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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사회변혁의 전략 논쟁2 - 사회주의로 가는 어떤 길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0. 18.

 

[근래 미국 좌파진영에서는 사회변혁의 전략에 대한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차별, 인종차별, 환경파괴 등에 맞서는 다양한 운동들의 성장, 노동자 파업 물결의 부활, 버니 샌더스와 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의 급부상 등이 이런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치열한 논쟁 속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레닌주의적 사회변혁 전략의 타당성 등도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글들을 계속 번역, 소개해 나갈 예정이다. 이번에는 올해 미국에서 열린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컨퍼런스에 벌어진 논의를 지면으로 옮긴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발표자 중에 한 명인 에릭 블랑(Eric Blanc)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고, 찰리 포스트(Charlie Post)는 미국의 극좌파 단체인 연대’(Solidarity)에서 오래동안 활동해온 사회주의자이며 학자이다. 이것은 이 기사의 전반부이다. 조만간 후반부도 번역 소개할 예정이다.(번역 - 두견)]

 

출처:https://www.jacobinmag.com/2019/07/socialism-revolution-electoral-politics-mass-action


1917년 러시아 혁명 



미국에서 사회주의 정치의 격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특히 한 가지 이슈는 레닌주의적 비판자들과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을 계속해서 갈라놓고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지배적 제도들이 사회주의 변혁에 이용될 수 있을까, 아니면 기존 국가 전체를 뒤집을 필요가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미리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 그리고 자본주의와의 단절은 먼 전망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 이 질문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학술적 연습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을 걸을 것인지 여부는 오늘날 활동가들이 선거 정치, 노동 운동, 조직 건설과 어떻게 관련맺을 것인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음은 얼마전 뉴욕에서 열린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 - 역사유물론 컨퍼런스'에서 에릭 블랑(Eric Blanc)과 찰리 포스트(Charlie Post)가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논쟁한 내용을 편집한 기록이다.

 

에릭 블랑: 


나는 우리가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우선 노동자들은 현존하는 국가를 단순히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이용할 수가 없다. 어떤 반자본주의적 기획이라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경제를 둘러싼 대기업 패권과 맞서야 할 것이고, 군부는 물론 국가 최고 관료조직과도 맞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힘을 깨기 위한 혁명이 필요하다.

 

성공하기 위해서, 그 혁명은 의회 밖의 대중행동과 단절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로 가는 순수한 선거적 길은 없다. 우리는 오늘날뿐아니라 앞으로도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치는 선거 개입과 아래로부터의 집단 행동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가 동의하는 또 다른 것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의 장애물은 외부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안에도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노동자들의 조직이 관료화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의 지도부는 현재의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마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지막 한 가지는 우리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도 그들의 전략이 최고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바탕으로 정치적 도전을 해야 한다.

 

우리 사이의 주된 차이점은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어떻게 그런 혁명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와 관련있다. 이곳의 조건은 의회주의 국가도, 정치적 민주주의의 전통도 없었던 러시아 1917년의 조건과는 분명히 다르다.

 

나는 여기서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레닌주의적 관점에 대해 논쟁하고 싶다. 이 개념에 따르면, 어느 시점에는 깊은 위기와 이중권력 기관(노동자 평의회 같은)의 출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이중권력 기관들은 반란을 통해 기존 국가 전체를 전복시키고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나 그와 유사한 형태의 조직의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나의 요점은 전통적인 레닌주의자들이 소수의 폭력을 옹호하거나 무장에 대한 준비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반란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기존의 권위나 정부에 맞서 무장 봉기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중권력 전략은 불가피하게 반란 전략이 될 것이다.

 

핵심 문제는 당신이 사회주의 혁명은 국가 전체에 맞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와 행정부 등 현재 국가의 일부 핵심 기관들이 노동계급의 반자본주의적인 파열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고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다. 내가 여기서 만들고 싶은 사건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논거이다.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와 다르며 심지어 살바도르 아옌데 같은 사람의 민주적 사회주의와도 다르다.

