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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추미애/ 의사파업/ 전광훈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9. 11.

전지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에 동참합시다!!

 

http://bit.ly/중대재해기업처벌법_국민동의청원하기

 

😳 청원이 잘 안된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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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moredeath.kctu.org/board/pds/16

 

동영상보고 따라하기

http://bit.ly/중대재해기업처벌법_국민동의청원_안내동영상

 


더 나은 논쟁과 비판을 할 권리

 

성공을 갈망하는 여성이...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성차별주의자 남성만이 아니다. 그런 여성들은 남녀 모두에게 괴물이나 악마 혹은 무자비한 포식자로 여겨지며, 그들의 성취 또한 쌍년의 성공으로 간주된다... 철저하고 직설적인 남성은 단호하고 유능하다고 여겨지지만, 동일하게 행동하는 여성은 싸가지없고 공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벨 훅스, <사랑은 사치일까?>)

 

지금 기성언론들이 힘 모아서 만들어낸 한국사회 최대 이슈는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의 시급성도 아니고, 코로나로 고통받는 취약계층의 삶도 아니고, 의사파업에 가로막힌 공공의료의 중요성도 아니고, 재난지원금 선별지급의 문제도 아니고, 극우개신교가 가로막는 차별금지법의 시급성도 아니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중요성도 아니다. 추미애 아들이 수술로 휴가를 며칠 연장한 것이 문제냐 아니냐다.

 

조선일보가 단독, 특종, 속보를 쏟아내고, 진중권, 서민 교수 등이 한마디씩 거들고, 다른 언론들도 슬금슬금 뒤따라가며 거드는 패턴이 또 나타나고 있다. 공인과 그 가족이면 어떤 인권침해와 조리돌림을 당해도 아무도 막아서지 않는 모습도 반복되고 있다. ‘부모찬스도 모자라 장애찬스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고... 폭로를 주도하는 극우익 군장성 출신 국힘당 신원식과 그의 최측근 부하였던 이균철이라는 국민당 지역위원장(카투사 A 대령으로 나오는)의 말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부분의 언론과 심지어 추미애를 변호하는 민주당 쪽 사람들마저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추미애 장관이 소설 쓰시네 하면서 말을 함부로 한 것은 문제지만...’ 저 말을 하자 한국소설가협회가 규탄 성명을 내서 사과를 요구하고 언론들이 또 대거 받아쓰기하던 게 기억난다. 도대체 저 말이 중년남성 정치인들이 그동안 수없이 쏟아냈고 지금도 쏟아내는 막말과 욕설 등보다 더 문제가 되는 이유가 뭔지 도통 이해불가다.

 

우리에게는 촛불 이후 한국사회 변혁의 진정한 과제와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불공정하고 부조리하고 차별과 혐오가 넘쳐나는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정말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더 나은 논쟁과 비판을 할 권리가 있다.

 

한국 언론지형의 역설과 퇴행 


권력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그러면 한국의 대부분 언론들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최근 다시 드러났다. 지난주에 검찰이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어 마지못해 이재용을 기소한 다음날 아래 신문들의 태도를 보라. 한겨레 정도를 빼면 전부 다 이재용의 시각과 편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일주일도 안 된 지금, 삼성 기사는 진작에 벌써 사라졌다. ‘문재인이 간호사와 의사를 이간질했다느니, ‘전광훈이 2주 격리를 마치고 이런 말을 했다느니 이런 것들만 크고 시끄럽게 보도됐다. 사람들의 관심사와 이야기 거리는 그것으로 돌려졌다.


 한국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정치권력뿐 아니라 언론과 국가기구들까지 좌지우지하며 온갖 불법과 범죄를 저질러도 결코 처벌받지 않는 권력. 삼성과 이재용은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은 선출되지 않는 대자본가와 고위관료, 언론사주 등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박근혜도 구속되는 상황에서 이재용은 국정농단의 책임을 피해갔고, 분식회계는 이미 2년전에 밝혀졌지만 무사했다. 금감원 조사를 통해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을 넘겨받고도 검찰은 2년을 더 끌었다.

