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상읽기 - 전광훈과 우파/코로나/미국 민중투쟁/부동산

전지윤

 

내가 진리이고 너희는 어리석고 그 투쟁은 무의미하다?

 

진중권, 김경율 씨 등이 낸 책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역시 이견의 존중 속에서 정치적 비판을 하는 것과 인간적 비난, 조롱, 경멸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고 상처를 주면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강경하게 고집하면서 상대를 더욱 공격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검찰-수구언론-우파가 연합해 반동을 시도한 검찰대란국면이 펼쳐졌었다. 그 절정은 광화문에 우파가 대규모로 결집해 스스로 ‘10월 항쟁이라고 선포한 시기였다. 그 배경에는 촛불시위가 대중투쟁에서 제도적 탄핵으로 유턴하며 마무리된 것, 검찰이 적폐청산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것, 오랜 세월 형성된 검찰과 언론 유착 구조, 문정부가 적폐세력에 계속 타협하면서 반격의 틈을 허용한 것 등이 있었다.

 

그 국면에서 진중권 씨 등의 입장은 분명 동의하기 어려웠고, 그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논박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이 비판과 반박보다는 비난, 조롱, 경멸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진중권 씨 등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지면서 그것이 지금의 입장으로까지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중권 씨 등이 자신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보인 비난, 조롱, 경멸이 먼저였고 더 심했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인격적 존중도 없이 상대를 마치 벌레 취급하는 듯한 논쟁 방식은 정말 심했다. 조국 가족과 민주당 지지자에 대한 진교수의 태도는 비판보다는 증오나 혐오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더 큰 스피커와 마이크를 가진 사람의 그런 언행이 더 문제라는 생각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것은 주류언론을 통해 더 증폭, 확산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이 더 큰 비난, 조롱, 경멸이라는 반작용을 낳고, 그것에 더 강하고 독한 표현으로 맞서면서 파괴적 상승작용의 연쇄가 계속돼 왔다.

 

그래서 지금 진중권 씨 등의 입장은 진영론을 비판하고 누구보다 탈진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친문이냐 반문이냐는 진영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있다. 그래서 똑같거나 더 심한 형태의 부정의, 부조리라도 검찰, 보수언론, 미통당이 관련된 것에는 잘 반응하지 않는다.

 

나아가 오히려 감싸주면서 그들에게 문정부나 친문들과 이렇게 싸워야 한다고 조언, 훈수, 격려를 보내는 태도로 나타난다. 진중권 씨가 청년극우 유튜버들을 칭찬한 것이나 서민 교수가 의사파업을 응원하는 것은 이런 반문 역진영론의 몇 가지 사례들이다.

 

진중권 씨 등이 낸 이번 책에 대해서는 제목에서부터 2가지가 특히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제목에서 당장 이 분들에게 이명박근혜 시대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용산참사와 쌍용차살인진압과 간첩조작,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등이 이어진 그 시기는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있다.

 

반면 지난 몇 년간은 당장 내 주변에서도, 최초로 노조를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하나씩 찾아나가는 여성노동자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민주당과 문정부가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다.

 

거리와 광장으로 나가서 촛불을 들고 이명박근혜 시대를 끝내고, 그 자신감으로 스스로 행동하고 요구하면서 민주노총 100만 조합원 시대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성과인 것이다. 이런 노동자와 민중이 맞서서 투쟁, 요구하고 뭔가를 강제해내기에 더 나은 상황과 상대라는 것이 이박정부와 문정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라는 책의 부제이다. 문정부가 전체주의이고 독재, 심지어 파시즘라는 미통당과 조선일보의 주장을 헛웃음 속에 한 귀로 흘려온 입장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문정부가 민주주의를 끝장내고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제목으로까지 붙였다는 게 놀라웠다.

 

물론, 사회주의적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문정부도 한계가 명백하지만, 적어도 문정부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벗어나거나 권위주의나 독재로 회귀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의회와 선거제, 다수당을 부정하거나 언론, 출판, 집회, 민주노조나 좌파정당 결성의 자유를 가로막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커녕 전광훈 등은 혐오와 폭력 선동의 자유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누려왔다.

 

다만 민주주의는 완성태가 아니라 과정이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도 권위주의나 독재로 역행하려는 시도나 경향은 나타날 수 있다. 더구나 한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근본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돼서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끝장내는방향으로 갔던 게 바로 박근혜 정부다. 그 절정은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이었다.