 

이 전략의 핵심은 의회민주주의의 조건에서 사회주의로의 길은 노동자 정당의 통치를 위한 보편적인 참정권 선거를 통과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부는 아래로부터 투쟁과 결합하여 기존 국가의 민주화와 반자본주의적 경제변화를 추진하며 지배계급의 소수파가 선출된 정부의 반민주적 파괴와 혁명적 과정에 의존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이러한 반동을 물리치는 것은, 우리가 선출한 대표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대중행동의 힘을 통해서, 경제와 국가에 대한 자본주의적 통제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단지 노동자 정당을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주의에 도달하기에 충분치 않지만, 그러한 선거에서 얻을 수 있는 지렛대가 없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중적 정당성이나 사회적 힘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시에, 정치적 과정이 중간에 탈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또한 대중파업과 강한 의회 바깥의 투쟁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보편적 참정권에 의해 선출되는 대표 기관과 (대체보다는) 결합될 수 있는 어떤 식이든 아래로부터 출현하는 이중권력 형태의 제도도 매우 필요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과정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적합한 이중권력/ 반란 전략을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보편적 참정권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짜르 전제정치보다 훨씬 더 많은 대중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찰리와 레닌주의자들이 내세웠던 주장에 맞서는 주된 논거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조건에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일관되게 그것을 주장하더라도, 노동자들 대다수가 의회 민주주의를 노동자 평의회같은 것으로 교체하는 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과거와 현재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역사적 경험은,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현존하는 정치적 민주주의 제도를 그들의 이익을 더욱 증진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하려고 할 것이란 것이다.

 

지난 150년을 살펴보면, 어려운 현실은 의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고 권력을 이중권력의 기관에 넣으려고 하면서 승리한 투쟁은 없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요점은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변혁도 일어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주적 사회주의와는 달리, 반란적 접근은 의회체제 하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지경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전략적 도전을 제기한다.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우리의 전략을 그렇게 가능성이 적은 어떤 것에 고정시키는 것이 정말 타당한가? 물론 정치의 세계에서는 온갖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비전을 성공 가능성이 가장 낮은 시나리오에 근거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혁명적 좌파의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 지도자가 레닌주의적 접근에 확고히 전념했더라면, 노동자들이 이미 권력을 쟁취했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나는 그것이 사실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의회주의 통치와 보편적인 참정권에 대한 노동계급의 강력한 지지에 대해 고찰하는데 실패한다. 둘째, 그것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과소평가한다. 사회민주주의의 모순을 피할 수 있거나, 통치에 대한 도전을 흡수하거나 억누르는 자본가(및 그 대리인들)의 거대한 권력을 쉽게 극복하할 수 있는 한 가지 빠른 비밀 해결책, 틀림없는 전략은 없다.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전략이 우리를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가? 우리는 대규모 노동계급의 권력을 구축하고 국가를 변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길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언제나 반자본주의적인 파열의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주시하면서 말이다.

 

나는 레닌주의 좌파의 많은 수가 대다수의 노동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선거 정치에 대한 접근법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장애들에 효과적으로 맞서고 그것을 극복할 능력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의 2015년과 같은 그런 새로운 위기가 닥쳤을 때, 이번에는 오늘날의 진정한 급진좌파가 자본가들의 경제력, 최고 국가기구, 노동 관료 등 우리에게 닥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질 수 있도록, 현재의 반기득권 선거의 격동에 단호하게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지금 여기 미국에서 혁명적인 파열의 순간 가까이에 있지 않다. 오늘 토론의 당면 과제는 급진주의자들이 선거 무대를 경시하거나 기권하려는 경향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토론의 실질적 의미 중 하나는 우리가 선거 정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지, 급진주의자들이 좌파적 선전 캠페인에서 스스로 기권하거나 제한해야 하는지, 또는 우리가 버니 샌더스와 제레미 코빈과 같은 캠페인에 의해 제시된 기회를 충분히 움켜줘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일반화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해서 보다 비판적이고 덜 교조적인 접근법을 취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당 건설이나 민주당 투표 전술 사용과 같은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덜 독단적이면서 우리 앞에 있는 실제적 조건들과 씨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촉진제' 역할을 해주길 희망한다.


찰리 포스트:

 

