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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언론개혁/ 긴즈버그/ 윤미향/ 임은정/ 채식 비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9. 23.

전지윤


 


 

언론-우파-관료-재벌 카르텔의 지속적 반격

 

요즘 한국의 주류언론들을 보면 잘못을 성찰하고 교정하면서 신뢰성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더 큰 잘못으로 위기를 덮으면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모습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추미애 아들 기사가 심할 때는 하루에 1천건이 넘었다는 지적을 보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추미애 아들 보도 좀 그만해라, 지긋지긋하다니까 그후로는 추미애 딸 보도가 시작됐다.

 

한국사회에서 정말 중요하고 시급한 이슈는 언론이 결코 주목하지는 않거나 덜 중요하게 뒤로 빼서 보도하는 것들에 있다. 예컨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국힘당이 추미애를 물고늘어지고 있을 때 정의당 의원들은 국회 로비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촉구 1인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추미애 아들 문제를 독자와 시청자들이 관심이 많고, 산업재해같은 우울한 소식은 클릭수가 높지 않다고? 그렇지 않다. 추미애 아들 문제는 국힘당과 보수카르텔의 입맛에 딱맞는 뉴스고 산업재해는 재벌 광고주들이 싫어하는 뉴스라는 게 진실이다.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서 누군가를 실검으로 올리고 단독, 특종, 속보로 끝없이 괴롭히는 것이 한국 언론의 특기다. 그 과정에서 개혁정치인, 연예인, 정치인의 아들과 딸까지 실명, 얼굴, 사생활을 공개하고 스토킹하듯이 한다. 주필 수준인 진모, 서모 교수 등의 입을 빌려서 사람을 벌레나 질병으로 비유하면서 낙인찍고, 혐오선동하고 개혁 지지자들에 대한 조롱, 경멸을 쏟아낸다.(그러면 반대 편에서도 극단적인 반응들이 나오며 상승작용한다.)

 

그것을 이어받은 극우유튜브와 일베 등에서 조국 교수 딸과 추미애 아들에 대한 극악한 성희롱과 인격살해가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랬던 자들이 근래 현모일병의 이름과 얼굴 공개(그것도 자신들이 이미 보도했던)에 인권 운운하며 거품을 문 것은 기가 막혔다. 이처럼 혐오, 차별, 폭력에 부추기는 주류언론들이 차별금지법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것도 너무 자연스럽다.

 

진보정치인들을 주무르고 길들이려는 이들의 행태도 가관이다. 자신들의 아젠다에 유리하게 이용하며 상대편을 이간질할 수 있을 때만 진보정치인의 입장과 발언을 입맛대로 짤라서 인용, 보도한다. 최근 장혜영 의원의 연설에서 알맹이는 빼놓고, ‘86 기득권부분만 부각한 게 대표적이다. ‘수해 현장에서 심상정의 깨끗한 옷처럼 기회만 있으면 왜곡해서 공격한다. 류호정 의원의 정책과 주장은 간데없고 원피스만 남은 경우는 또 어떤가. 그 후로 류호정 의원은 옷차림만 계속 뉴스가 되고 있다. ‘류호정 원피스 한달 후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아마 1주년 보도도 할 것 같다.

 

취재와 검증도 안 된 가짜뉴스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부분적, 선택적 사실로도 얼마든지 아젠다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샘 오취리님이 몇 년전에 다소 부적절한 댓글을 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취리 님이 방송에서 퇴출된 진짜 이유가 아니고, 블랙페이스 문제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쓴소리를 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미국에서도 최근 경찰폭력에 사망한 흑인들의 성폭력과 절도에 대한 전과가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과 경찰-감옥-산업 복합체가 문제의 본질이듯이 말이다.

 

조국, 윤미향, 추미애와 그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옷에 변이 묻었다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흙도 아니고 먼지거나, 먼지조차 없었던 경우(그래도 사과도 반성도 없다)를 떠나서... 본질은 흙이나 먼지가 아니다. 그걸 통해서 기득권에 대한 어떤 개혁도 가로막고, 다시 촛불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언론-우파-관료-재벌 카르텔의 본질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에서 선출, 통제되지 않는 진정한 권력자들이다.

