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경사노위 참가, 불참 논쟁
경사노위 참가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먼저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정해진 정답과 원칙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면 토론은 필요없고, 그냥 그 원칙과 정답을 적용하면 된다. 실제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답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보인다. 참가를 주장하면 배신, 거부를 주장하면 꼴통이란 식으로 정해놓고 상대 말을 들어보지도 않는다.
양쪽 모두에서 일부 보이는 이런 벽같은 태도는 토론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리고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이 없다면 이런 문제에서 함께 더 나은 답을 찾기는 더 어렵다. 더구나 이건 구체적 상황과 주객관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전술 문제다.
지금의 경제, 정치, 사회적 상황, 정권의 성격과 태도, 대중의 정서가 어떠한지, 지난번과 어떤 차이와 변화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서 어떤 선택이 우리 편의 사기와 결속을 높이고, 더 효과적인 연대와 투쟁 건설에 도움이 될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랬을 때 지금 경제상황이 악화하면서 자본의 압박이 심하고, 문정부도 약속을 어기며 노동문제에서 후퇴하는 데, 참가로는 개악의 들러리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분명 설득력이 있다. 교섭에 발목잡히기보다 투쟁 건설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실제 중도자유주의적 문정부는 갈수록 ‘경제’에 강조점을 두고있고 ILO협약 비준, 전교조 법내화 등 기본적 문제도 해결않고 있다.
다만, 대중이 문정부과 박정부, 노사정위와 경사노위를 다르게 보므로 경사노위에 참가해 주장과 요구를 하다가, 문정부와 경사노위의 본질과 한계가 대중적으로 입증될 때 나와서 더 큰 명분과 지지 속에 싸우자는 것도 완전히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좌파에게 입증된 것과 대중에게 입증된 것을 혼동말라’던 옛말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선거나 의회를 통한 사회변화가 근본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않는 좌파라도, 부차적인 수단으로서 선거나 의회 개입, 활용을 부정하진 않듯이 말이다.
한편, 이미 대부분의 대형산별들에 존재하는 산별 노정, 노사정 교섭틀을 통해 각 부문 조합원들의 이익을 잘 챙기면 되지, 굳이 책임지기도 부담스럽고 욕만 먹을 거 같은 경사노위에 들어가 골치아픈 전국적 의제들을 다뤄야 하냐는 협소한 입장도 있는 거 같다. 이것은 투쟁을 중심에 둔 입장도 아닌데 좌파적 목소리와 섞이고 있다.
지금 노동운동의 주요과제는 기존 대형노조들만의 울타리를 넘어서 전체 고통받는 대중의 관점에서 미조직 비정규 대중에게 파고들며 더 큰 기반을 만드는데 있다. 그렇다면 문정부와 경사노위에 대한 그들의 정서가 어떠한지, 노동운동이 조직된 정규직만이 아니라 바로 그들 편이라는 걸 입증하며 조직하는데 무엇이 가장 나을지가 이 전술에서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기존 조합원들의 의식, 정서, 요구만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데,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런 더 넓고 큰 관점에서 경사노위 참가를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기존 활동가나 지도자들마저 충분히 설득하며 진정성을 믿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경사노위 참가에 조바심을 내면 반발을 사기 쉽다.
서로 귀를 막고 상대를 전혀 토론과 협력의 동지로 보지 않는 분들도 보이는데, 이 상황에선 참가해도 내부적으로 불신과 갈등만 커질 것 같고, 불참해도 투쟁 건설에 힘을 모으게 될 것 같지 않아 참 안타깝다. 물론 지도부 탓만은 아니지만 책임은 가장 클 것이다.
우리가 함께 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있다면, 전술은 어떤 길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일지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다. 곧바로 앞장서 가야지 사람들이 따라 올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사람들을 더 많이 데리고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어떤 길이 옳았는지 미리 알 순 없을 뿐 아니라, 둘 다 장단점있고 완전히 틀리지 않은 길일 수 있다. 다만 어떤 길로 가든 서로를 불신하며 힘을 모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떨구는게 우선이 돼버린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신뢰와 협력은 이게 정답이라는 선포로도, 형식적 다수결 결정으로도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 청년 남성의 정서 논쟁
최근 바미당 이준석과 하태경이 ‘워마드와 전쟁’을 선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참 어처구니없고 무책임한 짓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대변하겠다는 청년남성들의 고통과 불만에서 그 원인과 책임 어느 것도 워마드에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어렴풋하지만 불길한 위험도 봐얄 거 같다. 하태경은 최근 <뉴스공장>에 출현해 김어준 씨의 호응 속에 워마드를 비판하며, 요즘 청년남성들의 관심과 지지가 높아진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청년남성들 속에서 바미당 지지율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고 이미 민주당을 제쳤다. 지난 대선 결과에서도 유승민의 ‘신보수’는 청년남성들 속에서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난민 혐오를 주도하는 이언주도 바미당 소속이다.
