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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내가 지금 러시아에서 살았다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2. 17.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의학에서 '환상 통증'이라는 말은 있습니다. 예컨대 다리가 이미 절단되고 의족을 달고 사는데, 갑자기 '다리에서의 통증이 난다'는 느낌이 오는 것 같으면 이게 바로 환상 통증, 헛통증입니다. 다리는 이미 가고 없는데, 다리가 있었던 시절의 '기억'이야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것이죠. 이게 의학적인 '환상 통증'과 약간 엇비슷한데, 제가 가끔 가다가 저도 모르게 '내가 지금 러시아에서 살았으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지곤 합니다.

 

사실 현실성이 거의 없는 질문이죠. 러시아 여권을 반납한지 어언 19년이나 됐고, 제가 대한민국 여권으로 러시아를 여행할 때에는 90'체류'가 가능해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돈을 받고 특강 한 번 해도 그 전에 미리 비자를 받지 않았다면 그게 불법이 되지요. "살고자' 한다면 복잡한 수속을 밟아 장기 체류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데, 그리 된다 한들 '외국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본국인으로서 사는 것과 좀 다른 것입니다.

 

다 자본주의 일색으로 된 세상에 뭐 러시아라고 해도 우리보다 좀 가난하고 표현의 자유가 없다 해도 그냥 사람 똑같이 사는 데가 아니냐, 이렇게 물어볼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같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페북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곤란한'(?)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기 전에 열번 생각해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표피적인 차원이 아니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따져본다면 전체적인 저소득이나 정치 형태의 차이 이외에는 저 같은 학교 소속의 글쟁이들의 '자리매김'은 좀 다릅니다.

 

노르웨이 같은 북구 국가에서는 '학교'(아직까지?) 축적 체제로부터의 압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내지 거의 받지 않는 일종의 '안식처'입니다. 살만한 임금을 주니까 굳이 부업을 안해도 되고, 외부 재정 지원을 유치하지 않아도 (못해도) 옷을 벗을 일은 없습니다. 모든 종합대학들이 다 공립이다 보니 문 닫을 일도 없고... 그리고 먹물들의 소리가 그다지 사회적 반응이 없다는 현실 속에서 <계급투쟁>지 같은 좌파 신문에서 무슨 체제, 정권을 비판해도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은 없습니다. 사실 요즘 같이 미쳐가는 세상 치고 이 정도로 그나마 비교적 편안한 데가 아직도 있나? 라고 자문할 정도입니다.

 

러시아는요? 축적 체제의 압력을, 지식 분자들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한국 이상으로 받는 곳입니다. 일단 저임금이다 보니 부업은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 관광객들에게 관광 안내를 해주는, 그런 부업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러시아에 내왕한 '사장님'에게 훈계나 면박을 주고 싶은 마음을 열심히 참고 웃으면서 친절하게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칫밥을 먹고 알아서 낄 줄 알아야 되는 것이죠.

 

외부 지원이 없으면 임금만으로 꽤나 궁핍할 수 있는데, 그 만큼은 강의하는 시간에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북조선에 지나치게 동조적이다든가 등등 강의시의 '부적절한 발언'이 한국의 해당 기관에 잘못 알려지면, 또 박근혜 같은 대통령이 취임하는 즉시에 '블렉리스트'에 올라 지원 명단에서 얼마든지 빠질 수 있습니다. 관광객에게 웃어주고, 관광 업체 사장님에게 웃어주고 지원 기관 관계자들에게 웃어주고...

 

거기에다가 러시아 대학 교원의 대다수는 인제는 공무원이 아닌 법률상의 '계약 직원'들입니다. 정년 보장을 받는 경우는 드물고 정교수에 한해서 가능합니다. 흔치는 않지만, 조교수나 부교수는 '계약 기간 만료에 따라서' 해고될 수도 있죠. 윗사람에게 미워보이면요. "정치적 부담", 여기에서 굳이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하도 자명한 일이니까요. 모스크바의 명문 학교인 고등경제대학은 최근에는 교원들에게 분석적 맥락 이외의 일체 '정치발언'들을 정식 금지 (?)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도 끽소리를 하지 못하는 판이니까요....

 

이리 눈치 보고 저리 눈치 보고, 특히 시간 강사 시절에 궁핍하고, 보수적인 '원로'들을 의식해서라도 정치적 발언의 순위를 알아서 좀 조절하고.... '국가'보다 권위주의적 요소가 강한 '사회'가 더 두려운 것이지만, 한국 학계에서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죠. 둘의 차이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권력 사회""부력 사회"의 차이입니다. 국가관료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에서는 ''보다 주로 국가안보기관 출신의 카르텔이 쥐고 있는 '권력'은 훨씬 더 위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자본은 국가의 '지휘감독'을 받는 거고 언제든지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죠. 창업이나 재벌에서의 취직보다는 국가보안기관에 입사해서 승진하는 것은 훨씬 더 커다란 '출세'로 통하고요.

 

이와 반대로 한국 국가공무원의 꿈은, 퇴직하고 본인이 직무상 관계를 맺었던 업체에서 다시 취직하는 것입니다. 삼성 "회장님"이 아무리 재판중이라 해도 대통령이 그를 자꾸 찾아가는 곳은 한국이죠. 한국 같은 신자유주의적 '부력 사회'의 비공식적인 서열상으로는 5년짜리 대통령은 삼성의 3대 주인보다는 비교할 것없이 훨씬 낮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강남 중상층에 속하지 않는 연구자가 한국 학계에 진입하면서 가장 아프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학계를 이미 거의 장악한 강남족들의 안하무인 헤게모니의 오만함 같은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다른 것보다 국가의 "너무나 잘 보이는" (?) 손은 아프게 다가올 수 있죠. 정치적 '문제' (?)를 일으키면 문자 그대로, 축자적으로 아주아주 아프게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제가 한국에서 살아도 축적 체제의 무게를 매일 같이 느껴 마음이 늘 많이 아팠을 것 같고, 러시아에서는 더더욱 더 아마도 거의 일상적으로 자기혐오와 공포, 절망 상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은 과연 어떻게 되나요? 그러다가 뭔가가 꺾여 인간이 정신적으로 파괴될 수도 있고, 그냥 압박과 예속, 불확실성 등에 익숙해져 '단련'될 수도 있습니다. 또 압박이 심각하고 늘 실감되는 사회에서야말로 현인이나 혁명가들이 등장될 수도 있는 것이죠. 사실 감옥 같은 나라에서야말로 체르느세비스키나 톨스토이, 레닌 같은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편안한 북구를 선택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참 인간'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을 종종 할 수 있는 '여유', 편안한 북구가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기사 등록 20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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