 

이번에 삼성 이재용 기소 과정은 이 기득권 카르텔과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생각하게 했다. 국가는 단순히 총자본의 대리인이 아니고, 아무리 압도적 대자본이라도 곧 총자본이나 국가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국가와 자본은 구조적 상호의존 속에서도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독자적 이해를 추구한다는 분석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가장 억압, 폭력적이며 강력한 국가기구인 검찰이 단순히 삼성의 도구는 아니었고,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삼성과 대립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것이 권위주의적 기원을 가진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에서 국가가 자본보다 여전히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아무리 자본주의 국가기구라도 지배와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계급투쟁과 세력관계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불어 지난해 검찰대란이 성공하지 못한 이후 반동의 중심축이 검찰에서 언론들로 이동한 상황은 자본주의에서 언론이 지배계급의 정신적생산수단이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지배계급 다수파와 주류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촛불 이후의 개혁 흐름에 저항하는데서 개혁언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많은 실망감과 의아함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운동 경험도 없는 젊은 기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편집부도 그것에 휘둘리는 후배권력이 문제라고 하지만 헛집는 것이다. 후배 핑계를 대면서 사실상 그런 흐름을 부추기거나 추수하는 것은 결국 권한을 가진 언론사 수뇌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레기라는 혐오성 멸칭을 쓰면서 모든 기자를 싸잡아 비난하고 문제의식을 가진 기자들과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도 잘못이다.

 

비판은 그런 흐름을 주도하는 지도적 선임기자들과 언론사 수뇌부를 향해야 한다. 이들은 출입처 제도 등을 통해 기득권 언론구조와 정--언 유착관계를 지키려는 것에서 보수언론 수뇌부와 공통의 이해관계와 정서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이 여론지형을 만들어내고 주도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탈진영을 말하면서 국가기구, 보수언론이 주도한 각종 흐름들에 동참했던 것은 최근의 일도 아니고, 이미 통합진보당 마녀사냥과 강제해산 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마녀사냥들은 단지 민주주의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지배계급의 주류와 다수파가 추진했던 사회경제적 방향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지금 검찰개혁, 언론개혁이 중요하냐? 불평등 해소, 기후위기 대처 등의 과제들이 더 우선이냐?’라고 묻는 것은 큰 실수일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문제들이거나 대립되는 과제들이 아니다. 이 모두는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구조와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제한할 때만 전진이 가능한 서로 연결된 과제들이다.(‘보통 사람들이 검찰개혁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사람은 지난주 피디수첩이라도 보면 좋겠다.)

 

검찰개혁이 전진하면 기후위기 대처가 어려워지고, 언론개혁이 이뤄지면 차별금지법이 어려워지는 그런 제로섬 관계가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 그 과제들에서 우리와 맞서고 있는 세력들이 그것을 구분해서 사고하거나 대응하고 있지가 않다. 혐오, 차별, 불평등, 인간 착취와 자연 파괴, 마녀사냥을 통해서 유지되는 체제와 지배세력에 맞서서 싸우는 모든 이들이 서로의 투쟁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추모하며 


여성과 소수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목을 짓밟고 있는 발을 치우기 위해서 함께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추모한다. 그의 삶과 업적을 다룬 다큐 <나는 반대한다>를 보면 그가 이룬 많은 성과와 노력들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논리와 설득을 통해서 꾸준히 장기적 변화를 추구한 자세, 정치적 반대자(심지어 우익 꼴통)와도 인간적 관계를 유지한 태도, 굽히지 않고 소수 반대의견을 제시한 의지, 그의 파트너와의 감동적 사랑 등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사법개혁, 검찰개혁 등의 문제가 보통 사람과는 무관한 기득권 세력의 이슈나 다툼이라는 식의 조야한 시각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친민주당 성향의 온건한 중도파였고, 결국 부유한 특권층이었으며, 신자유주의나 기업경영권 문제에서는 친자본주의적 태도를 유지한 인물에 불과하다며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미국 일부 좌파들의 태도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자신들도 지키기 어려운 앙상한 몇 가지 기준을 세워서 모든 것을 납작하게 끼워 맞추며 혁명적 좌파이거나 어떤 결함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언제 어디에서든 항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긴즈버그의 빈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에만 시야가 갇혀서는 안 된다는 지적들은 타당하다. 불편부당한 사법부를 구성해 점진적 평등과 시혜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자유주의 프로젝트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재구성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망하거나 자진사퇴하지 않으면 종신직을 유지하는 법복입은 9명의 원로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넘겨주는 (긴즈버그도 그 체계 내에 머물렀던) 연방대법원 체계와 구조가 과연 참여적이고 대중적인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이런 사법체계는 미국의 건국초기에 주도권을 쥔 노예주, 지주, 자본가들에 의해서 기층민중의 행동과 압력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됐다.

