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이 글은 지난 11월말에 있었던 인천인권영화제(INHURIFF) 자료집에 기고해 실렸던 글이다. 이 글을 다시 옮겨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준 영화제 주최측에 감사드린다.]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가 한참 뜨겁던 지난 여름에 많은 언론들이 난민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부추기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당시에 <조선일보> 기사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난민 심사의 빈틈을 악용해 난민 인정을 못 받아도 5~6년 체류가 가능하고, 계속 재판을 신청해 10년 넘게 체류하는 사람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그 기사를 쓴 사람은 그렇게 오랜 기간을 막막하게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고통스러운 시간의 늪에 대해서 눈곱만큼이라도 상상해 봤을까? ‘기다림’은 이 기다림의 6년 동안 어린 소녀 록사르에게 닥치는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다.
기다림에도 차이가 있다. 다가오는 희망을 기다리는 것은 두근거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도 너무 오래 지속되면 ‘희망고문’이라고 부른다. 다가오는 게 희망인지 절망일지 알 수 없다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절망이 언제 닥칠지만 기다리는 것은 가장 파괴적인 ‘절망고문’이 된다.
영화 초반에 축구 실력을 발휘하며 밝은 표정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던 록사르가 영화의 후반에 컴컴한 어둠 속으로 허우적대며 빠져드는 것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해를 넘길수록, 이민국의 관료적 반응을 접할수록, 록사르와 그 가족들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가족 내의 평온도 위태로워진다. 강제송환된 난민 가족의 소식을 들으면서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록사르 가족의 난민 신청은 ‘아동복지’ 문제와도 연결되면서, 난민 인정은 거부됐지만 당장 추방되지도 않으면서 계속 해를 넘긴다. 록사르는 언제든지 와서 자기 가족을 집에서 끌어내고 비행기에 태워 추방시킬 사람들을 ‘기다림’한다.
록사르는 밝게 웃고 뛰는 모습 뒤에 어떤 불안과 공포를 감추고 있던 것일까? 록사르가 자살충동과 불안장애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추방이 계속 미뤄질 수 있었을까? 록사르가 다시 밝게 축구를 하며 뛰어노는 소녀로 돌아온다면 추방은 더 다가올까? 아프가니스탄으로 강제추방돼 이교도로 몰려서 고통받는 것이, 덴마크에서 불안과 공포 속에 목졸려 죽어가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일까?
무엇보다 난민은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불신이 아니라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이미 믿지 않으려고 작정하고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눈 앞의 진실도, 인간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손이 잘린 아버지와 목숨을 잃은 오빠를 가진 록사르의 가족이 난민 인정을 못 받은 것은 이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2014년에 강제송환 결정을 받아든 난민이 자살했던 나라, 전쟁을 피해서 온 예멘 사람들 500여명 중에서 단 2명을 난민으로 인정한 나라, 가짜 난민을 가려내기 위해 난민법을 개정한다는 나라, 2017년 12월 시점에 9,900여명이 난민 신청하고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 있다는 나라, 바로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록사르의 아버지는 꽃을 심는 게 취미다. 꽃은 뿌리를 내리도록 사랑과 정성으로 가꿀 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난민제도는 꽃을 진짜와 가짜로 가려서 불법 딱지를 붙인 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말려죽이고 있다.
(기사 등록 201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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