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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인종주의, 다시 물 위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3. 1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요즘 하루하루 사는 게 '전시'와 같습니다. '전시'가 되면 보통 전선의 상황, 아군과 적군의 움직임 등등을 매일 두려운 마음으로 확인하게 돼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이처럼 요즘 하루마다, 몇시간에 한번씩 아주 겁이 많은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곤 합니다. 국내에서의 방역 상황도 당연 체크하지만, 방역 상황은 제일 두려운 것은 전혀 아닙니다. 국내 방역과 전염병 확산 저지를, 지금처럼 거기에 국력을 집중하면 조만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역에 총동원된 공공 보건 노동자들의 과로야말로 너무나 걱정되지만, 국내 '코로나' 비상 정국이 아마도 몇 주 내로 종언을 고하리라고 대체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걱정되는 것은 구미권에서 '코로나'보다 더 빨리 확산되는 인종주의 바이러스입니다. 신종도 아닌 구종의 바이러스인데, 몇 십 년 만에 너무나 크게, 그리고 너무나 폭력적인 버전으로 번져서 경악을 할 수밖에 없고 대단히 우려되는 것입니다.

 

하루마다 새로운 경악스러운 뉴스들이 노트북 화면에서 뜹니다. 런던의 옥스퍼드 거리에서 목씨 성을 가진 싱가포르 젊은이가 백주대낮에 인종주의적 백인 불량배들에게 폭행 당해도 시내 한복판인 거기의 군중들이 수수방관했을 뿐이라는 뉴스를 봤을 때에 믿을까 말까 했는데, 그런 종류의 뉴스들이 계속 접수됩니다. 제가 특강차 자주 가곤 했던 런던 SOAS의 근처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인종주의적 폭력을 당했다, 독일의 어느 도시, 어느 도시 길거리에서 인종주의적 폭력과 폭언이 자행됐다, 이런 류의 뉴스들입니다. 심지어 전체 인구의 15%나 아세아계인 LA에서까지 반아세아 인종주의 사건이 보도됐습니다.

 

이런 광란을 은근히 - 그리고 가끔은 거의 노골적으로 - 부추기는 것은 바로 보수 언론들입니다. 한 미국의 보수 일간지가 중국을 '아세아의 병부'라고 불러 중국 정부의 거센 항의를 야기시키고, 또 한 프랑스 일간지가 '황색 질병'과 같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표현을 썼습니다. 상당수 방송사들은 애당초부터 신종 바이러스가 마치 '아세아의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매체들은 '아세아인''코로나'가 거의 동의어처럼 들리게끔 하는 배타주의 분위기를 사실상 키웠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최근 몇 십 년 간 구미권의 '대세'를 생각하면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이 대세란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대체로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동아세아 지역에 대해서는 구미권의 매체들은 대개 나름 '예의'를 지키는 태도를 취해온 바 있는데, 이건 이슬람권에 대한 훨씬 더 괄시적인 태도와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물론 저들이 '착해서' 여태까지의 인종주의적 폐습을 스스로 고쳤다기보다는 '상황'상 종래의 동아세아에 대한 인종주의적 접근을 - 적어도 공석에서 - 거두어야 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동아새아가 더 이상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 전체의 무역량에서 동아세아가 차지하는 몫은 이미 약 40% 정도이고, 중국 한 나라만 해도 세계 무역량의 15%를 독차지합니다. 세계 정보통신 상품 중에서는 '메이드 인 차이나'의 비율은 이미 25% 지났습니다. 지금 중국이 유럽 국가에 투자하는 것이고, 유럽 각국이 그 투자를 유치하느라 로비를 하는 형펀입니다. 이런 판국에 "아세아의 병부"와 같은 100년 전의 모욕적인 언사를 꺼내는 게 구미권의 지배층이 보기에도 사실 부적절한 것이죠. 무역이나 정보통신만입니까?

 

한국처럼 국산 영화들이 전체 국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영화 대국', 유럽에 하나도 없는 겁니다. '문화'로 자존심을 세워온 프랑스만 해도 국산 영화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해마다 왔다갔다하지만 대개 30~40% 정도죠. 지금 유럽인들이 한국에 가서 그 영화산업 '성공의 비결'을 배우는 형국이지요. 무슨 '우월감'을 가질 일이라곤 인제 없는 겁니다. 마음 아픈 이야기지만, 종전의 오리엔탈리즘적 언사들을 유럽 언론들이 그대로 사용하는 유일한 동북아 국가는 아마도 북조선일 것입니다. 무역, 투자 관계가 거의 없기에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이처럼 최근 약 20~30년동안 노골적인 인종주의는 서방권 언론에서 그래도 퇴조를 보여왔습니다. 길거리 폭력, 폭언 사건들도 물론 없어진 건 전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드물어졌습니다. 1970년에 노르웨이로 이민 온,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한 중국계 동료의 이야기로는, 그녀의 자녀들은 1970년대~1980년대 초반의 오슬로의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거의 매주 인종주의적 모욕을 듣고 맞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소송감이고 신문 기사감이지요. 이런 판에 '코로나' 사태가 계기가 되어 인종주의가 다시 물 위로 크게 올라온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시스템의 동요'라고 봅니다. 이제 멀지 않아 새로운 공황이 올 분위기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겁니다. 양극화로 체제에 대한 불만 수위가 크게 올라가고, '중도' 정당들이 힘을 잃어가는 대신에 극우든 급진으로 보이는 좌파든 반신자유주의적 색채가 확연한 정치인들이 뜹니다. 트럼프와 같은 극우 인종주의자가 샌더스와 같은 나름 신념 있는 좌파 개혁가가 맞붙고 있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특히 좌파적 급진주의 부흥의 가능성에 크게 우려하는 구미권의 주도층은, 은근슬쩍 그 '대항마'라고 생각되는 극우 인종주의를 지원하는 편입니다. 여태까지 주요 피해자들은 중동 이슬람계나 아프리카 출신의 '불법 체류자' 등이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동아세아인까지 우파의 인종주의적 공격 대상에 포함된 셈이 되는 것이죠.

 

사실 30년대처럼 우파가 좌파를 꺽고 정국의 우위를 잡기 위해 인종주의적 언사를 써대는 판이지요. , 30년대에 그게 반유대주의이었다면 인젠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이나 동아세아인들을 '코로나바이러스' 동의어로 보는 태도입니다. 구미권의 좌파가 인종주의 부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결국 본인들의 궁극적 패배로 이어질 것입니다. 저의 또 하나의 걱정은, 구미권에서의 각종 인종주의적 광란들이 국내에서의 중국 혐오증이나 이슬람 혐오증을 간접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정말이지 혐오야말로 최악의 바이러스입니다. '코로나'보다 훨씬 피해 규모가 클 수 있는 전염병은 혐오병이지요....



(기사 등록 20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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