 

아래로부터 대중적 압력에 의해 의회가 채택한 진보적 정책도 엘리트 집단이 다시 뒤집을 수 있는 통로였다. 그 엘리트들은 사회 다수파를 대변하는 보수원로들로 구성됐고, 기층의 선출, 통제, 소환에서 자유로웠다. 그래서 연방대법원은 미국 역사 속에서 대체로 구체제와 기존질서를 지키는 버팀목이었다.

 

이러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 정치의 사법화는 당연히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이식돼 왔다. 근래에만 돌아봐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결정을 내린 것도, 박근혜 탄핵을 마무리지은 것도 헌법재판소였고, 전교조 법외노조 위법판결을 내린 것은 대법원이었다.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의 심층국가는 트럼프가 말하듯이 바이든 뒤에 있는 어두운 악의 무리들이 아니다. 이처럼 선출, 통제, 소환되지 않고 정치경제사법 권력과 결정권을 휘두르는 고위법관과 관료, 대자본가, 언론사주들이라고 봐야 한다. 트럼프는 이미 200여명의 영구직 연방법원 판사들까지 임명해 왔는데, 이들은 트럼프가 물러나도 자리를 지키며 기득권 세력을 위한 결정들을 지켜낼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순순히 물러나지도 않을 것 같다. 대선이 이제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트럼프의 핵심측근들은 만약에 선거 결과가 자신들의 뜻과 어긋나면 바로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계엄령을 선포해서 민주당 인사 등을 소요죄로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트럼프를 지지하는 우익 행동대들을 향해서 실탄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이런 비극을 막기위해서, 긴즈버그의 빈자리를 진보인사로 채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바이든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게 지금 민주당의 주장이다. 결국 더욱 더 바이든과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매달리게 되는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의 정서와 위기의식을 외면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말고 이러한 구도와 질서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는 지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긴즈버그가 여성과 소수자들의 권리에 눈뜨며 그것을 대변하고 결국 연방대법원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에 앞서서 미국을 뒤흔들었던 민권운동과 여성해방 투쟁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지난 4년간 트럼프에 맞서 싸운 여성, 소수자, 다인종 노동자들의 힘이 유지되고 더 확대될 때 트럼프는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유색인종, 모든 종류의 반대자들의 권리를 변호하기 위해 대법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나이브하다. 그러한 권리는 시민들이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조직하고, 항의하고, 시위하고, 파업하고, 보이콧하고, 법을 위반할 때만 살아난다... 낙태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로 대 웨이드대법원 판결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 결정 이전에, 전국 각지에서, 각 주들이 그 권리를 인정하도록 강요한 풀뿌리 운동에 의해 승리했다... 법원은 시민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이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직접 행동을 한 후에야 이러한 권리를 인정했다.”(하워드 진)

 

계속되는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에 대한 마녀사냥

 

끝내 화형대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한번 마녀사냥의 표적이 된 사냥감은 그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기억을 돌이켜 봐라.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은 파렴치한 위선자와 사기꾼, 범죄자의 누명을 쓰고 광장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수많은 돌팔매질을 당했다. 그때 보수언론만이 아니라 개혁언론까지 나서서 덧씌웠던 누명들을 똑똑이 기억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정의연의 운동 노선과 방향에 대한 온갖 부정적 왜곡을 바탕으로한 부당한 비판들이 쏟아졌다.

 

회계부정과 조작, 딸 유학자금, 아파트 구입 자금, 남편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 아버지에게 특권 제공...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제 밝혀졌고, 저 지독한 윤석열 검찰조차 그 부분에서는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러면 언론과 검찰과 그것에 동조했던 지식인과 명망가(진중권, 김경율, 권경애 등)와 작은 돌 하나 더 던지는 데 동참했던 이런 사람들은 반성하고 사과해야 마땅하다. 제국주의와 성폭력에 맞서서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활동가와 그 가족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고통을 가하고, 끝내 한 고귀한 생명이 사라지게 한 것을 뉘우치고 돌아봐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사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문제 삼았던 핵심부분들에서 꼬투리를 잡아내지 못하자, 곁가지에서 흠처럼 보이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서 끝내 기소했다. 신형철 선생님의 말했듯이 빨갱이 만들기공작은 이제 위선자 만들기공작으로 진화했고, ‘얼굴 피부를 가면이라고 우기면서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떨어지는 피를 더럽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모금에 개인계좌를 이용했으니 횡령이라고? 길원옥 선생님을 속이고 사기쳐서 기부를 하게 했다고? 안성쉼터를 비싸게 산 것이 배임이라고? 안성쉼터를 이용한 활동가들에게 사용료를 받은 것이 미신고 숙박업이라고? 답답하고 기가 막혀서 심장이 멈출 지경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굳이 억지를 만들어냈을까? 그래야 검찰과 언론이 합작해서 벌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했던 마녀사냥에 대해서 자기 정당화를 하면서 자기들이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 들어가서 그 활동과 가치를 이어가고 확장하려던 윤미향 의원의 손발을 계속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낙인과 주홍글씨를 짊어지고 평생 괴롭힘과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전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윤미향 의원의 핸드폰은 쏟아지는 저주와 욕설과 혐오의 문자들로 배터리가 매번 순식간에 달아서 사라졌다고 한다. 윤미향 의원은 기자의 카메라만 보면 그것이 번뜩이는 총구처럼 보여서 겁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지옥같은 고통은 끝나긴커녕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시작되고 있다. 반성과 사과는커녕 이제 새로운 표적과 먹잇감을 찾아나서고 있는 검찰과 언론에 대한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인권이 짓밟히고 폭력과 혐오가 넘쳐나는 현실을 뻔히 지켜보면서 외면하고 침묵하는 한국사회에 절망한다.