 

2년 동안 검찰 특수부는 조국, 윤미향, 울산선거 등으로 인력과 자원을 빼면서 어떻게든 이재용 수사와 거리를 두려했다. 막판에 윤석열은 수사심의위를 소집해서 다시 이재용 구하기를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언론들은 삼성과 이재용의 불법, 비리, 범죄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재용을 감싸고 변호하는 보도만 많았다. 단독, 특종, 기획을 통해서 더 파헤쳐야하고 그럴 소재도 무궁무진한 삼성과 이재용은 그렇게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언론을 도배한 것은, 그렇다고 수백억 부동산 투기를 하고도 국토위를 지킨 박덕흠도, 수십억 시세차익을 남긴 주호영도, 삼성 수사를 앞두고 홍석현을 만난 윤석열도, 족벌언론사주들의 온갖 부패와 비리도, 한명숙 사건에서 드러난 검찰의 충격적인 사건조작도 아니었다. 이런 이슈들은 뉴스타파, PD수첩, 스트레이트 등이 탐사취재를 통해 아무리 특종을 터트려도 다른 언론들이 한사코 외면해 이슈가 되지도 않는다.(뉴스타파는 최근 언론이 재벌, 공공기관들로부터 뒷광고와 돈을 받고 취재해온 관행을 고발하는 기획보도를 했는데 그것도 다른 언론들이 전혀 이어받지 않은 것은 놀랍지도 않다.)

 

대신 지난 1년 넘게 많은 언론들을 단독, 특종으로 뒤덮은 것들은 조국, 윤미향, 추미애에 관한 스토킹식 취재와 가짜뉴스들로 만들어낸 이슈들이었다. 이런 집요하고 막대한 보도를 통해서 조국’, ‘윤미향은 이미 낙인과 주홍글씨가 돼 있다. 그 단어만 들어도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부감과 혐오감정을 느껴야 하는 분위기다. 이번에 파업에 나선 의사들도 조국 딸은 의사고시에 응한단다’, ‘정의연같은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사를 만들려 한다면서 그런 편견과 낙인을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최근에도, 조국 교수의 법정 진술거부는 위선이라고 비난받았다. 진술거부권이 법적 권리이고, 아내를 유죄로 만들 증언을 하도록 남편(그것도 본인 자신도 재판을 받고 있는)을 재판에 세운 검찰이 문제라는 지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2000년대 초반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동지를 유죄로 만들 증언을 하라고 검찰에게 법정 증인으로 소환된 적이 있다.(당시에 보안법 집유 기간이던) 나는 당연히 진술거부권을 행사했고, 그런 악의적 검찰의 증인소환을 수락한 재판부는 나에게 벌금을 매겼다. 당시 내가 새벽알바로 벌던 임금의 몇 달치를.

 

윤미향 의원은 이번에 의원 재산공개 문제로 다시 마녀사냥대로 불려나왔다. 시민단체 활동가답지 않게 재산이 6억이나(?) 되고, 무슨 돈으로 자녀를 유학보냈냐는 의혹(?)도 다시 울궈 먹었다. 윤미향 의원이 뭔가 밉고 이상하게 나온 사진들이 또 그 기사들에 박혔다. 반면 900, 500억의 재산신고를 하고 의원 재산 탑 5를 자지한 미통당 의원들의 사연은 전혀 이슈거리도 되지 않았다.

 

실제로 수술을 받고 몸이 아파서 병가와 연가로 휴가 복귀를 며칠 미룬 것뿐이고 공식적 절차도 거친 추미애 아들은 황제휴가’, 심지어 황제탈영이라는 프레임으로 벌써 1년 가까이 언론을 장식중이다. 언론의 추미애 공격은 여혐적 시선도 명백하다. 여자가 말을 함부로 하고 설치고 나대면서 사고치고 또 구설수에 올랐다는 식이다. 가족 일이지만 남편은 언급도 없다. 무조건 엄마의 책임이고 잘못이다. 그런 기사들엔 어김없이 저 여편네’, ‘*’ 등의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추미애가 주도하는 검찰개혁의 의미와 내용 등은 전혀 다뤄지지도 않는다.