물론 바미당이나 하태경 등이 혐오정치로 무장한 새로운 포퓰리즘적 신우익을 만드는데 성공할지 속단하긴 이르다. 하지만 지금이 그 과정의 일부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항상 날카롭고 타당한 통찰을 보여주는 미국의 사회주의자 조나선 닐이 얼마전 페북에 올린 아래 글을 보자. 청년남성들의 분노가 실업, 저임금, 삶의 불안에 대한 정당한 불만인지, 아니면 삐뚤어진 감정인지 논란은 무망할 수 있다. 둘 모두일 수 있고, 문제는 그것을 누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냐는 것이다.
“브렉시트(Brexit) 투표의 인구통계학적 내역과 트럼프에 대한 투표는 괴상하게 비슷했다. 세대가 갈라지고, 계급이 갈라지고, 특히 두 나라 모두에서 쇠락한 공업지구의 약해진 노동계급 속에서 우파의 힘이 더 커졌다. 그들은 또한 페미니즘과 기후정의 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그 노동계급의 투표가 긴축, 신자유주의, 산업 쇠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인종차별적 투표를 보여준 것인지를 두고 좌파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은 어긋난 것이다. 그것은 둘 모두를 함께 보여준 것이다.
단단한 우파 정치운동가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종차별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노동계급적 울분을 함께 묶어서 포장하는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상당한 기간 동안 설득했다. 이와 비슷하게, 오랫동안 좌파들은 복지국가와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지지를 반인종주의, 친이민 정치와 연계시킨 종합대책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곤 했다.
강경한 우파가 사람들을 총체적이고 일관성있는 주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을 다시 반대편으로 설득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또한 왜 강경우파가 영국, 미국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이것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체성 정치'를 계급투쟁적 감각과 종합하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jonathan neale)
● ‘난민의 시대: 혐오의 정치에 맞서서’ 토론회
1월 12일 ‘난민의 시대: 혐오의 정치에 맞서서’ 토론회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참가자가 50여명에 달했고, 반난민 세력들이 연사와 토론회를 방해, 공격하겠다고 예고한 것이 오히려 토론회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불러 모았다.
한 분은 자발적으로 토론회장 앞에서 난민을 환영하는 1인시위도 해주셨고, 막상 토론회장 앞에서 집회를 하겠다던 반난민 세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토론회장 안으로 1~2명이 들어왔던 거 같은데, 별다른 발언이나 질문도 못하고 간 것 같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와서 난민을 환영하고 연대하는 강력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긴급한 요청에 국가인권위도 지원을 해주셨다. 그럼에도 ‘난민대책 국민행동’이 이런 협박을 예고한 것이나, 그곳에 달린 난민, 연사, 토론회에 대한 온갖 혐오성 댓글들은 한국사회에서 난민들과 난민인권센터같은 활동가들의 힘든 처지를 보여줬다.
많은 주장들이 소중하고 의미있었다. 특히 박노자 샘은 ‘우리는 옛날에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비자를 받은 적이 없다’는 캐나다 원주민의 말을 소개해주셨다. 또 몇 년전 한국군이 DMZ를 넘어가려던 병사를 사살했던 일을 떠올리며 ‘국경이 생명보다 우선’인 세상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난민을 발생시키는 전쟁과 기후재앙 등 많은 것들을 자본주의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연대주의적 방식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난민인권센터의 이슬 샘은 ‘남용적 난민신청’과 ‘가짜난민’의 개념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누군가의 삶을 전체로서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난민이지만 결국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런 비인간적 대우가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의료, 교육, 주거도 해결 안 되는 난민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면,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하고 이를 통해서 모든 곳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고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동정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하고, 힘들더라도 서로 함께 사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말, 벽이 아니라 다리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토론회였고, 함께해주고 힘 보태준 모든 분에게 감사한 시간이었다.
● 로자 룩셈부르크 사망 100년
1월 15일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망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발에 묶인 쇠사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던 실천가였고 ‘자유는 지지자들만을 위한, 당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전적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라고 했던 혁명가였다.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로운 이견과 비판을 차단하고 지도부가 내려준 지침에 대한 행동통일을 강요하는 전통에 질리게 되고, 오랜 정해진 공식과 정답만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에 의문을 품게될 때면 항상 그의 경구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된다.”
물론 지난해 초에 접한 에릭 블랑(Eric Blanc)의 작업은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보통의 인간으로서 오류와 단점이 적지 않았으며, 말대로 실천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을, 역시 ‘전통을 계승해 온 위대하고 뛰어난 혁명가들’에 대한 숭배로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영감을 얻었던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그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다. 독일에서 파시즘의 야만과 사회주의의 변질과 타락 모두를 경험했던 극작가 패터 바이스가 작품을 통해 한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계획들이 중단된 그 지점, 룩셈부르크의 생각을 계승하려던 모든 사람이 쫓겨난 그 지점, 자의식을 가지고 동참하는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라는 이념이 실종된 그 지점, 당이 개개인의 판단력을 향상시키기보다 자아가 매몰된 예배당이 되어버린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돼."(<저항의 미학>)
(기사 등록 201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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