 

검찰개혁과 임은정 검사의 투쟁

 

기본적으로 모래시계 검사어쩌구하는 이야기와 그 비슷한 신화들은 정말 밥맛이다. 의사들에 대한 온갖 영화나 드라마가 대부분 판타지였다는 것이 최근 드러났듯이, 정의로운 검사가 거악을 척결한다는 것도 판타지이고 특히 해로운 판타지이다. 한국 검찰의 역사와 성격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모래시계 검사의 대표인물이 홍준표이니 말 다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와 신화가 많은 언론, 지식인, 심지어 좌파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강력하다는 게 문제다. 대표적으로 지난 2016년 촛불은 언론 보도로(그것도 조선일보!!??)로 시작됐고, 태플릿피시가 결정타였고, 검찰이 정의의 칼을 휘둘러 적폐를 청산했다는 신화가 그렇다.

세월호가 중심이 된 촛불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역사의 반동에 저항하며 개혁으로 방향을 돌려낸 진정한 동력인 아래로부터 민중 저항과 연대는 다 사라지고 역시 입시, 취업, 병역이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는 3대 문제라는 식의 천박한 교훈만 남았다. 그리고 우파는 이것을 조잡하게 반복하려고 시도 중이다.

 

이런 신화는 이제 정의로운 윤석열 검찰(과 언론)이 살아있는 권력인 문정부의 부패와 비리를 감시하고 척결하려는 것을 막아서는 게 검찰(언론)개혁이라는 새버전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과서적 해석에 충실한 이런 판타지 논리에 진보좌파들까지 호응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민주당과의 거리두기만큼이나 중요한 검찰(+기성언론)과 거리두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보이지 않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슈와 프레임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재벌-언론-우파-관료의 카르텔에 복무하며 한국사회의 그 어떤 진보적 변화조차 가로막는 핵심축인 검찰이라는 국가기구와 그 수뇌부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시선은 사라져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검찰은 보수야당보다 더 힘과 존재감이 강력한 정치집단이며, 서로 긴밀히 공조하며 불평등과 차별에 기반한 구체제를 수호하려는 전위부대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해 검찰대란을 일으켰으며, 그때는 대대적 압수수색과 몰아치기 수사로 효과를 봤다면, 이번에는 8개월째 질질끌면서 냄새를 피우는 수법으로 또 재미를 보고 있다. 그 능란한 술수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럼에도 검찰 중에서도 임은정 검사에 대해서는 신뢰와 기대를 보내는 이유는 그가 검찰의 이런 역사와 성격에 대해서 계속 성찰하며 내부 고발과 비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외부를 향해서도 검찰을 감시하고 비판해 달라고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검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더 철저한 개혁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진짜 거악인 검찰을 개혁하려면 지금과 같은 아기 공수처로는 부족하다고도 했다


나아가 임은정 검사는 검찰개혁을 주저하고 썩은 구조에 타협하려 한다면 그것이 누구이든 - 문정부, 민주당, 이성윤, 추미애 등도 - 비판하고 고발해 왔다. 윤석열, 국힘당, 조선일보의 문제는 침묵하고 철저히 선택적으로 분노하고 비판하는 진모 교수 등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모두까기였던 것이다. 임 검사는 검찰 개혁이 안 되는 것은 언론과의 협업 때문이라며 검찰 간부들의 속기사 역할을 하는 기자들도 비판해 왔다.

