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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선진국'이라는 신화의 종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3. 2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선진국'이라는 개념어이었습니다. 도대체 '선진국'이란 무슨 뜻일까요? '선진'은 축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논어> 등에서 사용된 용어이며, '먼어 나아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먼저 나아간' 나라로 치면, 글쎄, 중국, 조선, 월남 등은 세계의 선진이 되겠죠? 한나라는 이미 무제 치하에 과거 시험을 두고, 그 전에는 진나라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신라는 독서삼품과 (讀書三品科)를 원성왕 시절인 788년에 실시했는데... 글쎄, 8세기에는 구주의 귀족 봉건제 사회에서는 중, 하급 관료지만 관료를 '독서'를 가지고 뽑는 제도라도 존재하긴 했나요? 근대의 '골간'은 산업적 대량생산과 합리적 관리제인데, 후자의 차원에서야 굳이 '선진'을 따지자면 동아세아가 선진이지요.

 

물론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선진국'이라는 말은, <논어>의 용어라기보다는 advanced capitalist country의 일종의 줄여진 번역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advanced capitalist society 류의 용어는 그 어떤 가치판단도 전제하지 않는 정치-경제 용어지요. "advanced"이지만 "capitalist"인 만큼은 당연히(!) 주변부에 대한 착취부터 시작해서 자본 축적 과정상 필요불가분한 모든 범죄 행위들을 다 하게 돼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체제론자들이 사용하는 '핵심부 국가' 같은 표현도 가치판단과 무관합니다. 사실 가치판단으로 치면 차라리 부정적인 가치판단을 전제한다고 보는 편은 맞을 것입니다. 핵심부 (구미권과 일본) 사회의 대부분은 다 옛 제국주의, 식민주의 국가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핵심부 국가" 류와 같은 용어와 달리, 한국어에서 제가 접한 '선진국'은 늘(!) 대단히 선악이분법적인 표현으로 사용돼 왔습니다. 한국어의 '선진국', 던순히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을 먼저 시작한 사회"는 아니고, "우리가 모방해서 빨리 따라잡아야 할 아름다운 사회"쯤이었습니다. "선진국"에 대한 신문기사부터 각종의 기행문 등에서 보면 늘 '합리성'이라든지 '관용'이라든지 뭔가 '근대'를 연상케 하는 긍정적인 의미의 명사들이 늘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선진국'들의 실질적인 역사는 전문가들의 연구 영역으로 남아 대중적인 지식의 영역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70년대까지 이어져온 북부 사미족에 대한 강압적인 '노르웨이화' (동화) 정책도 아니고, 우생학적으로 '적자가 아닌' 것으로 판정된 사람들에 대한 1970년대 이전까지의 강제적 불임수슬도 아닐 것입니다. '선진적 복지제도'부터 떠오르겠죠? 불란서는 한국인의 인식 세계에서는 '관용의 나라', 세계 3위의 무기 수출국은 아닐 것입니다.

 

하기사,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6위 무기 수출국인데.... 같은 범죄자들끼리 서로 지나치게 따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가장 곤란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선진국'의 범죄사를, 아무래도 동아세아 지역에서는 단순히 잊기가 너무나 힘든 것이죠. 그런데도 산업 연수생 제도 등 '선진국' 일본의 각종 제도적 실패작들을 한국 관료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열심히 따라 배우고 그랬지요....쉽게 이야기하면 '선진국'''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는 이 '선진국'이라는 신화를 더 이상 존속시키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끔찍한 제도적인 전염 상황 은폐는 '선진적'인가요? 사실 약자들, 나이 드신 위험 그룹 성원 분들 보고 알아서 죽든지 말든지 하라고 국가가 제도적으로 방치한 셈인데,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타살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환자들을 등쳐먹는 미국의 의료제도는 '선진'과는 뭔 관계가 있나요? '군중 면역' 운운하면서, '군중 면역'이 생기는 과정에서 영국에서 죄소한 50만 명이 병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외로 한 영국 총리의 말을 들으면서, '선진'/'후진' 떠나서 이 정도로 무책임한 인간이 도대체 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일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증유의 재앙과 영웅적으로 싸우는 의태리에서 병원마다 호흡기기가 부족해 보다 젊은 환자들을 우대하면서 일부 고령의 환자들에게 기기를 주지 않아 사실상 죽게끔 놓아두는 이 끔찍한 상황들을 보면서, '선진'/'후진'과 무관하게 구주의 공공 의료 제도를 신자유주의가 최근에 얼마나 파괴시켰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황폐화시킨 이 세계에서는 아마도 최근 40년간의 신자유주의적 폐풍을 그나마 성공적으로 막아낸 사회라면 조금 더 '선진적'이겠지요?

 

한 가지를 부디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국뽕'과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배울 게 있으면 당연 어디로든 달려가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근대적 자본 축적 과정이 한국보다 먼저 시작된 나라들을, 당연히 '참고'할 필요는 늘 있습니다. '벤치마킹' 대상은 아니더라도 반면교사라도 될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예컨대 부동산 거품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는, 그 거품이 1990년대 초반에 꺼진 일본 같은 경험을 철저히 학습해야 합니다. 선발주자들의 실패사를 분석하여 타산지석으로 삼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게 후발주자의 잇점이죠.

 

마찬가지로, 구주식 복지제도가 예컨대 무상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신분 이동 등을 보다 쉽게 하도록 하여 세습사회의 출현을 어느 정도 막았다면 이 성공사례도 분석하여 취할 걸 취해야 합니다. , 먼저 근대 자본주의로 이동한 나라들을 제발 미화, 이상화를 시키지 맙시다! 먼저 자본제와 근대 국민 국가를 구축했다고 해서, 선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관용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자본 축적, 국민 국가 제도의 공고화, 확대 과정에서는 각종의 범죄 행각들부터 많이 감행되는 것이죠.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 요소, 즉 복지 등이라면 상당부분은 노동계급의 조직적 투쟁의 쟁취물에 불과합니다. 이 투쟁의 역사부터 제발 조금 더 자세히 공부하려는 분위기가 잡혔으면 합니다....

 


(기사 등록 2020.3.23)                                                                                   *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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