 

문정부와 민주당은 집권세력이고 중도자유주의 정권으로서 분명 많은 한계와 문제가 있다. 따라서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 그러나 본질도 아닌 문제들로 가짜뉴스까지 만들어 개인들을 낙인찍고 가족까지 엮어서 스토킹과 사회적 왕따, 집단괴롭힘 수준의 보도가 한없이 계속되는 것은 지켜보기가 지긋지긋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옳든 그르든 민주당과 민주당 쪽 인사들이 공격받는 것은 무조건 반가운 일?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면서 진짜 특권, 부패 세력에 대해선 침묵하고 비호하는 언론들의 지금과 같은 불공정, 불비례한 행태는 절대 지지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런 프레임들을 거의 전부 조선일보가 주도해서 만들어내고, 다른 언론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뒤따라가고 있다. ‘우리가 한국사회의 이슈를 만들고 주도한다는 조선일보의 자뻑은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계속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동시에 조선일보는 모든 언론사와 기자들이 속해 있다는 기자협회의 올해 투표에서 신뢰도 1, 영향력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언론지형의 이런 역설과 퇴행에 분노한다.

 

한국 의사들의 퇴행적 정치파업과 미국 프로스포츠 선수들의 정의로운 정치파업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특권 전문가 집단인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의사 집단 중에서도 의료의 공공성이나 이윤보다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세력이 아니라, 그 정반대 세력이 지금 집단행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매우 엘리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이들은 지난 코로나 1차 대확산 국면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방역 정책을 김용익의 의료 사회주의 사단이 주도한다는 색깔론을 편 바가 있다. 지금도 의료는 공공재가 아니라는 이들의 주장들은 문제투성이다. ‘의료를 공산화하려는 문재인 정부가 운동권 시민단체 자녀들을 의사시키고 북한에 의사를 보내려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공공병원을 만들면서 의료게이트를 일으키고 있다는 식이다.

 

특히 반대 목소리를 내는 동료를 중국인이냐고 낙인찍으며 이런 행동에 앞장서고 있는 게 주로 젊은 의사들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이 청년 의사들 속에서는 실력도 없는 조국 자녀가 의사가 되고, 부동산 투자의 자유를 가로막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불공정한 정규직화를 추진한 친북친중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청년공정의 결합이 주로 어떤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지 다시 보여 주며 공정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던 사람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일부 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지금의 의사 파업이 단순히 밥그릇의 문제가 아니라 반정부 정치파업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파업은 노동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개혁정부에 맞선 특권층의 파업은 역사적 사례가 많다. 예컨대 1970년대 칠레 아옌데 정부에서 일어났던 운수사업자 총파업을 떠올릴 수 있다. 주로 자본가나 상층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이런 정치파업은 개혁정부를 무너뜨리거나, 개혁정책을 중단시키곤 했다.

 

반면, 최근 미국에서는 이런 퇴행적 정치파업이 아니라,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정치파업이 출현했다. 전통적인 노조나 좌파가 주도하지도 않았다. NBA, NFL의 프로스포츠 선수들이 경찰 폭력에 맞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며 경기를 거부한 것이다. 고임금일뿐 아니라 대체불가능한 이 선수들의 파업은 하키, 테니스 등 다른 종목으로 번져갔고 여론의 커다란 지지와 응원을 받았다.

 

르브론 제임스, 제이린 브라운, 오사카 나오미같은 톱스타 선수들도 동참했다. 이런 선수들이 맬콤X와 안젤라 데이비스(흑인여성이면서 미국의 베테랑 사회주의 활동가)를 인용하며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이들의 투쟁을 이어받아 미국 노동운동이 반인종주의 정치총파업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이들을 분노하고 행동하게 만든 것은 최근 제이컵 블레이크의 사망과 리튼하우스의 총격으로 다시 드러난 미국의 구조적 인종주의이고, 경찰의 폭력적 본질이다. 미국 경찰은 총도 없는 흑인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 등에 총 7발을 쐈지만, 총을 든 백인들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함께 손잡고 시위대를 진압했다.

