역사상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더 많이 인식한 적은 없었다. 혁명적 의도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남녀들이 그들의 이익과 기대의 증진과 방어를 위해 행동하기로 결심한 적도 없었다. 그들의 요구의 즉각적 대상은 고용주, 대학 당국, 또는 정치 정당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그들의 직접적 압력을 추동하고 있는 것은 국가를 향해 있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의 충족을 기대하는 것은 국가로부터이다.”
신자유주의가 자본가 계급 사이에 뿌리를 박은 것은 이러한 압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전후 시대를 거치며 자본가들이 강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불복종을 참지 않았다. 그들이 '국가'에 대해 개시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더 이상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계급들의 기대를 줄이는 데 있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그러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결국에는 그들에게 '결정적인 수준의 정치적 권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서 밀리밴드의 국가 이론을 약화시키는 증거가 아닐까? 이 책에 대한 밀리밴드의 서론은 이 명백한 역설을 설명해야 하는 그의 고민을 드러낸다.
그는 왜 국가가 보호한다는 바로 그 자본가 계급이 '항상 그들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를 '반드시 설득력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가 이것에 쏟은 관심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설계되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그들이 자원을 통해 전능한 힘을 발휘한다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 교정책이 될 수 있다. 전에 강조했던 것처럼, 그것은 그렇지 않고, 그들이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강력하다는 사실, 그들이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사회 안에서 다른 어떤 이익의 범위를 완전히 뛰어넘는 이데올로기적 주입의 노력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밀리밴드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자유 기업 경제'를 촉구하고 '어리석은 정치적 개입', '지나친 과세', '국가 부채'의 위험성을 설명하기 위한 기업 집단들의 노력과 지출을 기록한 것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려지게 된 것이 이미 맹아적으로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대중적 노동계급의 불복종으로 인해 이러한 기업의 메시지 전달이 방해를 받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밀리밴드의 책에 주목한 누구에게나 전적으로 예견된 일이었다.
도구주의에 대한 조잡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밀리밴드의 책은 사실 지배적 계급이 '단단하고 굳어있는 경제적, 사회적 블록들이 아니다'라는 그의 인식을 아주 뚜렷하게 표현했고, 그는 '그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들을 조율, 조정하고 융합시키는 정치적 형성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했다.
기업 싱크탱크나 로비단체의 위나 그 너머에서 '보수적 정당의 특수한 기능'이 들어온 곳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이는 '통합적이고 계급의식적인 정책 공세'의 유행을 이끌어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이고, 또한 '대중 정치의 시대에 정치적 경쟁에 적합한 이데올로기적 의복'을 유행시키는 측면에서도 그러했다.
거대 보수 정당들의 성과는 '그들이 당원이나 정책 면에서 기업과 재산을 가진 지배적 계급의 정당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밀리밴드는 주장했다. 사실, 그들에 대해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는 그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대중 정치"의 요구 조건에 적응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밀리밴드의 연구에서 항상 그렇듯이, 이는 궁극적으로 이들 정당과 '좌파적 정당들' 사이의 상호 작용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그 당들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특별히 그 직무에서 그들의 보수적 경쟁자들보다 그들의 목적에 대해 항상 훨씬 더 애매모호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보수적 정당의 지도자들과 비교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개인적 자질과 무관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이 문제들은 이 조건들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보수적 압력의 엄청난 무게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방어는 보수적 압력, 위협 그리고 유혹이라는 어떤 큰 성공의 척도로도 저항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당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거릿 대처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유명했다.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다. 우리는 상대편이 마음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대개는 신자유주의로의 이데올로기적 전환보다는 그 순간의 긴급 상황에 의해 움직이며 자본 축적을 촉진할 것을 약속하는 일련의 실용적 결정과 훨씬 더 관련이 있었고, 그것을 달성해기 위해서는 더 적은 국가 개입보다는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969년에 밀리밴드는 '국가가 경제 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사실상 자본주의 기업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고, 이것을 설명하면서 더욱이 '개입의 구조가 자본주의의 유지에 얼마나 필수적이게 되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는 사람은 종종 가장 자본주의 지향적인 정치인'이라고 언급했다.
랠프 밀리밴드는 '바람직한 범위, 성격, 개입의 빈도에 관한 정치적 논쟁은... 진지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토론의 양측 모두 '항상 그들의 제안과 정책을 자본주의 체제를 - 대체하기는커녕 -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더 큰 힘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해 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자본 사이의 제도적 연결망의 실용적 확장과 통합이었지, 국가가 경제에서 철수하는 것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신노동당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이전 노동당 지도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 공공연하게 이러한 실용주의와 통합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실천했던 것은 초기 노동당 지도자들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진실이었다.
