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재직하는 오슬로대학에는, 한국인으로서 아마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심각한 문제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법학부 교원 구인난입니다. 네, 여러분들이 오독한 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죠. 유자격자, 즉 노르웨이 국내법을 전공하는, 연구 경력이 있는 박사학위 소지자들 중에서는 법학부 교수 되려는 사람들이 하도 없어서 문제입니다. 만약 이게 법학부가 아니고 예컨대 수학부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러시아부터 한국까지, 준주변부 인재들 중에서는 아주아주 쉽게 적임자를 뽑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데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아무도 노르웨이 국내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기에 법학부로서는 문제 큽니다. 결국 지금 법학부가 구사하는 해결 방법은 바로 편법이죠. 원칙상 안 되지만, 법학부 교원들에게 임금을 편법적으로 높이는 것이죠. 신입 교원에게도 교원 치고 비교적 높은 초임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교원들에게도 임금인상을 대단히 많이 해줍니다. 안 그러면...바로 나가고 변호사가 되어 법학부 임금보다 몇배나 더 높은 소득을 올리겠죠. '교수'라는 직업의 명예? 노르웨이에는 그런 게 전무합니다. '교수'는 그냥 숙련공의 일종으로 인식되고 특별한 권위 따위를 띠지 않고 있죠.
반대로, 제가 가끔 만나는 제 아이 급우들의 학부형들과 '교원'이라는 직업을 수반하는 생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저를 좀 불쌍히 여기는 기색을 자주 발견하곤 했습니다. 보수는 배관공만도 못하는데 1년에 학회 참석 등으로 인한 외유 일수는 60~70일이라고? 그러면 몸이 너무 힘들지 않느냐, 만성적 여독에 시달리지 않느냐, 육아에 장애가 안 되느냐, 이런 질문을 계속 받곤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가 노르웨이의 3D 직종 중의 하나인 "대학교원업"에서 고생하고 있는 불쌍한 동구 출신의 이주 노동자인 셈입니다....
자본제 사회마다 당연히 사회적 위계서열이라는 게 있습니다. 노르웨이가 자본제 사회인 이상 당연히 노르웨이에도 각종의 서열들이 존재하죠. 예컨대 주로 백인/중산층 이상이 사는 오슬로 서부에는, 주로 이민자/노동계급이 사는 동부보다 기대수명부터 약 5살이 더 많죠.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자판기를 두들기는 인간들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간들보다 덜 아프고 더 오래 산다 이 이야기죠. 그런 것만 봐도 노르웨이 사회를 '사회주의'로 오인해서 안 된다는 생각부터 강하게 듭니다.
한데 오슬로와 그 주변에 '강남' 같은 중상층 위주의 동네들이 있다고 해서, 그 출신들이 명문대를 독식합니까? 그렇지 않죠. 명문대란 개념부터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모든 종합대학들이 다 공립이고 어느 대학을 나온들 본인의 장래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도 않습니다. 한국 같으면 서울대 출신들이 청와대 고위직이나 삼성 등 주요 재벌의 임원직에서 다 포진돼 있는데, 노르웨이의 삼성이라고 할 최대 재벌인 에퀴누르(국가가 지분의 약 70%를 소유하는 초대형 석유회사)에는 오슬로대 출신들은...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최고 경영자는 오슬로대와 관계없는 오슬로경영대학의 출신이고요. 오늘날의 (우파 연합) 내각에서도 오슬로대는 예컨대 베르겐대나 트럼셔대에 비해 더 많이 대표된 것도 전혀 아니고, 장차관의 출신대학이 어디인지 아무도 관심이 없기도 합니다. 어차피 이런 부분들이 정치나 인사 정책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강남이 있어도 8학군이라는 개념의 성립이 불가능한 것은 현재의 노르웨이입니다. 즉 서열이 있다 해도 그 모양은 한국과 몹시 다릅니다.
뭐가 가장 다를까요? 일단은 권력, 즉 사회적 '힘'의 분산이 많이 진행된 겁니다. 예컨대 제가 제 대학 총장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필요하면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할 수 있지만, 평상시에 총장이 누군지 관심도 없고 잘 몰라요. 학부장의 이름을 이제야, 몇 주 전에 알게 됐습니다. 저와 학부장이 같이 주노르웨이 한국 대사관의 초청을 받은 바 있기에, 그때 비로소 학부장의 이름을 알게 된 거죠. 총장도 학부장도 이름조차 모르면서 교원 일을 맡아볼 수 있는 이유는? 어차피 모든 중요한 일들을, 심지어 인사 (신임교원 임명)까지도 거의 다 최하 단위인 학과에서 다 결정하고 결재를 최후에, 형식적으로만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총장이나 학부장과 별 관계를 맺지 않고 잘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권력의 분산과 동시에 사회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평준화돼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명문대"와 같은 괴물의 출현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예방하고 있는 것이죠. 모든 대학에 지원을 균등히 함으로써요. 마찬가지로 공공의료 체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계속 유지되는 이상 의사들의 임금 수준은 지나치게 높아질 수가 없으며, <SKY캐슬>에서 볼 수 있는 "괴물 의대"의 출현도 어느 정도 막아놓을 수 있습니다. 결국 자본제 국가인 만큼 서열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권력의 분산과 정책적 평준화 등은 이 서열들을 약간 완화시킨 바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대한민국의 서열은 그냥 수직적인 직선입니다. <듀오> 따위의 결혼알선 업체들의 매칭 서비스 기준을 한 번 보시죠. 거기에서 이 수직적 직선의 기준들은 다 나옵니다. 대체로 부모의 재력이 본인의 화려한 SKY학력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고, SKY 학력을 바탕으로 해서 재벌 아니면 정부조직 아니면 학계에서 역시 일률적인 직선에 따라 서로 경쟁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려야 합니다. 참, 이 획일적인 '출세 루트' 시스템은, 한국에서 하도 상식적이라 누구나 당연시하지만, 여기 노르웨이 사람에게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업 준비하고 채점하느라 하루 8시간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하는 저 같은 사람보다는 제 이웃에서 사는 택시운전 기사 분은 훨씬 행복한 것이죠. 돈도 더 많이 벌고 맨날 해외 학회 참여하느라고 비행기 탈 필요도 없고, 그게 여기에서 생각하는 '행복'입니다. 대학교원을 한국에서 "교수님"이라고 존칭하고 높은 사람으로 여긴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로서는 집단 상상 속의 신분의 고저에 매달리면서 행복을 놓치는 사회는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노르웨이는 결코 이상 사회는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재산의 불평등부터 시작해서 은근한 인종적 편견까지. 자본제 사회로서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폐단들이 당연 다 있죠. 재산의 서열, 사는 동네의 지리적 서열도 당연 있고요. 한데. 노르웨이에 서열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서열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학의나 "C일보"의 색마 같은 주인 일가 따위의 괴물들을, 바로 이 서열이 키워낸 것이죠.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올라간, 내지 방 모씨처럼 이미 그 꼭대기에서 태어난 사람치고는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들은 극도로 드물어요. 괴물들을 퇴치하고 그 출현을 미연에 예방하자면 피라미드를 수평화시켜야 합니다. 대학 평준화부터 시작해서 의료의 공공화, 그리고 재분배 시스템을 통한 재산 격차의 억제... '헬조선'을 벗어나자면 이 길밖에 없죠.
(기사 등록 2019.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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