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세월호 5주기와 영화 <생일>
얼마전 영화 <생일>를 봤다. 반올림과 함께해온 인연 덕에 ‘재난 참사 및 산재 피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사회’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볼 수 있었다. 영화는 그런 비극을 겪는 당사자들의 감정, 기분, 일상이 어떨지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눈물이 너무 나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든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그런 것을 전혀 헤아리지 못할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그것을 공감하고 나누려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돼줄 수 있는지도 잘 이해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 끝나고 이어진 이야기마당이 더 중요했다.
세월호, 대구지하철, 춘천산사태, 삼성직업병, 태안화력 희생자 가족분들이 나와서 감상을 나눠주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거 같다는, 내가 아들과 같이 죽었거나 아들이 내 안에서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특히 시연 어머님은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우리 가족들은 지금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하셨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관심을 표시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감싸주는 것. 영화 속에서 수호 아버지가 공항직원에게 말하듯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작은 행동들을 절실히 기대하고 있고, 그것이 모이면 상처는 치유되고 사람은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4월이 이렇게 다시 왔고, 내가 사는 도봉 지역에서는 이번에도 함께 기억하고 행동하기 위한 준비에 모두들 정말 열심히셨다. 최선을 다하는 이 분들의 열정, 공감, 행동을 보면서 매번 감동받는다.
적폐세력은 요즘 현 정부를 ‘좌파독재’라고 하는데 정말 웃기는 말이다. 좌파독재 정부가 무슨 탄력근로제를 우선 추진한다는 말인가. 정말 좌파독재라면 미세먼지를 해결하기 위해 당장 모든 발전소, 오염산업, 공해기업들을 중단시켜 버릴 것이다.
그래도 적폐세력들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알만하다. 조선 방사장 성범죄 의혹이 다시 불거지고, 김학의가 국외 탈출을 하려다 실패하고, 조양호가 경영권을 위협받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처지와 미래를 떠올리는 것이다. 촛불과 정권교체 이후에 등장한 이런 상황이 못 견디게 싫을 것이고 과거가 그리울 것이다.
이런 변화는 윤지오씨처럼 끝까지 피해자를 잊지않고 고발해온 사람들 덕이다. 누군가가 쏘아올린 작은 공들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대 속에 눈덩이가 돼서 사회를 움직인 것이다. 도봉지역에서 내가 봐온 많은 사람들의 힘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결국은 세월호의 진실도 밝혀내고 말 것이다.
* 세월호참사 학살 책임자 처벌을 위한 5주기 국민 긴급 행동
* 세월호참사 5주기 전체 일정 안내
http://416act.net/notice/86026
● ‘낙태죄’에 맞선 투쟁이 거둔 역사적 전진
법률기관의 기본적 보수성과 종교적 근본주의 세력의 한국사회에서 여전한 영향력을 볼 때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 이후 다시 복기해보니,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6:3으로 폐지가 유지를 두 배 차로 누르고 있었고, 이것은 성별, 지역, 이념, 지지정당을 넘어서 다수였다.
여성, 소수자, 동맹 세력들의 오랜 투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것이 다시 세상을 앞으로 밀고나가고 있다는 게 다시 확인됐다. 이것은 국제적인 물결이고, 한국도 여기의 중요한 일부다.
한국은 여성들의 지위는 세계 최하위지만 여성들의 투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던 한 페미니스트의 지적이 생각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출산 파업)도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처럼 자생적이고 자율적이지만 강력하게 진행되면서 불필요한 폭력이나 피해는 최소화하며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를 뒤흔들면서 진행된 ‘파업’을 어디서 또 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강력한 노조나 혁명조직이 있어야지만 투쟁이 발전하고 승리할 수 있다’던 일부 좌파들의 반복된 이야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것은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권력과 자본이 수백 조의 비용과 (헛다리가 많았지만) 다양한 제도적 양보안을 고민하고 계속 내놓게 만들었다.
이번 전진이 특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생명(노동력)과 삶에 대한 지배계급과 국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삶을 생산, 유지하고 돌보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가장 핵심이고 중요한 것이다. 사회는 그것을 대부분 여성들에게 떠넘겨놓고 막상 어떤 결정권과 통제권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일들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타고난 자연의 섭리나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취급하고,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려는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불법 범죄자 취급해 왔다. 생명과 삶에 대한 통제권, 결정권을 소수 권력자들에게 남겨두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흔들리고 뒤집히기 시작했다. 어제 ‘합헌 의견’에 나온 문구들 (‘우리 모두 태아였다’, ‘우리조차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이 그런 변화에 대한 기존 권력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했다고 본다면 너무 과장일까.
두려움보다는, 자신들이 여성들에게 떠넘겨온 그런 부담과 고된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수행해온 사람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뿐 아니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게 옳다.