먼저 에릭에게 뒤틀린 '레닌 대 카우츠키'를 일종의 코스프레에서 좀 더 실질적인 토론으로 옮겨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동의하는 많은 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급진적인 단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적어도 추상적인 면에서는 개혁주의의 사회적 토대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것은 단지 나쁜 이론의 산물이 아니라 노조, 의회주의 정당, 피억압자들의 사회운동 등에 존재하는 전업 상근관료에서 비롯한다. 이것은 우리를 내가 근본적인 의견 불일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끈다. 처음에 그것은 미묘한 의견차이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주의의 어떤 혁명적 변화도 선거 활동과 대규모의 강력한 사회운동의 결합을 수반한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는 에릭이 그것을 제기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토론을 제기하고 싶다. 나에게 문제는 우리가 선거 정치와 대중파업 같은 것에 동등한 비중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어느 하나에 다른 것보다 더 우선순위를 매겨야 하는가? 우리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는 선거 프로젝트와 역동적이고 강력하고 불연속적인 사회적 투쟁을 건설하는 동역학의 서로 매우 다른 논리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나로서는 민주적인 길 대 봉기적인 길의 문제가 아니다. 그 대신, 내가 옹호하는 입장은 자본주의 국가에 반하는 훨씬 더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통치를 구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것은 지역사회와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자신의 능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결정을 스스로 실제로 내리고 수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는 선출직 공직자 등에 대한 쉬운 소환 등을 수반할 것이다. 한 마디로 '평의회 국가'는 더 우월하고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견은 단순히 반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타도가 불연속적인 활동, 대규모 노동계급 투쟁, 우선 가장 중요하게는 대중파업, 그 밖에 자본주의 국가기구 핵심에 대한 급진적 구조조정(파괴 또는 분쇄)로 정점을 찍을 다른 형태의 대규모 단절적 투쟁의 물결을 요구하느냐의 여부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억압권력, 경찰, 군부, 그리고 국가관료들이 반자본주의 강령 시행의 핵심 장애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에릭이 내세우는 전략이 실제로 봉기의 필요성을 없애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선출직의 승리와 대중투쟁에 동등한 길을 줌으로써 자본주의 국가 핵심에서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그들을 파괴하고 보다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런 주장은 내가 <자코뱅>에 기고한 글을 당신이 읽어봤다면 익숙할 것이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노동자 정당, 카우츠키와 에릭이 구상하는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정당은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 전환에 전념하는 정당으로, 산업의 사적 지배를 넘어서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자본의 논리에 대한 급진적 돌파구의 필요라고 우리가 믿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위한 방아쇠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은 또한 투자 파업의 형태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저항뿐 아니라 기존 국가 내에서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캐나다 동지인 데이비드 캠필드가 "계급 투쟁 정부"라고 부른 것이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저항을 어떻게 다룰 수 있었을까?

 

그들은 우선 어떤 반자본주의적 조치의 실행에도 맞서는 선출되지 않은 종신적 국가관료들과 공무원들로부터의 수동적이거나 적극적인 저항 모두에 직면할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아마도 노동자들의 조직에 대한 탄압과 군사적 억압 기구의 쿠데타 가능성이라는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민중권력의 조직에 의해 지지받는 사회주의로의 의회적 길을 약속했던 칠레 아옌데 정권의 운명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대한 자본주의적 국가의 억압이라는 진짜 위험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나아가, 나는 발전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노동자의 과반수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이 이중권력이라는 생각에 열린 적이 없었다는 에릭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가능했던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몇몇 국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강경하고 좌파적인 정부의 선출이 현실적으로는 오늘날 자본주의와의 단절의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일단 정권을 잡으면 이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에릭의 전략을 일관되게 옹호하는 사람들은 "글쎄, 작업장이나 노동계급의 주변이웃에서 민중적 권력의 조직들이 그런 저항을 견제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 요점인데, 관료들과 군부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대중적이고 노동계급의 권력을 가진 이 조직들이 사실상 대체 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중권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혁명적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들 상부의 법적/의례적 명령들에 복종하는 것을 멈출 평범한 공공 피고용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급진적 노동자 정당의 수년간의 조직화(하급 공무원들을 조직하는 것과 군대 내부에서 조직하는 것)가 선행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의 구조적 논리와 결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당이라면 사실 노동자 평의회를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 국가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좌파 정부와 의회기구는 그대로 두더라도 실질적 권력은 공무원 관료기구와 군부의 손에서 노동계급과 대중적 권력기관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부가 이러한 전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긴축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끝나거나(프랑스의 미테랑과 그리스의 시리자가 그랬듯이) 잔인한 군사적 탄압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칠레에서 아옌데처럼).

 

지금, 현재와 같은 비혁명적 시기에도, 나는 우리의 의견 불일치가 당장의 전략과 전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날 에릭의 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내가 말한 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노조, 사회운동, 독립적 사회주의 선거운동 등과 같은 분야에서 정말 유익한 일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에 우선순위를 매길 것인가 아니면 선거를 넘어선 조직화를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질적 차이로 이어진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형태로든, 종류이든 민주당을 이용해 사회주의 정치를 준비하려는 시도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이라고 믿는다. 민주당은 정식의 책임성있는 당원권을 갖춘 회원 조직이 아니다. 그 대신 자본에 의해 전적으로 완전히 지배되는 철저한 선거기구다



(기사 등록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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