 

경찰의 84%가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조사 결과와 경찰노조가 트럼프 재선운동 동참을 선언한 현실은 미국에서 경찰이라는 국가기구의 본질을 묻게 한다. 물론 경찰은 문제의 일부다. 지금 트럼프 지지세력은 민주당이 폭도, 맑시스트, 안티파, 성소수자들과 손잡고 나라를 중국에 팔아넘기려 한다. 지금은 트럼프 덕에 겨우 18만명만(?) 코로나로 죽었지만, 그러면 수백만 명이 죽게 될 것이다라면서 재선운동을 벌이고 있다.

 

신나치와 극우익들이 거리로 나서 행동하고 있다. 전광훈과 태극기부대의 주장이나 행태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국에서는 이들의 지도자가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코넬 웨스트같은 훌륭한 좌파 학자도 바이든이 가져올 신자유주의적 재앙을 지지하지 않지만, 반파시스트 연합의 일부로서 트럼프 갱단을 백악관에서 몰아내기 위해 바이든에 투표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이번 프로스포츠 정치파업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 출발이자 핵심이었던 NBA 파업은 오바마(그리고 이제는 억만장자 구단주가 된 마이클 조단)의 중재로 중단됐고, ‘시위가 너무 과격해지면 역풍이 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민주당 지도부 쪽에서 커지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시위를 폭도로 매도하면서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2008년 촛불시위가 중단되던 과정에서 촛불은 이제 그만들고 선거에서 심판하자던 한국 민주당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 그 후 이명박은 촛불을 폭도로 규정하며 보복을 강화했고, 4년 후에는 박근혜 정부가 등장했다. 중도개혁 자유주의자들은 반동적 우파에 눈치를 보면서 개혁을 주저하고, 역풍을 우려하면서 아래로부터 투쟁과 거기를 두고, 개혁을 절반만 하다가 포기해 버린다.

 

사람들은 실망, 분열, 사기저하에 빠지고 대중투쟁이 확대되거나 승리하지 못하면서 고립된 소수의 투쟁은 더 과격해지고, 우파는 그것을 이용해 역풍을 일으킨다. 이런 메커니즘이 연말에 트럼프의 승리를 낳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의 역설과 비극은, 안 그래도 주저하는 중도개혁 정부를 향해 검찰개혁, 언론개혁 이런 것 좀 그만해라는 압력이 온건한 자유주의자뿐 아니라 진보좌파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미통당-수구언론-검찰-재벌-극우개신교의 카르텔이 한국사회에서 검찰,언론개혁만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등 온갖 개혁 입법을 가로막고 부조리한 구체제를 고수하려는 핵심이라는 인식, 그것을 바탕으로 민주당의 한계를 넘어서 더 철저하고 비타협적으로 그 카르텔과 투쟁하려는 자세가 잘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전광훈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꼬리 자르기를 당하는 중

 

코로나 재확산은 정부가 불러왔으면서 전광훈과 극우세력을 희생양삼아서 마녀사냥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정부가 할인쿠폰을 나눠주고 휴일을 지정하고, 거리두기를 완화하면서 먹고 놀고 여행가라고 부추기며 코로나에 대한 사람들의 경각심을 느슨하게 한 것이 진짜 문제였다는 것이다.

 

일부 타당성이 없지는 않지만 과도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소비를 부추기는 게 문제라면 할인쿠폰을 넘어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것인가? 휴일 지정이 문제라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 문제이고 휴일을 더 늘려야 한다는 입장은 잘못인 것인가?

 

사실 방역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차단, 폐쇄, 중단하는게 가장 좋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게, 지금의 경제구조와 사회제도 속에서는 그렇게 해도 버틸 여유가 있는 배부른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이 당장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코로나 걸리기 전에 먹고 살게 없어서 죽는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적절한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것은 정답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비판의 지점은 그런 단기적 방역방침보다는 과연 정부가 코로나 위기의 근본적 배경을 이루는 사회구조와 제도들을 얼만큼 바꾸려고 하는지에 맞춰져야 한다. , 생명과 안전보다 이윤이 우선인 사회, 공공의료와 공공병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가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현실 등을 개선할 의지나 노력이 있느냐를 봐야 한다.

