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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문정부/ 정체성정치와 사회재생산/ 표현과 혐오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9. 1. 7.

전지윤


 



문재인 지지율 하락의 맥락과 진보좌파의 전망 

 

문정부가 재벌과 기득권 세력의 압력에 타협하면서 낡은 것들이 모두 되돌아오고 있다. 문정부의 지지율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개혁 배반의 결과라고 꼴좋아하기엔 문제가 단순치 않다, 주로 진보적 여론의 반발이고, 그 결과 진보좌파가 득세하는 상황이라면 반갑겠지만, 그렇게만 해석하긴 어려워 보인다.

 

지지율은 대체로 남북화해가 안보를 무너뜨리고, 최저임금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이 경제를 망쳤다는 프레임 속에 떨어지고 있다. 영남권과 자영계층 속에서 더 가파르고, 2030에서는 여성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만 챙긴다며 남성들의 이탈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한다.(서울 주요 대학들에서 총여를 없애는 과정에도 이런 여론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평화든, 노동정책이든, 성평등에서든 문정부가 너무 부족하고 약속도 어긴 게 진실이지만 프레임은 꼭 사실에 기반하진 않는 법이다. 당연히 정당한 현실적 분노와 불만이 뿌리에 있지만, 그것이 진보좌파의 프레임 속으로 담아지지 않고 있다. 반면 자한당 지지율은 탄핵 이전으로 회복됐고 친박이 부활하고 있다.

 

주말에 광화문에 가보면 갈수록 커지는 태극기 집회의 위세와 규모에 벙찌게 된다. 잊지 말 것은 자한당과 기득권 우파는 정치, 행정권력에서 일부 밀려났을 뿐 경제, 정치, 의회 권력의 핵심을 놓친 적이 없다.(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은 선출된 가관에 있지 않다) 그 힘으로 이들은 문정부가 찔끔 추진하던 개혁조차 전부 막았다.

 

산안법은 물론 유치원3법조차 통과를 막았던 상황이 대표적이다. 참여정부 때 박근혜가 사학법 개혁을 뒤집어 우파 결집하며 반격의 발판을 놓던 과정이 떠오른다. 그때도 사유재산권에 대한 신성모독이 우파를 불러 모았다.

 

우파야당들이 국회과반이고, 여당은 지지율도 떨어진 상황에서 적폐세력과 타협 속에 개혁을 계속 중단, 변질되고 있다. 제조업 위기에 세계적 경기하락까지 닥치자, ‘소득주도성장은 사라졌고, 경기침체의 책임을 조직노동에게 떠넘기며 시장주의 해법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자본주의는 재벌, 기득권의 불로소득과 지대추구에 유리하게 틀 지워져 있다. 경제가 성장하든 침체하든, 긴축을 하든 경기부양을 하든, 심지어 최저임금을 올려도 다수대중은 계속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정부는 여기서 체질 근본개선의 필요가 아니라, 임시 영양제 투여 중단으로 돌아서고 있다.

 

문정부가 타협을 중단하며 적폐세력과 정면대결해, 재벌특권체제의 근본적 개편을 추구하면 지지율이 크게 솟구칠까? 그렇진 않다. 오히려 기성체제의 저항과 총공 속에 더 추락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꿀꿀하진 않을 것이고, 적어도 희망의 불씨가 살아날 것이다.

 

반면 이 방향으로 계속가면 소수자혐오를 선동하는 이언주같은 신우파가 성장해, 여전히 강력한 종북혐오에 기반한 구우파와 힘을 합쳐갈 것이다. 혐오정치가 파고들 정치환경이 마련될 것이고, 불만을 혐오로 돌리는 지지자들(특히 젊은 남성들 속에서)이 만들어질 것이다. 혐오정치의 3요소(지도자, 지지자, 환경)가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물론, 진보좌파의 과제는 문정부가 정신차리라는 기대나 조언이 아니라, 문정부를 대체할 대안의 마련과 건설이다. 그리고 촛불과 문정부의 등장은 그런 과제 수행에 어느 때보다 좋은 조건과 환경이었다. 분명, 문정부는 진보좌파가 뭔가를 요구하며 맞서서 투쟁하고 조직을 건설하기에 우파정부보다 더 좋은 적수였다. 자유주의 정권의 한계는 좌파적 대안의 필요성을 설득할 좋은 기회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과제 수행에 큰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긴 했지만 0.4% 증가가 만족스럽다 보긴 어렵고, 힘을 합쳐서 조직해도 부족할 상황에 영역 다툼도 나타나고 있다. 진보정치가 힘을 합치고 성장하면서 제3의 대안으로 부상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박근혜 시절처럼 반우파라는 공동의 과제도 사라진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단결과 연대도 강화되진 못하고 있다. 혐오의 시대와 반차별이라는 과제가 새로운 공동과제로 분명히 인식됐다고 하기도 힘들다.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던 문정부를 누가 더 강하고 신랄하게 비판할지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는 할 일을 다한 것일까? 사회적 교섭 찬성이냐 반대냐의 전술 논쟁에 갇혀 무엇을 내걸고 어떤 투쟁을 함께 건설할 것인가라는 더 큰 논의가 흐려지진 않았는가? 연대와 투쟁을 강화하며 조직노동을 넘어 미조직 대중에게 다가서며, 문정부에 실망하고 이탈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기반으로 만들어내고 있는가?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계급 정치와 정체성 정치, 그리고 사회재생산