“자본주의 기업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계급적 당파성의 어떤 요소를 수반하는 것으로 전혀 보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과 말에서, 국가를 사회 전체의 구현이자 보호자로 보는 헤겔의 고차원적 견해는... 특히 그들의 반대파가 재임 중일 때일수록 다시 살아난다... 실제로 계급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을 단순한 위선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그러한 지도자들이 그들이 설득된 고귀한 임무를 추구할 가능성과 헌신과 결의에 대한 위험한 과소평가로 이어진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공적인 목표를 추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목표는 기존의 경제체제에 대한 그들의 헌신의 수용이라는 프리즘에 의해 조절되고 통과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또한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 클린턴과 블레어의 후계자가 됐던 사람들과 많은 관련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약탈적이고, 불평등하고, 위기로 향하는 자본주의와 단절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밀리밴드가 그것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좌파의 새 정부들은 ‘그들 자신을 개혁에 열정적이고 급진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로 둘러싸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대부분 개혁적 성향을 억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에 만족해 왔다.'
밀리밴드는 이것을 '중요한 정치적 목적'의 제공, 즉 '새로운 통치자의 의도에 대해서 보수적 이해관계와 세력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측면에서 설명했다. “좌파의 새 정부가 이러한 세력들을 안심시켜주려고 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보통 거대한 경제, 금융, 사회적 어려움과 위기의 상황에서 취임해왔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들이 '기업 공동체'의 의심과 적대감으로 인해 상황이 크게 악화될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를 읽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볼 수 있다. 국가의 수뇌부에 있는 진보적 정치인들이 계급 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있어 행해 온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 ‘여기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왔듯이, 이러한 완화는 그것의 역할에서 본질적이고 변증법적인 부분인 사회 질서의 수호자로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 중의 하나이다’ - 동시에 밀리밴드는 어떻게 ‘개혁이 항상 그리고 반드시 그것이 지키기로 선언한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지’를 강조했다: "새로운 개척지"에 도달하고, "위대한 사회"를 만들고, 가난을 제거하고, 모두를 위한 정의를 보장하는 십자군들.
항상 이것의 이면에 있는 것은 자본 축적의 위기를 가중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마치 밀리밴드가 오바마나 영국의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직접 연설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는다.
“그러한 두려움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부들이 그들의 취임을 전제로 직면하는 불리한 조건들을 다룰 수 있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러한 조건들을 더 큰 대담성을 향한 도전, 더 큰 급진주의를 위한 기회, 그리고 신속하고 결정적인 개혁 조치들에 대한 장애물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는 것이다. 결국, 목적이 확고하며, 대중적 지지의 실질적인 척도를 누리고 있는 진정한 급진적인 정부가 있으면, 위기의 상황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선거적 정당화가 이뤄진 이후에 실행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헌신적이지 않거나 덜 헌신적일 수는 있지만, 단호한 선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장기적인 사회주의 전략
랠프 밀리밴드에게 있어서 '단호한 선도'가 될 수 있는 것의 척도는 그것이 장기적인 사회주의 전략에서 어디에 적합한가 하는 관점에서만 취해질 수 있었다. 밀리밴드는 벨기에에서 나치에서 벗어난 직후인 16세의 나이에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무덤에서 사회주의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이것은 그를, 한때 노동당 당수였던 해럴드 라스키(Harold Laski)와 <트리뷴>[영국 노동당 좌파들이 지지하던 잡지] 지지자들과 함께 런던경제대학에서 공부하게 만들었고, 이후에 거기서 그는 25세였던 1949년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냉전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밀리밴드는 마르크스를 수용하게 되었다.
심지어 전후 '자본주의의 변화'가 마르크스의 현실 관련성을 종식시켰다는 저서 <사회주의의 미래>로 오랜 논쟁을 일으켰던 앤서니 크로스랜드(Anthony Crosland)조차 당시에는 마르크스를 비웃는 '당시의 유행'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그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거인'이었으며, 그의 작업은 고전 경제학자들을 '대비를 통해서 평평하고, 지루하고, 제한적인 사람들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 미성숙한 어린이이거나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들만이 그런 사람을 비웃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밀리밴드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특히 정치 이론에서 더 많은 발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발전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방적 접근법은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영국 신좌파를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불관용 못지않은 이것의 특징은 흔히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된 일종의 '이빨 없는 급진주의'에 대한 불관용이었다. 여기서 '기존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배열의 여러 측면에 대한 비판은 그것들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들의 거부와 결합되었다.' 밀리밴드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에 그것을 실었다.
