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지금 중동에서는 미국 제국주의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라는 반군이 기세를 올리고 있는 이 상황은 수백만 명을 학살한 미제국주의의 이라크 침공이 완전 파산했고 지정학적 재앙만 낳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라크에 8년간 14조 원을 쏟아부은 미국이 얻은 것은 이라크를 지옥으로 만들고, 제국주의 위신에 커다란 생채기를 낸 것뿐이었다. 2011년 12월 미군 철수 이후 2년 6개월 만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왜 이라크 제2 도시라는 모술에서 3만 정부군이 1천 반군에게 무너졌을까? 왜 90만 이라크 정부군이 1만 반군 앞에 무너져왔을까? 이것은 알 말리키 정부가 제국주의의 꼭두각시로 만들어졌고, 가짜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한 부패 정부이기 때문이다.
말리키가 이끄는 ‘법치주의연합’은 2010년 선거에서 패배했음에도 미국의 도움으로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말리키는 현재 시아파 일부의 지지를 받을 뿐이다. 많은 이라크인들은 말리키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라크 정부군을 ‘말리키 민병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는 종파적 대결과 거리를 두는 온건 수니파인 ‘사와 민병대’조차 약속을 어기고 해체해버렸다. 미군 철수 후인 2012년에 수니파가 ‘이라크의 봄’이라는 평화 시위를 시작했을 때 그의 대응은 수천 명을 고문·살해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억압적, 종파적 대응이 강경 수니파의 부상을 부추긴 것이다.
물론 말리키의 이런 종파주의는 미제국주의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자라난 열매다. 이희수 교수가 지적하듯이 원래 이라크에서 시아-수니파의 관계는 이토록 적대적이지 않았다. “수니-시아파 차이는 … 절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 사이는 서로 장사하고, 필요한 지식을 나누고 심지어 통혼이 가능”했다.
그리고 미국은 침공 초기인 2004년에 이라크에서 종파를 넘어선 반제국주의 저항에 부딪힌 바 있다. 당시 시아파 지도자이며 마흐디 민병대를 이끌었던 알 사드르는 ‘체 게바라’와 비교되면서 시아파-수니파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종파간 이간질말고는 점령을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시아파 지배계급 일부를 부역자로 끌어들여 권력을 약속했고, 그들이 수니파에게 총부리를 돌리도록 부추겼다. 또 수니파의 중도적 일부를 매수했다. 종파적 암살단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고무했다. 지금의 종파 갈등은 짧게 보면 이런 분열지배 책략이 낳은 결과다. 이 속에서 ISIL같은 알 카에다보다도 더 과격한 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시리아 혁명에 개입한 서방과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가 흙탕물을 일으키며 문제가 더 꼬였다. 이들은 아사드를 두고보는 것도, 아사드가 혁명으로 날라가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유시리아군을 지원하면서 아사드와 거래를 중개했다. 혁명은 내전으로 변질됐고, 종파간 폭력과 갈등은 극에 달했다. ISIL은 이 속에서 힘을 키웠다.
이라크 증후군
물론 현재 수니파 반군은 단일 집단이 아니라 동맹군이라고 한다.(케네스 폴락, <이라크 군사정세 보고서> 2014.6.14.) 후세인 정권 잔당들, 수니파 부족별 민병대, 옛 군부 출신과 탈영병들,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등이 말리키에 맞서 일시적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수니파 지역을 중심으로 통제구역을 넓히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내전은 종파적 분할선에 따라 장기 교착 국면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야만적인 일이 반복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ISIL는 자신들이 정부군 1천700명을 즉결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 상황을 핑계삼아 군사적 개입을 하려 할 것이다. 이미 오바마 정부는 이라크에 대한 무인기 폭격과 공습에 대비한 전투기 해상 발진기지까지 확보해 뒀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 증후군’에 빠져있는 미국은 지금 어디를 함부로 개입할 처지가 아니다. 게다가 침공과 점령을 통한 이라크 ‘안정화’는 불가능하다는 게 이미 입증됐다.