 

그런데 진중권 씨는 당시 상황에서 종북 마녀사냥에 맞서기 보다는 침묵, 심지어 동조했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그런 분이 지금 민주주의가 끝장나고 있다고 하니 납득이 어려운 것이다.(자신과 정파나 성향이 다른 이들이 주로 탄압받았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과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소극적이던 분들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을 불신하게 되는 이유다)

 

지금 정말로 민주주의가 끝장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홍콩, 벨라루스, 타이에서 볼 수 있다. 홍콩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만들어져 정치, 사상, 집회, 결사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벨라루스에서는 26년간 장기집권해온 독재자가 부정선거로 다시 권력연장을 하고, 항의 시위를 폭력 진압하다가 역부족에 직면하자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까지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도 군주제를 유지하는 타이에서는 쿠테타로 집권한 세력이 진보정당을 강제해산하고 반대파를 납치고문해 오다가 국왕의 권위에까지 정면도전하는 역사적인 세손가락항쟁을 불러일으킨 상황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나가고 있는 이들 지역의 민중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

 

만약 이명박근혜 정부가 권력 연장에 성공했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도 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촛불민중은 그것을 막아냈다. 이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야당이나 지식인보다는 아래로부터 민중투쟁에 의해 조금씩 전진했고, 고비마다 기득권 우파의 반동 시도를 분쇄해 왔다.

 

군부독재에 뿌리를 둔 이 기득권 우파들의 변신이 요즘 진행중이다. 태극기부대와 결별하고 청년들에게 다가가겠다고 한다. 문제는 트루스포럼, 신전대협 등 청년우파들의 극우적 성향이 전광훈 등에 버금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변신은 경제위기와 팬데믹이 낳은 불만에 기반해 새로운 혐오를 선동하며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포퓰리즘적 신우파의 재구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는 그런 더 위험한 신우파들이 우파의 헤게모니를 쥐고서 기존 개혁정부의 무능, 약점, 부패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는 소프트쿠데타를 성공한 바가 있다. 브라질에서 룰라에게 씌워졌던 비리 혐의, 볼리비아에서 모랄레스가 저질렀다는 선거부정은 뒤늦게 모두 사실이 아닌 게 밝혀졌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본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해 검찰대란과 광화문 ‘10월 우파 항쟁국면에서 그것에 맞서서 거리로 나섰던 촛불시민들의 힘이 중요했다. 그들의 분노와 행동을 폄하, 조롱, 경멸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태도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 분들은 차악(또는 차선)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최악을 방기하거나 심지어 돕자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핵심은 차악을 믿지말고, 더 적극적이고 앞장서서 최악에 맞서 싸우자는 데 있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적폐청산을 요구하며 기득권 우파에 맞서서 거리로 나섰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 속에 문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어떤 이견과 혼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투쟁을 지지하고 함께하면서 토론할 문제다.

 

지금 홍콩, 벨라루스, 타이에서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정치적 의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모순돼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보다 내가 가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은 당신들의 잘못된 투쟁과 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위험하고 이상한 막다른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원리를 들고서 여기 진리가 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는 교조적 방법으로 오늘날의 현실에 맞서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 자체의 원리에서 세상을 위한 새로운 원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그 투쟁을 멈추어라. 너희는 어리석다. 우리가 너희에게 진정한 투쟁의 슬로건을 주겠다고 세상에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세계에 보여줄 뿐이다.”(마르크스가 1843년에 동료에게 보낸 편지 중)

 

제이컵 블레이크의 비극과 미국 민중 투쟁의 새로운 발전

 

한국은 오랜 세월 여러모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왔고 그래서인지 비슷한 점도 많다. 지금 이 나라에서 극우개신교 - 태극기부대 - 미통당 - 검찰 - 수구언론이 카르텔을 형성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듯이, 미국에서도 기독교근본주의 - 백인우월주의 행동대 - 경찰 - 트럼프의 카르텔이 계속 만행을 저지른다.