 

그 점에서 물론 많은 부족함이 드러나 왔는데, 그 부족한 정책마저 지금 의사 등 특권집단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있는 게 현실이다. 그 앞서서는 매우 미흡한 수준의 부동산 3법 통과에 대한 불로소득 특권층의 대대적인 저항도 있었다. 이 속에서 전광훈과 극우세력(815는 극우개신교 신도들만이 아니라 극우 정치세력의 총연합 집회였다)은 정부의 방역지침을 노골적으로 위반 방해하다가 지금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비판이지 희생양 삼기와 마녀사냥이 아니라는 것은 신천지 때와 비교해도 알 수 있다. 당시 신천지 교단은 방역정책에 협조하면서 검사에 응하고 30만 신도 명단도 제출했고 거듭 사과했다. '고의적 명단누락이나 비협조는 없었다'는 것이 중대본이 거듭 확인해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보수와 개혁 언론까지, 각종 전문가, 기성교단 종교인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신천지를 비난했다. 고의적으로 바이러스를 퍼트린 것처럼 몰아가면서 그 신도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선동을 했다. 이미 기성교단에서도 신천지에 대한 이단추방 캠페인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역과 상관없는 그들의 신앙과 교리까지 비난과 해부의 대상이 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천지 교단 강제해산 국민청원에 100만이 넘게 서명했다.

 

반면 전광훈과 극우세력은 보수 언론과 정치세력, 주류 개신교, 대형교회들과 긴밀한 연결망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식의 대대적인 공격과 몰이를 당하고 있지 않다. 비판도 신앙과 교리 보다는 노골적인 방역 위반과 방해 행위, 극우적 행태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우파 쪽에서 전광훈과 선을 긋거나 이단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 등이 있는데 그것은 마녀사냥이 아니라 꼬리 자르기로 봐야 한다.

 

따라서 전광훈과 극우세력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것도 희생양이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광훈과 극우세력이야말로 계속해서 진보좌파 활동가들, 성소수자들, 무슬림, 이주민 등을 표적삼아서 희생양 삼기와 마녀사냥을 자행하고 주도해온 주축이다.

 

주류우파들은 전광훈 세력과 선을 그으면서도 이런 혐오 선동과 조장은 여전히 이어받고 있다. 코로나 방역에 대해 논의하려고 청와대로 간 한국교회총연합 회장이 차별금지법 추진을 반대하는 언급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청와대는 여기에 또 눈치보고 타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므로 혐오 선동에 앞장서온 전광훈 등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다만 일부 댓글이나 개인들의 반응에서 전광훈, 주옥순, 신혜식 등에 대한 분노와 비판을 넘어서 혐오와 비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개인들을 구제불능의 악마, 괴물로 묘사하면서 경멸, 조롱, 막말을 가하고 강력한 증오심을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그것은 아무리 과하더라도 주로 개인적이고 즉자적인 감정의 표출이지, 그런 극우세력에 대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배제로 연결시키긴 어렵다.

 

그것을 전광훈 등의 극우세력이 주도하는 혐오 선동과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별, 배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럼에도 혐오선동 극우세력에 맞선다는 이유로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따져볼 수 있다. 혐오세력과 혐오선동에는 혐오와 비난보다 분노와 비판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들도 결국은 결함이 많은 인간일뿐이고, 어떤 것이든 혐오는 전염성이 강하고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나는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종주의자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바람직한 행위를 하도록, 나아가 생각을 고치도록 요구해야 한다.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토사물이나 배변 같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우리는 분명 그들을 추방시킬 수 없으며, 설령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어떠한 집단이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오물처럼 취급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취급은 전염과 유사성에 대한 신비적 사고를 통해 특정 집단이나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는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추모하며

 

2008년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가 촉발한 중요한 투쟁 중 하나였던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하라 운동에 동참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99%라는 구호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가 며칠 전 사망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국가와 억압, 폭력이 없는 해방된 공동체를 건설할 가능성에 대한 많은 연구를 남겼다.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적극 수용해 돌봄과 가사노동이 가진 중요한 생산적 측면을 지적하는 인류학적 가치이론을 편 것으로도 유명하다. 보통 아나키스트라고 분류되지만, 본인 자신은 그런 식의 분류나 정체성 구분조차 거부했기에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길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를 찾아보게 되고 매력을 느낀 것은 지식인과 좌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주의와 전위주의, 분파주의와 파괴적이고 잘못된 논쟁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열린 토론에 대한 강조였다.

