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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피치자의 불안, 지배자의 불안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2. 18.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산다." 공포, , 두려움 등은 인류만큼 오래된 것입니다. 인간은 여타의 동물에 비해서는 "미래"에 대한 의식이 비교적 뚜렷한 편입니다. 본인이 꼭 언젠가 죽을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물 중의 하나는 바로 인간이죠. 인간에게 생존 본능이 내재돼 있는 만큼 미래에 대한 '의식'은 곧바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됩니다.

 

일단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 정도나, 질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사별에 대한 공포감 등은, 강약의 차는 있어도 대다수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죽음과 질병,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이나 사랑하는 이의 질병 등과 같은 "기본적인 불안증" 이외의 공포, 불안, 우려 사항들은 각 지역이나 인간 집단의 "상황"에 따라 왔다갔다하지요. 그래서 특정 사회를 이해하자면 그 사회의 불안이나 공포를 읽어보는 것은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에게 "과거의 당신의 제일 큰 공포 대상이 무엇이었느냐" 불어보면 아마도 이런 답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1997년 초반까지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거기에서 쏘련의 망국 이후엔 제일 큰 불안은 본인과 일가친척 등의 신병의 안전이었습니다. 1990년대 러시아의 살인률은 10만명당 30~40명 정도, 거의 중남미 수준이었거든요.

 

밤에 창문에서 총소리가 종종 들리고, 제 일가 친척 중에서 강도 조직에 잡혀가서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공포는 아마도 1950년대 이후로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겠죠? 지금도 아동 유괴범 등에 대한 경각심의 정도는 서울은 예컨대 오슬로보다 훨씬 높긴 하지만요.

 

두번째로 큰 공포는, 혹시나 군에 끌려가면 얼차려 등 각종 잔혹 행위를 당하고 이런저런 수모를 당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공포증은 2000년대 이전의 대다수 한국 남성들과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군대는 신체적 폭력보다 "수모", 즉 정신적 폭력 차원에서 더 위험하겠지만, 위계질서에 떠르는 정신적 폭력 (폭언, 면박, 불친절한 명령투 등등)이 하도 만연한 사회인지라 군대는 상당수의 기업 등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라기보다는 "조직 생활"이 주는 각종의 스트레스들이 전체적으로 불안, 공포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론조사들의 결과를 보면 "조직 생활 스트레스"가 가장 큰 불안, 공포 요소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온갖 권력 중독증 환자, 양아치 같은 상사나 선배 등등에게 복종하고, 때로는 굽신거려야 하는 것은 그저 미세먼지차람 일상의 "불가피한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짜증이야 나지만, "공포감"까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두려워하는 부분은? 나쁜 직장이지만 (직장 만족도는 한국에서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그 직장마저도 잃는 것은 한국인의 가장 보편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직 공포를, 70%의 직장인들이 느낀다고 합디다.

 

반대로, 직장에서의 "갈등 관계" (, 각종의 상사 갑질이나 진상 고객 등등)를 불안을 느껴야 하는 사항으로 뽑는 것은 6% 정도입니다. 이외에는 직장이 있어도 하기가 너무나 어려운 노후 준비 같은 것이 직장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부분이죠. 한국인에 비해서는 미국인들이 훨씬 더 언론에 강하게 세뇌되는 것을, 불안/공포 관련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 중에서는 "북한의 남침"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한데 테러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미국인의 비율은(38%), 개인적 파산을 두려워하는 미국인의 비율 (37%)에 비해 약간 더 높은 겁니다.

 

통계적으로 테러를 당할 확률은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훨씬 더 낮은데 말씀이지요. 한데 언론들이 매일같이 "테러"를 거론하다보면 이게 큰 위협이라고 착각하기가 쉬운 것이죠. , 60%의 미국인들은 공직자들의 부패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부패 지수는 한국이 더 높을 수도 있는데, 직장에서의 "갈등"과 마찬가지로 각종 "떡검사"들도 그저 나쁜 공기처럼 일상의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두려움 내지 공포, 불안의 대상보다는 짜증이 나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약자들은 "시장"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실직을 두려워하고, 실직되어 모기지론 변제에 실패해 집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파산을 두려워하고, 용돈 수준밖에 안 되는 연금으로 살아야 할 노후를 두려워하고.... 그러면 강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요? 약자들의 두려움은 서울에 가든 뉴욕에 가든 모스크바에 가든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서울에서는 "테러리즘"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다 엇비슷하지만, 강자 집단들은 또 다릅니다. 미국의 주요 두뇌집단이나 스트레트포르("민간 CIA"라는 별칭을 가진 안보, 전략 컨설턴트 회사)의 보고서를 보면, 미국 지배층을 대변하는 두뇌들은....그렇게까지 크게 두려워하는 건 없습니다.

 

-러와의 전략 경쟁은 그들에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긴 하지만, 설령 (그럴 가능성은 당장 높지 않지만) 세계 패권, 서구와 한-일에 대한 군사적 콘트롤 같은 걸 빼앗긴다 해도...미국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무역 의존도는 20% 안팎이거든요. 수출로 따지면 미국의 수출 의존도는 8% 정도지요. , 세계 패권과 함께 일부 해외 시장에서의 우월적 위치, 예컨대 한국에 무기를 강매할 수 있는 위치 등을 잃어도 미국 자본주의는 충분히 계속 돌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지정학적 틈새라고 할 북미에서는 미국에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없지요.

 

미국의 지배자들은 일단 자신만만합니다. 세계 패권을 혹은 상실해도 저들의 핵심적 이해관계들은 건재할 것이죠. 그런데 한국의 지배자들은 거기에 비해서는 불안의 정도는 좀 크지요. 물론 "북한 위협" 따위는 아닙니다. 수출 의존도 37.5%인 나라에서는 제일 큰 불안은 해외 시장의 상태, 그리고 해외 시장에의 접근입니다. 물론 독일의 경우엔 수출의존도는 아예 39%긴 하지만, 독일 경제의 종속적 주변부가 다 된 유럽연합 같은 "지역 소속"이 한국의 경우엔 없지요.

 

한국의 주된 시장은 중화권이고 거기에의 접근은 정치적 문제입니다. 거기에다가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를 일본이 있고, 동남아시아에서의 한국 기업의 투자를 어떤 "보이는 손"이 보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고... 미국이 보호세 갈취범처럼 방위비 높인다 해도 한국의 광의의 지배층이 "그래도" 미국에 매달려보려는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이 "심층의 불안"에 있습니다. 미국이나 예컨대 독일의 지배자들에 비하면 한국 지배자들의 지정학적 불안 지수가 훨 높은 것이죠.

 

만약 남북 관계가 정말로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면 지정학적 불안의 문제를 약간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북한이 같이 힘을 합치면 그 협상력도 배가되니까요. 그런데 인제 남북한 관계 개선의 기회도, 미국의 눈치만 계속 봐온 한국 정부의 태도 등으로 말미암아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음 아픈 부분이죠....



(기사 등록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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