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아(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인권연대>(http://hrights.or.kr/chung/?uid=11400&mod=document&pageid=1)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늦은 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 이 영화는 ‘보았다’가 아니라 ‘들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내가 유일하게 밴드의 모든 노래를 알고 있는 ‘퀸’의 음악을 러닝 타임 내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백하자면 학창 시절 몇 년간 ‘퀸’의 노래만 들을 정도로 심취되어 있었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해괴한 무대의상, 사생활 루머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간 오해와 편견으로 엉킨 매듭들이 스르륵 풀렸고, 중반부에 이르자 어렴풋한 기시감이 들더니 엔딩 즈음에는 확신까지 들었다. 평행 이론처럼 누군가의 삶과 흡사한 느낌~ 누구더라? 바로 여름에 보았던 영화 <휘트니>의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휘트니>는 생전 그녀의 활동 영상과 홈비디오를 샅샅이 찾아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라 좀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부색, 국적, 성별, 음악 장르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이들의 삶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휘트니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흑인치고는 하얀 피부색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흑·백인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파르시(인도에 거주하는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이민자 프레디 역시 인종과 종교의 차별을 끊임없이 받았다.
외모면에서도 휘트니가 인기가 절정이던 시기에도 피부색 때문에 흑인과 백인에게 번갈아가며 인신공격을 받아왔듯, 프레디 역시 외모(돌출된 앞니)로 외면당한 경험들 때문에 이 컴플렉스에서 평생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성적 정체성(영화에서 휘트니 역시 동성 연인으로 암시되는 인물이 나옴)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못했기에 내면의 혼란과 고통이 극심하였을 것이다.
설상가상 휘트니는 어릴 때 성적 학대를 당했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 프레디 역시 이성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동성 연인들을 만나는 동안 느끼게 되는 혼돈과 억압 등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이 늘 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에이즈(AIDS) 환자들은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극단적인 지탄을 받는 시대였으므로 결국 프레디는 발병 사실을 숨기며 적극적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요절했다.
휘트니는 수년 동안 마약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는 남편을 뒤치다꺼리하며 자신도 마약에 중독되어 피폐한 시절을 보내다 어렵게 재기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성적 다양성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금기시되던 시절이었기에 이들은 성소수자로서의 고민을 혼자 감당하며 고통 속에 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이러한 고민을 의논하거나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에 그들의 삶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런데 나는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를 보면서 프레디에게서 느낀 것의 갑절 이상의 연민으로 내내 눈물을 흘렸다. 물론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중적 상업 영화인 이유도 있겠지만 극영화 속의 프레디는 독실한 파르시의 삶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서 독립할 때도, 이성과 결혼(사실혼) 후 결별하고 또 동성의 연인을 만날 때도, 당시로선 파격적인 음악의 장르와 음반을 발매할 때도 대체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휘트니는 여느 여성들처럼 가부장제 질서 속에 억압된 여성의 삶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휘트니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동성 사촌에게 성적 학대라는 충격적 경험까지 하고,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혹독한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천부적인 가창력과 열정으로 당시 미국인이자 흑인 솔로 여가수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세계적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각종 범죄를 일삼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음악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꾸린 가정만큼은 끝까지 지키려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원인조차 불분명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그녀가 벌어들인 수입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관리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급기야 극심한 생활고까지 겪게 된다. 이렇듯 평생 그녀의 삶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체로 가족이나 남편, 타인과 언론 등에 종속되거나 결정되는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이유로도 마약, 약물 등에 빠진 그들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화에서 두 사람 모두 늘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들이 많은데 그것을 보며 또 가슴이 아렸다.
내가 휘트니나 프레디를 칼럼에 소환한 이유는 그들의 주옥같은 음반 때문만은 아니다. 두 사람은 인종, 성적 정체성, 종교, 경제적 배경, 심지어 외모까지 모든 것이 주변인이었다. 3옥타브를 넘는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는 순간에도 주류 세계의 차별과 혐오에 시달렸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우고, 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적 스타들의 삶도 이러할진대, 우리 주변의 이름 없는 소수자와 약자들의 삶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추운 겨울이 또 왔다.
※ 영화를 보고 작성한 내용이므로 실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 등록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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