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수많은 책을 썼다. 본인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 )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요즘 여유 날 때마다 서울에서 이번에 구입해놓은 탈북 외교관 태영호의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읽고 있습니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북조선을 잘 모르면서 그 관련 수업을 해야 하니까 공부할 겸 재미를 볼 겸 이렇게 독서를 하지요. 물론 그가 쓴 걸 그대로 취신하려 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 누구의 회고록이든 저자의 (숨겨진) 의제 등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건 사학의 기초니까요. 더군다나 태영호의 경우에는 그가 탈북하기 전에도 당연히 자기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외교관에게는 "자기 의견"은 본래 없습니다. 외교관은 본래 국가의 '입'이죠. 어디에서나 그렇죠) 탈북한 뒤에도 과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싶습니다.
탈북자들이 기관의 "보호"만 받는 것이 아니고 그 통제도 받는 거니까 그들의 표현의 자유는 많이 제한돼 있어요. 또 태씨와 같은 노회한 초로의 관료에게는 새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본능 같은 것도 좀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회고록의 일부 부분들은 자가당착의 극치를 이룹니다.
예컨대 그는 김현희가 KAL기를 폭파시켰다는 한국 기관들의 공식 입장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그와 동갑이며 그와 같은 외국어학원에 다닌 것으로 돼 있는 김씨를 한번도 학교에서 못봤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김씨는 투명인간이었나요? 그런데 배임 횡령하고 탈북한 그는 한국 기관의 "보호"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뻔히 그 저의가 보이는 이런 부분을 빼고는 이 책은 정말로 흥미진진합니다. 그 속에서 북조선 관료들의 하루하루 일상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일상 속의 아비투스를 이해해야 북조선을 현실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북조선을 가르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책은 중요한 부차적 교재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 참 놀라운 게, 이 일상의 속살을 보다 보면, 제게 아주아주 익숙해져 있는 대상 하나 머리 속에 뜹니다. 바로 우리들의 대한민국이죠. 물론 적색개발주의 식의 국가 주도/통제하의 경제냐 재벌왕국과 안보병영국가의 조합이냐 그 체제의 구체적인 유형에 따라 상이한 점들도 있지만, 어쟀든 양쪽에서 배경 (식민지적 근대성, 봉건시대 농업관료제의 유제 등)과 근대화의 근본적인 방식 (국가 주도의 압축적 근대화)이 서로 유사하기에 유사점들도 바로 눈에 띄죠.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 어릴때부터 키워지듯이 태영호는 조기 (관비) 유학을 했습니다. 단,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요. 오진우 (무력부 부장), 허담 (중앙당 대남 사업 책임자) 같은 핵심들의 자녀들과 함께요. 유학생 출신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대한민국만이 아니라는 거죠. 평양에서 태영호가 다닌 외국어학원, 즉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외곡어특목고는 역시 엘리트들이 운집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철저한 기수별 위계질서가 잡혀 심지어 선배들이 후배를 구타하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데 나중에 그 출신 사이의 끗끗한 연줄은 서로에게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참, 경기고나 요즘의 대원고 등을 보면 얼마나 다를까 싶습니다. 그 뒤로는 태영호는 모스크바의 MGIMO (국제관계대, 쏘련 외무성 간부들의 양성소)를 본따 만들어진 평양국제관계대를 졸업했는데, 거기에서도 일부 지방 영재 이외에는 주로 한국의 강남족 격인 평양 엘리트들이 모여져 있었다는 거죠.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 외교학과 격인데, 거기를 졸업하고 나서는 태영호가 외무성으로 직행했습니다. 10년이나 시달려야 하는 군을 거치지 않고요. 남북한은 공히 철저한 병영국가들이지만, 그 속에서도 병영행을 면제 받는 계층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참, 학생 시절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그 상대자는 바로 오극렬, 오금철, 오철산 등을 배출한 고위간부 가문이었죠. 개인들이 아닌 "문중"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도 한국 정계나 재계를 왜 이토록 닮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한국의 대원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스웨덴과 영국에서 근무하는 강남족 계열의, 정계 핵심들과 혼맥을 맺은 조기 유학생 출신의 외교 관료보다는 태씨의 관로는 조금 더 험난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류층이 이미 하나의 계급을 이루어 그들의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지만, 북조선과 같은 적색개발주의 사회의 경우 배타적인 재산/생산소유자들의 집합으로서의 지배계급의 형성은 아직은 진행 중입니다. 아직은 국가는 상류층의 것이 됐다기보다는 상류층 위에서도 군림할 수 있죠. 그래서 예컨대 한국 관료로서 어떤 사건에 걸려 불명예 퇴직 당하고 구속까지 당할 위험보다는, 그의 북조선 동료에게는 숙청으로 칼바람을 맞을 가능성은 더 크다고는 볼 수 있죠.
그런데 그걸 빼고 외교 관료로서의 삶의 전체적 분위기는... 거의 비슷합니다. 윗분들의 눈치를 잘 보고 (외무성이 최고 지도자의 눈치를 가장 훌륭하게 보는 최고로 지능적인 부서로 알려져 있답니다), 윗분들의 일가 친척들이 해외나들이할 때에 통역과 가이드를 당연 해드리고 혹시나 최고의 윗분, 즉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 등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으면 이를 가보처럼 보관하고... 태씨의 경우 그의 직속 상사인 현학봉 주영대사는 그의 학교 선배이었는데, 그만큼 공사 생활이 좀 편했다고 솔직히 토로합니다. 한국 외무부의 풍경을 좀 방불케 하지 않나요?
태영호 씨가 북한에 도저히 돌아가고 싶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망명을 했다고 합니다. 글쎄, 외국 (구미권이나 제3세계의 국제학교)에서 자란 한국 외교관들의 자녀들 중에서는 헬조선에 돌아가기 싫어서 그냥 구미권 대학을 나와 거기에서 눌러앉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죠. 즉, 이것도 너무나 익숙해진 풍경입니다. 글쎄, 아마도 인제 개혁개방을 지향하는 김정은 체제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 상류층에 양보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한국처럼 그 외교관 자녀들의 해외 잔류를 허용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서방과의 가교역할을 할 사람들도 필요하고 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미래의 태영호들이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겉으로 계속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이야 이미 그들의 한국 동료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뭐, 평화를 보장해주는 의미에서야 이와 같은 개혁개방과 북조선 상류층의 "글러벌화" (?)를 환영하지만, 이건 결국에는 일반 인민들에게 재앙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를 씻어내기가 힘듭니다....
(기사 등록 2018.8.9)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anotherworld.kr/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쟁점과 주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세상을 위해 (0) | 2018.09.06 |
---|---|
[박노자] 성추행을 방지하는 방법 (0) | 2018.08.26 |
정신건강의 정치 - 자본주의와 정신의학 (0) | 2018.07.31 |
[박노자] 독립이 아닌 독립: 리가(Riga) 시찰기(視察記) (0) | 2018.07.23 |
최악의 독약, 권력 (1) | 2018.07.11 |