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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한반도 평화, 다시 멀어질 것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0. 1. 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202014일에 독일, 백림의 '자유대학'에서 구쏘련 문서로 본 조선(한국) 전쟁의 모습에 대해 특강할 일이 있어 최근 며칠간 그 문서집을 다시 쭈욱 읽어봤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 모택동과 팽덕회, 그리고 스탈린 내지 주북 쏘련 대사(슈트코브, 그리고 그 후임으로는 라주바예브) 등이 주고 받은 편지와 보고서, 요청서 등등입니다. 그 문서집을 읽으면 환히 딱 보이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1년 봄부터 확연해진 '종전' 가능성, 즉 정전 협상의 가능성에 대한 김일성-박헌영과 모택동, 그리고 스탈린의 '입장차'입니다.

 

처음에는 전쟁 발발을 주도한 것은 바로 김일성이었지만, 속전속결이 불가능하고 미 공군 융단폭격으로 북조선이 거의 초토화 상태가 되자 그의 태도도 바뀝니다. 1951년 봄부터 오히려 그와 박헌영이 쏘련 대사를 상대로 해서 '정전협상 시작하자'고 로비를 합니다. 그들보다 모택동의 사정은 덜 딱했지만, 크게 봐서는 딱한 게 마찬가지이었습니다. "항미원조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선에서의 전쟁은 1951년 중국 국가 예산의 32%나 잡아먹었습니다. 종전 없이 경제부흥에 착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모택동은, 1951년 봄 시점에 "앞으로 약 2년 정도 더 전쟁하고 중국군 손실 약 30만명을 감수해야 한다"고 내다보고 있었지만 가능만 하면 "빠른 종전"을 지지했습니다.

 

김일성은 가장 초조했고 모택동도 역시 "평화 회복"을 외쳤지만, 스탈린은 가장 여유만만했습니다. 쏘련의 전후 부흥은 이미 어느 정도 됐고, 쏘련군이 (공군 이외)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고, 중국-북조선군에게 공급되는 무기도 "무상"이 아니고 "외상거래", 제 값을 받고 파는 것이었으니까... 쏘련은 전쟁 지속에 잃을 게 없었습니다. 19516월에 만주의 당서기 고강과 김일성 등이 스탈린을 겨우 설득해 정전 협상 개시에 대한 스탈린의 '결재'를 받았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판문점 협상이 완결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전시특수로 경제 호황이 지속됐던 미국도 스탈린 이상으로 전쟁을 계속해서 잃을 게 없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강약의 차이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결정짓습니다. 1950년대 초반의 전쟁 상황에서 제일 약자이었던 북한은 평화협상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최고 강자이었던 미-쏘는 가장 소극적이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한반도 상황에서도 '강약의 차이'가 가져다준 전쟁과 평화에 대한 태도의 차이 역시 뚜렷했습니다. 북조선이 상대적 강자이었던 1960년대만 해도 북조선 지도층에 '호전성'이 없지 않았습니다. 19681월 청와대 습격의 시도나 그 해 삼척지역 '해방구' 설치 시도 등등을 봐도 알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러다가 1970년부터 역학 관계의 역전이 시작되고 1990년쯤에 그 역전이 완결됐습니다. 1970년에 중-미의 "조심스러운 해빙"이 시작됐는데, 19722월 닉슨 미 대통령의 북경 방문, 모택동 알현 (?)으로 본격화된 것이죠.

 

사실 닉슨과 모택동이 악수한 그 순간부터는 김일성처럼 똑똑한 전략가는 "남조선 무력 해방"의 모든 계획을 파기해야 한다고 이미 마음 속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중국군이 개입해도 한반도 남반부의 미국 지원을 받는 친미 정권을 깨뜨릴 수 없었던 것이지만, 중국군 개입 없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니 그 해 이후락과 '평화 통일'을 논했을 때에 '무력통일'의 포기는 아마도 김일성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에는, 쏘련이 남한과 수교하고 중국도 역시 대남 수교 준비에 착수한 상황 속에서, 이미 세계적 규모의 제조업 국가가 된 남한의 '위상 변회'를 볼 수 있었던 북한 지도부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대외정책 방침을 정해놓았습니다.

