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같은 세상에 '운동권'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지만, (한국) 자본주의에 다소 비판적인 진보정당 당원과 사회운동가, 활동가 등을 '운동권'이라고 그래도 범칭하자면 그들 사이에 한 가지 아주 불편한, 많은 경우에는 거론하기가 꺼려지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적'들을, '운동'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봐야 하는가 라는 대목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소주제는 분명 '북조선'에 대한 시각일 것입니다. NL과 PD 양 진영을 갈라놓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수많은 분열의 명분이 된 주제니까요.
그런데 요즘 중국과 이란에서 대대적인 민중 운동에 대한 잔혹 진압 사태들이 벌어져 그들에 대한 태도 역시 '운동권'의 고심거리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일면으로는 (남한과 달리) 미군기지 없는, 미군 기지가 없을뿐더러 미국과 현재에도 몇 종의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우리 적의 적"이지만, 일면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도 (더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 같지도 않고, 권력자들의 민중에 대한 잔혹성 역시 (특히 이란에서의 민중운동 탄압의 경우) 아예 1980년의 광주를 방불케 할 정도고...
아무리 저들이 미국의 패권 야심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들, 우리로서 그쪽 권력자/제도권을 가깝게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는, '운동권' 주류에서는 지배적인 듯합니다. 한데 한국진보연대의 '솔레이마니 장군 추도' 이란 대사관 방문 등으로 봐도, 다르게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대원칙'을 세울 수 있을는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내 적의 적"과 동상이몽의 동맹을 맺는 경우들이야 역사 책에서는 거의 꼭지마다 있습니다. 쏘련과 서방 부르주아 민주국가들의 일시적인 반파쇼 연대부터 시작해서 말입니다. 한국사에서도 신간회로 시작된 '좌우 합작'의 시도들을 열거하려면 몇 권의 단행본이 되겠죠? 일제의 '적'이 되는 이상, 많은 좌파들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손잡아 '불편한 동거'를 할 자세는 돼 있었습니다(코민테른의 입장이기도 했고요).
덜 알려진, 그러나 꽤 재미있는 경우들도 있지요. 1961년 박정희 군사 정변 이후에는 나중에 의문사를 당한 장준하 선생은 처음에는 군부 정변 세력들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 유창한 영어를 무기로 삼아 그들과 미국 대사관, CIA쪽 사이의 "관계"까지 막후에서 만들어줄 정도이었습니다. 제1,2공 시절 국가 관료들의 부패, 무능의 정도가 하도 높아 조국 근대화를 갈망했던 근대주의자 장준하가 그들에게 절망한 나머지 한 때에 정치군인들을 '적의 적'이라고 생각했었죠.
아니면, 이미 다들 까먹었지만, 한 때의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동거' 역시 같은 논리 선상이었습니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불편한 동거'는 아무도 그대로 믿지 않았던 장 선생의 '실족사'로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소련과 미-영-불의 '동상이몽'은 파쇼 독일에 대한 승리의 기반이 되고, 김대중과 충청도 세력들의 일시적 동맹은 한국 리버럴들의 제도권에서의 정치적 입장 강화에 도움됐다고도 볼 여지가 있죠.
그러니 '적의 적과의 동침' (?) 종종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런 '통일전선'(?)이 성공되자면 한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나'와 '적의 적' 사이에 '차이'보다 '공통 분모'가 그래도 좀 더 커야 한다는 것이죠. 스탈린과 루즈벨트는 아무리 이념과 이해가 달랐다 해도, 히틀러에 위협을 느끼는 것부터 둘 다 이념적으로 계몽주의의 후예이었다는 점까지 그래도 서로 중첩됐습니다. 전라도에 기반을 둔 리버럴들과 충청도 계통의 보수주의자들이 똑같이 영남 패권을 상대화시키고자 했고요. 그런 '공통 분모'가 없을 때에는 '적의 적'에 대해 가깝게 느끼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탈레반의 대미 성전(?)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한국 '운동권'에서 탈레반에 대해 그다지 가깝게 느끼지 않았듯이요.
그렇다면 한국 '운동권'과 미국의 지정학적인 라이벌인 중-러-이 등 사이에서는 과연 '공통 분모'는 어느 정도 있을까요? 우선 제 답부터 내놓겠습니다. '반제' 지향 이외에는 공통 분모는 그다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중-러-이의 현재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반제, 반봉건 혁명들의 '계통'을 이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 자신들의 '영향권 구축' 등 본인들의 지정학적인 이해관계도 있고 해서 지금 그들이 미국의 '독주'에 맞서서 '다극적 세계질서'를 주장하는 것이고, 그런 질서 속에서는 한반도 평화나 중립화, 주권 회복이 좀 더 쉬우리라고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적의 적인' 그들에 대해서는 '동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만, 딱 여기까지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라 하더라도 한 가지 단서를 붙여야 합니다. 중-러-이의 제국주의는 분명히 미 제국주의에 비해 '국지적'이며 소규모이긴 하지만, 중국의 내부 식민지라고 할 신강이나 신장, 이란의 주니어 파트너가 된 이라크, 러시아 경제를 위한 '인력' 공급자가 된 키르기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는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인다는 단서입니다. 한국으로부터는 아주 '작은' 걸로 보일 수 있는 중-러-이의 '주먹'은, 거기에선 훨씬 커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반제 지향 이외에는 중-러-이의 사회-경제 구조에서는 '운동권' 입장에서 바람직하게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발견하기란,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네, 중국의 공기업들이 GNP의 40% 정도 담당하고, 러시아 공기업 등 공공부문은 고용의 거의 40%를 담당합니다. 중-러-이에서는 관료들이 분명 자본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산자유주의적 '주주 자본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국가관료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비해 사회에 덜 파괴적일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돼 있는 모든 문제적 요소들은 거기에도 다 있는 것이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서방측에 비해 오히려 더 심각할 수도 있고요.
결론적으로 일언이폐지하자면... 관료 자본주의 국가들이 미 패권주의에 정당한 저항을 벌일 때에, 그 저항 행위 자체를 지지할 수 있다 해도 그 집권 세력들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들이 본인들의 발언권이 더 강화되고 본인들의 영향권이 공인될 수 있는 '다극적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넘어서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극적 세계'야 한반도인의 입장에서는 더 바람직할 수 있지만, '동상'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고 나머지는 '이몽'일 겁니다. 가면 갈수록 각종의 위기들이 더 심하게 중첩되어가는 암흑 같은 오늘날 세계에서는 '반미'를 외치는 국가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동감'하는 것이 쉽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고 평가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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