 

지난 연말에, 문재인 정부가 약속했던 젠더폭력방지법이 국회 논의와 입법 과정에서 여성폭력방지법으로 바뀌어 통과됐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대상을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하고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수정했기에 취지가 변질, 후퇴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반면 여성 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아직 발의도 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은 페미니즘과 해방을 향한 투쟁이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와 관해 여러 가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미 성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부 시위 등에서 참가자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하는 게 과연 적절한지 논란이 돼 왔다. ‘여성이 가장 큰 피해를 겪으니 여성부터 챙겨야 한다는 주장과 여성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들이 함께 해야 한다며 차별과 억압의 교차성을 주목하는 주장도 논쟁돼 왔다.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해 온 여성들이 그것을 고발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화가 여성을 피해자로만 여기거나, 다른 소수자를 지우는 데 눈감는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가부장제의 핵심축인 젠더이분법 자체는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성차별주의자들이 한사코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평등이라고 고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전의 앞면만 아니라 뒷면도 선택할 수 있다지만, 여전히 앞뒷면만 있는 동전 던지기로 우리의 선택을 가두는 것이다.

 

일부에선 이것을 정체성 정치의 한계와 실패라고 지적한다. 차별받는 당사자들의 정체성만 강조하는 것은 분리주의로 나가기 쉽고, 결국 억압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 장애인, 소수자, 트랜스젠더 등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고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건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그런 투쟁에서 느껴지는 힘과 프라이드는 소중하다.

 

문제는 억압하는 다수자 집단의 정체성 정치. 백인들이, 남성들이, 이성애자들이 기존질서와 자신들은 문제가 없고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징징거리며 억압받는 소수자 집단을 공격할때 그 뻔뻔함과 폭력성은 거슬릴 수밖에 없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며 자신들만 보편성인 것처럼 구는 것도 위험하다. 여타 소수자 운동을 부차화하면서, 정작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이익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는 일부 노동운동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성과 인종을 소홀하게 여기는 노동계급 정체성의 정치도 얼마든지 폐쇄적일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젠더이분법적이거나 닫힌 정체성의 정치로 보인다. 반면에 젠더 다양성과 억압의 교차성을 이해하면서, 다른 소수자들에게 열린 정체성 정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서로 교차로처럼 연결돼 있는 성, 인종, 계급적 억압과 착취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그래서 상호교차성을 넘어 사회재생산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보인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처음부터 성별화되고 인종화된 형태로 재생산되며, 제국주의는 국가간의 위계 속에 생산과 재생산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이런 착취와 억압, 차별과 혐오의 연결망 속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투쟁은 더욱 커져야 하고, 우리의 다양성과 차이는 얼마든지 힘과 연대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도구로 그가 만들어 놓은 게임 안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성차별주의를 넘어, 인종차별주의를 넘어, 나이 차별을 넘어, 계급 차별을 넘어, 동성애 혐오를 넘어 모두가 진정으로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장차 성공할 수 있느냐는 우리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 그것을 분열이 아니라 창조의 원천으로 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드>)

 

표현의 자유는 억누르고, 혐오의 자유는 보장하는 국가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가가 나서서 혐오 표현을 규제하고 있는 데 한국은 그냥 손놓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니 표현의 자유라며 혐오 표현과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단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이 나라에선 국가가 단지 방관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며, 혐오를 부추기는 적극적 구실을 한다는 점도 항상 같이 봐야 한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가 있다. 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깡그리 부정하면서, 종북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조장, 선동하는 대표적 법과 제도다. ‘종북은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생명조차 존중받지 못해온 게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 국가기구는 단지 방관자가 아니라 종북혐오가 가능한 환경과 기반을 마련하고 마녀사냥을 주도한 적극적 가해자였다. 따라서 혐오, 인권, 차별, 표현의 자유 문제를 논할 때 보안법과 종북몰이의 문제를 빼놓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혐오나 차별과는 별개의 남북관계에 관한 지나간 문제처럼 취급한다면 큰 실수일 것이다.