 

많은 학자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급진적 사회운동의 성명서를 쓰고 있으며 가장 악질적인 분파주의적 전쟁에 연루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또 사소하게라도 의견이 다른 학자는 암묵적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제국주의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악의를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의 사유에서 나왔듯 레닌주의,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그람시주의, 알튀세르주의도 저마다의 저자를 갖고 있다.(국가 원수들의 이름에서 출발한 이 목록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프랑스 교수들의 이름으로 바뀌어가는지 주목하라) 피에르 부르디외는 만일 학문의 장이 학자들이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게임이라면 다른 학자들이 당신 이름의 형용사형을 궁금해가기 시작할 때 승리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서로 다른 토론을 하는 와중에, 다른 맥락에서였다면 그저 비웃고 말았을 역사의 위대한 사상가따위를 운운하는 이유는 아마도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컨대 (트로츠키의 사상도 그렇지만) 푸코의 사상이 수백 명이 참여하는 끝없는 대화와 논쟁으로부터 나온 특정한 지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상은 언제나 단 한 명의 남성(아주 드물게 여성) 천재로부터 나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대다수의 지적 논쟁은 파벌 정치의 패러디로 변질되었고, 학자들은 상대방의 주장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위험하다며 서로를 터무니없이 왜곡하려 애썼다. 게다가 그 논쟁은 7년쯤 대학원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면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언어로 이루어지기 일쑤였다.”

 

같은 문장을 읽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자. 하나는 저자가 적어도 조금이나마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가 완전히 멍청하다고 보는 방식이다. 보통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나는 어떻게 이런 방식이 지적 실천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공동의 기획이라는 생각과 조화될 수 있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다.”

 

지식인들의 다른 습관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잘못된 방식목록을 정성들여 만들어서, 나와 다른 관점의 주장이 그 목록중 어디에 들어가는지 확인했을 때에만 그 말을 듣는 습관도 있다.(그 잘못된 방식의 목록은 무슨무슨 주의로 끝난다...)... 이것이 이론에서의 차이를 (많은 경우 별것 아닌 차이를) 몇 가지 상상된 주의에 속하는 징표로 여길 뿐 아니라 엄청난 도덕적 결함으로 여기는 경향과 결합하게 되면 대부분의 희한한 전위주의 분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지적 논쟁의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재생산하게 된다.”

 

이런 분석과 지적들은, 이견을 제시했다가 오랜 동지들로부터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노선의 차이를 가진 온갖 ‘~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비난당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사상적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망한 것인지 깨달은 뒤로서는 더욱 다가오는 내용이었다. 요즘 전교 1등에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게 당연하고 공정하다는 생각들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엘리트주의에 대한 그레이버의 비판과 열린, 겸손한 자세에 대한 강조는 더욱 다가온다.

 

지식인의 삶이 진정 공동으로 진리나 상호이해 등등을 탐구하는 삶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분명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다른 입장의 글을 읽고,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전략적으로 정확한 분석을 행한 뒤 앞장서서 대중을 이끄는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는 게 결코 아니다.... 지식인은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관찰해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의 더 큰 함축적 의미를 찾아낸 뒤, 그 의미를 처방이 아닌 기여로, 가능성으로, 곧 선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레이버를 추모하면서 월스트리트 점거하라 운동에서 나왔던 우리가 99%라는 노래를 들어본다. 좋아하던 RATM의 톰 모렐로가 연주를 하고 시스템 오브 다운의 세르쥬 타키안이 노래를 불러서 더욱 애청하게 되는 멋진 노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56bXZTvrJA&app=desktop2008%EB%85%84&fbclid=IwAR1BCOTMlAt_OeuDSQoIKkuPPAssPF1MLLeKC-LXhxD57-RZ41zeNg2xDyk 


(기사 등록 20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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