물론 소수 권력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또 ‘피임과 출산에 대한 남성들의 무책임함을 탓하지 말고 체제를 겨냥해 남녀가 단결하라’고 하는 분들이 있기에 말한다. 낙태 합법화의 성과와 여전한 고민을 담은 독일 영화 <24주>를 보면 그토록 자상하던 남편도 통제적 태도를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연대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여성의 발화를 불신하고, 가르치고, 통제하려하는 남성들의 변화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여성들이 처벌의 두려움이나 죄의식없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판결 소식을 들으며 바로 한 여성이 떠올랐다. 혼자 돌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임신중지를 위해 몇 번이나 다락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굴렀던 여성이다. 그래도 결국 태어난 그 아이가 몸이 아프거나, 불행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혼자 눈물흘렸다는 여성이다.
이제 다시 그 여성이 다락 위에서 몸을 던지기 전에 막막한 맘으로 내려다보던 세상을 떠올려본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 때보다 분명히 더 나아져 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아팠을 그때의 그 여성에게 지금이라도 다가가 손을 잡으며 절대로 당신의 탓과 잘못이 아니고, 당신 덕분에 우리가,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말해주고 싶다.
● ‘사회적 강간’과 ‘강간문화’
근래의 몇 가지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강간통념’과 ‘강간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줬다. 흉악한 낯선 남자가 폭행이나 협박을 통해 저지르는 것만이 강간이며, 보통 친밀한 관계에서 많은 남성들이 범하는 잘못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는 문화 말이다.
일부 좌파마저도 그런 태도를 보인다. 그 논리는 아주 전형적인데, 강간문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너무 과장된 단어와 개념이며, 강간을 저지르는 것은 일부 극소수 남성일뿐이며, 대다수 남성들은 권력도 잘못도 없으니, 여성들은 남성과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대표적으로 노동자연대 분들이 요즘 이런 주장을 열심히 펴고 있더라.)
이처럼 ‘강간문화’나 ‘사회적 강간’처럼 사회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그것을 해결하는데 집중하는 문제의식이 없으니 성폭력 사건에 직면해서도 단지 개인을 악마화해 꼬리 자르거나, 아니면 가해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식으로 해결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남는 건 조직보위다.
이런 좌파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분석할 때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일부 자본가 개인이 악마, 괴물이어서 문제가 아니고, 그런 소수의 개인들을 제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이다.
이처럼 계급과 노동착취를 분석할 때 나타나는 엄정한 태도가 젠더와 성적폭력을 접근할 때는 희미해진다. 대다수 남성은 문제가 없고 남성우월주의는 사회주의가 되면 점차 사라져갈 다소 유감스러운 태도쯤으로 취급된다.
민주노조를 적대하는 사회적 문화를 성토하며 ‘살인해고’라는 말로 노동자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없던 사람들이, 여성혐오 문화가 존재하며 ‘강간문화’라는 개념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표현하자는 것에는 거부감을 보인다.
하지만 성폭력과 강간은 결코 일부 괴물들이 저지르는 것도, 그들만 도려낸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레베카 솔닛은 ‘미디어와 대중문화 등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사회적 환경’을 강간문화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누구도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이다. ‘강간문화 측정 척도’로 보통 제시되는 다음 기준과 요소들을 살펴보자.
* 피해를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 만들기
* 피해 호소를 일단 불신하고 의심하는 분위기
*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가정하기
* 피해자가 가해자를 좋아했는지 따지기
* 피해자의 처신, 정신상태 등에서 원인을 찾기.
* 피해자만 그만하면 모두 괜찮을 것이라 말하기
* 피해자가 공동체 분열의 주범인 것처럼 말하기
* ‘거친 섹스’나 ‘나쁜 섹스’라고 순화하기.
*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억울함과 앞날을 더 걱정하기
* 무고를 당한 억울한 남성이 많다고 주장하기
과연 여기서 자유로운 공동체가 얼마나 될까. 소수 괴물이 아니라 이런 사회, 문화, 규범, 공동체에서 살아온 많은 남성들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런 남성들은 반쯤 얻어진 동의는 동의라고 생각하지만 반쯤 거절된 것은 강간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시즌4에서도 도넛은 자신이 한 것이 강간이라고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두깃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원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의 주장처럼 형법개정을 통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재구성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다. 피해자에게 계속 ‘왜 거부하지 않았는가’, ‘내심으로 동의한 거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하였는가’, ‘무엇을 근거로 동의했다고 봤는가’를 질문하며 화살을 돌려야 한다. 동의없는 성관계가 바로 강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사회적 규범과 문화, 법과 제도를 변화시켜 나갈 때 강간문화는 약화될 수 있고 남성과 좌파일수록 여기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연대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법의 남용과 부작용’부터 걱정하고, 일부 자본주의 선진국이나 유엔마저도 권고하는 이런 개선 방향에 부정적이면서 ‘남녀 프레임을 버리고 계급 프레임을 수용하라’고 계속 가르치려하니...
(기사 등록 2019.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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