 

한국에서는 일제시대와 군부독재를 거치며 형성된 무소불위의 검찰이 주요 문제라면,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화와 감옥-산업 복합체의 형성 과정에서 군사화된 경찰이 주요 문제다. 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를 죽인 것에 대한 분노가 아직도 타오르는 가운데 최근 경찰이 제이컵 블레이크에게 총 7발을 난사하는 만행이 또 일어났다. 그것도 어린 세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사건이 일어난 위스콘신 커노샤 지역에서는 엄청난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경찰과 협력하며 시위대를 공격하던 무장한 극우민병대 편에 있던 한 청소년(아래 사진)이 총기를 난사해서 2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트럼프의 법과 질서타령, ‘무장하고 거리에서 폭도를 막아내자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선동이 죽음을 부른 것이다. 전광훈-미통당-조선일보의 선동이 코로나 2차 대확산을 불러 왔듯이 말이다. 특히 공화당과 대자본가의 일부로부터도 용도폐기되기 시작한 트럼프가 갈수록 거리의 극우파들에게 행동을 선동하고 있는 것은 위험한 징후다.

 

물론 트럼프는 군병력 투입도 지시했다. 그런데 민주당 소속인 위스콘신 주지사도 그것을 수용했다. 민주당의 이런 본질적 한계는 얼마전 카말라 해리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에서도 드러났다. 해리스는 흑인여성이긴 하지만, 출세지향적 정치인으로서 캘리포니아 법무장관과 검사장으로 있을 때 감옥-산업 복합체의 일부이고 폭력경찰과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평가받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 당시에 해리스의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트럼프가 많은 후원금을 보냈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해리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많은 월스트리트의 큰손들이 막대한 후원금을 바이든 캠프에 보냈다고 한다. 대자본가들의 상당수와 공화당의 일부까지도 바이든 지지를 선언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도 미국 좌파들의 오랜 요구였던 전국민의료보험은 민주당의 의제로 채택되지 못했다.

 

우리가 민주당을 가장 앞에 둔다면, 민주당은 우리를 가장 뒤로 돌릴 것이다라는 맬컴 X의 말이 생각나는 상황이다. 그래도, 트럼프의 재선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 속에 좌파들도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좌파는 여전히 민주당 안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주요노조들조차 전국민의료보험 도입을 반대한 상황에서 민주당 우파만 비난한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고.

 

무엇보다 해리스 지명 이후에 트럼프와 공화당이 여성혐오, 흑인비하적 공세와 선동을 시작한 상황이기도 하다. 바이든-해리스를 비판하면서도, 이런 공세에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맞서야 한다. 마치 우리가 문정부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극우개신교-미통당-검찰-언론-재벌의 카르텔에는 결코 타협하지 말아야 하듯이 말이다. 더구나 지금 인종정의와 사회정의를 향한 미국 민중의 투쟁은 단지 민주당에 대한 기대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누적된 불만과 심화하는 경제불황이 낳은 고통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인종과 세대를 뛰어넘어서 들불처럼 번져가던 이 투쟁은 이제 NBA, NFL의 프로 농구, 야구 선수들까지 블레이크의 아픔에 연대해 경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사회정의를 위한 파업의 모범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투쟁하는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정치적 우파의 코로나 음모론과 그 위험성

 

코로나의 위험은 너무 과장돼 있고, 엘리트 권력자들이 코로나를 핑계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면서 자유주의적 기본권들을 억누르려 한다는 음모론은 사실 간단히 평가하기 어렵다. 일부 권위주의 정권들이(헝가리 등에서) 그런 양태를 보인 것도 사실이고, 일부 좌파 지식인들도(예컨대 아감벤) 그런 의견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압도적으로는, 정치적 우파들이 이런 입장이다. 미국의 트럼프, 영국의 보리스 존슨, 브라질의 보우소나르 등... 이런 우파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마스크 쓰기, 거리두기 등을 하찮게 여겨서 스스로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툭하면 봉쇄와 차단을 풀고 자유롭게 학교와 공장에 가야한다고 우긴다.

 

이 나라에서도 우리는 전광훈과 극우 개신교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다가 2차 대유행의 진앙지가 되버린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왜 이처럼 극우파들은 과학을 거부하고 반지성주의적 태도로 (중국, 또는 북한, 심지어 문정부가 바이러스를 퍼 나른다는) 코로나 음모론을 펼까?