 

그래서 최근 여러 우울한 소식 중에서도 법무부가 임은정 검사를 검찰 감찰부로 보낸 것이 반가웠다. 추미애와 그 가족에게 쏟아지는 기성언론들의 대대적 협공도 이런 맥락과 결코 떨어져서 볼 수 없을 것이다. 임은정 검사가 부디 내부 고발과 비판을 포기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것을 응원하고 뒷받침해온 아래로부터 힘(개혁의 진정한 동력과 주체)이 지속, 확대되길 기대하면서 임은정 검사의 여러 속 시원한 인터뷰 중 가장 레전드를 다시 본다.

 

검찰은 늘 제가 상상하던 것 더 이상... 술자리에서 부장검사가 회식을 하면서 여검사들한테 추행 좀 하자라고 하고 추행을 하고... 문제제기하면 꽃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헤픈 여자라고 하고 그냥 참고 있으면 몸 로비 했다... 그러니까 상가집에서 공연히 추행을 하고 회식 장소에서 공연히 추행을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많은 전 현직검사들이 구속될 가능성이 저는 높다고 보고 지금까지 수사의 성역이었던 검찰을 수사한다면 여기는 황금어장이다. 그물만 내리면 범죄자들이 잡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물고기입니다, 이 물고기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고발인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런 역할을 할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두 건을 고발해서 김진태 전 총장님, 김수남 전 총장님을 다 고발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 총장님이 문무일 총장님이고 그 다음이 윤석열 총장님인데 결국 뭐 다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02U2_kmSk&fbclid=IwAR24oHXvYZx4Q_0wuP4qbCrHNdSRbLdwtMVfo9fg2Xisj2LQU6TOZnp40mE

 

기후위기와 채식, 비건의 중요성

 

얼마 전 기후위기 비상 집중행동이 있었다. 확실히 지난 1년간 기후위기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느낀다. 1년 전만해도 기후침묵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금의 그린뉴딜은 물론 한계가 많지만, 적어도 문제의식과 논란이 시작됐다는 점에서는 반가운 일이고 진전이라고 보여진다.

 

나아가 기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우리가 자본주의적 축산업과 육식주의에서 벗어나고 채식과 비건을 택해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더 강조해 주면 좋겠다. 그 점에서 아래 동영상들은 큰 도움이 된다. 조길예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대표님이 아주 명쾌하게 핵심을 짚어주고 있다. 동물을 착취하고 고통을 주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도 채식과 비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온실가스의 23%는 농작물 생산에서 나오고, 축산업은 단일 산업으로서는 최대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주범이고 열대우림도 대거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식량 위기, 생태계와 생물다양성 파괴도 낳고 있다. 육식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채식보다 수십배나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지금의 코로나 위기도 축산업과 육식문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밝혀져 왔다.

 

지금은 유엔도 채식을 권고하는 상황이고, 지금부터 전세계가 완전채식을 하게 되면 온실가스의 23%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재식과 비건은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는 최고의 행동 중 하나다. 다 나아가 조길예 대표님은 채식은 지속가능성, 생명존중, 공감과 배려, 비폭력 평화를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라고 강조한다. 단지 개인적 실천에 머물지 않도록 국가 정책과 제도로도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가는 타당한 주장이다. 이런 내용은 더욱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아직도 일부 좌파들까지도 채식과 비건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도 체력을 유지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채식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면서 도덕적 죄책감을 가하는 방식은 대안이 아니고 틀렸다라고 쓴 기사를 보고 참 안타까웠다.

 

육식을 해야지 체력을 유지하고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축산업과 육식산업이 만들어내는 신화일뿐이다. 채식 장보기를 실제 시도해 보면 정말 비싼 것은 고기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도덕적 가치와 정의에 호소하는 것은 어느 운동에나 다 수반되는 것이기도 하다. 채식과 비건이 개인적인 해결책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단적 대안이나 정책, 제도와 연결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진짜 문제다.

 

비건지향으로 살면서, 비인간 동물에게 피해를 덜어준다는 점에서도,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도 좋은 다목적 해법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진다. 실제 변비나 소화불량, 두통도 상당히 줄었고 몸이 많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수구언론들이 앞장서 줄구장창 조국, 윤미향, 추미애와 그 가족에 대한 스토킹과 집단적 괴롭힘 수준의 보도만 이어가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이런 방향과 주장들을 더욱 더 많이 소개해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mGIJR9M5kG4&feature=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J4ZEBx5cQbk&feature=youtu.be 


(기사 등록 20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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