 

이 기본 방침은 간단합니다. 강자의 외교는 대개 어떤 '팽창', 세력권 확대 등을 꾀합니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대표적이지만, 사실 남한의 동남아에 대한 투자 공세 역시 "팽창 지향적" 대외관계의 사례죠. 그러나 약자의 외교는 오로지 '생존'을 꾀합니다. 그게 바로 1990년 이후 북조선 지도층의 유일무이한 진정한 목표죠.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책은 세계체제의 정식 편입입니다. 평양에 미, 일 대사관이 세워지고, , 일의 투자들이 들어오고 남한과의 중국-대만식 발전지향적 경협-평화공존 관계가 잡히기만 하면 궁극적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핵을 폐기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제국주의 외세"들이 정식 편입을 승락해주지 않으면 차선책은 바로 '/미사일'입니다.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할 만한 자금이 어차피 없는 상황에서는 사실 핵개발이야말로 가장 '저렴한' 안보 '보험카드'인 셈이죠. 최악의 경우에는 생존을 위해서 "제국주의 렬강"들과의 무기한 대립도 각오하고 있는 것이지요. , 각오를 한다 해도 절대 선호하지 않습니다. 선호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최선책, 즉 전면 정식 '세계체제 편입'입니다. 이런 편입이 평화를 의미하는 이상, 북한의 외교 정책이 '평화 지향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약자는 본래 평화 편이 되기가 가장 쉽죠. 그리고 김일성 말년에 정해지고 김일성과 방북 중의 카터 미 전 대통령의 악수를 통해 가시화된 이 방침은 이미 지난 거의 30년간 크게 달라진 일은 없었습니다. 북조선은 다른 걸 몰라도 일관성이 대단한 체제죠.

 

이 방침을, 김일성과 닮았다는 것을 가장 큰 상징자본으로 삼은 김정은은 가장 전형적으로 실시해온 것입니다. 그는 트럼프와의 협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해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아예 평양에서 아예 반미 선전 포스터들도 치울 정도로 "진심"을 보였습니다. 적폐 정권의 대북 도발 행위(북조선 식당 여종업원들의 사실상의 탈북 강요, 그리고 남한에서의 억류 등) 같은 문제들이 해걸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대남 정상회담 등 '평화 움직임'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약자인 만큼 '평화'에 대한 상당한 지향성을 보인 것이죠. 그러나 지금까지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습니다.

 

군부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민주당의 공격에 시달리는 트럼프는 군부의 요구대로 "세계체제 편입"을 약속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계속 '백기 항복', 일방전인 무장 해제부터 요구하고, 남한의 문재인 정권은 충분한 독자적인 움직임들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정권의 핵심들은 내심 남북 밀월의 지속, 심화를 원할 수도 있지만, 미국의 '눈치'를 김대중이나 노무현 시절보다 차라리 '' 보는 형펀입니다. 북조선은 금년말까지 기다렸다가 대미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다시 대립 모드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지금 경고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아쉽지만, 어쩌면 이 경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트럼프도 문재인도 결국 펜타곤의 대북 '압박', 투항 요구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결과죠.

 

잘못하면 우리가 다시 한번 평화 시스템 정착의 기회를 지금 놓칠 수 있습니다. 미국 내부 정치에 한반도인들이 그다지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한국 시민 사회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힘차게, 크게, 정열적으로 '평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대북제재, 대북 압박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바로 북조선 주민들이지만, 간접적으로, 평화가 멀어지고 병영국가 체제가 지속되는 이상 한반도인 모두 다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다시 전운이 감돌 수 있는 이 순간에야말로 '평화' 의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필요합니다.

 


(기사 등록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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