 

이것은 이들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적 친시장 논리와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유로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며, 시장 작동과 이윤추구를 가로막는 모든 것은 악이라는 자본 물신숭배와 극단적 개인주의의 논리는 진지한 과학적 사고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광신과 우상숭배와도 잘 어울린다.

 

더구나 이들은 생산적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나이들고 병약한 사람들의 희생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다윈주의를 내면화하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감염이 무서워 맨날 마스크쓰고 손씻고 이러는 것은 남자답지못하다는 인식을 퍼트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들에서 중도파나 개혁파들도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우파나 극우파들은 더욱 더 충실하다고 봐야 한다. 중도파나 개혁파는 자본주의라는 손에 잘 안 맞고 부자연스러운 장갑이라면 우파와 극우파는 자연스럽게 딱 맞는 장갑인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극우파들은 혐중 인종주의까지 발전시키면서 코로나의 원인과 책임을 더욱 엉뚱한 것으로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이데올로기는 주류언론과 권력자들과 여러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서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지난 815때 우리는 돈과 권력보다는 가난과 소외가 더 느껴지는 사람들 수만 명이 광화문에 모인 것을 봤다. 그분들 대부분이 감염병에 취약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주거환경에 있을 것이다.

 

특히 노령층에서는 빨갱이 문재인이 소득주도성장, 언론과 검찰 개혁, 부동산 규제, 탈원전,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며 나라를 망치고 공산화하고 있다는 논리와 가짜뉴스가 무섭게 번지고 파고들어 왔다. 그런 의견에 동조하거나 광화문에 같이 나가지 않으면 친구들과 대화나 어울리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극도로 불평등하고 경쟁적인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이런 극우적 논리에 이끌리는 현실, ‘젊은 세대는 우리를 무시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트리는 현상, 그러다가 코로나 재확산의 매개가 되면서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 당혹하고 있는 상황 모두가 비극적이다.

 

그래서 이들을 부추기고 동원하다가 갑자기 등을 돌리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미통당, 조중동 등에 더욱 분노하게 된다. 사실 전광훈도 이들이 앞세웠던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전광훈을 공천관리위원장으로 거론했던 게 총선 전의 미통당이다. 지난해 검찰대란때 광화문 집회를 호소하며 전광훈을 ‘10월 항쟁의 지도자로 추켜세웠던 게 미통당 지도부다.

 

전광훈같은 지도자를 앞세워 문재인과 맞서자는 칼럼을 싣고, 전광훈 전면 인터뷰를 실어서 선동의 장을 열어준 것이 조선일보다. 815 직전만해도 조선일보에 실린 가장 큰 광고는 부동산 광고와 815집회 광고였다. 이제 전광훈과 우리는 무관하다는 게 미통당이고, 815 다음날부터 다시 김정은, 태양광, 미스터트롯으로 지면을 채우며 모른 체하는 게 조선일보다. 이들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 아니라) 분노와 비판은 정당하고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광훈의 배후인 기득권 파워엘리트들이 문제의 핵심이다

 

전광훈과 그 세력에 대해 당연히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평소 전광훈의 색깔론, 소수자 혐오선동이 너무 너무 싫었다. 툭하면 누굴 몰아내고 죽이고 총살하자고 하는 증오와 살기가 넘치는 발언들... 더구나 이번에 전광훈과 그의 세력은 명백히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고 큰 차질을 주면서 대유행으로 가는 불길에 부채질을 했다.

 

이것을 보면 코로나 초기에 신천지에 대해 쏟아졌던 그 많은 비판들이 너무 과했고 희생양 삼기의 성격이 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신천지는 적어도 이렇게 고의적 노골적으로 방역을 방해하고 비협조하지 않았었다.(그때 당시에는 문정부를 돕지 않으려고 신천지 수사에 소극적이었던 검찰이 요즘 뒷북으로 신천지에 가하는 조처들은, 따라서 매우 과해 보이고 정치적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코로나의 출현, 확산, 팬데믹은 일부 세력들에게 그 원인과 책임을 다 묻기 어려운 매우 근본적인 생태적, 사회적, 경제적, 국제적 뿌리가 있다. 일시적 소강 이후에 매번의 새로운 대유행이 시작될 때마다 주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반응이지만, 너무 과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다.