 

박근혜 말기엔 여기에 테러방지법까지 덧붙여졌다. 테방법은 국가가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혐오를 제도화한 또다른 사례로 2의 보안법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이 법이 이주민, 난민, 무슬림 등에 대한 감시와 사찰, 자의적 확대해석에 의한 테러범 낙인과 처벌을 낳을 거란 경고였다.

 

2년이 지난 오늘날, 이 판단을 바꿀 어떤 근거도 찾기 어렵다. 특히 최근 이 법의 최초 적용 사례와 유죄 판결이 나왔다. 여기서 검찰과 법원은 이 나라에서 10년 넘게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온 시리아인 A씨가 페북에 테러 선동 글을 올렸다며 징역3년을 선고했다. 재판은 전부 비공개로 진행됐고, 제시된 증거들도 의아하기만 하다.

 

테러리스트가 테러 선동 글을 페북에 전체공개로 그냥 막 올린다고? 차에 있던 부탄가스가 사제폭팔물 준비 증거라고? 부탄가스는 휴대용 버너를 쓰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고 나도 있다. 법원도 A씨가 다른 사람에게 IS가입 권유를 했다는 기소는 증거가 없다고 인정했다. 결국 A씨가 실제로 뭔가 불법과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테러방지법이라는 악법의 희생양이 된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를 근거로 언론은 난민 신청했던 사람이 테러리스트였다’, ‘인도적 혜택을 줬더니 테러 선동으로 답했다며 낙인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인도적 체류허가가 대단한 혜택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없어야할 국가보안법과 테러방지법은 있고, 있어야할 차별금지법은 없다. 그래서 국가는 한편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면서, 한편으로 혐오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도화하고 있다.

 

 

박노자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3- 김만겸과 남만춘

 

알마전에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박노자 선생님의 한국 공산주의 문화사’ 3강을 들었다. 이번에는 박헌영 등으로 대표되는 화요파의 멘토라고 볼 수 있는 이르쿠츠크파의 원조이며 러시아 이민 2세대인 두 인물 김만겸과 남만춘에 대해 강의하셨다.

 

이르쿠츠크파는 서울파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상해파와 파벌적 경쟁 관계였는데, 상해파가 민족적 공산주의에 가까웠다면 이르쿠츠크파는 좀 더 계급적 입장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어찌보면 NLPD의 대립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는 것인데, 모순의 상호교차보다 대립을 강조하며 반목하는 안타까운 전통은 뿌리가 깊었던 것 같다.

 

적자생존에 따른 사회진화론을 지지하며 권업회 활동을 하던 김만겸이 민족주의 운동의 한계를 체감하며 급진화해 볼셰비키가 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짜르 군대의 장교였던 남만춘이 172월혁명 과정에서 사병들의 지지를 받아서 병사소비에트 지도자가 되는 과정도 흥미있었다. 하지만 남만춘은 귀향했다가 내전 시기에 백군에 일시 강제징집당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스탈린 대숙청 과정에서 비극의 씨앗이 된다.

 

박노자 샘은 특히 남만춘의 <압박받는 고려>를 의미있게 평가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맹아적 시도로서, 나중에 백남운 등을 통해 더 깊이있는 분석으로 나아가는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만춘은 조선이 일제의 포획시장으로서 원료와 자원을 수탈당하고 있다는 식민지수탈론의 관점을 보여주며, 사회주의적 변혁을 통한 소비에트 조선 건설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은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특히 소수민족 억압과 여성 억압에 대해서도 강조했는데, 이런 소수자 해방에 대한 관심이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공동체를 유지해간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접경인(경계인) 위치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했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서울파와 화요파 등과 모두 접촉하고 세력을 안배하면서 통합을 유도했다고 하지만, 잘된 것 같지는 않다. 망명 지식인에서 현장 활동가로 지도선을 바꾸었지만, 러시아의 모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며 지시를 내리던 패턴 자체는 그대로였던 것 같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1938년에 거의 같은 시기에 일제간첩이나 트로츠키파로 몰려서 총살 당했다. 한세기 전에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그것이 실현되고 다시 좌절되는 과정은 처연하지만, 실수와 실패로 더럽혀진다고 해서 꿈이 무의미해지진 않는다. 몇달후에 4강은 임화를 다룬다니 더욱 기대가 된다.

 

 

(기사 등록 20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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