그런데 이라크 사태 ‘해결’을 위해 미국과 이란이 손을 잡으려는 기괴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이미 이란은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도우려 혁명수비대를 파병했다고 한다. 미국의 딜레마는 이것이 이 지역에서 이란의 영향력 확대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회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전선을 강화할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손을 잡으면 이라크의 수니파는 더욱 힘을 모으려 할 것이다.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숙적이며 미국의 경비견인 이스라엘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가 ISIL를 돕고 있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이 틈에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은 유전 도시 키르쿠크를 점령하고 오랜 염원인 독립국가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터키도 쿠르드족 독립국가를 저지하기 위해 개입하려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연결되면서 중동전쟁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제국주의가 이 모든 비극과 재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을 봐야 한다. 석유와 패권을 위해 중동을 지옥으로 만들어 온 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역사이다. 대표적으로 1916년 5월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멋대로 갈라서 나눠먹기로 결정한 ‘사이크스- 피코 비밀협정’이 있다.
여기서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요르단을 갖고, 러시아에게 터키 동부지방을 주고,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하기로 한 바 있다. 이어서 1917년에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약속하는 ‘벨푸어 선언’을 했다. 여기서 오늘날 중동의 비극과 재앙의 기본적 양태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중동 민중을 분열지배하려는 제국주의의 더러운 야욕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전략가였던 리처드 홀브룩은 이라크를 남부 시아파 지역, 북부와 서부 수니파 지역, 북부와 키르쿠크의 쿠르드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은 종파간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며, 종파간 갈등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진정한 문제를 가릴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이 이라크에 만들어놓은 끔찍한 억압, 공포, 빈곤, 고통이다. 이희수 교수는 이라크에서 “초토화된 의식주 공급체계는 회복되지 않았고, 물과 전기를 위해 매일 생존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에 맞서는 이라크 민중의 종파를 뛰어넘은 단결과 저항이 필요하다. 이라크노동자평의회조합연맹의 활동가 팔라 알완은 이렇게 말한다.
“이라크 노동계급은 쿠르드족 북부에서 이라크 남부의 가장 먼 지점까지 전국에 걸쳐 존재하는 공통의 세력입니다. … 이들은 분명 분열과 분단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며 … 이란의 뻔뻔한 간섭에 대해서도 확고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우리는 걸프정권의 개입에,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무장세력 지원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누리 알 말리키의 종파적이며 반동적인 정책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또, 무장한 테러리스트 범죄조직과 이들의 모술 및 다른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반대합니다. … 우리는 종교 기관의 간섭과 이들의 무차별적인 전쟁 선동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을 지지합니다.”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가들이 혁명적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끔찍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아랍 민중의 단결과 저항을 건설하는 게 절실하다. 이미 2011년 아랍 혁명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 바 있다.
좀비 총리와 레임덕 박근혜?
위와 같은 중동 상황 때문에 ‘오바마는 아시아가 아니라 중동으로 회귀해야할 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이런 딜레마와 역부족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화를 앞장서 부추겨 왔다.
그리고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과 개헌 추진은 이제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성큼 나가게 만들었다. 분노한 일본 민중 4만 명이 수상관저 앞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일본 여론의 과반수 이상이 반대한다는 뜻을 표했지만 말이다.
아베 정권이 얼마전 북한과 납치 문제 해결과 제재 완화라는 거래에 나선 것도 이 큰 그림의 일부였던 것 같다. 전 통일부장관 정세현은 납치 문제 해결을 통해 “아베 총리의 입지가 강화돼야만 헌법 개정을 밀고 나갈 수 있다”며, 이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부합[하므로, 북일 관계 개선이] … 조금 불편해도 더 큰 전략적 이익을 위해 눈 감아 주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런 미제국주의의 강력한 후원 아래 일본 지배계급은 재무장을 향한 돌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 센카쿠(댜오위다오) 등을 둘러싼 중일간의 갈등이 우발적 충돌에서 국지전으로 발전할 위험은 더욱 커졌다. 이럴 때 한반도로 어떤 재앙이 번질지 불안할 뿐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아베의 질주를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집단자위권 결정을 앞두고 한미일 군수뇌부가 모여서 3국간 군사정보 MOU를 논의한 것이다. 집단자위권 결정을 기정사실화하며 이를 뒷받침할 후속조치를 위해 같이 머리를 맞댄 것이다.
아베는 재무장을 위해 고노 담화 수정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노골적인 침략 역사 부정은 한국의 여론을 악화시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에게 어려움을 안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일본은 결국 박근혜 정부가 큰 무리없이 한미일 군사정보교환과 MD 체계로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는 듯 하다. 이것은 이번 쉬진핑 방한 때 박근혜가 어떤 줄타기를 할지 지켜보면 좀 더 분명해 질 것이다.