 

사실 요즘의 코로나 재확산은 세계적 현상이고, 정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치고 느슨해졌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문정부를 크게 탓하고 싶지도 않다. 문정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봤을 때, 이 정부가 코로나 대처에 대체로 열심이고 효과적이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 상황에서 집회나 모임 자체가 문제이고 모두 계속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방역 지침을 지키면서도 집회, 결사의 자유는 어느정도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운동사회의 지속적인 입장이었다. 사람은 먹고 자고만 하면서 살 수가 없다. 서로 교류 접촉하고 유흥, 문화생활, 종교활동, 사회정치활동도 모두 필요하다. 더구나 지금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더 많은 정서적, 영적 위안과 치유가 필요해진다.

 

다만 전광훈 세력의 집회는 코로나와 무관하게 그 전부터도 어느 정도의 제한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그 집회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 폭력 선동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혐오와 폭력 선동은 표현, 집회의 자유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이처럼 거짓선지자를 앞세워 정치를 종교화하는 현상은 미국에서도 툭하면 성경책을 들고 흔드는 트럼프에서 볼 수 있다. 전광훈은 트럼프 모델을 한국에서 실현하려 해 왔다.

 

트럼프가 일부 백인, 남성, 하층민들의 울분을 파고들어 왔듯이, 전광훈 세력도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재확산이 수도권 작은 교회들에서 주로 나타났다는 김진호 선생님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고령의 가난한 신도들이 많은 이런 교회들은 무허가주택을 교회당으로 쓰는 경우도 많고, 최저생계비를 보장받지 못하는 목회자들에게 생계형이중직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다단계업소나 열악한 조건의 부업을 하는 과정에서 감염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고, 이것이 다시 교회와 예배를 매개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진호 선생님은 주로 강남에 있는 화려한 대형교회(메가처치)들에서 밀려나고 이탈한 신자들과 소외된 비주류들이 극단화(종교적 근본주의와 극우정치)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박탈감과 소외감을 혐오 선동의 자양분 삼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성 주류 세력의 웰빙 보수주의가 오히려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들이야말로 대형교회를 네크워크삼아 인맥, 혼맥을 형성하고 정치권, 학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 등 곳곳에 자리잡은 이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이라는 것이다.

 

정말 공감가는 지적이다. 이 파워엘리트들이 오늘날의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지탱하고 있는 핵심 세력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줄이자는 정책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도,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고, 반전평화로 나아가자는 방향도 가로막으면서 말이다. 영적 위안보다는 외적 성장에 치중하고, 근본주의적 교리해석에 매달리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조직 보존과 내부적 결속을 시도하는 모습도, 사랑보다 증오로 나아가는 경향도, 사실 주류 개신교의 토양에서 자라났다.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는 그것을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경우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파워엘리트들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고 필요할 때마다 전광훈과 그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 활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미래통합당이 이제와서 선을 긋고 서로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정말 뻔뻔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 파워엘리트들의 기득권에 기반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이 반동적 절망과 정치적 기만에 이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동산 문제의 복합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이 중요한 이유

 

부동산 3법 강행 통과 이후 민주당 지지율은 더 떨어졌었다. 여기에는 단지 (다주택자와 불로소득자들의 대변자인) 우파언론과 미통당의 왜곡과 선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거 같다. 이미 지난 3년간 부동산 혼란을 방치한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 부동산 대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게속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런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번에 통과된 (그나마 무주택자와 평범한 사람에게 다소 유리한) 제도와 법안에 대해 막상 그 당사자들의 지지여론보다는 반대여론이 더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였다. 이것을 보면서 정말 문제가 간단치 않고 복잡한 여러 문제가 얽혀있다는 생각이 커지는 가운데 서영수 애널리스트의 분석을 듣게 됐다.

 

이런 문제에서는 너무 기존 틀로만 현실을 비추는 좌파적 학자나 이론가보다도 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긴밀히 체크하는 사람의 분석이 더 유용할 때가 가끔 있다. 서영수는 부동산 문제의 핵심에는 금리와 신용대출이 있다고 지적한다. 금리가 낮고 신용대출(특히 전세자금대출)은 용이해지면서 갭투자가 만연해진 것이 참여정부 때와 달라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 갭투자라는 용어는 10여년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용어다. 그런데 문정부는 과거의 정책으로 부동산을 잡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큰 구멍이 되면서 욕을 먹게된 임대사업자 제도도, 이런 잘못된 인식 속에 집값 하락을 예상하면서 다주택자들을 양성화해서 관리, 통제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말에는 대출을 옥죄고 금리를 높이면서 집값이 하락하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자 언론 등을 중심으로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특히 지난해 일본수출 차단이라는 위기 속에서 그 압력은 엄청 커졌다. 결국 초기 부동산 정책을 주도하던 김수현이 밀려나고 기재부가 주도권을 쥐면서 금리 인하와 대출 확대 속에 임대사업자 제도 등을 모두 경기부양으로 돌리면서 일시적 집값하락은 다시 반등됐다는 것이다.