“사회적 질서의 경제적 기초가 의문시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질서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그것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성하지만 안전한 토론과 논쟁을 일으키고, 그리고 사적 이익 추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적 질서라는 모든 '문제들'들 중 가장 큰 문제들로부터 주의를 흐리게 하면서 문제들의 '해결책'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이빨이 없는 급진주의의 공식화, 그리고 위험한 결과 없는 비평의 표출, 나아가 직설적 변론의 측면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대단히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변론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그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그 유용성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
밀리밴드는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는데, 1964년 연간 첫 권부터 이 책은 영어권에서 사회주의적 분석을 위한 최고의 지적 장소 중 하나가 되었고, 이것은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 그의 예리한 책임감을 반영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1961년 그의 저서 <의회 사회주의>에서 전통적 의회 관행에 대한 노동당의 헌신을 그것의 정치적 행동양식의 '조건부 요인'으로 본 그의 유명한 비판을 출판했다. 그것을 출판된 지 1년 만에 밀리밴드는 '국가에 관한 큰 책의 집필'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5년 정도 걸릴 것이고, 이론적이고 분석적이며 규범적이며, 많은 정치적 질문들과 문제들을 규율있으면서 엄격한 방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것은 6년이 걸렸고, 그는 프랑스에서 학생과 노동자 반란의 여파 속에서, 그리고 LSE(런던정경대학)를 사로잡은 유명한 학생 반란의 휴지기 한복판인 1968년 7월에 그 책의 서문을 마무리했다. 이 책의 엄청난 영향력은 산문의 명료성과 신중한 논증으로 특징지어진 그의 눈에 띄게 접근하기 쉬운 문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리밴드는 이 책이, 특히 '국가와 사회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 분석의 결핍을 개선하는 주요 임무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기반 닦기 연습이라고 보았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 국가 이론은 '지금까지 그들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정교함'을 필요로 했다.
197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 이론 논쟁은 현실적인 관점이 사회주의 전략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급진적인 의도의 사회주의적 개혁마저도 어떤 한계에 부딪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서 동기 부여를 받았다.
만약 그들이 여기서 멈췄더라면, 새로운 국가 이론은 패배주의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1970년대 후반에 밀리밴드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와 풀란차스(Poulantzas)의 <국가, 권력, 사회주의>와 함께 그들은 민주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관련된 핵심적 정치 문제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는 데 관심을 집중시켰다.
밀리밴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레닌의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개념을 비판한 것은 물론, '구조적 개혁' 개념을 창의적으로 확장하는 데서도 결정적 발걸음을 이어갔다. 밀리밴드는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가 어떤 종류의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시민사회에 기반한 행정적 다원주의 전략을 통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정식화하려고 했다.
풀란차스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에 대한 자신의 통렬한 비판과 대표하는 기관의 장소와 의미를 통한 사고방식에 대한 그의 강조와 함께 뒤따랐을 때, 이것은 밀리밴드가 발전시킨 입장과 매우 일치하고 상호보완적이었다. 사후에 출간된 저서인 <회의하는 세대를 위한 사회주의>를 포함해서, 1994년 죽기 직전까지 밀리밴드는 '그것이 요구하는 엄격하고 상세한 우려와 같은 어떤 것이든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다'고 우려했다.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는다면' 21세기에 필요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과 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약속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 결론을 통해 그린 기본 개요는 보다 새롭고 정교한 사회주의 비전을 요구하는 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선진 산업 사회는 높은 수준의 계획, 경제적 조정, 물질적 자원의 미리 계획되고 합리적인 사용을 국가적일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규모로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의 물질적 자원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의 사적인 목적에 주로 맞추어져 있는 경제체제의 한계 내에서 선진 자본주의 사회는 이것을 성취할 수 없다...
비슷하게도,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이러한 사회들은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사회성과 협력의 정신, 진정한 관여와 참여를 요구하는데, 이는 사적인 전용에 대한 충동이 지배적 체제에서는 마찬가지로 성취할 수 없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자본주의의 초월 - 다시 말해서, 사회적 자원의 가장 큰 부분의 공공 영역으로의 전용 - 이 산업 사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그 자체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들의 해결책에 있어서 모든 장벽들 중 가장 큰 장벽을 제거하고, 최소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적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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