그런데 요즘 박근혜의 머리 속은 이것이 아니더라도 매우 복잡할 것이 틀림없다. 근래 박근혜 정부의 양상은 정말 ‘레임덕’이란 다소 과장된 표현도 크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다. 아직 임기가 3년반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윤창중에 이어서 또 한명의 대인기피적 외톨이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문창극, ‘좀비 총리’가 된 정홍원 등은 너무나 희극적이다.
이 속에서 박근혜의 지지율은 계속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고, 수도권에서는 40% 이하로 떨어졌다. 심지어 새누리 자체 조사에서 20대의 박근혜 선호도는 1.4%에 불과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한귀영은 “그동안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평가를 유보했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눈물을 흘리며 구해달라고 해서 지방선거에서 도왔는데 이게 뭐냐’면서 우파 지지층까지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근래 조중동 종편마저 박근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권력 누수만이 아니라 권력 암투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김무성은 “권력을 독점하려 나를 모함했다”며 김기춘 사퇴를 요구하며 친박계와 정면 충돌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기춘이 포함돼 있는 7인회가 박근혜를 비판하는 양상이었다. 7인회의 최병렬, 김용갑 등은 문창극 지명을 공개 비판했는데 이것은 김기춘이 문창극을 민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전 국회의장 박관용은 “혼자 사는 여자의 가슴에 깊은 한이 맺혀 있다. 그것이 ‘수첩인사’로 나타난다”며 “가깝게 의논하는 사람들은 [김기춘과 7인회가 아니라] 따로 있다”고 지적했다. 박지원은 그 세력을 남동생 박지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재만, 사이비교주 최태민의 사위 정윤회 등 “만만회”라고 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여권 관계자의 인터뷰가 나왔다. 정윤회와 청와대 비서관 3인으로 구성된 ‘4인방’이 진정한 실세이고 박지만조차 이들에게 견제받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이든, 이것은 집권 핵심 세력 내부의 어지러운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전형적 권력누수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박근혜의 위기는 세월호 후폭풍이라는 큰 그림 아래서 진행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거리 투쟁으로는 크게 확대되지 못했지만, 심대한 정치적 파문을 낳았던 것이다. 새누리당 서청원도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정치는 중심을 잃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윤논리와 국가 구실에 대한 의문까지 낳았던 세월호 참사의 여파는 곳곳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생각을 낳았다. 직접적으로는 KBS 파업과 길환영 제거를 낳았고, 이 공백 속에서 KBS 9시 뉴스가 문창극의 실체에 대한 폭로 무대가 됐다.
세월호 속에서도 참패를 면한 선거 결과를 본 후 박근혜가 문창극을 총리로 내세운 것부터 무리수였다. 지방선거 이후 ‘박근혜 시즌 2’를 공세적으로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수정없이 강행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본격화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박근혜는 문창극, 이병기 등 극우인사를 전진배치하며 친위직할통치를 강화하려 했다.
선전포고가 코미디로
이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밀양 행정대집행, 의료민영화 조처 강행, 진보당 김선동 의원직 박탈 등도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무리수가 박근혜의 강경함과 건재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성을 드러내고 위기를 앞당기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기세등등하던 선전포고가 갑자기 코미디가 된 것이다. 이는 박근혜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모순이 커져 온 결과다.
불만에 찬 대중에게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약속하며 집권했지만 악화하는 경제·대외 환경 때문에 그 약속은 결코 지킬 수가 없고, 오히려 대중의 불만을 더 높일 정책을 추진을 할 수 밖에 없는데, 태생적인 부정·부패로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게 박근혜의 모순이다.
이 모순 때문에 박근혜는 이미 지난해부터 국정원 촛불 시위 국면과 철도 파업 국면에서도 위기에 빠졌다가 벗어난 바 있다. 그리고 이번 위기도 그 연장선이자 쌓여 온 모순의 증폭 결과라고 봐야 한다. 이제 박근혜는 정책 추진과 법안 통과 등 온갖 반민중·반민주적 계획들을 추진할 엔진의 동력이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김대중도 우려가 크다. “이것은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이다. … 좌파 세력은 때 만난 듯 기세등등하고, 우파 세력도 이제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집권층이 틈을 보이자 노조는 다시 지난주부터 깃발을 올리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나 자신도 박근혜 정부 취임 직전에 이렇게 예측한 바 있다.