 

서영수는 부동산은 건설업, 가전업, 요식업 등 그 관련 종사자만 300만에 달하는 영역이라고 지적한다. 집을 짓고 새로 이사를 오고 가전제품을 사고, 외식을 하고 상권이 형성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수와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 영역을 정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도 집값을 하향 안정시키려면 금리를 높이고 대출을 회수하면서 어느 정도 경기침체를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값도 낮추고 경기도 부양하는 그런 길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경기침체는 단지 정부의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자리와 내수, 소득의 감소로 연결돼서 보통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가할 것이다.

 

오늘날의 부동산 문제는 결국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연결돼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금융화는 우리가 갈수록 신용대출과 부채, 시장과 금융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금융와 부동산의 융합 속에서, 부동산 시장과 가격이 매우 많은 사람들을 얽어매도록 만들었다. 사회복지, 노후대책이 부족하고 고용은 불안하고 시장임금은 너무 낮은 조건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을 통한 자산형성에 뛰어들도록 등을 떠밀었다.

 

영끌부모찬스까지 이용해서 갭투자에 뛰어들고 비트코인을 사고 개미투자자가 된 청년들, 평생 모은 돈과 퇴직금까지 다 털어서 부동산에 뛰어들고 사모펀드를 산 자영업자들이나 퇴직 노동자들이 많았던 이유다. 특히 이명박근혜 정부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빚내서 집사고, 주식사고, 펀드사고, 투자와 투기에 뛰어들도록 부추겼다. 그래서 사람들을 부채와 신용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부동산 문제도 결국은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고, 그럴 때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문정부의 부분적 일시적 대책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록 이번에는 세금을 높이고, 임차인을 보호하고, 시장을 규제하는 큰 방향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이것이 양질의 일자리와 복지 확대, 임금 인상, 불평등 해소라는 방향과 연결돼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또다른 핀셋과 땜질에 그칠 수 있다.

 

기본적 소득과 삶이 보장되고 주거와 노후가 걱정없는 세상이 온다면 누구도 더 이상 빚을 내면서 투기판에 뛰어들어 몫돈을 마련해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연대와 투쟁을 통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각자도생하면서 왜 우리같은 개미들이 투자할 기회를 닫아버리냐며 시장 규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들도 줄어들 것이다.

 

삼성피해자 공동투쟁에 참가하고 나서

 

얼마전 삼성피해자 공동투쟁 집회와 기아차 판매 해고자 박미희 동지 연대 집회가 연달아 있었다. 더운 날씨와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삼성생명 암보험 피해자들, 과천 철거민들, 삼성 피해자들에 연대하는 동지들이 모여서 방역을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내가 겪고 있는 손배소에도 자기 일처럼 관심과 걱정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본인들도 삼성과 싸우면서 민사소송을 많이 당해봤지만 피해자와 연대했다고 손배소로 압박하는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봤다며 같이 분노해주셨다. 나도 연대 발언을 했다.

 

지금 코로나, 코로나발 경제위기, 장마와 물난리, 부동산 대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전광훈과 극우개신교는 방역을 방해하고 큰 위기와 혼란을 가져왔다. 누가 전광훈을 비호하고, 띄워주고, 보석 석방해주고, 집회 허가해주고 해 왔는가. 바로 미통당, 기성언론, 검찰, 법원 등이다. 그런데 전광훈 봐주기보다 더 심한 것은 이재용 봐주기다. 역시 기성언론, 검찰, 법원 등이 그러고 있고 민주당도 눈치만 봐 왔다. 여기 삼성 피해자들의 투쟁과 연대만이 이재용을 심판할 희망이다.’