“앞서 지적한 박근혜의 모순들은 서로 결합돼서 나타날 수 있다. 경제 위기 심화 속에 박근혜는 복지 약속들을 지키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박근혜의 우익 포퓰리즘적 기반이 흔들리고 이탈할 것이다. 만약 여기에 부패 추문이 결합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그러면 다가오는 지방선거 등에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의 타이틀이 빛바랠 것이다. 이럴 때 박근혜의 중요한 강점이었던 우파 결집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투쟁의 기회가 될 수 있다.”(‘박근혜 정부의 모순과 다가올 저항의 기회’, 2013.2.18.)
이것이 우리 편에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무노조’ 신화에 역사적 파열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상황 속에서였다. 물론 3대 세습을 마무리해야 하는 삼성의 처지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7백여 명이 한치도 흔들림없이 40일 넘게 파업 노성을 이어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신·유골까지 탈취하던 자들이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KBS,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전진에 이어서 이제 화물연대의 파업도 예고되고 있고, 민주노총은 7월말 동맹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쌍용차노조는 7월 재보선에 김득중 진보단일 후보를 출마시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더 키우고 있다.(이는 진보 단결이라는 점에서도, 선거와 투쟁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시의적절한 전술이다.)
그러나 박근혜의 위기가 자동으로 우리 편의 기회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잊지말자. 촛불항쟁의 치명타를 맞고도 정권 재창출까지 한 이명박이 보여줬듯이 말이다. 정권의 위기가 아무리 일찍 시작되고 반복되더라도 우리 편이 무기력하고 분열돼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박근혜는 또다시 위기를 벗어날 것이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언제나 ‘골든타임’ 안에 박근혜를 구할 준비가 돼 있는 새민련도 있다. “야당은 그동안 [박근혜 정부] 침몰의 속도를 늦춰주었던 일등 공신”(한귀영)이었다. 지금도 친야권 언론들은 ‘이 정부의 붕괴는 막아야 한다. 이 정부가 실패하면 국민이 힘들어진다’는 등의 말을 흘리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공동운영자로서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새민련은 삼성전자서비스 투쟁 때도 막바지에 끼어들어서 비공개 교섭 등을 중재하며 김을 빼는 구실을 하려 했다. 새민련이 세월호 국면에서마저 지방선거에서 죽을 쑥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문제는 지방선거 이후, 진보에게 새민련과 ‘거리 두라’보다 ‘함께 해라’는 훈수가 늘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양당제적 구조 속에서 주류의 일원이 되는 경쟁을 벌이는 것을 이번에 생각해봐야 한다.”(박상훈 교수) “독자성을 명분으로 덩그러니 소수 약체 정당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냉철하게 짚어봐야 한다.”(김윤철 교수)
정의당 등을 중심으로 ‘원자력 폐기가 아닌 확대 중단 등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운동이 아닌 정치를 해야 한다’ 등의 새민련 추수적 주장도 늘었다. 한겨레가 해직자를 내치고 법내에 ‘가만히 있으라’고 전교조에게 훈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진보교육감들에 대한 이런 ‘조언’도 많으며 이에 대한 우려스러운 수용도 눈에 띈다.
박근혜도 이런 틈을 파고들며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이미 전교조 법외 판결이 있었고, 대검찰청은 6월 26일 ‘공안대책협의회’를 열었다. 신임 국방장관의 ‘군대 내에도 종북이 있다’는 발언은 불길하게 들린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에서 노조 간부의 도박을 적발한 것도 우리 편의 치부를 이용한 공격 시도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중요 사건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했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마르크스가 예로 든 것은 삼촌 나폴레옹 1세와 조카 나폴레옹 3세였다. 독재자인 아버지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도 비슷하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박근혜도 “자기의 일을 도와달라고 노심초사 과거의 망령들을 주술로 불러내며, 이 망령들로부터 이름과 전투구호와 의상을 빌려 이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언어로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김기춘은 살아있는 망령이고, 박정희보다 박근혜가 분명히 더 희극적이다.
박근혜가 희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박정희 시대와 달라진 주객관적 조건에서 박근혜가 그것을 따라하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정희 때처럼 한국 자본주의의 팽창·발전기가 아니다. 지금은 지배계급에게도 박정희 때처럼 미국에 줄서기만 하면 되던 시기도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고, 한반도는 미중 갈등 속에 지정학적 혼돈으로 가고 있다. 이런 물질적 토대에서의 변화가 정치적 상부구조에서의 변화와 위기도 낳고 있다. 달라진 조건 속에서 박정희 스타일을 따라하던 박근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듯싶더니, 이제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추락하고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산업화 속에 성장한 노동계급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노동계급이 분열을 극복하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나서도록 정치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박근혜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도, 이 정부의 위기를 우리의 기회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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