 

정말, 이제와서 전광훈만 꼬리자르는 행태들은 웃긴다. 개신교우파와 정치우파의 뒤얽힘은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갈만큼 뿌리와 역사가 있는 문제다. 2000년대 초반에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이것은 더욱 심화했다. 개신교우파-정치우파-재벌-보수언론-검찰 등 억압기구의 카르텔 구조. 누가 뭐래도 이들이 한국사회 기득권과 권력의 중심이었다. 최근 정치 상황의 핵심에는 이들의 반격이 있었다고 본다.

 

촛불 덕에 정권을 잡은 이후에 3년간 별달리 한게 없던 민주당이 총선 이후 그나마 알맹이가 부족한 부동산 3법을 강행 통과한 것이 기점이 됐다. ‘부동산 3법은 모두에게 고통만 줄 것이고, 탈원전이 이번 장마 속에 산사태를 낳았고, 친일청산도 나라 망치는 일이고, 자기들 비리를 덮고 야당 탄압하려는 게 검찰개혁과 언론 개혁이고, 문정부는 협치를 거부하는 전체주의 독재 정부이니 몰아내야 한다는 게 지난 몇 달간 보수언론과 미통당이 계속 하던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가장 극단적이고 조잡한 형태로 담은 유인물을 뿌리는 어르신들이 하루종일 서서 815때 광화문에 모이자고 하는 것을 나는 한달간 전철역 출구에서 마주쳤다. 특히 최근 민주당 지지율이 지난해 검찰대란수준으로 급락하고 반면 미통당 지지율이 반등하면서 이 분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게 느껴졌다. 물론 미통당과 김종인은 그러면서 중도파 견인을 위한 변신도 시도했다.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전태일 동상 참배를 했던 2011년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현재, 815가 우파 결집과 국면 전환의 중대 분기점이 될 거라는 그들의 기대는 좌절됐고, 급속히 전광훈과 손절하고 있다. 그러나 ‘180석 믿고 독주하지 말고 검찰개혁, 언론개혁, 친일청산, 탈원전 이런 것 좀 그만하고 민생부터 챙기면서 협치를 해라는 목소리와 프레임은 여전히 강하다. 민주당도 눈치보면서 다시 지난 3년처럼 타협할 가능성이 크다. 차별금지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을 부동산 3법처럼 추진하거나 강행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좌파적 목소리와 대안은 커지지 않고 있고....

 

레닌주의 정당 건설을 위해 간부의 본원적 축적을 해야 하는가?

 

영국에서는 제레미 코빈의 총선 패배 이후에 노동당 새대표가 된 키어 스타머가 당내의 좌파들을 쫓아내면서 당을 갈수록 오른쪽으로 끌고 가서, 코로나 팬데믹에서도 보리스 존슨과 별다른 차별성이나 제대로 된 비판과 대안 제시도 못하는 갑갑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당 안팎의 급진좌파들 속에서 과연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떤 조직을 건설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과 토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위기는 이미 브렉시트 국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포퓰리즘적 극우파에게 주도권을 놓쳐온 것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기존의 전위정당 노선이 옳은지, 아니면 노동당에 들어가거나 남아 있어야 하는지 등등을 고민하는 흥미있는 글과 의견들이 생산되고 있다. 그 중에서 나온 역사가이자 활동가인 닐 포크너(Neil Faulkner)의 아래 지적을 보면서 최근에 봤던 트로츠키 사망 80주년에 대한 어떤 주장들이 애처롭게 떠올랐다. 아무튼 이런 근본적 재검토와 고민은 항상 흥미있고 반갑다.

 

“'트로츠키주의자들'도 레닌이 '새로운 유형의 정당'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들만의 '민주집중주의 전위' 정당을 만들어서 이 업적을 재현하기를 열망했다. 이것이 국제 노동계급 혁명의 문을 열 열쇠라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기껏해야 몇 천 명, 때로는 몇 백 명의 아주 작은 조직들이 볼셰비키 당의 21세기적 맹아라고 스스로 상상하는 경지로까지 퇴행적으로 진화했다. 이런 종류의 작은 조직들은 모든 시기에 존재한다. 반면에 대중적 혁명정당들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때때로 '간부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불려온 것을 통해 민주집중주의 종파에서 혁명정당이 출현한 역사적 사례는 하나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래로부터의' 혁명, 즉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민주주의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사 등록 20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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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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